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291화 (257/345)

291화

23장 4화 태평천국의 난(3)

북경 시내에서는 산발적인 전투가 이어졌다. 이미 팔기군이 첫 전투에서 궤주하며 북경 시내 사방으로 흩어졌고 이후 일방적인 사냥으로 변질되었다.

“진일강 승상님! 팔기군이 남동쪽의 민가 일대에서 항전을 벌입니다!”

“민간인의 피해가 없도록 잘 처리해라.”

병사들은 팔기군을 추격하는 명목으로 민가로 난입하였다. 문을 열고 태평천국을 받아들이면 신자요, 아니면 한간이나 죽여 없애야 할 만주족이었다.

설령 문을 열어도 부자의 집이라면 살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저택을 포위한 병사들은 문을 걷어차며 말했다.

“문을 열어라! 셋을 셀 때까지 문을 열지 않으면 한간(漢奸)이다!”

“알겠소! 문을 열 것이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방금 전까지 마름과 함께 소작농의 토지 분배를 논하던 노인은 눈치껏 문을 열라고 신호하였다. 제발 이 폭풍이 지나가기를 빌며 상대에게 고개를 숙일 준비를 마쳤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태평천국 병사들이 저택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은 마구잡이로 날뛰며 모든 재물을 약탈하고 장정들을 모두 잡아다가 총검을 겨누고 협박하였다.

“네놈들 가운데 팔기군이나 만주족에게 꼬리를 살랑거린 녹영군이 있을 것이다!”

“저! 저는 아닙니다! 저는 아니라…….”

그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던 소작농의 뱃가죽에 총검이 깊숙이 찔리며 말이 끊어진 것이다.

“보아하니 네놈들 모두가 녹영군 같구나! 상제께서 네놈들의 죄를 씻을 방법을 알려주리라!”

병사를 이끄는 간부는 한구석에서 온몸의 장신구를 빼앗긴 노인과 일가족을 지목하였다. 그러고는 정원에 있는 돌을 가리키고 명령을 내렸다.

“부유한 한족 놈은 만주족에게 수많은 뇌물을 바쳐서 저런 자리에 올랐을 것이다! 저 돌을 들어 흉물들을 모조리 때려죽여라!”

“그렇게는 못 합니다! 이분은 저희의 소작료를 줄여주시…….”

“한간은 언제나 튀어나오지! 바퀴벌레같이!”

총성이 울리며 한 소작농의 미간에 구멍이 뚫리고 뒤통수가 터졌다. 소작농들은 어쩔 수 없이 머리통만 한 돌을 하나씩 들고 말하였다.

“주인나리 죄송합니다. 저희도 먹고살아야 합니다.”

“잠깐! 잠깐! 하지 말게! 내 손자만큼은! 손자는!”

돌이 내리 찍히는 소리가 연이어 들리며 비명과 절규가 메아리쳤다. 이후 눈물을 흘리며 죄송하다는 말을 중얼거리는 소작농들이 쓸 만한 재물을 모두 짊어지고 황궁에 쌓아두었다.

평상시에 한족과 척을 지고 분쟁을 벌이던 객가들은 한족의 씨를 말릴 작정으로 서로를 상잔시켜 나갔다. 그러한 과정에서 기지를 발휘해 목숨을 건진 이들도 생겨났다.

“셋을 셀 때까지 문을 열어라!”

지휘관은 군침을 흘리며 저택 안에 얼마나 많은 재물이 있을지 고민하였다. 그러나 저택의 문이 열리자 노인이 연꽃 문양의 깃발을 보여주며 말했다.

“진공가향 무생노모! 드디어 꿈이 이루어지게 되었소!”

“백련교?”

젊은 시절 백련교를 토벌하였던 군인은 이제 다 늙어빠져 죽을 날을 기다리는 노인이 되었다. 그는 마지막 기지를 발휘하여 태평천국이 가장 좋아할 만한 사람으로 자신을 위장했다.

태평천국 입장에서도 백련교는 자신과 뜻을 함께한 동지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극소수의 신자만 남아 있는 형편이라도 동지는 동지였다.

“나는 민닝(도광제의 휘) 그 자라새끼를 암살하려는 백련교를 후원하던 자요! 거사가 실패하고 늙어 빠져서 삶을 끝내려던 차에 이런 경사가 일어날 줄이야!”

노인은 자신이 토벌하면서 배운 백련교의 주문과 진언을 마구 외워가며 상대의 눈을 홀렸다. 그러자 약탈을 준비하던 지휘관이 오히려 인사를 하며 답하였다.

“그럴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세상에 북경 한복판에 백련교가 있을 줄이야!”

“기왕 이렇게 된 것 재물을 모두 다 바치겠소. 대신 이 주변에 사는 스무 가구는 모두 백련교의 후원자이자 한때 신자였던 자요. 부디 이 복록을 함께 누리게 해주시오!”

혼란 속에서 기지를 발휘한 노인과 그 주변의 사람들은 재산을 빼앗기는 선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또 다른 학살이 자금성 안에서 벌어졌다.

“죽여라! 스승님께서 돌아가실 때 개입한 모든 이들을 찾아 죽이란 말이다!”

홍수전은 조정의 주요 인사들을 하나씩 제거하였다. 민심을 유지하기 위해 주요 황족은 아직 죽일 때가 아니라 판단하였지만 고위 관료들은 동조하지 않으면 모두 제거 대상이었다.

그래도 마지막 개심의 기회를 줄 겸 재판을 시행하였다. 본래 함풍제가 앉아 있어야 할 옥좌에 오른 홍수전은 태평천국의 이름을 앞세워 검사이자 판사가 되어 날뛰었다.

“저는 모릅니다! 저는 임 대인께서 돌아가실 적에 북경 외곽에서 근무하였습니다!”

“죽여라! 일가족을 모두 죽여 씨를 말려라!”

사형 아니면 포섭, 둘 중 하나의 판결만 떨어지는 재판이었다. 일선 관료들은 살려두되 고위 관료들은 재산을 빼앗고 본보기로 삼을 겸 대부분 사형 판결이 떨어졌다.

“다음 죄인을 들여보내라!”

“죄인 엽명침은 황제께 자신의 죄를 고하라!”

구타를 당하여 온몸이 피범벅이 되고 강제로 무릎을 꿇은 엽명침은 분노에 불타는 눈으로 홍수전을 노려보았다. 그의 명성을 잘 알고 있는 홍수전은 억지로 그를 변호하였다.

“곤신(崑臣 - 엽명침의 자) 자네는 당시 관직이 워낙 낮아서 스승님의 죽음과 연관이 없네.”

“네놈의 역성혁명이 성공할 듯싶더냐! 병사들이 지금도 네 말을 듣지 않는데 한 번이라도 패하면 모조리 궤주하여 도륙당할 것이다!”

엽명침은 청나라의 충신으로 죽기 위해 이 자리에 온 사람이었다. 그는 홍수전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약점을 들먹였다.

홍수전의 태평천국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자금도, 병력도 아니었다. 바로 홍수전 개인의 위신(威信)과 관련된 문제였다.

자고로 역성혁명을 지휘하는 사람이라면 통솔력과 지략 혹은 개인의 무력으로 아래 사람을 휘어잡아야 한다. 그만큼 불안한 단체를 이끄는 사람으로서의 능력을 보여줘야 했다.

그런 점에서 홍수전은 최소한의 조건인 인망을 객가 한정으로 갖추고 있었다. 무력은 보여줄 몸이 아니며 지략은 다른 이들의 협조를 통해 간접적으로 보여줬다.

“지금 뭐라 하였느냐! 짐의 태평천국이 무너질 것이라!”

“그렇다! 네놈이 언젠가 패하는 그 순간! 모든 병사들은 갈기갈기 찢기며 분열되고 네놈은 비루하게 패전하여 세상을 떠돌다 죽어 나갈 것이니!”

그 결과가 무절제한 약탈과 살육이었다. 어떻게든 반란에 성공하여 수도를 점거하였지만 수도를 점거한 직후부터 권위가 부족한 홍수전의 명령이 점차 이행되지 않는 것이다.

홍수전은 분노로 손발을 부들부들 떨며 엽명침을 끌고 나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보다 빨리 엽명침의 몸이 움직였다.

“청조의 모든 선조시어! 이 나라를 굽어살피소서! 이 악적에게 벌을 내려 주시옵소서!”

세차게 머리를 찧은 엽명침은 그 자리에서 두개골이 깨어져 즉사하였다. 홍수전은 엽명침이 남긴 유언을 머릿속에서 되새기며 앞으로의 일을 대비하였다.

“무분별한 살육을 중단하라. 모두 다 쓸모가 있는 법이며 양이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내며 몸값을 받아낼 것이다.”

홍수전이 통솔력과 지력을 보여준 사례는 있었다. 조-청 전쟁의 남부 전선, 영국군과의 전투 단 하나였다. 여기서 철저한 소모전을 유도하여 영국군을 퇴각시켰다.

이 과정에서 임칙서의 부관 중 하나로 전투를 경험한 홍수전은 서양의 군대가 얼마나 강대한지, 이들을 상대하려면 얼마나 많은 희생이 필요한지 알고 있었다.

쓸데없는 적을 줄이고 더 많은 이득을 위한 명령이 하달되었다.

[재물만 빼앗고 살육을 금지한다. 태평천국에 협조하면 절대 죽이지 말도록.]

[서역인은 몸값을 받고 추방할 것이다. 사지가 멀쩡하게 데려오도록.]

이 명령조차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다. 객가들은 북경 시내를 이 잡듯이 약탈하며 보이는 모든 서양인을 쏘아 죽이거나 죽이기 전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 듯이 가지고 놀았다.

“서역 오랑캐의 군대가 얼마나 강건하기에 주의하라는 말을 하시지?”

“그래 봤자 예전에 회주께서 싸웠던 당시를 생각하면 답이 나오지 않나? 지금까지 우리가 물리친 녹영군이나 팔기군을 데리고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였잖아.”

“그렇지, 그러면 별문제 없을 것 같은데?”

영국 대사관 앞까지 몰려 구조 요청을 하는 서양인들에게 태평천국의 병사들이 포위망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앞으로 누릴 또 다른 즐거움에 빠져 명령 따위는 망각하였다.

* * *

공친왕과 증국번의 청도 조차지 방문은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비공식 일정이었다. 휘하 시종들도 북경 인근의 공업단지에 방문해 프로이센 사람을 찾는 것이라 설명했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하여 스무 명의 호위병과 이동한 공친왕은 하루 만에 북경에서 40㎞ 거리, 제대로 된 철도와 마차철도로 연결된 공업단지를 스치듯 지나갔다.

“공장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이 절반도 안 되는군.”

“신이 생각하기로는 지방에 있는 공장들만이 제대로 가동되고 있을 것이옵니다.”

증국번이 얻어낸 정보대로라면 저 공장 가운데 몇 개는 대한제국에게 포섭되었고 대한제국 군대에서 개인 전신을 운영하는 장소였다.

그러나 함부로 갈 수 없는 곳이다.

저 지역은 홍수전의 세력들이 세력을 불린 공장이다. 홍수전의 세작(細作)이 얼마나 많을지 짐작할 수 없는 위험한 곳에 공친왕을 데리고 들어갈 수 없었다.

짐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하였고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기 위해 말과 마차를 갈아타며 이동하였다. 자연스럽게 공친왕과 증국번의 옷은 흙먼지에 절어 새 옷으로 바뀌었다.

“이러다가 청도에 도착할 때쯤 지쳐 쓰러질 것 같군.”

공친왕은 끝없이 말 위에서 시달리며 입에서 단내가 나고 얼굴이 수척해져서 황족의 위엄은커녕 피로에 시달리는 전령의 모습에 가까워졌다.

증국번을 통해 근처 관리에게 빌린 화려한 관복도 흙먼지 범벅이 되어 위엄을 드러내지 못하였다.

증국번은 이 몰골을 보고 저 멀리 보이는 철도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조금만 더 가시면 됩니다. 거기부터는 인력철도가 아닌 제대로 된 철도가 있사옵니다.”

“그것참 반가운 소식이로군. 하루만 더 질주하였다면 온몸이 무너졌을 것이야.”

“또한 철도가 있는 지역부터는 도적들이 함부로 습격하지 못하옵니다. 병사들에게 역에서 대기하라는 명을 내리시어 조금이라도 기밀을 유지하시옵소서.”

호위병 입장에서는 영 모양새가 빠지는 명령이나 공친왕이 보기에는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비밀 방문에 호위병을 데리고 가면 여러모로 정보가 유출될 가능성이 있으리라.

항시 가동되는 기차역은 북경 인근에서 생산된 화물이 오가는 장소였다. 정기 기차 시간도 없이 그냥 화물이 많이 차오르면 차를 보내는 방식이다.

“기차가 비어 있어도 좋소. 요금은 모두 내서 기차 전체를 대절할 것이니 즉각 출발해 주시오.”

“네?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나라의 일을 하러 온 것이오. 서둘러 주시오.”

증국번은 자신이 늦지 않기를 빌면서 기차역에 은자 수백 냥을 내놓았다. 그 돈을 받은 역장은 눈을 굴리다 아직 예열이 안 된 기관차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아직 승객도 화물도 없어서 기차에 열을 넣어야 합니다. 두 각(30분) 정도만 기다려 주십쇼.”

“먼저 기차에 탑승해서 대기해도 되겠소?”

“물론이지요. 객차 문을 열어두겠습니다.”

피로에 절어버린 공친왕과 증국번은 사지를 휘청거리며 객차에 올라탔다. 공친왕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멍하니 기차역을 바라보다 이변을 감지하였다.

“분명 승객이 없다 하였는데 저 승객들은 무엇인가?”

기차를 가득 메우고도 남을 정도의 손님들이 몰려들었다. 증국번은 이미 홍수전이 기차역에 끄나풀을 배치해 두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지만 공친왕을 위해 태연하게 말하였다.

“아무래도 역장이 욕심이 생긴 모양이군요. 우리가 기차 요금을 다 내지 않았습니까?”

“저런 놈은 나라에서 당장 끌어내야 할 걸세! 일단 우리가 대절한 기차이니 승객을…….”

“쫓아내시면 안 됩니다. 전하께서는 비밀리에 움직이시지 않사옵니까? 지금부터 전하는 제 벗인 강유화입니다.”

공친왕은 졸지에 꽉 찬 기차 안에서 시달릴 신세가 되어 욕을 중얼거리며 승객들의 면모를 살폈다. 그러나 승객들 모두 보통 사람들이 아니었다.

등에 메고 있는 길쭉한 무언가는 총이요, 허리춤에는 단도 하나씩은 챙기고 있었다. 더군다나 사방을 에워싼 채 둘이 탄 기차에 몰려들었다.

공친왕이 놀라서 아무 말도 못 하는 사이 증국번이 자리에서 일어나 홍수전을 흉내 내 과장되게 도포자락을 흩날렸다. 그러고는 태연하게 상대에게 먼저 질문을 하였다.

“혹여나 유일지상의 명령을 받들어 이 자리에 온 형제들이오?”

공친왕이 잔뜩 긴장한 것과 달리 증국번은 태연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태평천국의 방식대로 성호를 그은 다음 가슴을 탕탕 치면서 그럴싸한 거짓말을 시작하였다.

“형제들이어! 지체 높으신 분께서 나에게 명을 내리셨소. 이 증국번이 조선 놈들을 현혹하기 위하여 직접 청도 조차지에 방문해 놈들의 시선을 돌려놓을 거요!”

“무슨! 무슨 소리를 하는가!”

“거 유화 이 친구야! 내가 놀랄 것이라 말하지 않았나!”

공친왕이 증국번에게 고함을 쳤지만 역으로 증국번이 더 큰 목소리로 말을 덮어버렸다. 그러자 기차 안을 점거하였던 홍수전의 끄나풀들이 증국번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회주님의 벗을 뵙습니다!”

“태평천국! 멸만흥객!”

“태평천국! 멸만흥객!”

구호를 즉석에서 받아넘긴 증국번은 잠시 고개를 돌려 공친왕을 바라보았다. 만주족을 멸망시키자는 말이 들리자 그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며 심정을 대변하였다.

결국 의심이 샘솟았다. 한 간부는 의심을 담은 눈초리로 허둥거리는 공친왕을 보다 증국번을 살펴보며 말했다.

“제가 알기로는 회주님께서 형님을 포섭하지 않았다 하였는데요.”

“어허! 회주님이라니! 이미 태평천국의 치세가 시작되었는데 새로운 황제요 나라의 주인이 아닌가! 네놈들을 당장 때려눕히고 모질게 채찍질을 해야 정신을 차리겠는가!”

증국번이 예상한 대로 사태가 흘러가기 시작했다. 상세한 사정은 잘 모르니 대화가 이어지면 발각되기 마련.

그는 상대방이 아무런 말도 못 하게 윽박지르기 시작하였다.

“이미 금려팔기는 도륙이 났을 것이요! 사방에서 태평천국의 이름으로 삿된 자들을 없애는 상황이 아닌가! 그런 상황에서 조선 놈들은 우리의 약점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지!”

증국번은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종합하여 홍수전의 계획을 분석했다. 끄나풀이 움직였다는 말은 이미 북경이 함락되거나 경각에 처했다는 증거나 마찬가지이다.

여기에 그가 조선과 친하게 지내서 조선인들이 북경에서 대부분 쫓겨나게 되었다. 이 행동은 조선의 개입을 회피하려는 움직임이 분명하다고 판단했다.

“대사관에 있는 놈들이야 감금해 두면 될 거야. 다만 회주님께서는 조선의 개입을 늦추기 위해 내가 알아서 하라 하였지. 그러니.”

증국번은 사람 좋은 미소를 하며 공친왕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공친왕의 머리를 툭툭 쳐서 변발을 쓰다듬으며 말하였다.

“여기 이 친구와 함께 청도로 나아가 적당히 구워삶아 시간을 벌 작정이야.”

“실로 옳은 말입니다만 대체 저 사람이 누구입니까?”

“일부러 아무것도 안 알려 준 나의 친구일세. 호남성에서 함께 학문을 배운 강유화라 하지. 이 옷을 입혀서 만주족 고위 관료로 위장하면 좋겠군.”

증국번은 몸을 놀려 공친왕이 예비용으로 준비한 관복을 보여주었다. 지체 높은 사람이나 입을 법한 관복을 확인한 홍수전의 부하들은 공친왕을 상세히 뜯어보았다.

이미 초상화와 용모파기를 통해 만주족 주요 인사들의 살생부가 작성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4일 동안의 고된 여정으로 인해 공친왕의 외모는 많이 손상되어 있었다.

약간 갈색으로 타들어간 피부, 관리를 못 해 자라난 수염, 변발로 밀어버린 머리카락이 다시 자라난 앞이마 그리고 공친왕의 두툼한 볼과 광대 대신 약간 얇아진 볼과 도드라진 광대뼈.

오히려 증국번이 손을 써서 공친왕과 닮은 사람을 섭외하였다 생각하니 앞뒤가 더 맞아떨어졌다. 다만 마지막 확인을 위해 증국번에게 질문이 돌아왔다.

“호남성에서 함께 하였던 친구라면 아무것도 모를 것 같은뎁쇼?”

“이 친구는 머리도 별로 안 좋고 장기는 음주가무와 폭식이야. 쓸모없는 친구이지만 어차피 만주족은 일도 안 하고 죄다 부패해서 뇌물만 찾지 않는가?”

“이제야 알겠습니다. 저런 친구도 쓸모가 있군요!”

“옳은 말씀입니다. 혼자서 방문하면 의심을 사지만 둘이 방문하면 여러모로 편하군요!”

졸지에 밥버러지 신세가 된 공친왕이지만 상황은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살리려고 어떻게든 기지를 발휘하여 증국번에게 억지로 너스레를 떨며 말하였다.

“처, 처 척생! 이 친구야! 그런 자리라면 나에게 이야기 좀 하지!”

“저거 보게! 언제나 술과 음식을 즐기던 자인데 자네들이 윽박지르니 안색이 창백해지고 속이 뒤틀리지 않는가! 새로운 황제폐하의 명을 이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알겠습니다. 저희 모두 물러갈 것이니 즐거운 여정을 보내십시오.”

“황제폐하께 잘 말씀을 드리게. 한때 친구였던 내가 신하로서 할 일을 다 할 것이라고.”

홍수전의 끄나풀들은 썰물처럼 객차를 빠져나갔다. 그러자 얕은 숨을 몰아쉬던 공친왕이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증국번을 바라보았다.

기차역에는 홍수전의 끄나풀들이 있을 것이요, 기차의 직원들조차 홍수전에게 포섭된 객가일 가능성이 높다.

그는 고함 대신 이를 꽉 깨물며 목소리를 낮추어 말하였다.

“변란……? 홍수전이 정말 변란을 일으켰나.”

“이미 모든 일이 끝났을 것입니다. 병력이 남아돌아 이 기차역까지 분견대를 보냈다면 북경은 이미 초토화가 되었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이상하다 생각하였는데. 모든 것이 자네의 아집과 독선이 함께 한 계획일 줄이야.”

짤깍 소리가 나며 권총의 공이가 젖혀졌다. 총구를 증국번 방향으로 돌린 공친왕은 울분을 담아 눈물을 뚝뚝 흘리며 분노를 털어놓았다.

“내가 있었어야 해, 내가 있었어야 한다고. 변란이 일어난 상황에서 형님은 자리에 누워 계시고 나는 정백기를 지휘하지 않고 이 자리에 도망쳐 왔지. 내가 뭘 할 수 있겠나?”

공친왕은 차라리 자신이 전장에서 죽어 나자빠졌으면,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분전을 거듭하다 적에게 참수당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꿈은 증국번에 의해서 깨어졌다. 자신에게 억지를 부려 북경에서 탈출시킨 충성심을 이해할 수 있으나 원망만큼은 남아 있었다.

그러자 증국번이 덤덤한 목소리로 답하였다.

“이 나라를 되살릴 수는 없어도 혈통을 이어갈 수는 있사옵니다.”

“혈통을 이어가? 멸만흥객이라는 구호를 외치는 미치광이들이 북경에서 어떠한 일을 저지르는지 아는가? 여기에 고토(故土)를 조선에 빼앗겨 도망칠 곳도 없는데?”

“전하, 이미 국운이 경각에 달하였사옵니다. 저는 한 나라의 신하로서 나라가 어떠한 형태로든 살아남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하였사옵니다.”

증국번은 방아쇠를 휘감은 채 점차 떨려오는 공친왕의 손가락을 보고 태연히 말하였다. 그는 청나라의 충신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였다 생각했다.

이미 기차는 출발하여 어지간한 말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의 속도가 되었다. 여기에 예비용으로 힘을 아껴둔 말 네 마리를 가축용 차량에 올려 두었고.

아마 공친왕 정도의 재주라면 어떻게든 청도 조차지로 도망칠 수 있으리라. 증국번의 고요한 눈동자를 확인한 공친왕은 권총을 창문 밖으로 집어 던지고 말하였다.

“조선에 고개를 숙여 나라를 되살리면 어떻게 될지는 나도 알지. 모든 이권이 빼앗길 것이요, 영토가 분열되고 청이라는 국호조차 상실될 것 같군. 나는 폐주(廢主)가 되겠고.”

“하오나 조선이 단 하나만큼은 약속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증국번의 눈이 좁혀지며 지금까지 억누른 증오가 샘솟았다. 온몸에 열이 올라오고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며 주먹에서 핏줄기가 새어 나올 지경이 되었다.

저 머나먼 어딘가에 있을 북경 방향을 가리킨 증국번은 분노를 담아 저주를 퍼부었다.

“나라를 기만하고, 백성을 유린하고, 수많은 이들을 고통에 빠트린 홍수전에게 대한 복수만큼은 조선이 대신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응당 그리할 것입니다.”

청나라의 멸망은 기정사실이었다. 그나마 조선의 편을 들어주면 복수라도 할 수 있으며 나라의 명맥이 가느다랗게 남아 이어질 것이다.

초개와 같이 죽음을 맞이하느니 반역자에 대한 응징과 명맥을 남기는 것이 중요하리라.

한편, 이 소식은 전신을 통해 북경으로 하루 늦게 전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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