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18장 10화 사립 대학(1)
대한제국의 의무 교육제도가 시작되고 6개월이 지난 1851년 11월이 되었다. 얼기설기 엮은 조직을 굴려대던 학부는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갔다.
정확히는 이틀에 한 번꼴로 야근을 하는 수준으로 업무가 감소했다.
이틀에 한 번 야근이면 다른 부서에서는 몸서리를 칠 수준이나 학부 입장에서는 지옥에서 조금 덜 뜨거운 지옥으로 이동하는 수준이지.
박규수는 거의 송장 몰골에서 심신쇠약 수준으로 몸이 좋아졌다.
그는 퇴근하던 중 나를 만나자 평상시에 잘 하지도 않던 농담을 건넸다.
“거대한 빙고를 사들인 박 후작 나리 아니신가. 요즘 빙과(氷菓)는 잘 먹고 다니는가?”
“환재 대감께서 농을 잘하시는군요. 사실 골나(콜라) 원액을 섞은 빙과를 먹고 있지요.”
“내가 그걸 몰랐군. 그나저나 일감이 줄어들기는 하였는데 영 귀찮은 일이 생겨서 말이야.”
박규수는 나를 은근슬쩍 자신의 집무실로 끌어들였다. 잠시 대화나 나누려고 방문하였는데 의외로 많은 서신들이 쌓여 있었다.
“근래에 들어 지방 유생들에게서 항의가 들어오고 있다네.”
“항의라니요. 어떤 내용입니까?”
“자네가 맞춰보면 어떠하겠나? 대부분 한 가지를 원하고 있다네.”
스무 통 정도 쌓인 서신을 잠시 바라보고 이들이 뭘 원하는지 생각을 해 보았다. 일단 각 지방에 부설된 공장에서 서당 개념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니 교육 관련 내용은 아니리라.
여기에 각 지방은 아직 인원도, 자금도 부족하여 의무교육을 시킬 능력이 없다. 3년 뒤에 교육을 실시할 예정이라며 통지를 내렸을 뿐이지.
서신을 보낸 지방의 유생들이 이 상황을 모를 정도는 아니겠지.
잠시 고민하다 박규수에게 답을 주었다.
“지방에서 인재를 한양으로 보내서 아이들을 가르친 일의 보상을 내놓으라는 소리겠지요.”
“거의 정답이라네. 그나마 가장 온건한 서신 하나를 읽어보게.”
내용은 내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백성을 가르치는 일은 공자의 옛 사상을 퍼트려 모두를 교화(敎化)하는 일이라 찬양 일색이었다.
그 다음 내용부터는 학문의 전당이 텅텅 비어버렸다는 말. 제대로 학문에 발을 붙일 수 있는 인재들이 붓을 사들여 글귀 연습이나 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예상은 하고 있었네만 생각보다 답이 빨라서 문제라네.”
“지금까지 이 나라에서는 언제나 손해를 입히면 보상을 주었지요.”
“나도 생각이 없지는 않았지. 황제 폐하께 말씀을 드려 각 지방 사학에 지원금을 보내는 방안을 모색하였는데 돈 이전에 인재가 문제라 하는군.”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사실 지방 사학에, 정확히는 서원을 억지로 뒤틀어 문과, 사학과 그리고 철학과의 3가지 과만 만들어 둔 유사 대학에 지원금을 보내도 큰 효과가 없다.
현대는 물론이고 이 시대의 대학은 각 학과 간의 연계를 통한 발전과 연구진행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이 유사대학들은 연구비를 받아도 연계가 극도로 힘들다.
간혹 몇몇 커다란 대학들은 국립대학들을 졸업한 인재들을 받아들여 나름 학과를 만들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런 대학이 5곳도 안 되어서 문제이지.
“이들을 제대로 지원할 방법을 모색하면 어떠하겠나.”
“그러면 제대로 된 사립대학을 만들면 괜찮을 것 같군요.”
박규수의 눈썹이 뒤틀리며 입술이 꿈틀거렸다. 그는 붓 대신 연필을 들고는 나와 함께 예산안을 작성하기 시작하였다.
“최소한의 학과만 마련한다 생각하고 초기 예산안을 작성해 보지.”
“좀 더 연구를 해야 할 것 같지 않습니까?”
“일단 탁지대신께 들이대 봐야 뭐라도 성과가 나오지 않겠나?”
다음 날, 나와 박규수의 방문을 확인한 김좌근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대놓고 싫은 표정을 지었다.
그는 귀찮으니 제발 내버려 두라는 눈빛을 보내더니 한숨을 내쉬고 포기하듯 말했다.
“두 대신들이 무슨 일로 이 탁지부를 찾아왔는지 알 것 같군. 지방 서원 관련 예산인가?”
“예산으로 단순히 돈만 지급하면 안 됩니다. 제대로 된 지원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안 그래도 일감이 폭주해 미칠 지경인데 그러면 자금을 더 쥐어짜라는 말이잖아!”
김좌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양복 자락을 휘날리며 의자를 박차고 탁자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탁자를 발로 쾅쾅 찍어대면서 한탄하였다.
“황제폐하께서 국난을 대비하시며 국고를 알뜰히 쓰고 계시는데 뭐? 또 다른 일감? 지방 서원 관련 예산을 어떻게든 쥐어짜서 이백만 냥을 만들어내었는데!”
탁지부 관원들은 김좌근을 바라보더니 모두 다 탁자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우리를 바라보며 위협하듯이 발을 구르며 말했다.
“우리도 못 살겠다! 탁지부도 사람이다!”
“오 황제 폐하시어! 우리에게 자비를 내려주시옵소서!”
“과다 업무 중단! 정상 퇴근 촉구!”
한동안 발을 구르며 소란을 피우던 탁지부 관원들은 우리가 뒤로 물러나자 책상에서 훌쩍 뛰어내려 다시 업무에 몰입하였다.
김좌근은 자리에서 내려오고는 딱 잘라 말하였다.
“예산이 부족해서 못 하겠네.”
“그럼 세금을 더 거두면 될 것 아닙니까? 여기 환재 대감이 새로운 세금을 고안했습니다.”
김좌근은 우리의 눈빛을 보더니 괜히 헛기침을 하며 탁자 위의 흙먼지를 수건으로 닦아내었다. 그러고는 옆에 마련된 별실에 앉아 흥분을 가라앉히지 않고 말하였다.
“환재 대감이 새로운 세금을 창안하였다고? 그 세금의 이름이 무엇인가?”
“교육세입니다. 의무교육제도가 도입되었는데 혜택을 받는 백성이라면 세금을 내야지요.”
“인두세(人頭稅) 개념이로군. 모두가 교육의 기회를 받은 시점에서 괜찮은 것 같아.”
바로 인두세의 이야기가 튀어나왔는데 박규수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이려 하였다. 어떻게든 업무를 줄이려는 모습을 보고 박규수를 대신해 의견을 내놓았다.
“인두세가 아니라 소득 대비 과세로 하셔야 할 겁니다.”
“소득 대비 과세? 그러하면 소득세나 재산세처럼 하나하나 장부를 작성하라는 말인가?”
김좌근은 잠시 고민하다가 검지를 까딱거리면서 반대를 하였다.
“의무교육을 명목으로 세금을 거두면 소득 대비 과세에 저항이 만만치 않을 거야. 나와 탁지부 업무량은 둘째 치고 집안에 재산이 많은 사람들이 의무교육을 받을 이유가 있는가?”
“그러하니 재산이 많은 사람들에게도 혜택을 주어야지요. 지방에 사립대학을 부설하고 예산안을 받아서 업무 기자재를 교육세로 사들이는 겁니다.”
“음, 뜻은 좋군.”
김좌근의 답을 들은 박규수가 한 걸음 다가갔는데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귀를 막았다.
내 예상대로 김좌근은 숨을 크게 쉰 다음 피가 끓는 목소리로 고함을 쳤다.
“그래! 아주 좋아! 십 년 넘게 도성에 올라와 논문을 발표하고 예산을 받아가던 사람들이! 제대로 된 대학을 경영하면서 등록금에! 각종 시설 유지비를 비롯한 예산을 제출할 수 있다고!”
창문이 덜컹거릴 정도의 고함에 박규수가 하얗게 질려 뒤로 물러났다.
김좌근은 탁자를 탕탕 내리치며 말을 계속하였다.
“그 엉망진창의 예산을 하나하나 관리하고! 사람을 보내서 대학의 세금이 제대로 쓰이는지 확인하고! 그 모든 작업을 모두 황제폐하께 보고해야 하는 내 입장을 생각해 보게!”
“하옥(荷屋) 대감의 업무를 제가 도울 것입니다.”
“돕는다고! 학부에서 의무 교육 관련 예산을 작성할 때 내가 관여해서 수정했는데!”
김좌근은 눈에 핏발을 세운 채 나와 박규수를 번갈아가면서 쳐다보았다. 과도한 업무로 쌓일 대로 쌓인 분노가 이 자리에서 터져 나왔다.
그는 안동 김씨의 수뇌로 가장 많은 재산을 축적하였다. 최소 수십만 냥의 재산을 축적하고 이를 투자로 부풀리고 있는데 쓸 시간이 없어서 못 쓰는 상황이지.
이 뒤틀린 정신을 업무로 표출하고 있었다. 자신이 돈을 못 쓰는 형편인데 돈을 헛되이 사용하는 놈들을 철저히 막아내겠다는 뒤틀린 충성심이다.
“머저리들이 소중한 예산으로 실험 기구를 사들여 죄다 깨 먹는 모습을 상상하니 토할 것 같군! 이들이 제대로 예산을 소모하게 대학 설립과 관련해 제대로 된 방안을 마련하도록!”
김좌근은 우리를 떠밀어 아예 탁지부 바깥으로 몰아내 버렸다. 복도에서 멍하니 탁지부 문을 바라보니 내부(內部 - 내무부) 관리가 우리에게 아는 체를 하였다.
“학부대신님과 외부대신님도 일언지하에 거절을 당하셨습니까?”
“일언지하가 아닌데 아무튼 거절을 당했지.”
박규수와 눈을 마주쳤는데 그는 아예 강압적으로 일을 처리할 생각이 분명해 보인다.
아무리 보아도 효명제에게 건의를 할 기세라 뜯어말리려 하였다.
“하옥 대감께서 아예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세금을 거두고 예산을 쓰려면 제대로 해야지요.”
“내 말이 그 말이야. 방도가 없으니 황제 폐하께 명을 내리시게 하여…….”
박규수는 답도 안 하고 성큼성큼 걸어서 아래층, 학부 집무실로 내려가려 하였다. 학부 집무실 입구를 보니 유럽에 다녀온 일준이가 손을 흔들며 나를 맞이하였다.
“환재 대감님 아니십니까? 학부 휘하 국립이학대학의 연구 성과 보고를 위해 방문했습니다.”
“생각보다 빨리 방문했군. 본래 십이월 귀국 예정 아니었나?”
“수에즈 운하가 완공되지 않았습니까.”
일준이는 박규수와 악수를 나누고 나와도 악수를 나눴다. 그러고는 우리의 표정을 보고 없는 눈치를 굴려서 질문을 하였다.
“두 분 다 무슨 일을 겪으신 겁니까?”
“그렇지 않아도 교육과 관련된 일이야. 자네 도움도 필요하네.”
그동안 개인 연구 과정을 진행하느라 의무 교육 내용과 담을 쌓았던 일준이였다. 녀석은 우리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탁지대감께서 옳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이 학문에 관심을 보여야 할 수 있지 덮어놓고 재료만 주면 모래장난을 치는 아이들과 같은 짓을 하지요.”
“그렇다면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연구 과제를 국립이학대학에서 제공하면 어떠한가?”
“지금 국립이학대학 수준이면 너무 난해합니다. 학부생 수준의 연구과제만 내놓아도 각 지방 대학에 파견된 강사들 입장에서는 고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박규수는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쉬었다. 이래도 문제 저래도 문제라면 결국 국고를 탕진하는 수 외에는 방도가 없다. 이는 박규수도 싫어하는 일이었다.
반면 일준이는 한참 동안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나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여유당 선생님이 생전에 말씀하시길 사 년 주기로 학술 토론회를 열기로 하였지? 이 시기가 1853년 팔월인데 국제 박람회를 겹치면 어떨까?”
“국제 박람회와 학술 토론회를 병행할 수 있어?”
“오히려 병행하는 편이 나아. 그렇지 않아도 유럽에서 대한제국 기술 박람회 개최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데 첫 행사는 화끈하게 해봐야지.”
박규수는 고개를 들고 일준이를 바라보았다. 국제 박람회를 주최하는 학부 측의 부담이 제법 큰 편이나 어차피 학술 토론회만 개최해도 부담이 크기는 매한가지였다.
“학술 토론회에 쓰일 자료를 각 대학별로 연구시키면 괜찮을 것 같군.”
“가장 쉽고 일상과 밀접한 연구 과제도 몇 개 준비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제 제자인 파스퇴르와 파브르가 재미있는 실험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재미있는 실험인가? 실험이 쉬운 편이기는 한가?”
“파스퇴르의 실험은 메주이고 파브르의 실험은 소의 육종(育種)과 관련된 실험입니다.”
순간 우유 대신 메주를 다루는 파스퇴르, 곤충 대신 소를 매만지는 파브르를 상상하여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일준이는 나와 박규수의 표정을 확인하고 말하였다.
“좀 더 정확히 말씀드리면 파스퇴르는 곰팡이 관련 연구를 석사 과정 연구생들과 함께 진행하였습니다. 파브르는 다른 연구생들과 함께 생물 번식 논문을 공저(共著)하고 있지요.”
“그걸 메주와 소로 편하게 변형하여 연구 과제로 제공한다는 말인가.”
“자고로 처음 접하는 실험은 쉬울수록 좋습니다. 당장 제가 담당하는 화학과의 첫 강의는 소나무와 양초로 진행하는 간단한 실험이니까요.”
나와 박규수, 그리고 일준이는 머리를 맞대고 예산안과 필요 기자재 그리고 필요 인원을 산정하였다.
마침내 3일 뒤, 모두 김좌근에게 방문해 예산안을 제출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성명(誠明 - 정약용의 시호) 대감의 기일을 맞이하여 학술 토론회가 개최될 예정이었지.”
“성명 대감은 이 나라에서 학문으로 명성을 떨치던 분이었습니다. 고인을 추모하고 초회 학술 토론회를 개최하면 어떠하겠습니까?”
예산안에는 11개의 사립대학 설립, 인원 배분, 강사 섭외 그리고 해외에서 들여온 강사들의 파견 항목까지 들어 있었다.
김좌근은 이 예산안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면서 질문을 하였다.
“다른 건 다 좋은데 왜 메주인가? 메주는 흔하디흔한 물건인데.”
“각 집안마다 장맛이 다르지 않습니까? 그 이유가 뭐라 생각하십니까?”
“콩의 종류나 삶는 시간 혹은 띄우는 방법도 있겠지.”
“그 차이를 각기 비교해 보면 얼마나 재미있는 실험입니까? 한 대학에서만 수십 종류의 메주를 다룰 것인데 하루 종일 실험실에 박혀서 곰팡이를 관찰하고 성분을 분석하겠지요.”
김좌근은 일준이의 설명을 듣고 눈을 가늘게 뜨고는 탐탁지 않다는 듯이 말하였다.
“소의 육종 관련 실험은 우수한 소의 씨를 다른 소에게 퍼트리는 것이니 좋은 일 아닌가. 그러나 메주의 곰팡이는 이해할 수 없는데 숨겨진 이유라도 있는가?”
“곰팡이 가운데 화농(化膿)을 억제할 수 있는 물질을 내놓는 경우가 있더군요.”
“화농을 억제하는 곰팡이라? 그러하면 메주에 핀 곰팡이를 하나하나 수집하여…….”
“약을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김좌근은 흐뭇한 표정으로 예산안을 받아들였다. 그러고는 일준이와 악수를 나누며 말했다.
“역시 조 총장이라니까. 내가 예산안을 조금 수정하도록 하지.”
“그러하면 교육세는 어찌 배분할 예정입니까?”
“소비세와 재산세 그리고 물품 통관 관련으로 교육세를 조금 배분하면 될 것 같네. 이 정도는 양보해 두어야지.”
박규수는 허가를 받더니 아예 학부로 달려가다시피 사라져 버렸다. 이제 박규수에게 남은 일은 국립이학대학의 강사들을 분배하는 작업이다.
일준이는 복도에서 기지개를 켜며 한 건 해냈다고 중얼거리기까지 하였다. 녀석에게 궁금한 점이 있어서 우내각사의 휴게실로 가서 질문을 퍼부었다.
“곰팡이로 약을 만들면 페니실린이잖아? 너 예전에 페니실린은 못 만든다 하지 않았었냐?”
“푸른곰팡이 번식까지는 가능하고 실험실 단위에서 페니실린 추출은 일 년 정도 시간을 투자하면 가능해. 대신 이 페니실린을 유통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이제는 만들 수는 있으나 유통이 불가능하다 하네.
한참을 바라보니 녀석은 내 눈치를 보더니만 당당하게 말하였다.
“설파제 완성은 일 년, 유통은 이 년 앞으로 다가왔어. 다만 이 세상에 항생제라는 개념 자체가 없어서 이를 어떻게 판매할지. 이론을 어떻게 적용시킬지 고민하다 해답을 내놨다.”
“그럼 유럽에서 페니실린을 먼저 만들게 해서 항생제 개념을 도입한다고? 그럼 또 문제가 있는데? 페니실린 성능이 설파제보다 훨씬 좋다면서?”
“페니실린을 만드는 건 가능한데 유통이 불가능하다고. 그럼 못 만드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뭔 소리인가 해서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기억 한구석에 있던 페니실린의 약점을 떠올렸다.
“예전에 네가 말했지. 페니실린 보관에 실패해서 옆 실험실이 난리가 났다고. 영하 이십 도로 보관해야 할 물건을 냉장실에 보관해서 다 분해되었다던가?”
“이제야 떠올렸네. 이미 유럽에 보낸 유학생들은 푸른곰팡이에서 페니실린을 추출하려고 난리를 피울 거야. 그런데 실험실 밖으로 떠난 페니실린이 모조리 사멸하면 어떻게 될까?”
일준이의 흉계를 듣고 속이 꽉 막혀오는 기분이 들었다. 유럽의 대학들은 수많은 인재를 보내 일준이의 연구를 확인했다.
이들은 푸른곰팡이가 만들어내는 미지의 물질, 페니실린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였다. 일준이가 연구를 진행하는 순간 이들은 이 과제를 선점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리라.
갖은 노력 끝에 정제에 성공하고, 이 약품의 효능을 연구 논문으로 제출하는 과정은 가능하겠지.
일준이는 난간에 걸터앉아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 시대의 페니실린은 냉동 상태로 유통이 가능한데 그 유통망 구축과 자금 문제가 겹치지. 내 예상대로면 페니실린 한 병에 최소 이천 냥 정도는 할걸?”
“그 상황에서 네가 설파제를 시장에 출시해 버려서 수요를 충족하겠다고?”
“당연하지. 항생제라는 미지의 약을 갈망하던 사람들은 내 설파제를 줄기차게 사용하겠지. 냉장 보관도 필요 없고 가격도 대충 한 병에 서른 냥에 불과한 약물이니까.”
유통 과정에 들어간 페니실린은 같은 무게의 금보다 훨씬 비싼 물건이 되리라.
일준이는 괜히 기지개를 켜면서 이 흉악한 계획에 대해 말하였다.
“최초의 항생제 개발? 그런 건 필요도 없어, 내가 원하는 건 아무나 쓸 수 있는 안정적인 항생제를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퍼트리는 거다.”
친구는 서로 닮아간다는 말이 있었다. 내가 일준이의 어떠한 점을 닮게 되었는지 몰라도 녀석은 나의 흉계와 남을 이용하는 마음을 닮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