179화
16장 5화 이민(2)
아일랜드 이주민들이 조선에 도착하기 몇 달 전, 아일랜드 독립운동 단체인 신 페인(Sinn Féin)은 정례 회의를 시작하였다. 먼저 정치 공작을 실시한 이들이 보고를 올렸다.
“영국 노동당과의 접견 결과는 영 신통치 않았습니다. 여전히 우리에게 물자를 지원해주는 상황이니 갚을 것은 다 갚고 독립을 논하라 하더군요.”
“아무리 노동자의 권익을 추구한다면서 말해도 결국 영국의 국익이 우선이로군요.”
“그럼 우리 페니언의 뜻대로 무력 투쟁을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신 페인 연합 독립운동 협회의 회장인 찰스 개번 더피(Charles Gavan Duffy)는 포마드를 발라 단정한 머리를 쓸어 올리며 짜증을 숨겼다.
과격 독립운동 단체인 페니언 출신 사람들은 눈을 흘기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찰스 개번 더피는 짜증을 숨기지 않으며 이들은 만류하였다.
“우리가 멋대로 범죄를 저지르면 막 미국으로 이주한 동지들은 어떻게 합니까! 이들이 가까스로 정착하기 시작했는데 동지들을 예비 범죄자 집단으로 만들 생각이십니까!”
“회장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당분간 상황을 지켜보겠습니다.”
“그러면 다음 의제로 넘어가지요. 아일랜드 독립운동 관련 후원에 관한 의제입니다.”
아일랜드의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국가는 그리 많지 않았다. 다시 실망한 그의 앞에 그나마 성과를 거둔 사람이 있었다. 다들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인물이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제법 많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지난 넉 달 동안 강연회 세 번에 신문 기고 열한 건 그리고 대중 연설 두 건이라.”
프로이센 출신의 두 명이 수십 명 어치의 일을 완수하였다. 찰스 개번 더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지시를 내렸다.
“이건 놀라운 일이로군요. 얼마나 많은 자금을 사용하였는지 모르지만 참으로 탁월한 재주를 가졌습니다. 당장 들어와 보고를 올리라 하세요.”
시작부터 놀라운 성과를 거둔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즉각 회의실로 불려왔다. 둘은 바로 악수를 나누고 자리에 앉았다.
“참으로 놀라운 성과를 거두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성과를 이룩하셨는지요?”
“많은 노력을 하고 인맥도 많이 만들었습니다.”
“인맥…… 이요?”
카를 마르크스가 당당하게 인맥이라고 대답하자 엥겔스는 고개를 푹 숙이며 눈치를 보았다. 회의장의 사람들은 서로의 옷과 카를 마르크스의 옷을 비교해 보았다.
아일랜드는 몇 년 간의 기근에 시달려서 대부분 구색만 갖춘 복장을 입었다. 심지어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이들도 사치를 금지하고 좋은 옷은 성당이나 교회에 갈 때만 입었다.
“옷이 뭐 이리 좋아? 이거 런던에서 맞춘 것 같은데?”
카를 마르크스의 옷은 날이 서 있고 얼마 전에 맞춘 새 양복처럼 깔끔하고 세련되었다. 질문을 받은 마르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바로 보셨습니다. 연설을 하려면 옷이 좋아야지요.”
“틀린 말은 아닌데 이건 좋아도 너무 좋잖아!”
신 페인 독립 운동가들 대다수는 집안의 재산을 털어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사람들이라 가난한 이들도 있었다. 결국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찰스 개번 더피가 권고를 하였다.
“조금 미안한 일이네만 이런 자리에는 좀 헤진 옷을 입게.”
“이게 가장 해진 옷인데요.”
마르크스와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침묵이 오가고 엥겔스가 책상에 머리를 쾅쾅 박는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수상한 기운을 느낀 찰스 개번 더피가 말하였다.
“자네 회계장부 가져오게. 아직 정리가 안 되었는데 일단 확인은 해 봐야겠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밖에 나갔다 돌아온 엥겔스는 장부를 내밀었다.
잠시 연필을 끄적거리는 소리가 회의실을 메웠다. 일단 계산을 끝낸 찰스 개번 더피는 회의실이 떠나가게 웃다가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리고 고함을 쳤다.
“야 이 미치광이야! 고작 석 달 동안 사백 파운드를 써! 삼 년 어치 활동자금을 태워!”
“그야 당연한 일 아닙니까? 집하나 구해야지, 인맥 만들게 파티 열고 귀부인들과 춤 춘 다음 화려한 장식의 케이크를 즐겨야지, 옷은 세 벌 정도 갖추고…….”
보다 못한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입을 틀어막았다.
카를 마르크스가 소비한 자금은 3개월 동안 700파운드에 달하였다. 이를 ‘익명 후원금’으로 엥겔스의 돈을 끌어들여 400파운드로 절감하였다.
그래도 끔찍하게 많은 돈이다. 10년 이상 경력을 가진 직조공이 받는 월급은 6파운드, 일 년 봉급이 70파운드쯤 하는 시대였다.
카를 마르크스 혼자서 3개월 만에 10년 어치 연봉을 날려버린 꼴이다. 페니언 출신 독립 운동가들은 주먹을 움켜쥐고 벌떡 일어나 고함을 쳤다.
“그렇게 돈을 쳐 풀어대면 강연회 세 번이 뭐야! 서른 번은 하겠다!”
카를 마르크스는 개인의 사상과 달리 아주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다. 부르주아 중의 부르주아이며 그의 친구 엥겔스도 부유하기로 유명한 집안 출신이다.
그는 부르주아이면서 자신의 재산을 날릴 정도로 엄청난 낭비벽을 자랑하였다. 본래 역사에서도 그 많은 자산을 날려 버린 파멸적 경제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막대한 자금이 생기자마자 여러 명분을 들어가며 즉각 낭비하였다. 엥겔스의 손을 치운 카를 마르크스의 입에서 모든 사람들의 속을 긁어버리는 답변이 튀어 나왔다.
“바로 보셨습니다! 이렇게 계속 상류층 생활에 얽히면 많은 인맥과 이권이 나올 겁니다!”
마침내 페니언 독립 운동가의 인내심이 폭발했다. 그들은 부지깽이와 큼지막한 장작을 집어 들고 최후통첩을 날렸다.
“그리고 네놈 입안에서 부러진 치아가 튀어나오겠지!”
“일단 진정하십시오! 몽둥이 내려놓으라니까요!”
“닥쳐! 이럴 때는 두들겨 맞으면 정신을 차리더라.”
회의장 밖으로 도주한 카를 마르크스를 페니언 독립 운동가들이 쫓아갔다. 이번 기회에 꼴 보기도 싫은 놈을 두들겨 팰 의지로 가득한 모습이었다.
찰스 개번 더피가 한참을 기다리자 헐떡거리는 마르크스가 회의실 문을 박차고 뛰어 들어와 애걸복걸 하였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좀 살려주십시오! 앞으로 제 돈만 사용하겠습니다!”
“이미 날려먹은 삼 년 간의 활동자금은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이걸 입 싹 씻고 가만히 두실 작정이십니까? 몇 배로 벌어 오셔야지요.”
찰스 개번 더피와 신 페인 독립 운동가들의 답은 냉정하였다. 카를 마르크스가 몸을 돌려 다시 도망치려 할 때, 먼저 회의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여기 있었네!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버려야지!”
마르크스의 곱슬머리를 움켜쥔 페니언 단은 몽둥이를 머리 위로 치켜 올렸다. 그 순간 찰스 개번 더피가 구원의 목소리를 보냈다.
“잠깐 멈추십시오. 우리는 비폭력 독립운동을 실시하니 폭력은 자제해야 합니다.”
“회장님! 이놈에 대한 처벌을 어떻게 합니까? 삼 년 어치 활동자금을 석 달 만에 태워 버린 놈이지 않습니까!”
앞에는 돈을 벌어오라는 요구를 하는 회장, 뒤에는 불구가 될 때 까지 집단 구타할 의지가 가득한 페니언 운동가들이 있었다.
찰스 개번 더피는 회의실 안을 몇 바퀴 돌면서 마르크스를 쓸 곳을 찾았다. 그러고는 이틀 뒤로 예정된 대한제국 이주자들의 송별식을 떠올리고 말하였다.
“카를 마르크스에게 지시를 내리겠습니다. 이틀 뒤 우리 동포 오천 명이 프린스 흥선의 은혜를 갚기 위해 대한제국으로 이주합니다. 그들을 인솔하세요.”
“인솔만 하면 됩니까?”
“석 달 만에 삼백 파운드의 후원금을 받아내셨으니 앞으로 일 년 정도 동방에 머무르시며 한…… 천 파운드만 후원을 받아 오시죠.”
카를 마르크스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지며 입술이 시퍼렇게 변해버렸다. 사치와 향락 그리고 즐거운 파티를 머나먼 대한제국에서 즐길 방법이 없었다.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겪을 고난, 자신이 향유하던 유럽 문화를 벗어난 충격 그리고 머나먼 동방에 버려질 고통이 그의 입에서 거절의 말로 올라오려 하였다.
“아이고 우리 회장님 참 착하셔라. 곱슬머리가 다 펴질 때까지 두들겨 패려 했는데.”
페니언 독립 운동가들이 몽둥이를 그의 등에 슬쩍 두드렸다. 거절하는 순간 말 그대로 박살 내겠다는 신호나 마찬가지였다.
매는 아주 가깝고 희망은 아주 멀어서 방법이 없었다. 카를 마르크스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이민선단에 올라 아일랜드 사람들을 인솔하였다.
* * *
두 달의 지루한 항해는 마침내 막을 내렸다. 평양의 남포에 내린 아일랜드 이주민들은 대한제국의 이주 규칙에 의거하여 만주 일대로 터전을 옮겼다.
“대한제국은 추운 곳이로군.”
남포에서 간단한 신체검사와 건강검진을 받은 이들은 늦겨울 추위를 온 몸으로 체감하였다. 이들은 입김을 확인하며 손발을 부비고 주변을 살폈다.
아일랜드 사람들 입장에서 가장 큰 차이는 맑은 하늘과 건조한 공기였다. 몸을 휘감는 건조하고 차가운 공기를 느낀 아일랜드 사람들은 앞으로 지을 농사를 기대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건조한 곳이기도 하잖아? 잘만 하면 보리나 밀농사가 가능할 것 같은데?”
“내가 알기로 대한제국은 쌀농사를 짓는다 했어. 쌀이 뭔지는 모르지만.”
평생 음침하고 습한 아일랜드에 살아오던 사람들은 대한제국의 기후에 적응하기 힘들어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끔찍한 기근을 견딘 사람들이라 대수롭지 않게 말하였다.
“프린스 흥선께서 알려주신 대로 순무와 메밀을 심어 보던가 하지. 정 안 되면 평소에 기르던 대로 감자라도 마구 길러볼까?”
잠시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아일랜드 농민들은 이런저런 질문을 하며 주변을 살폈다. 이들이 눈을 돌리는 동안 카를 마르크스는 코트를 입은 채 투덜거렸다.
“여기서 어떻게 후원금을 얻어내나. 왕족이라도 꼬드겨 볼까?”
마르크스는 많은 고민을 하였다. 자신은 프린스 흥선과 인연이 있으니 정치와 경제 관련 인물에게 끈이 금방 닿을 수 있다. 여기서 후원금을 얻고 바로 본국으로 보내려 하였다.
문제는 자신의 언변이 이 머나먼 동방에서 통하는지 확인이 안 된 것이다.
덥수룩하게 자라난 수염을 매만진 그는 기차에 타고 팔짱을 낀 채 독일어로 중얼거렸다.
“대한제국은 봉건제 국가잖아. 더군다나 어느 정도 의식이 깨인 현 황제는 몰라도 상황(上皇)은 젊은 시절에 프롤레타리아를 탄압하였고.”
마르크스는 유명한 사상가답게 대한제국에 대한 서적을 최대한 많이 탐독하였다. 그의 기준에서 현 황제 효명제는 어느 정도 합격 선상에 있는 모범적인 지도자였다.
반면 전대 왕인 순조는 경래 홍의 프롤레타리아 봉기(홍경래의 난)를 유혈 진압한 자였다. 유혈 진압도 모자라서 진압의 끝은 무장을 해제한 민중을 학살하였다.
“갈등과 모순이 극에 달해 자본주의로 진화하려다가 효명제의 힘으로 억지로 봉건주의를 유지한 사회라. 이런 사회가 빠르게 개혁되어야 하는데.”
카를 마르크스는 순조를 봉건 독재자이자 백성을 학살한 괴물로 인식하였다. 백성을 위하고 백성을 생각하는 왕이라 자처하지만 모두가 연극이라 판단하였다.
그의 입장에서 대한제국은 누더기를 기워놓은 말기 봉건 사회에 불과하였다.
이런 생각의 끈을 이어가는 마르크스를 본 아일랜드 이주민들은 혀를 차며 말하였다.
“저 친구는 대한제국에 와서 아무런 감상도 없네.”
“석 달 만에 칠백 파운드를 쓴 놈이 두 달 동안 오 파운드만 사용해서 정신이 나갔나 봐.”
“미치광이 털보라니까. 내가 마음대로 돈을 낭비하려고 작정해도 그만큼은 못 쓰겠다.”
어느 새 미치광이 털보라는 별명이 생긴 카를 마르크스는 대한제국의 풍경을 바라보며 요동으로 향하였다. 마침내 기차가 요동의 중심지 심양의 남서쪽, 등탑(燈塔)에 멈추었다.
“다들 내리시오. 여기서 십 리 정도 걸어가야 숙소가 나오니 모두 이동하시오!”
아직 오전 10시, 추위가 가시지 않은 벌판을 지나가는 동안 기병대와 병사들이 아일랜드 이주민을 호위하였다. 이들은 아예 문화권이 다른 사람이라 집단 거주지가 필요하였다.
이들의 거처로 옛 철도 공사 노동자들의 숙소가 배정되었다. 추위에 시달리던 이들은 마침내 자신들의 숙소에 도착하였다.
기차 노선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마을은 거대한 숙소 여러 개와 관료들이 머물던 고급 숙소. 그리고 각종 공사 기자재를 보관하였던 창고가 있었다.
이를 어느 정도 개량하고 개인 주택을 설립하면 마을로 충분히 쓸 수 있었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벽돌로 만든 공동 숙소 벽을 쓰다듬으며 말하였다.
“이런 곳에 사람이 없는 마을이 있을 줄이야.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한 삼 년 정도 방치되어 있던 것 같은데 어떻게든 구색은 갖추었군.”
새로 거주할 마을 구석에는 붉은 빛의 마차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를 기이하게 생각한 카를 마르크스는 군관에게 질문을 하였다.
“관리께서 벌써 당도하셨습니까?”
“일단 들어가 보시면 압니다. 한 시간 뒤에 대표에 해당되는 서른 명만 따로 나와 주십시오.”
대표에는 당연히 카를 마르크스가 끼어 있었다. 그가 인솔자 자격으로 아일랜드 이주민에게 지시를 내리던 중 멀리서 두 무리의 사람들이 방문하였다.
“시간을 맞춰서 왔군. 조금 일찍 오셨으니 불을 쬐면서 몸을 녹이시오!”
아일랜드 사람들이 머무르는 임시 거주지에 방문한 이들은 대한제국 출신 화전민과 대한제국의 사람이 된 만주 거주자들이었다.
아직 추운 날씨여서 모닥불이 여럿 피워졌다. 삼삼오오 모여 불을 쬐던 이들 중 대한제국 사람들이 아일랜드 이주민을 바라보며 얕잡아 보았다.
“간혹 양이(攘夷)들이 드나든 적은 있는데 이제는 양이들이 이주하였네?”
“어허 양이라니! 이 나라의 백성이 되면 대한 사람이지!”
서로를 흘끗흘끗 쳐다보던 세 부류의 사람들에게 군관이 다시 지시를 하달하였다.
카를 마르크스는 이 순간에도 이들의 옷과 대한제국 군인들의 말투를 보며 여러 정보를 얻었다.
“우리를 얕잡아 보다가 서로 자제하는 것 같은데 이건 당연한 거고. 의외로 행색도 괜찮은데 효명제가 새 영토를 다스리는 능력이 탁월하군.”
카를 마르크스의 입장에서 효명제는 봉건제 국가를 이끌 자격이 충분한 군주였다. 다시금 순조에 대한 비난을 속으로 삭이던 그와 아일랜드 이주민은 지시에 따라 다른 숙소로 들어갔다.
숙소의 벽을 틔워 100명 이상이 모일 수 있는 거대한 방을 만들어두었다. 바닥 온돌의 뜨끈한 기운을 느끼며 잠시 기다리고 있자니 군관이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태상황 폐하 납시오!”
반사적으로 대한제국 사람들의 머리가 숙여지고 절이 나왔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어쩔 줄 몰라 당황하다가 한쪽 무릎을 꿇고 서양식 예법으로 이를 맞이하였다.
문이 열리고 순조와 그의 사촌 경양군, 이제는 심양왕으로 불리는 이정이 등장하였다.
순조가 고개를 끄덕이고 손짓하자 모두가 일어나 다시 인사를 올렸다.
“태상황 폐하께 인사를 올리옵나이다.”
“이런 추운 날에 먼 곳 까지 고생이 많구나. 몸을 충분히 녹인 것 같으니 짐과 함께 점심식사를 함께하지 않겠느냐.”
모두가 호화로운 식사가 나올 것이라 예상하였다. 그러한 기대와 달리 어디선가 아일랜드 인의 끔찍한 기억을 자극하는 냄새가 풍겨왔다.
“이거 아이리시 모스(해초, 대기근 시기에 죽기 싫어서 섭취하였다) 냄새 같은데?”
“아이리시 모스? 그 끔찍한 보라색 덩어리를 여기서 또 먹는다고?”
“뭐 못 먹을 건 없지만. 프린스 흥선이 가르쳐 준 대로 식초와 소금에 버무려서 억지로 넘길 수는 있는 음식이잖아?”
점차 진동하는 해초 특유의 바다 냄새가 방 안을 메웠다. 여기에 어디선가 느껴 본 고소하면서 이상한 냄새도 밀려왔다.
“찬이 왔구나. 보잘것없이 차렸으나 마음껏 들도록 하라.”
소반에 놓인 식사가 시종들의 손으로 계속 옮겨졌다. 이 중 하나는 순조의 앞에 놓였고 다음 하나는 심양왕 이광의 앞에 놓였다. 둘 다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반면 아일랜드 이주민도, 대한제국에서 이주한 화전민 출신도 그리고 기존에 만주에 거주하던 사람 모두 소반을 내려다보고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순조는 눈치가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 심양왕 이광은 더 눈치가 없는 사람이었고.
두 사촌형제는 이주민들의 환영 식사를 자신들의 기준으로 판단하였다.
그들은 뜨겁게 덥힌 온돌방에서 만주에서 구할 수 없는 귀한 음식을 먹으면 만족하리라 생각하였다.
숟갈을 들어 국을 뜬 아일랜드 이주민은 눈물을 훌쩍거리며 말했다.
“이게 뭐야. 식초에 마늘을 잔뜩 넣고 시커먼 해초를 풀어놨잖아.”
국의 정체는 김 냉국이었다. 파래가 섞인 최상급 김은 아주 풍부한 해초 향을 품고 있었다. 당연히 씹는 순간 지독한 냄새로 구역질이 밀려왔다.
“이건 돼지도 안 먹겠다.”
밥 속에도 해초가 가득하였다. 검은 색도 아닌 갈색과 초록색이 섞인 말린 톳은 아일랜드 사람들이 보기에는 갈색 구더기 모양 해초였다.
심지어 서양에서는 맥주 재료나 말 사료로 쓰이는 보리만 가득하였다. 한 입 먹은 용감한 아일랜드 이주민은 헛구역질을 하며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지금 우리를 고문하려고 이상한 음식을 먹이나. 그건 또 아닌 것 같은데.”
카를 마르크스는 이 순간에도 상황을 분석하였다. 아일랜드 사람은 너무나 끔찍한 음식이라 입에도 대지 않으려 하였다. 그러니 옆에 앉은 대한제국 사람을 살펴보았다.
혹시나 이 음식은 대한제국에서 즐겨 먹는 토속 음식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 사람 중 이 음식을 즐겨 먹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반면 순조와 심양왕 이정은 농민도, 마르크스 기준으로 프롤레타리아가 거부하는 음식을 행복한 표정으로 먹고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세상에 어떤 왕이 이런 음식을 즐겁게 먹는단 말인가.”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에 의하면 이런 현상은 일어날 수도, 일어날 방법도 없었다. 잠시 주변을 살펴본 순조는 군관에게 지시하여 다른 명령을 하달하였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순조가 식사를 마치자 누구나 쉽게 먹을 수 있는 고기구이와 흰 쌀밥이 밥과 반찬으로 다시 배식되었다.
“짐은 식사를 모두 끝내었으니 알아서 배불리 먹도록 하여라.”
말을 마치고 아쉬운 표정으로 나간 순조에게 모두가 감사 인사를 올렸다. 마르크스는 이 기묘한 사태를 이해하려 시도하다 엉뚱한 결론을 내렸다.
“이제야 이해할 수 있겠군. 아일랜드의 사람들이 기근에 시달리다 이주를 청하였으니 이들을 받아들일 자격을 갖추려고 기근에나 먹는 험한 음식을 먹은 거야.”
카를 마르크스는 대한제국 사람들이 식사를 억지로 먹은 것에 착안하여 이번 일을 해석하였다. 문제가 있다면 사람들의 출신이었다.
여기 모인 대한제국 사람들은 화전민과 만주에 거주하던 청나라 출신이었다.
화전민은 평생 산속에서 살던 사람들이니 해산물이나 해초를 접할 기회도 없었다. 만주에 거주하던 청나라 사람은 애초에 해초를 별로 먹지 않는 민족이었다.
당연히 해초 냄새가 가득한 김 냉국과 꽁보리 톳 밥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음식이었다.
이를 멋대로 해석한 마르크스는 순조라는 인물을 연구해 보기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