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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285화 (343/345)

285화

23장 1화 믹스

탄환 수입과 물자 비축을 비롯한 청나라와의 전쟁 준비는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여기에 주변국과의 연계를 통해 전쟁이 장기전이 될 상황도 대비하였고.

마침 시기도 적절하다. 1840년 동지조약으로 20년 동안 조차된 청나라의 각 지역에 대한 반환 혹은 연장과 추가 개항에 관련된 논의가 필요할 시기였다.

“저희 영국은 대한제국을 통해 홍콩 조차지의 기한 연장을 부탁드리려고 왔습니다.”

“프랑스 또한 개항지인 태주(台州 - 현 타이저우)와 복주(福州 - 현 푸저우)의 연장이 필요하던 차였지요. 마침 잘되었습니다.”

대한제국이 조차한 상해와 청도는 예전에 회담을 거쳐 기한을 50년으로 연장하였다.

반면 영국은 홍콩 조차지에 대해 프랑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눈치를 보다가 프랑스의 개항지 연장 시간이 다가오자 합류한 것이다.

나와 접견을 요청한 양국 대사를 바라보면서 여러 생각을 하였다. 프랑스와 영국을 청나라 사태에 얼마나 개입시킬지, 얼마나 명분을 갖추게 할지도 내 손에 달려 있었다.

“개항지 기한 연장정도야 아주 쉬운 일이라 본국에서 하셔도 될 것 같은데요.”

먼저 가만히 내버려 둬도 개입 가능성이 높은 프랑스 측에 의견을 물어보았다. 그러자 본국에서 파견을 온 대사는 우리를 존중해 주겠다는 의사를 먼저 표현하였다.

“그래도 대한제국의 의견을 조금이나마 들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좋은 방침이라 마음이 저절로 넉넉해지는군요. 그럼 영국 측에서는 지금까지 해오시던 대로 알아서 잘하시면 홍콩 조차지의 기한 연장이 가능할 것 같은데요.”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서 대한제국의 도움을 청할 뿐입니다.”

영국은 지난 아편전쟁에서 저지른 결례로 인해 프랑스에게 쥐어 사는 신세였다. 프랑스도 기존 식민지인 인도까지는 영국의 영향권을 존중하고 있지만 그 이상은 존중하지 않는다.

결국 영국은 아주 정석적이고 합리적인 방안, 투자를 통한 기업 유치와 이로 인한 사업적 이득을 통해 동아시아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이미 일본에는 영국인이 세운 공장과 기업이 41개, 대한제국에도 19개가 세워져 있었다. 세계 최강의 국가인 영국이 정석적인 방향으로 공세에 나서도 이 정도 영향력을 행사한다.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홍콩 조차지를 넘어서 청나라에 영향력을 행사할 때였다.

영국 대사는 짜증을 섞어가면서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다가 말했다.

“대체 청나라는 어떤 국가입니까? 홍콩 조차지에서 청나라 내부로 진입해 뭘 좀 해보려 하면 뇌물을 됫박으로 먹여도 소용이 없고! 노동자들을 통해 아편이 역류하지 않습니까!”

“거 아편 가르친 나라 사람이 말이 많네.”

“정도가 있습니다! 공장에서 아편에 취해 산 채로 기계에 빨려 들어가 짓뭉개지는 시신을 건져내는 것도 일이고! 뇌물을 제때 안 먹이면 공장 집기를 뜯어가지 않습니까!”

평범한 청나라의 일상이다. 영국은 일본이나 대한제국에 하는 것처럼 적당한 민간인을 고용해 사장으로 앞세우고 아래 경영진을 영국인으로 채워 뒀으리라.

홍콩 정도야 그런 방식의 경영이 통하겠지. 반면 중국 대륙 내부로 들어가면 이런 방식의 합자 투자 기업 자체가 견실하게 운영될 여지가 거의 없다.

“이번 기회에 확실히 이권을 얻고 청나라 정부의 확약을 얻어 제대로 된 사업체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이러다가 본국의 투자자들이 속이 터져 줄줄이 죽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냥 예전에 하던 대로 철갑선으로 위협하고 함대를 보내서 협박하지 뭘 그러시오.”

“댁이랑 말을 안 하겠소.”

영국 대사는 프랑스 대사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홱 돌리고 짜증을 담아 담배를 피워댔다. 이 모습을 보면서 영국을 청나라 내부로 끌어들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청나라가 망하고 쪼개지면 대한제국의 역량으로는 통제할 수 없다. 그렇다고 프랑스를 믿자니 이 인간들은 언제 ‘방데’ 할지 모르는 살아 있는 폭탄이다.

차라리 최대한 이용하고 뽑아먹으려 드는 영국이 청나라 쪼개기에 동참해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일본 경제를 야금야금 잠식하는 영국의 시선을 돌릴 겸 적당한 의견을 제시하였다.

“애석한 말씀이지만 청나라의 부패는 도가 지나치기는 하지요.”

“바로 보셨습니다. 일본도 뇌물을 두어 번 먹이면 알아서 잘 돌아가는데 청나라는 아닙니다.”

“그러니 가장 위에서 허가를 받아야 할 것 같군요. 청도 조차지를 통해 북경에 영국 대사가 상시 주재하는 대사관을 세우시고 계속 뇌물공세를 보내십시오.”

이제는 영국 대사의 눈에 짜증이 맴돌았다. 결국 뇌물로만 해결할 수 있는 나라라는 말인데 아마 인도 식민지가 생각나지 않을까.

그래도 북경 주재 영국 대사관은 꼭 필요하다. 홍수전의 반란이, 정확히는 나의 개입으로 인해 망가진 반란이 시작되면 일어날 일은 불 보듯이 뻔하다.

파견 대사들은 북경 대사관에 보낸 부패관료와 같이 반란에 휩쓸려 살해당하리라. 그러던 중 홍수전이 가장 먼저 목표로 삼을 인물이 떠올랐다.

“저는 의비, 지금 청나라 황제의 왕자를 낳은 사람에게 인맥을 만드는 걸 추천하고 싶군요.”

“본래 왕비가 아니고 두 번째 왕비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본래 왕비는 후손을 낳지 못하여 발언권이 약해진 반면 두 번째 왕비인 의비는 발언권이 서서히 강해지고 있지요. 이 점을 잘 노리면 괜찮을 것 같군요.”

본래 역사에서 서태후가 된 인물이지만 아직 함풍제가 멀쩡히 살아 있어 의비라 불리고 있지.

영국 대사는 골똘히 생각하다가 내 시선을 빤히 바라보면서 말하였다.

“혹여나 두 번째 왕비인 의비가 숙청을 당하면 어떻게 됩니까? 본처와 첩실이 서로 갈등을 벌이면 본처의 영향력으로 인해 첩실이 숙청당하는 일이 자주 있던데요?”

“그런 끔찍한 경우는 생각하기도 싫군요. 다만 대한제국은 연좌제를 국가 반역과 관련된 사태에만 적용하는데 청나라는 밥 먹고 숨 쉬듯이 적용하는 나라 아닙니까?”

“그렇죠. 대사관의 직원들이 희생당할 가능성이 꽤 높겠군요.”

누가 혐성의 대표국가 영국 아니랄까봐 내 권유를 알아서 잘 해석하였다. 정말 대사관 직원들이 변에 휩쓸려 희생당하면? 영국은 명분을 얻게 된다.

그 명분으로 참전해도 희망은 없지만. 대한제국이 볼 이득을 모두 다 본 다음에 혼란스러운 청나라를 정리하기 위해 자금과 인력을 퍼부어 대겠지.

“애석하지만 모든 일에는 위험을 부담하기 마련입니다. 별도리가 없군요.”

“세상일이 언제나 위험하기 마련이지요.”

물론 겉으로 보기에는 사람 목숨을 판돈으로 걸어대는 행위이다. 프랑스 대사가 우리의 말을 듣고 헛구역질을 하다가 아예 방 밖의 타구(唾具)에 가래침을 뱉었다.

영국의 대사관 설립 관련 조언을 몇 번 한 다음에 공식적인 추천서를 작성해 주었다. 기왕이면 인력도 아낄 겸 2개월 뒤인 1859년 9월에 돌아갈 외과의와 함께 사람을 보내기로 했고.

아마 영국은 겉에서 적당히 이득만 빨아먹으려 하리라. 그 청나라의 아비규환 속에 말려들어 끝없이 뒤섞이리라는 미래는 예측하지 못한 것 같고.

* * *

한 달이 지나고 더더욱 많은 시설을 정비할 무렵 내가 미리 깔아놓은 포석이 완성되었다. 매달마다 내 집으로 배달되는 의학 관보(官報)를 확인하니 첫 페이지에 기사가 적혀 있었다.

-보로서(프로이센) 연구진, 헤로인이라는 약물에 대한 공식 입장 표명.

-청나라에서 세계 최초로 생산 준비에 들어가는 헤로인은 영웅약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본래 아편 중독자에 대한 치료 목적으로 제조된 이 약물은 강한 부작용이 있다.

-헤로인은 아편 중독을 치료하는 것이 아닌 아편보다 더 강한 중독을 불러일으킨다. 그 진통과 호흡기 안정 효과 또한 몇 배나 강하지만 후유증은 수십 배에 달한다.

-따라서 헤로인의 아편중독 치료 효과를 처방에서 삭제하기로 하였다.

“아니 금지한다면서 왜 아편중독 치료 효과만 쏙 빼놓는데.”

결론은 아예 금지약물이 아닌 ‘아편중독 치료용’으로 사용하지 않는 극약에 가까운 진통제, 한약재로 따지면 맹독을 지닌 비소나 수은처럼 다루라는 조언이었다.

이 관보는 매달마다 의료 정보를 수집하는 청나라 외과의들에게 자연스럽게 읽혀서 전달되리라.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기는 하다.

홍수전이 아편중독 치료제라고 만들어 내는 물건이 함부로 손대서는 안 될 극약으로 분류되어서 문제이지.

이 애매한 결론에 대해 물어보려고 일준이를 찾아갔다. 문제는 일준이가 최근 졸업논문 심사에 참관하면서 아무 일도 못 할 시기라는 점이었고.

일준이는 내가 방문했음에도 피곤한 눈초리로 논문을 힐끔힐끔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별일 없이 잘 끝나서 다행이네. 헤로인 관련 정보가 전해졌다면 일이 다 끝난 거야.”

“그렇긴 하지. 다만 완전 금지된 약물이 아니고 극도로 제한적인 상황에서 사용하라 하던데.”

“실제로 약효가 있기는 하니까. 모르핀으로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극단적인 통증이나 호흡기 질환이 있는 환자가 유언장이라도 작성하게 할 목적이지만.”

일준이는 이 말을 하고 커피가 담긴 잔을 들어 마시려다가 헛구역질을 하며 물을 마셨다. 그러더니 속이 쓰리다는 듯이 매만지면서 답했다.

“상태가 이래도 좀 봐줘라, 논문에 외국에 연락 보내서 좋은 인재들 선점하는 연락망 구축에 이거저거 할 일이 넘쳐나서 그래. 여기에 전쟁 준비까지 하고 있잖아.”

“나도 여유가 없는 편인데 널 보니까 더 불안하다. 아예 죽어나는 것 같은데?”

“일선 현장 담당을 다 제자들이랑 교수들 그리고 공학자들에게 돌려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쓰러졌어.”

일준이는 이제 하얗게 세어가기 시작하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보고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너도나도 이제 환갑이 다 되어가는 나이다. 몸 관리도 잘해야 하는데 할 일이 태산이니.”

“누가 아니래. 그래도 야근은 안 하도록 잘 조절하고 있는데 한계가 있지.”

“난 조절도 못 하는 바람에 에이다와 사이가 안 좋아졌어. 평소에는 에이다 연구도 좀 봐주고 하는데 일이 많아서 내가 의견을 아무것도 못 내놓거든.”

이 부부는 연구를 하면서 의견을 주고받아 사랑이 생기는 부부이다. 그런 상황에서 서로 대화도 제대로 주고받을 수 없는 입장이니 친구 입장에서 좀 나서줄 필요가 있었다.

에이다의 연구실은 복도부터 진한 커피냄새와 밀가루 냄새가 뒤섞인 기묘한 장소가 되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가운 소매에 시커먼 커피가루와 밀가루를 묻힌 에이다가 인사를 했다.

“연구실 개판이죠! 요즘 청소도 못 하고 있어요!”

“대체 뭘 하기에 밀가루에 커피가루까지 묻혀가면서 일해요?”

연구실 한구석에는 밀가루 반죽 덩어리와 파스타들이, 다른 구석에는 커피콩을 볶는 로스팅 기계와 수많은 커피콩이 쌓여 있었다.

에이다는 먼저 커피콩을 가리키며 말했다.

“토스카나 공국에서 새로운 방법의 커피 추출법을 발명해 달라고 요청을 보내왔어요. 여기에 나폴리에서는 파스타 제면기계를 만들어 달라는 청원도 했지요.”

“그래서 연구실이 이 꼴이군요. 이러다가 연구실에 커피가게를 차려도 되겠는데요?”

“이미 커피기계는 완성해 뒀어요. 문제가 있다면 기본 구조 자체가 거대하다는 점이죠.”

에이다는 손등으로 증기기관과 연결된 거대한 원통을 톡톡 두드렸다. 대충 대형 냉장고 크기의 증기기관에 장착된 원통 내부에 무언가가 잔뜩 들어 있었다.

“일단 새로운 커피 추출법의 기본 원리는 확립해 뒀어요. 필터 위에 두고 물을 떨어트리는 방법이나 작은 냄비에 넣어 끓이는 방법이 안 된다 하니까 증기를 활용했지요.”

“증기압력이라. 그러면 커피에 고압축 증기를 쏘아서 추출한다는 말인가요?”

“역시 한센은 눈치가 빠르다니까요? 물이 안 되면 증기를 쏴서 추출해야죠!”

에이다는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밸브와 레버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기계가 가열되며 덜컥거리는 소리와 증기가 쉭쉭 뿜어져 나오는 소리가 방 안을 메웠다.

그동안 에이다는 대충 빈대떡이 들어갈 냄비 크기의 통을 분리하였다. 한참을 씨름하자 덜컹 소리가 나면서 강철로 만든 쇳덩어리가 분리되었다.

문제가 있다면 그 통 안에는 대충 보아도 100명 이상이 마실 수 있는 커피 가루가 들어 있다는 점이다.

“대체 몇 인분의 커피가 들어가나요? 이건 커피가 아니라 떡 같은데요?”

“터키 커피 기준으로 백팔십 잔 어치의 커피에요. 오래 끓여서 추출하는 것도 아니라 농도가 좀 낮아서 아마 백 인분 내외가 나올 것 같네요.”

에이다가 문제라 말한 부분을 단번에 알 것 같았다. 이 시대에는 ‘작고 튼튼하며 정밀한’ 기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일단 튼튼하려면 크고 둔해야 한다.

이 기계는 증기 추출식이다. 섬세한 증기압 조절이 불가능해서 증기를 만드는 부분과 쏘는 부분 모두가 거대하다. 당연히 압력이 걸리는 출구, 현대에는 포터필터(poter filter)라 불릴 부분도 커지기 마련이지.

에이다는 냄비 크기의 포터필터에서 추출이 끝난 커피가루를 끄집어내며 말했다.

“내가 이 고생을 왜 하는지 모르겠네요. 좀 더 작으면 팔이 덜 아플 텐데.”

“유나가 손을 좀 쓰지 않았나요?”

“유나가 만든 기계는 모두 다 실패했어요. 크기를 줄이면 어느 한 구간에서 압력이 세게 걸려 터지거나 말단부의 증기압이 부족해서 커피를 우려내는 데 실패했지요.”

됫박 하나에 담기고도 남을 양의 커피가루가 끝없이 채워지고 있었다. 이 커피가 모두 추출되면 내가 근무하는 외부 전체의 커피 수요량을 충족하고도 남겠지.

조수를 불러 커피가루를 설치한 에이다는 레버를 돌리고 밸브를 조작하며 압력을 맞췄다.

이윽고 기계 상단에서 증기가 피어오르며 커피가 추출되기 시작했다.

“새로운 방법을 연구하다 보니 얻는 것이 많았어요. 특히나 기계의 조작방법만 숙지하면 어느 누구나 동일한 맛의 커피를 우려낼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요.”

“단점이 있다면 기계가 너무 크다는 점이군요.”

“그건 나중에 가면 알아서 해결될 문제죠. 중요한 건 이 기계를 널리 퍼트리는 거죠!”

기계의 배출구에는 에스프레소 전용잔 대신 커다란 주전자가 준비되어 있었다. 여기에 시커먼 에스프레소가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듯 꿀렁거리며 채워졌다.

“이걸 다 마시면 중독증상으로 심장이 터져서 죽겠는데.”

“네? 각 연구실에서는 이 주전자 하나씩은 챙겨가던데요?”

“그게 사람 사는 동네인가 아니면 논문 통과를 바라는 대학원생의 수용소인가 모르겠네.”

“수용소에 가깝죠? 아무리 보아도 정상은 아닌 것 같아요.”

추출이 끝난 에스프레소를 주전자 안에서 한 번 휘저은 에이다는 작은 잔에 담아서 맛을 보라며 권했다. 한 모금을 입에 머금자 뒷골이 당겨오는 강렬한 쓴맛이 전해졌다.

“어우 이거 엄청나게 쓴데. 더군다나 터키 커피처럼 떫은맛도 없고.”

“그렇죠? 거기에 향도 꽤 좋은 편이구요.”

“고온 고압의 증기로 가장 빠르고 강하게 추출해서 잡다한 맛이 다 사라진 것 같고. 다른 뭔가를 섞어도 되겠네.”

이 시대 기준으로는 정말 깔끔한 맛이다. 그러나 현대의 기준으로는 깔끔한 맛이 아닌 지나치게 쓴맛만 들어 있는 커피, 인스턴트커피의 맛이지.

먼저 맛 평가를 위해 남은 커피를 모두 마셨다. 그러고는 컵을 물로 헹구면서 이 기계의 문제점을 짚어 주었다.

“맛은 괜찮은데 이 기계는 납품 목적으로 쓸 수는 없겠네. 이탈리아 반도 사람들이 커피를 얼마나 사랑하고 자부심을 가지는지 대충은 알고 있거든.”

“저는 잘 모르겠는데 어느 정도지요?”

“삶의 절반이 커피라 보면 될 거야. 느긋하고 여유 넘치는 환경에서 커피를 한 잔 즐기지 백 명이 마셔도 될 양을 한 번에 추출하고 나눠 팔면 뭔 꼴이 나겠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네요. 커피는 기호식품이고 즐기기 위해 마시는 것이지 런던처럼 길거리에 서서 대충 식초를 뿌려대고 먹는 음식이 아니죠.”

물론 현대에는 적용되지 않는 이야기이다. 현대는 바에서 앉지도 않고 선 채로 에스프레소 한 잔 마시고 1분 정도 잡담을 나누고 돌아가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도 이런 거대한 기계를 일반 가게에 설치할 수도 없을뿐더러 관리의 문제도 있다. 에이다는 기계 가동을 중단시키고 압력 배출 밸브를 돌리면서 결론을 내렸다.

“이 기계는 공장이나 사람들이 대규모로 밀집한 장소에서나 쓸 용도면 적당하겠군요.”

“그럼 군용으로 납품하지그래? 군인들이 이런 커피를 마시면 사기가 확 오를 것 같은데.”

“군용이요? 생각해 보니 이동식 전신기의 배터리 충전 용도의 소형 증기기관이 있긴 하죠. 부대마다 몇 개는요.”

“다만 군용으로 활용하려면 단맛이 필요해. 군인들은 언제나 달달한 음식을 즐기거든.”

내가 제빵을, 특히 제과 계열을 배운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군대에 있을 때 단것을 먹고 싶은 나머지 관심을 가지고 대학원 시절에 짬을 내서 조금씩 익혔다.

하물며 더욱 가혹한 환경에 처한 이 시대 군인들, 특히 중국 대륙에서 전투를 벌여야 하는 군인들을 위해 사기도 진작시킬 겸 좋은 보급이 필요하다.

그 방법은 나도 잘 모르겠지만. 대충 에스프레소 기계를 가져다놓고 설탕이나 지급하면 되지 않을까 했는데, 에이다가 손뼉을 치면서 답을 내놓았다.

“연유! 생각해 보니 가당연유가 있었어요!”

“연유? 혹시 농축 우유 말하는 거야?”

“네! 요동 지역에서 우유가 너무 많이 생산되어 이야기가 나왔거든요! 십 년 전의 만국박람회에서 나온 진공 증발기를 활용한 연유 공장이 얼마 전 가동되기 시작했어요!”

벌써 연유가 나올 줄이야. 에이다가 안내한 옆방에는 거대한 플라스크 형상의 금속 통 옆으로 피스톤과 실린더가 결합된 기괴한 기계가 전시되어 있었다.

“이게 진공 증발기에요! 한센도 기초적 과학상식은 있죠? 압력이 감소하면 액체의 끓는점이 높아져서 낮은 온도에서 끓어오른다는 과학적 상식이요.”

에이다는 납품이 끝나 먼지가 쌓인 연구실을 이리저리 헤집고 돌아다니며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었다. 언제나와 같이 활달한 에이다에게 억지로 어울려 주기 위해 대충 답해주었다.

“높은 산에서 밥이 설익는 이야기를 들어서 알긴 알아. 다만 기초 과학이 아닌데?”

“아무튼 이 과학적 원리를 활용해서 우유를 영양소 파괴 없이 농축할 수 있었어요! 여기에 장기 보존을 위해 설탕을 듬뿍 넣었죠.”

병조림으로 가공한 유리병 안에는 설탕 색으로 인해 약간 갈색이 된 액체, 아마도 연유가 담겨 있었다.

병뚜껑을 잡아당기자 봉인이 제대로 되었는지 뿅 소리가 나며 열렸다. 조금 찍어서 먹어보았는데 현대에서 먹던 연유보다 두 배 정도 달달한 대신 고소한 맛이 어우러져 있었고.

이제 두 재료를 결합할 차례다. 커피를 잔에 붓고 이 양의 1/3 정도의 연유를 넣은 다음 섞었다. 색상이 현대의 믹스커피와 비슷하게 되어서 기대감을 품고 잔을 기울였다.

달달하고 고소한 맛, 여기에 쌉싸름하고 진한 커피의 향이 어우러져서 믹스커피와 흡사한 맛이 되었다.

에이다도 똑같이 커피를 타 마시고는 눈을 굴리며 답했다.

“이건 당장 밖에 가져가서 팔아도 되겠어요. 그냥 막 팔리겠는데요?”

“내 말이 그 말이야. 이건 마음을 자극하는 맛 그 자체인데 일준이도 맛보게 하자고.”

피로에 절어 있는 상태로 논문을 점검하던 일준이는 나와 에이다가 다시 방문하자 눈을 가늘게 뜨고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그러나 잔 안에 담긴 물건을 보자 눈을 크게 떴다.

“한센이 만든 연유 커피 한 잔 드셔보시겠어요?”

믹스커피가 이 시대에 나올 것이라 상상조차 못 한 일준이는 한 모금을 마시더니 맛을 음미하였다. 그러고는 에이다의 어깨를 부여잡고 꽉 끌어안고는 말하였다.

“당신이 이런 물건을 만들어낼 줄은 꿈에도 몰랐어! 당장 대량생산하자!”

“저기 닐슨. 검증도 안 했는데 대량생산을 어떻게 해요?”

“일단 시음부터 시키고 봐! 그럼 돈은 나중에 줄 거야!”

며칠 뒤 시음회가 시작되었다. 제1사단인 성부사단 장병들이 시음 대상이 되었고 이런 물건을 군대에서 마실 수 있다면 무조건 마시고 보겠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곧이어 연유와 가압식 커피기계에 대한 예산안이 일사천리로 통과되었다. 군부 입장에서도 군인의 사기를 끌어올릴 수 있는 물건은 언제나 환영하기 마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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