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215화 (314/345)

215화

18장 10화 사립 대학(3)

지방 대학교 중 가장 학자가 많은 대학은 정약용과 연관된 양주 대학교였다. 이 대학은 교통이 편리한 한강 북부에 위치하여 상당수의 강의를 국립대학들과 연계하였다.

반면 규모가 가장 큰 대학은 순조의 입김이 들어간 수원 대학교였다. 이들은 정조의 손길이 닿은 수원 화성 인근에 위치하여 빼어난 격식과 위엄을 갖추었다.

“철근 콘크리트로 만들어낼 본관은 내년 여름쯤 되어야 완공될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빠르게 완공되는군. 옛 방식으로 나무로 집을 만들려면 지금쯤 잘라낸 재목을 말리고 있어야 할 텐데.”

“이 작업도 만만치 않습니다. 건물 바깥에 돌을 잘라내 붙여야 하는데 그 공임이 꽤 되지요.”

수원 대학교의 교수들은 한창 거푸집을 조립하는 본관 건물을 보면서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 설계도에는 2층 규모의 커다란 본관 건물이 위엄을 드러냈다. 대신 건물 방향은 정남향이 아닌 남서향에 가까웠다.

교수들은 저 머나먼 남서쪽 방향을 바라보며 인사를 올리고 대화를 이어갔다.

“이 향교가 바라보는 방향은 정조 선황제(先皇帝)께서 계시는 건릉 방향이지. 우리가 대학에서 강의를 할 때에는 언제나 선황제께 부끄럽지 않게 해야 할 걸세.”

“선황제께서 능에서 화성을 바라보실 때 학문을 익히는 모습을 볼 것 같습니다.”

“이보다 좋은 장소가 있단 말인가. 물론 두 개의 국립대학은 제외해야지.”

교수들은 의식적으로 양주 대학교와의 경쟁을 생각하며 몸을 돌렸다. 향교의 각 건물은 증축되고 개수되어 제대로 된 강의실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국립이학대학 출신, 혹은 각 국가에서 초빙한 외국인 강사들이 이과 강의를 진행할 예정이었다. 교수들은 이과 실험동의 모습을 살펴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예전에 심곡서원(深谷書院 - 수원의 서원)에서 강의를 할 때 기억하나? 당시에는 두서없이 수학 서적과 과학 서적을 들고 서로 토론하며 학문을 다졌지 않는가?”

“이제는 제대로 학문을 가르칠 수 있는 강사가 오니 얼마나 좋은가.”

“그 강사가 우리의 강의를 평가하고 장계를 올리는 사람이라는 점은 명심하게. 우리가 도성에 나아가 연구 결과를 보고할 때와는 아예 다른 일이 될 것 아닌가.”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 하는데 이십 년 동안 세 번이나 세상이 뒤집히는군.”

대한제국의 양반 계층은 지금껏 많은 변화를 겪어왔다. 본래 서원과 향교는 백성을 착취하고 세금을 포탈하는 수단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이 향교와 서원을 중심으로 공장 투자를 실시하고 학문을 익히는 기회의 장을 마련하였다. 기회를 잡은 양반들은 더욱 발전할 수 있었으나 시대에 늦은 이들은 점차 쇠락해졌다. 이 과정에서 학문을 익히고 많은 이들을 가르친 서원과 향교는 대학교로 격이 올라갔다.

공사가 막 끝난 건물의 문을 연 교수는 자신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세 번이 뒤집혔는데 이제 네 번째 기회가 찾아올지도 모르네. 황제폐하께서 하신 말씀대로 인격을 도야(陶冶)하고 학술이론과 응용방법을 가르치고 연구해야 하지.”

한옥으로 만든 건물의 강의실은 두툼한 장판지를 깔고 그 위에 책상과 의자를 가져다 두었다. 칠판을 한 번 매만지고 내부를 점검한 교수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말하였다.

“제대로 된 대학은 스스로 공부하는 방법을 깨우쳐야 한다네. 여유를 충분히 두어 학생을 가르치되 적절한 과제를 제공하여 스스로 학문을 익히게 해야지.”

“얼마 전 흥선공이 보내온 서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네. 왜국에서는 왜왕(倭王 - 덴노)의 명으로 대학을 설립했는데 쉬는 시간에 난잡하고 기괴한 짓거리만 한다더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 교수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억지로 분노를 참아가며 왜국이라는 말을 한 교수에게 따지고 들었다.

“거 왜국이 아니고 일본 아닌가. 이 나라의 동맹이라면 국호를 제대로 불러줘야지.”

“자네는 헐벗은 형상을 숭상하는 놈들을 일본인이라고 부를 셈인가?”

“그건…….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니기는 하군.”

먼저 화를 낸 교수는 괜히 고개를 돌리며 딴청을 피우며 말꼬리를 흐렸다. 교수들은 둘이 진정하자 교실을 나와서 말하였다.

“학생들이 여유 시간에 구락부(俱樂部 - 클럽, 현대의 동아리)를 꾸릴 수 있도록 빈 건물을 몇 동 만들어두기는 해야겠지.”

“학문만 익히면 사람이 쉽게 어긋나기 마련이야. 어느 정도 풀어줘야 할 걸세.”

“구락부 강사를 우리가 겸임하면 어떻겠나? 학생들이 탈선하지 않게 지도해 줘야지.”

“그건 좀 너무 나간 것 같군. 정 원한다면 구락부에 지원금을 보내도록 하지.”

첫 사립대학 개설은 삐거덕거리며 얼기설기 진행되었다. 마침내 1852년 4월 입학고사가 진행되었다.

“국립국학대학과 국립이학대학 두 대학의 교수들이 낸 시험 문제요.”

봉투에 담긴 시험지가 입학 희망자들에게 배부되었다. 감독관은 자리에 앉아 마지막으로 권고하였다.

“배우지 않았다는 말은 하지 마시오. 대학이라는 학문의 전당에 발을 들이려면 이 정도 지식은 함양해야 할 거요.”

사립대학은 문과로 언어, 인문, 철학, 법률, 역사의 5개 과목. 이과로 수학, 물리, 화학, 생물 그리고 기계공학의 5개, 총 10개 학과를 개설하였다.

이 기준 과목 외에 수원 대학교에서는 수원 화성을 기려 건축, 토목의 두 개 강좌를 추가 개설하였다. 과목별 입학시험에 응시한 학생들은 필사적으로 문제를 풀어나갔다.

거의 만점을 받은 이들이 먼저 시험장을 나왔고 당연히 고배를 마신 이들도 많았다. 한 수험생은 시험장을 나서자마자 주점으로 들어가 정신없이 술을 들이켰다.

“내가 건축을 천한 학문이라 생각해 학위나 따려 했는데 건축에 꼭 산학이 필요할 줄은…….”

“건축학은 예전의 목장(木匠 - 목수)들이 하던 천한 학문이 아닐세. 구주에서는 수많은 인재들이 건축에 매진하여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지.”

“어디 하나 쉬운 일이 없군. 자네는 어떠한가?”

“나? 생물학과 시험을 보았는데 반은 글씨요 반은 종이더군.”

수원 대학교 정문에는 이미 주점과 찻집을 비롯한 시설들이 들어섰다. 심지어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대학생에게 월세를 받으려고 집을 내어주기까지 하였다.

이틀 뒤, 합격 결과가 공표되고 정규 학기 전 임시 강의가 시작되었다. 파견된 강사들이 먼저 강의에 들어가고 다른 교수들은 임시 강의를 진행하며 이를 습득하였다.

“가르치는 것도 힘든데 내 연구는 언제 진행하고 내 학문은 언제 가다듬는단 말인가.”

교수 전용 휴게실에는 언제나 담배연기가 피어올랐다. 예전이라면 사서삼경에 매달려 자신의 철학적 완성을 추구하던 교수들은 진정한 학문에 발을 들여 고통을 겪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사립대 교수로서 할 일이 있었다. 강의에 소홀하여 일정 수준의 학생을 육성하지 못하면 교수 지위가 박탈될 수도 있다.

단순히 수업만 잘하면 되는 것이 아닌 학생의 성적 유지, 연구 진행 그리고 논문 발표를 비롯한 수많은 업무를 동시 진행해야 하였다.

“내가 알기로 구주 대학의 교수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던데.”

“그 양반들 자기 전 재산을 털어가면서 연구를 진행하는 것 모르나? 이러다가 가산을 탕진해서 연구에 동참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그나마 예전부터 대학 노릇을 하던 언어, 인문을 비롯한 문과 교수들은 업무 부담이 덜 하였으나 이과 교수들의 업무 부담감은 엄청난 수준이었다.

이들 가운데 박사학위 이수자로 정식 교수가 된 사람은 극소수였으며 대부분 석사학위 이수자로 몇 년 동안 강의를 하거나 경력을 쌓아 임시 교수가 된 이들이었다.

“그냥 조 총장님이 권고할 때 박사학위 이수나 할걸.”

“그랬다가는 아직도 졸업하지 못했을 것 같은데? 지금 제정신인가?”

“어허! 육 년 정도면 졸업할 수 있지!”

“내가 알기로 십일 년째 갈루아 교수 아래에 있는 석사가 한 명 있는데…….”

교수들은 일제히 헛구역질을 하였다. 국립이학대학에서는 이런 난항을 겪는 교수를 위해 여러 연구 과제를 할당해 주었다.

이 연구 과제가 적힌 서적을 살펴보던 임시 교수들은 몇 페이지는 아예 보지도 않고 넘겨 버렸다.

그 페이지에는 교수들이 석사 학위를 이수할 때 국립이학대학에서 연구를 진행하던 과제도 있었다. 그러던 중 모두의 눈길이 한 과제에 집중되었다.

“이건 간편한 과제 같은데? 메주에서 채취한 곰팡이 배양과 유효 물질 분석.”

“웃기는 소리 하지도 말게. 최소한 색층법(色層法 - 크로마토그래피)을 굴려야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이야? 여기에 하루 종일 냄새나는 메주를 깎아 곰팡이를 채취한다고?”

“아니지, 당장 생물학부 담당인 자네 입장에서는 현미경 사용법을 가르칠 기회 아닌가?”

듣고 보니 그럴싸한 이야기였다. 코에 걸면 코걸이요, 귀에 걸면 귀걸이이니 화학과에서는 물질 분석을, 생물학과에서는 곰팡이 관찰과 배양 강의와 연계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임시 교수들은 바로 강의 준비에 착수하였다. 주변의 민가에 의뢰하여 제대로 된 메주를 구매하고 지원금 명세서를 작성하여 배양용 기기와 크로마토그래피 기기를 구매하였다.

이 소식은 국립이학대학에 근무하는 영국인 강사에게 전해졌다. 곧이어 이 소식은 전신과 서신을 타고 영국의 교수들에게도 전해졌다.

* * *

유럽의 정세는 급격히 전쟁을 향해 치달았다. 흑해 함대 증설을 시작으로 각지의 전력을 끌어모으던 러시아는 언젠가 터질 폭탄과 같은 기세로 오스만 제국을 위협하였다.

이 과정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수에즈 운하의 보호 목적으로 오스만 제국을 소극적으로 지원하였다. 1852년 5월경이 되자 아예 <수에즈 보호조약>이라는 협정을 제안하였다.

조약의 골조는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를 보호하기 위해 주변 지역의 지배권을 영국과 프랑스에 분할해 달라는 혐오스러운 제안이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한 몸이 되니 이런 조약을 오스만에게 강요하는군.”

“오스만 제국은 영토는 크나 별명이 구주(歐洲 - 유럽)의 병자라 불릴 정도로 나약한 국가입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나…….”

“병에 걸린 사람이 강도를 당할 위기에 처하자 강도를 막아줄 테니 집부터 내놓으라는 소리 아닌가.”

외부 관원들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였다. 조약이 성립되면 이집트, 이스라엘, 요르단에 해당하는 국가가 모두 독립하여 영국과 프랑스의 보호 아래에 놓인다.

오스만 입장에서는 말 그대로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쥐어 짜이고 가산을 탕진하는 꼴이지.

그나마 조약에서 제시하는 이득은 오스만 제국의 수에즈 운하 통행료 면제가 전부였다.

“박 후작님께서 이번 전쟁의 중립을 표시한 것이 그나마 다행입니다. 멋대로 영길리나 오스만에게 연줄을 대었다가는 어떤 꼴이 벌어졌을지 모르겠군요.”

“아마 쌍성자에 거주하던 사람들 대다수가 징집되어 지금쯤 크림반도로 옮겨질 거라네. 반대로 노서아에게 연줄을 대었다면 영길리가 분노하였겠지.”

“그래도 전쟁이 시작되면 병력을 파병할 생각 아니십니까?”

“엄밀히 따지면 최소한의 호위 병력만 파견하지. 우리는 전쟁에서 발생하는 부상병을 진영, 이념, 종교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치료할 계획이라네.”

10년 이상 빠른 국제 적십자 창설이다. 임시 명칭은 <대한제국 국제 구호협회>이며 명분은 이해득실을 가리지 않는 전쟁 피해자들의 치료와 구조 활동이었다.

실제로는 영국에서 급격히 발달 중인 의학을 더욱 많이 베끼기 위해서, 또한 전시에 필요한 숙련된 의무병과 외과의를 육성하기 위한 수단이지.

대한제국은 아직도 내과 치료에 치중하는 감이 있다. 솔직히 말해 우리가 발견한 여러 의학적 지식을 유럽이 더 빠르게 받아들였다.

영국은 빅토리아 여왕의 명으로 이미 혈액형 분석이 끝나고 아서 왕자를 위한 ‘동일 혈액형’ 공급자를 마련해 두고 수혈을 활성화할 수준이다.

이를 따라잡으려면 현장에서 직접 응급치료를 하며 경험을 축적할 필요가 있지.

“우리는 중립국을 표방하며 의무를 다할 걸세. 전장에서 쓰러진 이가 오사만국의 부상병이건 노서아의 부상병이건 가리지 않고 모두를 치료해야지.”

그 과정에서 영국의 발전된 의술을 쏙쏙 빼먹을 계획이다. 심지어 일준이는 설파제 샘플을 보내서 전장에서 빈번한 패혈증에 적용해 인체실험을 대신할 생각이고.

일준이가 만들어낸 설파제는 독성 실험을 통과했지만 ‘심각한 세균감염 환자’에 대한 최종 실험이 필요하다던가.

관원들은 잠시 뿌듯한 표정을 짓다 허탈한 표정이 되어 말하였다.

“제가 보기에는 치료를 받은 다음에 바로 상대 진영에 포로로 잡혀갈 것 같은데요.”

“아니라면 구호협회 사람들이 총검에 떠밀려 한 진영에 틀어박힐 것 같습니다.”

“그래도 개죽음을 당하는 것보다는 나은 형편 아닌가? 더군다나 노서아가 패배할 것이 확실한데 영길리와 불란서의 부상병을 치료하면 이기는 쪽에 선 것과 마찬가지지.”

그렇지 않아도 로버트 리스턴에게도 편지가 도착했다. 자신은 전쟁을 준비하여 더 나은 소독 체계와 마취제를 동원한 외과 수술을 준비하였다고.

우리도 전쟁을 준비하며 할 일이 많지. 특히 내 업무의 상당수는 급격히 근대화를 진행하고 있는 베트남과 관련된 사항을 다루었다.

“정기 보고를 시작하게. 대월의 군사 개혁과 농업 개선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지?”

“대월에 파견된 관원들이 보고하기를 군사 정비는 일단락되었다 합니다.”

보고를 들으니 나폴레옹 3세와 사덕제의 조합이 꽤 좋은 효과를 발휘하였다. 나폴레옹 3세는 군사력으로 압박을 가해 군부를 휘어잡고 사덕제는 이를 다독여서 설득하였다.

베트남은 본래 역사에서 잃어버린 근대화의 역량을 제대로 활용하고 있었다. 내가 조선의 세금 구조를 뜯어고친 방식대로 비료 공급을 미끼로 토지정비도 실시하였지.

여기에 화교들에게 재산을 압류하고 프랑스에게 채권을 들여서 전체적인 역량을 진보시켰다. 아직 공장 부설은 불가능하나 10여 년 이내로 가능할 것이라는 보고까지 이어졌다.

“다만 채권이 심상치 않게 불어나고 있는데 연이율 팔 푼(8%)에 달하는 채권이 일억 냥에 달합니다. 이 외의 채권과 투자 자금을 합치면 거의 이억 냥에 육박할 겁니다.”

물론 프랑스는 여전히 프랑스였다. 기회를 보아서 이자율이 높은 채권을 잔뜩 먹여 투자를 환수하고 이후 충분한 이득을 얻어낼 때까지 베트남을 옭아매려는 계획이다.

“대월 규모에 이억 냥에 달하는 투자를 하였다니요. 박 후작님, 이 정도면 이자로 인해 나라가 휘청거릴 수준이 아닙니까?”

“이대로 두면 삼십 년 정도 지나고 나서야 채무를 이행할 수 있을 것 같군.”

그나마 프랑스라서 저런 꼴이지 영국이었다면 국가 주요 생산수단을 하나하나 사들여서 극한의 이득을 뽑아냈으리라.

보고를 듣고 잠시 생각한 다음 대책을 마련하였다.

“불란서 성격도 어디 안 간다니까. 대월의 호조에 연락을 보내 채권을 대한제국 것으로 돌려 막는 것을 권고해보면 어떨까 싶은데.”

“저희가 채권을 구매한다니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전쟁이 벌어지면 어느 나라건 곳간이 텅텅 비고 백성들이 굶주림에 빠지는 법이지. 돈은 급할 때의 천 냥이 평안할 때의 일만 냥 보다 중요한 법 아닌가.”

이번 기회를 통해 프랑스에게 협상을 주선할 생각이다. 중립국 입장에서 전쟁에 손가락 하나도 댈 수 없으나 다른 국가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건 충분히 가능하다.

베트남에게 전쟁 장비를 판매하여 이 물건을 프랑스에게 바로 지원한다. 프랑스 입장에서는 가뭄 속의 단비나 마찬가지이다.

전쟁 장비를 더 비싼 가격에 판매하면 베트남이 구매한 채권은 자연스럽게 대한제국으로 넘어간다. 베트남 입장에서는 적절한 시기에 도움을 주어 족쇄를 하나 풀어주는 격이지.

“평상시에는 못 미더운 구식 병기라 하여도 이 시기에는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일세. 특히 소구경 화포들이 크림 반도의 기동전에 유리할 것 같으니 이 물건을 중점적으로 판매하지.”

“듣자 하니 군부에서 후미 장전식 소구경 화포를 만들어내고 있다 하였지요.”

“생각보다 개발이 빠른걸. 이걸 실전에서 두드려 맞을 청나라를 생각하니 웃음이 나오는군.”

차근차근 전쟁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마침내 1852년 7월 초, 러시아 제국은 오스만에게 일방적인 선전포고를 보내왔다.

앞으로 최소 1년, 본래 역사대로라면 3년 이상 진행될 크림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작가의 말

프랑스 학위이수 최장기록은 2016년에 박사학위를 취득한 콜레트 불리에(91세)입니다.

석사로 30년 동안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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