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16장 11화 종의 기원(2)
국립이학대학 부설 의료기술 연구실, 별칭으로 약당(藥堂)이라 불리는 곳은 의약품과 의료 관련 지식을 연구하는 기관이다.
이들은 평소에는 정약용을 비롯한 학자들이 분류한 수많은 약재 성분을 분석하며, 가끔 특정 주제를 연구하였다. 이 연구 주제 중 하나가 혈액과 관련된 제반 사항이었다.
“연락은 미리 받아 두었습니다. 찰스 다윈 강사님이시지요?”
“맞습니다. 강의를 한 것이 몇 년 전이라 직급만 강사입니다.”
다윈이 방문하자 한복 위에 하얀 가운을 덧입은 의사가 맞이하였다. 입구를 지나 기나긴 복도로 들어가자 제법 많은 학자와 의사들이 자료를 조사하고 실험을 실시하였다.
“듣자 하니 쥐나 개를 이용한 동물 실험을 실시하는 곳이었는데 사람이 제법 많군요?”
“그 단계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더군다나 최근 연구 주제가 사람의 혈액과 관련된 사항인데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요. 특히 서양 사람들은 더욱 필요합니다.”
한양 인근의 혈액질환자들이 시험 진료 겸 자료 축적을 위해 약당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복도 중간의 진찰실로 안내받은 찰스 다윈은 먼저 의료 차트를 넘겨받았다.
“이 환자들이 찰스 강사님에게 배정된 환자들입니다. 이외 사항은 언제라도 물어보시지요.”
“차트를 확인하니 공(空 - O형)과 병(丙 - AB형)이라는 항목이 있는데 이건 뭡니까?”
“이건 직접 설명하는 것이 나을 것 같군요. 잠시 채혈 좀 해도 되겠습니까? 다들 예비 혈액 좀 챙겨줘!”
다윈이 손을 내밀자 의사는 섬세한 손으로 채혈을 실시하였다. 다른 의사들이 세 개의 피를 채혈하였고 뽑아낸 피에 약품을 섞고 원심분리기에 넣고 설명을 하였다.
“서양에서는 수혈(輸血)실험을 한 적이 있더군요. 여기서 실패하는 경우도 있으나 간혹 성공하는 경우가 보고되었지요?”
“소문은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산부인과 의사가 과다출혈을 일으킨 산모 열 명에게 실시하여 다섯 명이 성공하였지요. 대신 나머지 다섯 명은 피가 굳어 숨을 거두었다더군요.”
“바로 그 점에 착안하였습니다. 성공 조건을 모두 모으면 사람끼리 피를 온전히 교환할 수 있을 겁니다.”
의사는 원심분리기로 분리된 혈구와 혈청을 뒤섞어 반응을 확인하였다. 의사는 슬쩍 웃으며 찰스 다윈에게 음(陰 - RH-), 을(乙 - B형)이라는 쪽지를 내밀며 말했다.
“찰스 강사님의 혈액 성분은 상위분류 음에 해당되고 하위분류 을에 해당합니다.”
“이렇게 간단하게 혈액 성분을 알아낼 수 있다니요?”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노력과 연구 끝에 알아낸 결과지요.”
현대처럼 시약을 사용할 수 없는 시대라 혈구와 혈장의 교차반응을 통한 반복 작업만 가능하였다. 의사는 찰스 다윈에게 표식을 건네주며 말하였다.
“한 사람의 혈액형을 알아내려면 혈액형이 다른 네 사람에게서 혈액을 채취해 비교해야 합니다. 더군다나 혈액형 음은 이 나라에는 극히 희귀하지요.”
이미 혈액형에 대한 통계가 차곡차곡 축적되고 있었다. 의사가 보여준 전체 통계에 의하면 대한제국의 음 혈액형 보유자는 1%에 미치지 못하였다.
“대신 유럽에는 많은 혈액형입니다. 나중에 헌혈 실험을 할 때 조금만 지원을 부탁드립니다.”
“여기서 연구 결과를 받아가는 입장이니 그 정도는 해드려야지요.”
대한제국은 이미 혈액형 분류 중 RH와 ABO 분류를 마쳐놓은 상태였다. 이 과정에서 가장 먼저 혈액을 채취한 조일준은 자신의 RH+ B형을 대분류 ‘양’ 형, 소분류 ‘을’ 형의 표준 샘플로 삼았다.
찰스 다윈은 이 연구가 완성되면 인류의 수명이 증가할 것이라 판단하였다. 다시 안내를 받아 방 안으로 들어간 찰스 다윈은 연구 과제로 추천받은 청년을 만났다.
청년의 외모는 기이하다 못해 저절로 불쌍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얼굴은 창백하고 사지는 비쩍 말라 있고 관절만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여기에 팔뚝에는 커다란 멍이 하나 있었다.
여기에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찰스 다윈도 저절로 우울한 느낌이 들었다. 상대는 다윈을 보고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제 병을 연구하러 오신 분이십니까?”
“그러하네. 차트를 보니 출혈이 멈추지 않는 병을 앓고 있군.”
“그 병 때문에 죽고 싶은 심정입니다. 오로지 모친의 얼굴을 보아 참고 또 참았습니다.”
찰스 다윈은 혈우병 환자의 곁에 앉아 손을 붙잡았다. 특유의 합병증으로 인한 관절염과 사지쇠약 그리고 어디선가 일어날 수 있는 출혈이 그의 몸을 끝없이 괴롭혔다.
“대체 이 병은 어디서 온 겁니까? 저를 왜 이리 괴롭힌단 말입니까?”
“참으로 안 된 일이지만 나는 정보를 알고 있네. 사십여 년 전 미국의 의사 존 콘래드 오토가 이 혈우병(血友病)에 대한 연구를 실시하였지.”
본래 역사에서 잊힌 논문은 조일준에 의해 수거되어 대한제국에서 잘 활용되고 있었다. 다윈은 이 논문과 자신의 연구 자료에 근거하여 병의 정체를 알려주었다.
“이 혈우병은 애석하게도 자네의 모친을 통해 전해진 병일세.”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찰스 다윈은 자신이 연구한 항목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이 청년은 운이 좋아 지금까지 살아왔으나 대부분의 혈우병 환자는 열 살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그는 남성과 여성의 유전 과정에 대한 이야기. 그 과정에서 여성이 혈우병 인자를 후손에게 넘겨준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청년은 그 이야기를 듣고 격하게 화를 내며 말했다.
“말이 안 됩니다! 제 형님이 넷에 제 동생이 셋입니다, 아들만 여덟을 낳았는데 저 혼자서 혈우병이라니요!”
“자네 형제들은 혈우병이 아니란 말인가?”
“당연히 아닙니다!”
찰스 다윈은 심각한 표정으로 청년을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니 혈우병은 모계로 유전되며 전파 확률은 50%이다. 그마저도 남자 기준이고 여자의 경우 보인자가 될 확률은 25%이다.
생존에 불리한 우성도 사멸하는 마당에 생존에 불리한 열성은 몇 대가 지나지 않아 사멸되리라. 찰스 다윈은 한참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이론을 재정립하였다.
“생각해 보니 당연한 일이기는 하군. 생물조차도 여러 종류의 변이가 일어나 환경에 적응한 변이가 일대의 아종(亞種)이 되는데 사람은 더 많은 변이가 일어날 거야.”
“지금 변이니 아종이니 하셨는데 뭐가 문제란 말입니까?”
“애석한 말이지만 자네의 병은 몸이 태중에서 자라나며 생긴 것 같군.”
절망적인 말이나 찰스 다윈의 이론은 핵심에 근접하였다.
실제로 혈우병 환자 중 25%가량은 부모의 혈우병 인자를 물려받지 않고 수정 단계의 유전적 결함으로 인해 발생하였다.
청년은 실없이 웃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선생님의 말씀이 옳다면 차라리 잘된 일입니다. 모친께서는 자신이 잘못하여 제가 이 끔찍한 천형(天刑)을 달고 산다며 매일 불공을 올리시지요. 이 말씀을 해드려야겠군요.”
“그래도 수혈이 가능하다면 살 수 있을지도 몰라.”
“수혈 말입니까? 다른 사람의 피를 수혈하면 목숨을 부지할 수도 있겠지요. 다만 그러한 사람이 주변에 있어야 가능한 일이지요.”
억지로 웃으며 기운을 내는 청년을 응원한 찰스 다윈은 다음 병실로 향하였다. 그곳에는 폴을 따라온 흑인 가족 중 사지가 멀쩡한 청년이 누워 있었다.
“반갑습니다! 제가 왜 여기에 있는지 알 길이 없었는데 과학자분이 드디어 오셨네요!”
유창한 영어로 답하는 흑인 청년, 마르코에게 흠칫 놀란 찰스 다윈은 침대로 다가가 차트를 확인하였다. 그 차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었다.
-원인 불명의 빈혈이 자주 발생, 체격에 비해 지구력이 매우 약함
-말초 모세혈관 괴사 빈발. 감염이 시작되어 발가락 두 개를 절단함
-약 대용으로 마늘과 은행 열매 섭취를 권고하는 중
환자복을 입은 마르코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연덕스럽게 과도로 사과를 깎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사과를 담은 접시를 다윈에게 건네다 일부러 호들갑을 떨었다.
“이런 세상에! 아직도 노예근성이 남아 있나 봐! 남부의 꼴통들이 또 떠오르네?”
“자네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볼가네 효종갱 분점에서 일하였지?”
“예엣! 바로 보셨습니다!”
마르코는 대수롭지 않게 사과를 계속 깎아나갔다. 다윈은 절단을 마치고 희석한 락스로 소독 중인 발가락을 보며 말하였다.
“참 딱한 일이로군. 빈혈에 이유 없이 발가락이 괴사하여 절단하다니.”
“가족 대다수가 이런 증상을 겪었습니다. 그나마 손가락이 아니라 다행이죠.”
“가족 대다수가 빈혈이라고? 손가락이 아니라 다행이라니 또 뭔 말인가?”
마르코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다윈과 같이 사과를 먹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가족력에 대해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였다.
“저희 가족은 꼴통 중의 꼴통이 가득한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서 목화를 뜯었습니다. 제 증조부께서는 지구력이 약해서 몽둥이찜질을 매일 당하셨고 제 조부님도 마찬가지였죠.”
“내가 알기로 미국의 노예 중 쓸모가 없는 이들은 죽거나 헐값에 팔린다던데.”
“그럴 뻔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말라리아가 싹 퍼지더니! 농장주도 가족도 죽고! 노예들도 떼죽음을 당하고! 제 증조부님과 조부님 그리고 몇 명의 다른 노예만 생존했죠!”
“당시에는 키니네도 없고 학질렬(虐疾裂 - 학질을 찢다, 아르테미니신)도 없으니 당연하지.”
알렉산더 훔볼트가 찾아낸 키니네와 정약용이 추출한 아르테미니신의 조합제제가 이 시대 말라리아의 표준 처방전이 되었다.
그나마도 약효에 비해 독성이 강하고 가격이 지나치게 비싸 모든 환자에게 쓸 수 없는 약이다. 마르코는 팔뚝에 억지로 힘을 주고는 말하였다.
“이게 저희 가족의 특징입니다. 말라리아에는 안 걸리는 대신 지구력이 약하고 손발가락의 혈관이 막히죠.”
“그런 체질이 세상 어디에 있나?”
“정말입니다! 전 말라리아에 걸려본 전적이 없습니다.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이지요.”
“운 하나는 좋군. 대대손손 운이 좋은 거야.”
-육 번 병실 환자 학질 발작 시작이다! 얼음과 알코올 가져와!
얼음을 담은 바구니와 알코올을 담은 의사들이 복도를 뛰어갔다. 마르코는 휘파람을 불며 접시를 정리하고는 말하였다.
“전 한 번 다녀온 사람이 무조건 말라리아에 걸리는 습지를 수백 번 드나들어도 걸린 적이 없는데요.”
“그럼 한번 걸려보지 않겠나? 말라리아의 원인은 모르지만 말라리아 환자의 혈액을 조금 투여하면 아주 확실하게 걸릴 거라네.”
다윈은 여행을 다니며 말라리아를 앓아 끔찍하게 고생한 기억을 떠올렸다. 병을 우습게 보지 말라는 경고를 들은 마르코는 오히려 홀가분하게 말하였다.
“그럼 더 잘된 일이네요. 저는 병(AB형) 혈액형이라 약간의 수혈은 받아도 됩니다.”
“스스로 말라리아에 걸리겠다고 나서? 제정신인가?”
“제정신 맞습니다. 저희 가족이 대대로 체력이 부족하고 발가락, 심지어는 사지가 썩어 들어가는데 혹시 말라리아에 걸리면 이런 현상이 사라질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찰스 다윈은 마르코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비논리적이고 비과학적인 생각이며 보름 내내 고열과 구토에 시달리면 이런 허황된 생각이 사라지리라.
잠시 뒤 주사기를 받아온 찰스 다윈은 의사와 함께 마르코에게 다가왔다. 말라리아 원충이 가득한 혈액을 확인한 마르코는 팔뚝을 내밀며 말하였다.
“말라리아야 들어와라!”
“앞으로 보름 정도 죽을 고생을 하면 정신이 바짝 들 것 같군.”
이후 찰스 다윈은 말라리아의 잠복기가 지나고 마르코의 몸 안에서 병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이후 삼 주가 지났음에도 마르코의 몸은 멀쩡하였다.
멀쩡하다 못 해 절단 수술을 받은 발가락의 상처가 거의 다 회복되어 퇴원을 앞두었다. 그는 병상에서 일어나 배달 온 파울스 치킨을 뜯으며 다윈에게 인사를 하였다.
“말라리아에 걸린 것 맞기는 합니까? 열이 좀 나고 피로하기는 한데 이건 뭔······.”
“그냥 증세가 약한 것 같은데? 혈액 검사 좀 하지 않겠나?”
이 시대 현미경은 말라리아 원충(原蟲)을 볼 정도로 배율이 높지 않았다. 대신 적혈구의 형태를 보아 파괴되거나 부풀어 오른 적혈구로 병의 유무를 파악하였다.
마르코의 피를 약간 뽑은 의사는 현미경으로 이를 확인하였다. 잠시 뒤 의사는 뒤로 자빠지면서 비명을 질러댔다.
“으아아악 이게 뭐야!”
고요한 약원 복도 안에 고함이 퍼지자 사람들 모두가 눈살을 찌푸리며 다가왔다. 반면 마르코의 혈액을 확인한 의사는 바닥에서 허우적거리며 겁에 질려 말했다.
“네 적혈구 대체 뭐냐고! 너 정말 사람 맞아?”
“네? 사람 맞습니다! 한때는 사람이 아니고 노예였지만요.”
“원장님! 마르코 환자 적혈구 좀 보십시오! 이건 사람의 적혈구가 아닙니다!”
시간이 비는 의사와 학자들 그리고 찰스 다윈마저도 현미경을 들여다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들 모두는 같은 발언을 하였다.
“이런 형태의 적혈구를 지닌 생물, 아니지 사람이 있다고?”
그 혈액에는 둥글둥글한 적혈구가 아닌 길쭉하거나 낫 형태의 적혈구가 절반가량 보였다. 이는 대부분의 생물과 다른 형태였다.
이런 기이한 형태의 적혈구는 오로지 마르코에게서만 존재하였다. 더군다나 적혈구 중 부풀거나 파괴된 적혈구가 거의 없었다.
“학질이 발생하면 적혈구 파괴 흔적이 보여야 하는데······.”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의사들은 열띤 토론에 들어갔다. 그러고는 마르코의 적혈구에 대한 논리적인 판단을 하여 임시 결론을 내렸다.
“마르코 환자는 특이한 적혈구로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네. 장점이야 혈액을 파괴하는 학질에 면역이며 단점은 이 형태로 인해······.”
간단히 그림을 그려 모세혈관 줄기를 표현한 의사는 길쭉한 적혈구가 차곡차곡 쌓이며 혈관을 틀어막는 현상을 묘사하였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혈관 곳곳에 적혈구가 막혀 버려서 빈혈과 지구력 저하가 일어나겠지.”
“와! 원장님! 저는 그럼 초인(超人)이라는 말입니까? 슈퍼 깜둥이 같은 거죠?”
“초인은 맞는데 그 초인이 아니고 초(憔 - 수척할 초)인일세.”
“아니 좀! 말라리아 많은 동네에서는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잖아요!”
찰스 다윈은 다시 사유(思惟)에 빠져들었다. 마르코의 형질은 생존에 불리한 대신 말라리아라는 질병에 면역에 가까운 특이성을 부여하였다.
“말라리아가 가득한 아프리카의 흑인들은 이러한 유전이 장기적 생존에 도움이 될 거야. 그 흑인들이 노예로 잡혀 온 미국에서도 말라리아를 통해 형질이 유지되었겠지!”
어느새 병실을 빠져나간 마르코는 폴을 비롯한 다섯 흑인 식구들의 적혈구 형태를 모조리 조사하였다. 70여 명에 달하는 식구들을 조사하여 유전 분석을 하였다.
열성 형질이며 생존에 불리한 말라리아 면역 형질, 겸상 적혈구라 공식 명명된 이 질병은 열성유전이며 마르코의 가족과 폴의 동생이 보유하고 있었다.
찰스 다윈의 저서는 이제 완성 단계에 들어갔다. 상, 하권으로 나뉜 종의 기원 하권. <인류의 형질> 편의 서두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기입하였다.
-인류의 형질은 끝없이 변화하고 생존에 유리한 변이나 불리한 변이가 일어난다.
-그러한 변이들 중 환경을 극복한 변이는 불리한 점이 있어도 번성하며 환경을 극복하지 못한 변이는 유리하더라도 점차 소멸하거나 인류 안에 내재되어 있으리라.
-인류는 모두 소중한 존재이다. 마르코의 몸 안에는 말라리아를 극복할 수 있는 소중한 형질이 잠재되어 있었다. 이는 우리 인류가 환경을 극복한 상징이다.
-만에 하나 형질의 우열(優劣)을 명분으로 남을 핍박하는 자가 생길지도 모른다. 그러한 자는 스스로의 열등함을 숨기기 위해 모든 인류를 열등하게 만드는 자이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닐슨 총장이 저술하였으나 마음에 와닿는군. 형질의 우열을 앞세우는 놈이야말로 인류 전체를 파멸시키는 열등한 놈들이지.”
1,204페이지에 달하는 거대한 저서는 두 권으로 나뉘어 대한제국에서 먼저 인쇄되었다. 아직 영어 판본이나 이를 읽은 유생들은 진솔하고 담백한 평가를 내렸다.
“허어, 사람이 원숭이에서 발전하여 사지를 갖추었다?”
“사람과 짐승의 차이는 이성이 있고 남을 돕는 인의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닌가. 중요한 것은 이 나라가 올바른 뜻을 가졌다는 것이야.”
“바로 보았네. 세종대왕께서 천형으로 몸이 불편한 이들을 대우하라 하고 이 올바른 뜻을 대대손손 전하였지. 이 올바른 뜻이 전 세계에 퍼져 나가야 할 걸세.”
대한제국에 퍼진 진화론은 잔잔한 물결에 불과하였다. 반면 영국에 퍼진 종의 기원은 본래 역사보다 몇 배는 거대한 폭탄이 되었다.
창조론에 대한 논박과 신랄한 비판 그리고 여러 자료를 통한 철저한 스스로에 대한 고찰을 거듭하였다. 여기의 하권의 내용이 가장 큰 논쟁거리가 되었다.
멘델의 유전법칙과 환경 압력의 개념을 절묘하게 배합한 항목이었다. 일반적으로 갈루아-다윈 법칙에 의해 보존되는 유전자의 비율은 환경 압력으로 극적으로 변화할 것이라 저술하였다.
“깜둥이의 혈액이 소중하다고! 이런 정신 나간 놈을 보았나!”
“왕후장상의 고결한 피를 물려받은 사람들이! 합스부르크도 아닌데 멋대로 질환이 생겨!”
“인간이 원숭이에서 조금씩 나아간 모습이라고! 이놈 지금 대한에 있지!”
종의 기원을 읽은 사람들은 격노하거나 수긍하는 반응을 보이며 언쟁을 벌였다. 대부분의 모임 장소는 <종의 기원> 관련 논의는 따로 배정된 결투 공간에서 실시하라는 권고가 붙었다.
여기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사람은, 정확히는 가장 큰 타격을 받을 예정인 사람은 빅토리아 여왕을 비롯한 영국 왕실이었다. 빅토리아는 창백한 얼굴로 책의 내용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였다.
아마 몇 달 이내에, 아무리 길어도 일 년 이내에 3남 아서 윌리엄 패트릭 앨버트에 대한 사실. 혈우병 보인자라는 소문이 퍼져나가리라.
그때가 되면 종의 기원에 기록된 혈우병과 맞물려 영국 왕실의 위엄을 갉아먹는 끔찍한 사태가 벌어질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