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22장 7화 선의 속의 바늘
마침내 한가위를 목전에 두고 청나라의 의사들이 방문할 준비를 마쳤다. 홍수전은 의사들이 일 년간 머물 자금이라며 먼저 은자 10만 냥을 보내와 체면치레를 하였다.
“약원에서 의사 한 명이 사용하는 기자재 비용만 일 년에 은자 백 냥이 넘어간다.”
의술이 발달할수록 비용소모도, 예산도 급격히 늘어나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피와 땀 같은 예산이 허비되고 각 신문에서는 이를 쟁점으로 삼아 보도하리라.
“외국인을 가르치는 데 돈을 쓰는 미친 짓을 왜 하냐면서 욕을 하겠지. 그나마 나이 많은 사람들은 이해하는데 젊은 사람들은 청나라를 꼴통으로 보니까 더 반대할 거고.”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 사관학교를 1차 졸업하고 육군으로 진로를 확정한 은찬이가 떠올랐다. 녀석의 방으로 들어가 녀석이 뭘 배웠는지 점검해 볼 겸 질문을 하였다.
“이야기를 좀 하자꾸나. 그동안 무엇을 배웠는지 궁금해서 말이다.”
“제 발언 하나하나가 수많은 이들을 죽이고 살릴 수 있는 무거운 자리임을 알아차렸습니다.”
녀석은 고작 1년 만에 군살이 쏙 빠질 정도로 시달려 눈빛이 변할 정도가 되어 있었다. 외몽골에서 건너온 귀족들이 얼마나 ‘접대’를 잘했는지 실전 경험도 쌓았다던가.
실전이라 해보았자 시베리아의 도적 소탕이 전부이지만.
내가 가만히 있자 은찬이는 당시의 일을 떠올리고 나에게 이야기를 해 주었다.
“저에게 여러 일을 가르쳐 준 몽골의 귀족들은 자신들을 지휘해 보라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지. 도적을 소탕하는 훈련에 참가하여 도적 소굴로 추정되는 마을을 발견하자 몽골의 귀족들이 네 앞에서 명령을 내리라고 했다던가.”
“아무 명령도 내리지 못했습니다. 사지가 뻣뻣해지며 청산유수 같은 말이 막히고 마음이 혼란해 지기에 그저 멍하니 숲속에 있는 마을을 바라보았을 뿐입니다.”
과격한 방식이지만 훌륭한 교육이다. 은찬이 입장에서는 저 마을이 도적 소굴일지, 원주민이 살고 있는 개척촌일지 분간할 방법이 없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전장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스스로 판단하여 지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런 과정 없이 무턱대고 공격 명령을 내린다면 병사를 말아먹는 장교다.
은찬이는 당시의 일을 떠올리고는 눈을 질끈 감고 한참을 생각한 다음 말하였다.
“해가 저물어가서 한 시간 이내에 결정을 내려야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소자는 첫 명령으로 마을 주변을 정탐하고 이들이 도적인지 확인하라 하였지요.”
“시간이 부족했을 것인데?”
“생각을 바꾸어 직접 마을 주변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러니 사냥꾼이 많이 사는 개척민들의 마을이었습니다. 하루를 후하게 대접을 받고 편안히 지냈지요.”
아마 쌍성자 사관학교 분원 생활이 은찬이의 그 고약한 심보, 아버지의 그늘 아래에서 능글맞게 이득만 챙기려는 심보를 고친 것 같다.
물론 아버지의 입장에서 은찬이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는 대충 보였다.
녀석의 눈치를 좀 본 다음 슬쩍 운을 떼었다.
“내가 널 기르고도 이십 년이 다 되어간다. 내가 보기에는 군문에 그리 관심이 없는 것 같은데 내 생각이 옳더냐?”
“바로 보셨습니다. 부친께서 말씀하신 바가 지극히 옳으나 소자는 이미 군문에 발을 들인바. 이 일을 완수하고 의무를 다한 다음에 새로운 일을 찾아볼 것이옵니다.”
“네 생각이 틀리지는 않다. 관심이 나중에 생길 수도 있고 즐기던 일도 당장 그만둘 수도 있지. 조변석개(朝變夕改)처럼 자주는 아니더라도 마음이 몇 년마다 바뀌는 법도 있다.”
은찬이는 내 후광이 없어도 잘 자립할 정도로 성숙해졌다. 오히려 내 교육이 너무 온건해서 자립이 늦어진 감도 있는 것 같고.
이제 은찬이의 생각을 알게 되었으니 외교 관련 질문이나 해보자.
잠시 뜸을 들인 다음 천천히 이번 건에 대한 질문을 하였다.
“네 식견이 궁금하여 물어보겠다. 청나라에서 외과 의술을 배울 의원을 보내기로 하지 않았더냐? 이 의원을 어떻게 대접하는 것이 좋겠느냐?”
“외과 의술을 배울 의원이라…… 변란을 코앞에 두고 적국의 군의관을 육성하십니까?”
“이 아버지가 의술을 가르치는 과정에서 함정을 하나 파두었다. 다만 이런 사실을 누구에게나 말 할 수 없으니 너와 같이 젊은이들의 생각이 어떠한지 궁금하구나.”
은찬이에게 괜히 질문을 한 것이 아니다. 정치나 외교는 국민의 수준과, 특히 세대가 다른 젊은 계층의 시선과 다른 분석을 하다가 역풍을 맞는 일이 자주 있다.
내 행위는 헤로인의 독성을 알려 홍수전에게 함정을 파놓는 짓이다. 그러나 은찬이와 같은 군인이, 더군다나 젊은 세대가 보기에는 함정이 아닌 적을 이롭게 하는 행위일지도 모르지.
은찬이는 함정이라는 말을 되뇌이다가 답을 내어주었다.
“소자는 함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나 다른 이들은 모릅니다. 그러하니 더더욱 큰 명분이, 예전에 이 나라에서 오사만국에 의원을 파견한 것처럼 선의로 나서야 합니다.”
“선의라?”
“그렇습니다. 이들에게 의술만 가르치는 것이 아닌 진정으로 이 나라의 백성과 동등한 대접을 해주고 최대한 많은 사람을 치료하라는 옳은 뜻을 내세우십시오.”
녀석도 나와 닮아서 정치 머리는 조금 있다. 내 생각과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백성들의 불만이나 여론 문제를 잠재우기 위한 명분을 내세우라는 소리 아닌가.
거대한 대의명분 앞에서 약간의 불만은 누그러지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은찬이의 새로운 면모를 확인하고 칭찬을 해주었다.
“훌륭하구나, 네가 외교나 정치를 하면 어떠할까 하는데.”
“저는 섶을 지고 기름을 부은 다음 불길 속에 뛰어들 생각은 없습니다.”
“이 녀석이. 이 아비가 불이라는 말이더냐?”
“불을 삼키는 해태가 아닐까 합니다. 소자와 같은 사람은 범접할 수도 없지요.”
아무리 보아도 칭찬이 아니고 욕이나 경고로 알아들은 것 같았다. 은찬이가 잘못 이해한 건 넘어가고 녀석의 의견이 내 생각과 어느 정도 일치하니 자신감이 생겨났다.
청나라 의원들의 교육은 대의명분에 의거하여 편의를 보아주고 선의로 다가갈 생각이다.
그 선의 사이에 청나라에 대한 반발심, 정확히는 홍수전에 대한 반발심을 미리 깔아둬도 괜찮겠지.
마치 선의로 포장한 독약 사이에 바늘을 넣어두듯이 말이다.
* * *
1858년 양력 9월 27일, 청나라에서 건너온 의원들은 속속들이 각 지방으로 배정되었다. 이들은 각 지역에 50명 이하의 단위로 배정되어 의료 교육을 받을 예정이었다.
“여러분은 한 달에 한 번 한양으로 모여 서로의 배움을 교환할 겁니다. 그때까지는 각 지방에 계시면서 편안히 지내십시오.”
황기영을 비롯한 청나라 광주 일대의 의원들이 배정받은 지역은 얄궂게도 경기도의 광주였다. 같은 한자를 사용하는 도시이나 기후도, 사람도 완전히 다른 지역이었다.
이제 막 수원에서 분할하여 광주군이 된 도시는 경기도에서도 그리 발달하지 않은, 막 발달을 시작하는 도시였다. 그 발달조차도 청나라 사람 입장에서는 별천지나 마찬가지였다.
해가 저물어 밖이 어두워질 무렵 주요 대로에 사람들이 오가며 가스등을 점화하였다.
이 불길을 확인한 광주 출신 의원들은 눈을 굴리며 이 불빛의 정체를 확인하려 했다.
“저건 고래 기름으로 밝힌 등잔인가? 어떻게 저렇게 밝지?”
“고래 기름이 아닌 것 같아. 등잔이라 하면 아래에 기름을 담는 통이 있어야 하잖아?”
여기에 교대근무를 실시하는 도시 외곽의 공장에서는 전깃불을 훤하게 밝히며 창문을 통해 주변의 길거리에 빛을 선사하였다.
광주는 청나라의 광동성 일대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 중 하나이며 불야성(不夜城)이라 불리는 번성한 도시였다. 그러나 이 불빛은 달랐다.
광주 외곽에서 공장 일을 마치고 늦게 퇴근하는 근로자를 위한 배려이자 치안을 유지하기 위한 조명이었다. 의원들이 주변을 돌아보자 대표인 황기영에게 인솔자가 다가와 말하였다.
“밤이 늦었으니 일단 들어가서 쉬시지요. 숙소도 준비해 두었고 수업 일정도 정해뒀습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소. 우리가 의술을 배우는데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 함께 해야 하는 법 아니겠소이까? 이대로 역관 한 명이 담당하기는 너무 힘든 것 같은데.”
“모두 다 준비를 해두었으니 염려하지 마시지요. 의원님 다섯 분당 한 명씩 언어에 능통한 역관이 달라붙을 겁니다.”
“그 정도로 준비를 할 줄은 몰랐는데.”
청나라 의원들에게 달라붙은 통역관은 예전에 요동에서, 정확히는 산동반도에서 건너온 청나라 사람이었다. 이들은 식사를 비롯한 수발을 드는 하인 역할을 하였다.
이들의 도움 속에 외과 의술 수업은 체계적이고 정교하게 이루어졌다. 약원을 비롯한 중앙 의료기관에서 충분한 학습을 거친 외과의사가 강사로 배정되어 핵심 교육을 실시하였다.
“사람의 체질은 제각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반면 피의 종류는 음과 양 그리고 네 가지 종류로 대략 여덟 가지로 분류되며…….”
첫 수업부터 충격의 연속이었다. 사람의 피와 피를 섞을 수 있다는 말도 이해할 수 없었고 이 형태가 여럿이라는 말 또한 충격 그 자체의 발언이었다.
“고로 과다출혈이 일어날 경우 수혈을 통하여 목숨을 부지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강사님께서는 정말 피와 피를 섞을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피와 피가 섞이면 여러 질병이 같이 옮겨가기 마련이라 필요할 때만 하지요.”
강사들은 원심분리기와 주사기 그리고 각종 약품을 가져왔다. 그 다음 자신의 팔뚝을 걷으며 고무줄을 동여맨 다음 손짓을 하였다.
“모두 자신의 혈액형을 알아보면 좋을 것 같군요. 서로 알아보는 시간을 가집시다.”
청나라 광주에서 건너온 의원들은 졸지에 채혈을 당하고 뻥 뚫린 주사바늘 자국을 솜으로 억눌렀다. 그 동안 모두의 혈액이 분류되고 뒤섞이며 혈액형이 드러났다.
“황 의원님은 양에 공(RH+ O형)이고 진 의원님은 희귀한 음에 갑(RH- A형)입니다.”
모두가 자신의 혈액형이 낱낱이 드러나게 되어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심지어 비상시를 대비하여 혈액형을 자신의 신분증에 새겨 넣기까지 하였다.
황진강은 이 새로운 의술을 어떻게 활용할지 궁금해하였다. 그리고 가장 앞으로 나서 강사에게 질문을 하였다.
“놀라운 일이군요. 그럼 크게 상처를 입은 사람에게 즉각 수혈을 할 수 있습니까?”
“미리 혈액형을 알아 두어야겠지요. 대한제국의 장병 모두는 입대 직후 혈액형을 검사하여 비상시에 수혈을 할 수 있도록 대비하고 있습니다.”
첫 수업으로 혈액형을 알고, 다음 수업으로 세균 개념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는 상처 치료에 관한 지식을 하나씩 전수받기 시작하였다.
“개방골절의 경우에는 예후가 매우 안 좋습니다. 대신 일반 골절은 뼈를 제자리로 맞추고.”
아예 인체 모형을 가져온 강사들은 대한제국 각 지방의 의원들도, 청나라의 의원들도 공평한 방식으로 가르쳐 주었다. 그 과정에서 여러 무술 지식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
“뇌진탕을 일으키는 방법은 턱에 주먹 한 방을 먹이는 겁니다. 당해보신 분이 계십니까?”
“매번 당해보았지요.”
“잘못해서 뺨을 맞으면 아프기만 한데 턱을 제대로 맞으면 정신이 나가 버립니다.”
하나하나의 가르침이 사람을 살리는 길을 가장 빠르게 알려주었다. 청나라에서 건너온 의원들은 어느새 조선이라는 말 대신 대한이라는 말을 쓸 정도로 우호적이 되었다.
수업과 자습을 반복하며 지식을 쌓아가던 중 황진강의 머리에서 의문이 샘솟았다. 잠재적 적대국가인 대한이 왜 청나라 사람에게 이런 지식을 가르쳐 주는지 궁금해졌다.
그 생각은 식당에서도 계속되었다. 점심으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요리들과 반찬이 놓이고 황비홍이 군침을 삼키고 있었다.
반면 황기영은 생각에 잠겨 멀뚱히 있었다.
“뭘 그리 생각하쇼?”
옆의 동료가 옆구리를 찌르자 황기영은 군침을 꿀꺽 삼킨 채 아버지가 젓가락을 들기를 기다리는 장남, 황비홍을 살펴보고 억지로 웃으며 말하였다.
“아…… 그게, 이런 귀한 의술을 왜 가르칠까 궁금해서.”
“그런 생각이나 마시고 밥이나 드시구려. 애가 군침만 삼키다 배를 채우겠네.”
심지어 식사와 언어 문제까지 해결해 주었다. 황기영이 알기로 한 명당 은자 백 냥을 받았는데 이 돈은 이동 비용, 식대, 숙박비 여기에 모든 비용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기자재만 따져도, 자신들이 사용한 약물만 따져도 한 달에 은자 10냥의 비용이 소모되리라. 여기에 부수적인 비용도 만만치가 않았다.
특히 음식의 품질이 상상 이상이었다. 이 자장면이라는 요리는 설탕과 기름이 잔뜩 들어가고 고기도 마구 썰어 넣어 청나라 광주 객잔에서도 고급 요리라 불릴 정도였다.
왼손으로 면을 비벼 한 입 넣은 황기영은 어느새 입가에 갈색 춘장을 잔뜩 묻힌 장남, 황비홍의 입가를 닦아주며 말하였다.
“여기서 지내보니 어떻더냐? 음식은 입에 맞는 것 같은데.”
“아주 좋습니다! 조선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것을 배우고 있어요!”
“너를 가르친다고?”
“네! 강사님의 친척이 우리말을 할 줄 알아서 저와 친구들에게 산학을 가르쳐 주십니다!”
황기영이 생각해 보니 요즘 너무 많은 것을 배우느라 아들과 대화도 제대로 못 나눌 지경이었다. 간혹 자식들을 데려온 동료들도 같은 신세였다.
그런 아이들이 방치되자마자 대한제국이 먼저 움직여 아이들을 보살폈다. 이토록 큰 은혜를 왜 내려주는 것일까 궁금한 마음만 들었다.
“강사님, 계십니까?”
“들어오시지요. 수업 내용에 대해 질문을 할 것이 있으십니까?”
수업을 가르치는 강사들도 열정이 가득한 사람들이며 편견이 없었다. 대한의 의사들과 같이 강의를 받는 입장임에도 어느 편을 들어주지 않고 공평하게 대접하였다.
젊은 강사의 눈을 한참 동안 살펴본 황기영은 용기를 내어 질문을 하였다.
“저기…… 저희를 너무 잘 대접해 주시는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아시다시피 대한은 우리나라와 전쟁을 벌이고 승리를 한 나라 아닙니까?”
“그런 적이 있었지요.”
“그렇다면 우리를 왜 이리 잘 대접해 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돈도 별로 안 받고 의원을 가르치는 입장인데 교육 수준이 너무 높습니다.”
강사는 황기영의 눈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자신이 사진첩 속에 둔 흑백 사진을 꺼내서 보여주며 말하였다.
“이 사진은 제 동료들과 함께 머나먼 이역만리, 오사만(오스만)에 다녀왔을 때의 사진입니다. 당시에 전쟁에 참가하지 않은 대신 부상을 입은 장병들을 치료하였지요.”
“네? 그러면 영길리의 편을 들었다는 말씀이십니까?”
“어느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오사만에, 다음에는 전선이 밀려 노서아에 있었지요. 마지막에는 영길리 영토에 소속되기는 하였지만요.”
강사는 흑백사진에 있는 병사들을 하나하나 가리켰다. 각자 다른 군복을 입고 있는 병사들은 하나같이 부상에서 회복되어 새 삶을 되찾는 모습이었다.
“저는 아무런 사심이 없이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이번 교육에 참가한 모든 강사들은 이역만리에서 이 나라의 사람이 아닌 다른 나라의 사람을 치료한 전적이 있지요.”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왜 그런 일을 하셨습니까?”
“사람이 고통을 받고 상처를 입은 사람을 치유하지 않으면 짐승과 다를 것이 있습니까? 세상 어느 사람이 남에게 고의로 고통을 입히고 극약을 먹이는 악행을 저지릅니까?”
듣고 보니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청나라의 빈약한 의술을 감안하면 이 새로운 의술로 수많은 사람을 치료하고 회복시킬 수 있으리라.
그러나 황기영은 한때 향용으로 참전한 전적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나라, 남에게 고통을 입히고 극약을 먹이는 나라를 답해주었다.
“영길리라는 나라가 있지요.”
강사는 이마를 탁 치고는 광주에서 예전에 있었던 일, 조-청 전쟁의 부수적 전투를 떠올렸다. 그러고는 한숨을 푹 내쉬고 황기영에게 신신당부하듯이 말하였다.
“그 친구들도 요즘 정신을 좀 차려서 아편을 안 팔지 않습니까. 오히려 아편을 청나라에서 외국에, 특히 일본에 팔아치워서 난리가 난 적이 있습니다.”
“뭔 소리입니까! 아편을 알음알음 재배하는 걸 넘어서서 아편을 팔아치웠다!”
“모르셨습니까? 여러분이 오신 광주 일대는 모르지만 상해 조차지에 아편을 소지한 채 밀입국을 시도하는 밀수업자가 수백 명이 넘어가는데요?”
황기영은 자신의 나라, 별로 도움도 안 되고 덩치만 큰 데다 광주와 같이 용맹한 향용들이 나서야지 지킬 수 있는 나라를 그리 싫어하지는 않는 사람이었다.
청나라는 부패했을 뿐 악행을 퍼트리는 나라가 아니었다. 그러나 아편이라는 극약을 알음알음 쓰는 것도 아닌, 재배하여 다른 나라에 수출하는 짓은 명백한 악행이었다.
“똑바로 이야기, 아니지! 사람들을 모두 다 불러오겠습니다. 모두 이야기해 주십시오!”
“모르고 계신다면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강사는 공식 경로로 입수한 청나라의 아편 재배 현황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여기에 일본에 아편을 밀수하여 큐슈 일대가 도탄지고에 빠진 일까지도 설명하였다.
며칠 뒤, 더욱 확실한 증거와 서류를 통한 자료까지 첨부하여 보여주기까지 하였다. 자리에 모인 대부분의 의원들은 의욕을 잃은 채 큰 방에 모여 술을 퍼마셨다.
“나라 꼴이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임 대인께서, 우리의 대형(大兄 - 따꺼)께서 이 모습을 보시면 피를 토할 걸세.”
박현상이 숨겨둔 바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광주를 제외한 다른 지역의 의원들은 조금 덜 민감한 반응을 보였지만 이들 또한 비슷한 반응을 보이며 청나라의 문제를 파악하였다.
그 원한은 점차 청나라의 부패한 조정과 그곳에 기생하는 세력으로 쏠리기 시작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의원들 가운데 몇 명은 아예 대한제국 망명을 생각하기까지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