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18장 6화 의무 교육(2)
한 달에 걸친 서류 작성 작업을 마치고 양력 3월 1일을 시점으로 한양의 각 시민들에게 서신이 배부되었다. 이 서신을 받은 이들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봉투를 열었다.
“검은 것은 글씨요 흰 것은 종이지. 하긴 내가 글을 알면 학교에 다닐 이유가 없는걸.”
연은방(延恩坊 - 현 은평구 일대)에 사는 공장 직원 박득문은 한숨을 내쉬고 아내를 바라보았다. 그나마 어느 정도 글귀를 뗀 아내도 글을 더듬더듬 읽으며 답하였다.
“저야 이름자 정도만 알고 상세한 글은 잘 몰라요.”
“우리가 제대로 배운 적이 있나. 옆집 사는 이 서방은 알고 있으니 물어보고 오겠소.”
가까스로 글을 깨우친 사람들은 서신을 대신 읽어주었다. 서신에는 일방적인 통지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었다.
-교육 권장 제도에 의거하여 박득문 외 교육 희망자 2명의 명부를 작성하였음. 이에 의거하여 박득문, 박우영 그리고 박우성의 학교를 배정하였음.
-학교는 각기 오전 8시에 시작하는 오전반, 정오에 시작하는 오후반, 오후 4시에 시작하는 저녁반 그리고 오후 8시에 시작하는 야간반으로 구성됨. 수업 시간은 3시간.
-연령 7세의 최우선 교육 대상자 박우성은 위례(백제의 옛 지명) 학교의 오후반으로 입학할 수 있음
-연령 9세의 차선 교육 대상자 박우영은 위례 학교의 오전반으로 입학할 수 있음.
-연령 27세의 성인 교육 대상자 박득문은 고릉(高陵 - 공양왕릉) 인근에 위치한 고봉 학교의 오전반으로 입학할 수 있음.
-가족 구성원의 입학이 불가할 경우 가장 박득문이 필히 고봉 학교에 나와 해당 사항에 대한 서류를 기입할 것. 이 경우 입학은 3년 뒤로 미루어질 것.
내용을 두 번 읽어준 이 서방은 눈을 흘기며 중얼거렸다.
“자네 아들 둘은 집에서 얼마 안 떨어진 학교로 가면 되는데 자네가 문제로군.”
“이건 좀 너무한데? 내가 지금 연은방에 살고 있는데 고릉까지 가라고? 못 가면 삼 년이나 뒤에야 기회가 생긴다고?”
“그나마 운이 좋은 것이라 생각해야지. 내가 서신을 읽어준 것이 세 번인데 연령이 맞지 않거나 애매한 경우에는 아예 입학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었어.”
이 서방의 말을 들은 박득문은 자신이 얼마나 여유를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는 6년 째 연필 공장에서 2교대 근무를 하는 사람이며 낮에는 근무를, 저녁에는 잡다한 일을 하였다.
공장에서 오후로 근무하는 건 서류 신청 한 장이면 가능한 일이었다. 중요한 사실은 학교에 다니면 공장 업무 이외의 수익이 사라지는 것이다.
“집안에 저축을 좀 해둔 것이 있기는 해. 다만 삼 년간 학교를 다니면 모조리 까먹겠는데.”
“여기 자네를 위한 설명이 더 있는데? 추가 교육 항목이야.”
-성인은 기존 3시간의 수업을 끝낸 뒤 1시간 30분의 추가 교육을 받을 수 있음.
-추가 교육은 화재, 홍수 그리고 변란과 같은 재해에 대처하는 방안을 배울 예정. 식사 포함.
-국가에 이득이 되는 교육이므로 소정의 지원금을 내려줄 것임. 성적 상위 1할에 속하는 자는 매년 20냥, 이수자는 매년 15냥을 지원할 것임.
“매년 스무 냥을 지원할 것이라고?”
박득문은 머리를 굴려보았다. 자신이 공장에서 근무해 받는 봉급은 매년 375냥이다. 여기에 오후에 각종 자질구레한 일을 하여 60냥 정도의 수익을 거두었다.
이 수익이 20냥으로 줄어들어도 아주 큰 타격은 아니었다. 일 년 출석일수가 150일에 불과하니 남은 200일 동안 여러 일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으리라.
“글을 읽어줘서 고맙네. 내가 글을 깨우치게 되면 자네에게 술 한 번 사지.”
“학교에 다닐 생각인가? 혹시 나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우면 나도 학교에 다녀야겠는걸.”
이 서방과 악수를 나눈 박득문은 다음 날 홀로 고봉 학교까지 걸어갔다. 한 시간 정도를 걸어 도착한 학교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서류를 제출하였다.
“저는 아들 둘과 딸아이 둘을 학교에 보내겠습니다. 대신 저는 다음 기회를 노리겠습니다.”
“그렇다면 간단한 서류 작성만 하시고 돌아가시면 됩니다.”
바로 앞의 사람은 자신은 학교에 다니지 않고 자식들만 가르치기로 하였다.
그 사람이 돌아가자 담당관은 박득문의 서류를 살펴본 다음 질문을 하였다.
“몇 명이나 입학시키실 예정입니까?”
“아직 결정된 사항이 아니라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추가 교육이 대체 뭡니까?”
“추가 교육과 관련된 사항은 옆 교실의 장교님에게 들어보시지요. 조금만 기다리면 됩니다.”
박득문처럼 추가 교육에 대한 궁금증을 품은 사람들은 따로 마련된 교실에서 장교를 기다렸다. 곧이어 장교와 병사 두 명이 풀을 먹여 다린 군복을 입고 성큼성큼 걸어왔다.
“이번에도 추가 교육에 대한 궁금증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도착했군. 나는 성부사단 소속의 육군 정교(正校 - 상사) 최제선이며 이 둘은 각기 상등병 김수현과 주영산일세.”
최제선, 본래 역사에서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가 당당하게 자신을 소개하였다.
최제선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람들은 서로를 돌아보고 두서없이 궁금한 점에 대해 물어보았다.
“추가 교육은 각종 재해에 대처하는 방법이라 하였습니다. 어떻게 대처합니까?”
“왜 선생님이 아닌 장교님께서 저희를 가르치십니까?”
“저희가 재해를 맞닥뜨리게 되면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는 합니까?”
최제선은 팔짱을 낀 채 재해(災害)라는 글자를 미리 준비된 칠판에 분필로 썼다. 그리고 분필을 내려놓더니 사람들을 바라보며 답을 시작했다.
“그 근본을 간단히 알려주겠네. 자네들이 얼마나 부족한지 알고 있는가?”
최제선은 잠시 침묵하다 갑자기 손가락을 뻗어 한 사람을 지목하였다. 그러고는 속사포와 같이 질문을 퍼부었다.
“누군가가 자네 집 뒤에서 건초에 기름을 뿌리고 불을 붙였네. 어떻게 해야 하나!”
“어 음 그게. 일단 건초가 어떻게.”
“이미 건초가 불타오르고 옆집으로 불이 옮겨붙었군. 그럼 다음!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손가락이 박득문을 가리키자 그는 공장에서 배운 기초 상식을 동원했다. 나무를 많이 다루는 연필 공장에서 일해서 화재를 방재하기 위해 간단한 상식 정도는 알려주었다.
“거적에 물을 뿌려서 불이 난 곳을 덮고 그…… 물 같은 걸 끼얹어야 합니다.”
“좋아. 화재는 진압하였는데 불을 일으킨 범인이 도망치고 있군! 주 상등병이 범인이다!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어느새 교실 뒤쪽으로 돌아가 있던 주영산은 쏜살같이 도망쳐서 교실 밖으로 사라졌다. 최제선은 손뼉을 치면서 평가를 내렸다.
“화재는 막아냈으나 범인을 추포하지 못 하였다. 녀석은 다른 곳에 가서 기름을 뿌리고 불을 붙이겠지. 이제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알겠는가?”
“저희가 황제폐하의 수족이 되어 나라를 건사하는 데 도움을 주라는 말씀이십니까?”
“거기까지는 너무 나간 것 같군, 수신제가치국평천하, 먼저 몸을 지키는 법을 배우고 가족을 보호하는 법을 배워야 하지. 그러하면 큰 재앙을 손쉽게 막을 수 있다네.”
이 자리에 모인 성인 모두가 최제선의 설명을 적당히 이해하였다. 자신들은 아주 크나큰 일을 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과 가족을 지키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이라 생각하였다.
이 모든 것을 황제폐하의 은혜요,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라 생각한 사람들이 궁궐 방향을 향해 인사까지 올렸다. 최제선은 손짓을 하며 설명을 마무리 지었다.
“자네들은 화재, 홍수를 비롯한 각종 재난부터 국난(國難)에 대비하여 기초적인 병장기를 활용하는 방법까지 익힐 예정이네. 군문의 일을 모두 다 익히지는 않더라도 필요한 것만 익히지.”
“그러하면 총 한 발 정도는 쏠 수 있습니까?”
“응당 배울 수 있지. 아예 훈련용으로 부품을 몇 개 제거한 구형 소총을 준비하였네.”
범인 역할을 하여 교실 밖으로 사라졌던 주영산은 어느새 소총 몇 자루를 가져왔다. 신형 소총인 갑식, 진식 소총으로 교체된 구형 브라운베스가 교보재로 쓰이게 되었다.
“만에 하나, 모든 병사들이 국난을 맞아 자리를 비웠을 때가 생길지도 모르지. 그때가 되면 우수한 성적을 거둔 이들은 병사들을 대신해 나라를 지킬 것일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모두가 침묵하였다. 장교쯤 되는 사람이 ‘국난을 맞아 자리를 비웠을 때’라 하였으니 정말 큰 전쟁이 나서 나라가 위기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뜻이기도 하였다.
최제선은 이런 태도를 확인하고 피식 웃으며 옷을 고쳐 입었다. 그러고는 옛일을 이야기하듯이 가볍게 말하였다.
“이 나라에서 국난이 일어날 때 의병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분연히 모여들었네. 그런 때를 대비해 자신을 지키고 적을 격퇴할 지식을 갖춰야 하지 않겠나.”
“의병으로 활약할 수도 있으니 수업을 철저히 이수하겠습니다!”
“훌륭하군. 맞서 싸울 생각이 아닌 스스로를 지킬 마음을 품고 있게나.”
박득문은 쿵덕거리는 가슴을 움켜쥐며 방 밖으로 나섰다. 글을 배우고 지식을 쌓은 어른으로서 나라를 위해 의무를 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이 어린 시절, 아직 나라의 이름이 조선일 때와 비교하면 너무나 살기 좋아진 나라이다. 더 이상 배를 주릴 필요도 없으며 상인들이 곡식을 가지고 장난질을 치지도 않는다.
“내가 나라님에게 받은 은혜가 얼마인데! 이번 기회에 일 할이라도 갚으세!”
“아예 군인으로 입대하는 것도 괜찮지 않나?”
“나라가 위급할 때라면 입대하겠는데 지금은 아니야.”
다른 사람들도 같은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는 철저히 수업을 이수하고 추가 수업에서 높은 성적을 거두어 자신을 지키고, 가족을 보호하고 나라를 지킬 방법을 배우려 하였다.
* * *
교육제도를 도입하고 새 학기가 시작된 5월이 되었다. 내가 막 알래스카 구매 서류를 작성하고 있을 무렵 국가의 모든 시스템은 교육을 위해 움직였다.
박규수의 의무교육 도입은 말 그대로 사람을 콩나물시루에 길러내듯이 진행되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의무 교육을 ‘최초로’ 시행한 순간은 사실상 전 국민이 교육 대상자이다.
그나마 한양 한정인데 한양의 인구는 1850년 통계 기준 약 83만 명이다. 이 가운데 40%인 33만여 명이 교육을 받겠다고 나섰다.
“이러다가 학부 사람들 모두가 피로에 찌들어 쓰러지는 꼴이 날까 두렵습니다.”
“임시로 양 대학의 사람들과 각 지방의 향교와 서원의 사람들을 교사로 사용했지. 그런데도 이 꼴일 줄이야.”
알래스카 관련 서류를 작성하다 머리가 아파 좌내각사 옥상에 부하 직원들과 같이 올라왔다. 부하 직원들도 나도 반대편 건물인 우내각사를 바라보았다.
오후 3시경 산송장 몰골로 튀어나온 학부 직원들은 갈지자로 걸어가며 아예 부축을 받아 퇴근하였다. 모두 밤샘근무를 한 것 같은데 저게 사람이 할 짓인지 모르겠다.
“저렇게 과도한 업무를 진행해야 합니까? 저렇게 업무를 진행하면 백성들을 가르치다 모두 다 죽어 나자빠질 것 같은데요?”
“탁지부에서 저런 꼴로 야근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한 달 내내 저런 꼴은 아니지 않습니까? 학부대신님이 괜찮으실지 염려가 됩니다.”
나도 박규수가 염려되어 찾아가 봤는데 그냥 퇴근을 포기하고 살더라.
이런 중요한 시기에 박규수를 퇴근시킬 수도 없어서 적당히 얼버무렸다.
“처음 몇 년은 저럴 수밖에 없겠군. 교육을 도입할 시기에 많은 인원을 가르쳐야 후일 사람이 쌓는 일을 막을 수 있을 걸세.”
모든 국민이 교육을 받고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만 교육을 받는다고 가정해 보았다. 그러면 전 인구의 8%가량이 학교에 다닌다는 계산이 나왔다.
바꿔 말하면 8% 이상의, 가급적 초반에 16%의 인구를 교육시켜야 인원이 적체(積滯)되는 현상을 방지할 수 있다. 그 대가는 모두 학부 관료들이 부담하고 있었다.
“이미 신문 공고도, 각 지방에 보내는 전신에도 교사로 활동할 수 있는 사람 모두를 모집하고 있다네. 그런 점에서 앞으로 일 년 이상은 나라가 고난에 빠질 것 같군.”
“그래도 다행 아닙니까? 한양에서의 교육이 성공하면 수많은 교사들이 각 지방으로 돌아가 교육 제도의 순차적인 도입을 도와줄 것입니다.”
“황제폐하께서 원하는 바도 그러한 것이지. 다만 하루 네 조의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의 부담이 너무나 막중할 것 같군.”
교육제도가 정비되면 대한제국의 기초 교육은 2교제,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뉠 예정이다. 반면 이 시기에는 4교대로 빡빡하게 돌아가고 있다.
내 부하 관료들도 이 모습을 보고 염려하였으며 학부의 별명이 ‘염라부’라 불리기까지 하였다.
교사들조차 2교대로 활동하니 말 그대로 콩나물시루 위에 숙주나물 시루를 얹은 격이다. 업무를 다 마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적당한 학교 한 곳을 정해 방문하였다.
“외…… 외부대신님께서 방!”
“학생들이 수업을 하지 않는가. 내가 방문한 것은 비밀로 하게.”
주변 떡집에서 학생들에게 먹일 떡을 몇 시루나 사들여 방문하였다. 예전에 국가에서 쓰이던 창고를 개조한 교실에서는 아이들이 서로 어깨를 마주한 채 바닥에 앉아 수업을 듣고 있었다.
“이 나라는 옛적에 조선이라 불리었으며 이를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이라…….”
칠판에 간단한 지도를 그린 교사는 교과서를 몇 번이고 확인하며 설명에 살을 붙여나갔다. 아직 글을 깨우친 아이들이 많지 않기에 설명이 제법 상세하였다.
아이들의 열정도 교사의 열정도 충분한 수준이었다. 비록 부족한 점은 많으나 이 시대에 이 정도 교육이면 대단한 편이다.
교사들도 피로가 막중하여 교대 근무하였다. 이 와중에 잔업을 하다 잠시 쉬고 있는 교사에게 질문을 하였다.
“한 반에 몇 명이나 수업을 듣는가?”
“아이들은 일흔 명으로 네 조를 교대합니다. 어른들은 조금 더 덩치가 크니 마흔 명으로 세 조를 교대하지요.”
“다들 수업은 잘 따라가는지 모르겠군.”
“잘 따라가다 못해 글을 미리 배운 아이들 덕분에 진도가 조금 더 빨리 나가고 있습니다. 서로 글을 가르치고 모자란 부분을 깨우쳐 주더군요.”
현대에는 한 살 차이가 절대적이나 이 시대에는 8살 차이까지 친구로 사귈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이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모두 친구 사이가 된 것이다.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이 썰물처럼 좁은 교실에서 빠져나왔다. 나름 운동장이라고 구색을 갖춰 두었으나 기껏해야 아이들이 종이로 만든 공을 차고 노는 수준에 불과하였다.
교사들도 수많은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니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우거나 아예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팔다리를 주무르고 있었다. 이들에게도 적당히 돈을 건네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자네들이 나라의 근본을 만들어나가고 있다네. 항상 자부심을 가지고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쳐 황제 폐하의 뜻을 온전히 전수해 주게나.”
“대감님께서 저희를 어여삐 보아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교사들도 피로가 막심한 모습이나 눈을 빛내며 열정을 보여주었다. 잠시 교사들이 근무하는 사무실에 들렀는데 나무상자가 제법 많이 쌓여 있었다.
“그나저나 다른 사람들도 몇 명 찾아와 후원을 보낸 같군.”
“어떻게 아셨습니까?”
의무 교육제도의 도입은 시대를 따라가지 못한 양반들도 움직이게 하였다. 이들은 백성을 교화하는 원대한 의무에 감동하여 각 학교에 지원 물품을 보내주었다.
학교는 워낙 많은 인원을 가르치느라 지필묵 대신 분필과 연필을 사용하였다. 이 사실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질 좋은 붓 수백 자루와 연습용 종이를 학교에 선물한 것이다.
“지필묵이 쌓여 있지 않은가. 연필이나 분필 대신 지필묵을 보내왔다면 교육 제도에 대해 잘 모르는 지방의 유생들이 보내온 후원이겠지.”
이건 옛 가르침을 잊지 말아달라는 지방의 유생들.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의 선물이었다.
교사들은 내 말을 듣더니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였다.
“그래서 골치가 아픕니다. 저희가 쓸 만한 붓은 아니고 죄다 어린이들을 위해 작게 만든 붓이라 어찌 써야 할지요.”
“진도가 예상보다 빠르면 지필묵을 사용하는 법 정도는 알려줘도 될 것 같군. 좋은 선물을 제대로 사용하는 것이 옳지.”
온 나라가 교육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변화를 거부하여 지방 지주로 남은 사람들조차 자신들의 고집을 지킨 채 교육을 도왔다.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과거제도가 유교 사상을 만나 온 국민의 교화로 발전하고, 수많은 위인들이 이를 줄기차게 이어온 결과물이었다.
이 뿌듯한 마음에 다음 학교로 향하였다. 외곽에 있는 성인들의 군사적 교육을 위해 마련된 학교들에서는 특별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화재 대비 훈련 시작! 어서 거적에 물을 적셔라!”
“오와 열을 맞추어 움직여라! 번잡한 모습을 보이면 주변 사람들이 겁에 질린다!”
마른 장작에서 막 피어오르던 불길이 순식간에 진압되었다. 성인들은 수업을 듣는 조와 장교를 중심으로 한 군사 훈련을 받는 조로 나뉘어 있었다.
내가 헛기침을 하자 다음 훈련을 준비 중인 장교가 기자재를 정리하며 나에게 인사를 올렸다.
제법 잘 진행되는 것 같아 슬쩍 웃으며 훈련 사항에 대해 물어보았다.
“성인들이 어느 정도로 훈련에 응하고 있는가?”
“막 군문에 발을 들인 신병보다는 못 하여도 열정은 대단합니다.”
“혹시나 의문을 품는 사람이 생기던가? 자신들이 하는 훈련에 대한 의문 말이야.”
특별 교육에는 대한제국 각 사단 훈련소의 훈련 내용을 쪼개고 분해하여 적용하였다. 성인들은 군대에서 일어나는 비상상황 대비 훈련이나 제식훈련을 알게 모르게 체득하였다.
비록 행군같이 시간이 오래 걸리는 훈련은 할 수 없으나 이 정도면 충분하리라.
장교는 잠시 훈련장을 돌아보다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답변하였다.
“없습니다. 군대 훈련이 아니고 오로지 자신들이 가족을 지키고 고장을 수호하는 의무라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주 좋은 상황이야. 나중에 성과가 좋다고 칭찬하며 사격 훈련을 할 준비는 되었는가?”
“물론입니다. 갑식 소총 대신 구형 소총을 열 발 정도 쏘면서 체험하면 될 겁니다.”
이론상 학교에서 특별 수업을 받은 성인들은 3주 정도의 적응을 거치면 신병이 될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이론상의 일이며 실제로는 1개월 정도의 적응기간이 필요하리라.
그래도 기존에 신병을 모집하면 4개월 내내 훈련을 굴리고 최소한의 글을 가르쳐야 제대로 된 병사로 만들 수 있다. 이 기간 동안 봉급과 각종 비품도 계속 소모한다.
-줄줄이 앞으로! 갓!
-앞으로- 갓!
자신도 모르게 제식훈련을 하는 성인들을 보니 절로 미소가 나왔다. 훈련소에 입소한 군인들에게 필요한 돈은 제법 많다, 4개월 동안 소모품과 급료 포함 160냥이 소모된다.
반면 이들은 연간 15냥을 받으려고 훈련에 참가하였다. 앞으로 5년 정도가 지나면 대한제국은 최소 15만 명에 달하는 반쯤 완성된 군인을 만들어내겠지.
자신이 군사적인 경험이 없다 생각하는 반쯤 완성된 신병들 말이다.
이들은 징집된 순간 자신의 지식을 적용해 곧바로 군에 적응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