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295화 (261/345)

295화

23장 7화 선전 포고

청도 조차지로 도주한 공친왕과 증국번은 아직 북경의 현황을 모르고 있었다. 대한제국도 간접적으로 북경 내부사정을 알고 있을 뿐 상세한 정황은 알지 못하였다.

그런 북경의 사정을 서양인 생존자들이 전했다. 영국 대사관의 비밀통로로 간신히 빠져나오고 셍게린첸의 도움을 받아 도망친 이들의 증언으로 내부 사정을 정리하였다.

“지금이 반란이 벌어지고 열흘이 지났지. 아직도 폭력이 만연할 것 같군.”

내가 내부 사정을 한마디로 정리하자 관원들은 물론 사단장인 어재연도 내 눈치를 살폈다. 그러고는 어재연이 군인 입장에서 헛기침을 하고는 내 말에 반박하였다.

“역도들이 흉포하다 하여도 사람 아닙니까? 홍수전이 어떤 놈인지는 몰라도 자신의 기반이 될 북경에서 계속 사람을 죽이다가는 병력을 보조할 인부조차 구하지 못할 겁니다.”

“아무리 반란군이라 해도 질서는 있습니다. 열흘이 지나도 병력 통제가 안 되면 애초에 반란을 할 수 없었지요.”

“영국에서 파견한 전권대사와 프랑스 상인들이 그 길을 막아버리지 않았나.”

역시나 영국과 프랑스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남을 엿 먹이는 걸 좋아하는 영국과 이미 혁명을 겪어서 어떤 방식으로 반란이 폭주하는지 아는 프랑스의 합작품이다.

다른 사람들이 아직도 내 말을 믿지 않는 눈치라 목을 가다듬고 지금 벌어지고 있을 일을 이야기하였다.

“생존자들의 마지막 증언에 의하면 병사들이 뒤로 물러나고 지위가 높은 간부가 대사관에 왔다 하네. 대사관이 폭발해서 반란군의 주요 간부와 호위병이 목숨을 잃지 않았겠나?”

“그렇지요. 천오백 근이 넘는 폭약이 터졌다면 주변이 다 날아갔을 겁니다.”

“당장 한양에서 같은 일이 벌어지면 백성들이 외국인들에게 어떻게 하겠는가?”

“그야…… 엉망진창이 될 겁니다.”

나름 사람을 많이 가르쳐본 어재연도 말끝을 흐리며 내 눈빛을 피했다. 대한제국 사람들이 아무리 순박하고 교육을 받았어도, 외국인에 익숙해도 수습하기 힘든 사태가 벌어지리라.

하다못해 지금 반란군의 주력은 객가다. 그마저도 한족과 항상 치고받고 싸우며 다른 객가들과도 관계가 안 좋은 세력들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지금 반란군의 핵심은 객가 중에서도 계투를 일삼던 객가들이지. 평상시에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고, 대포로 쏘아 집을 무너트리고 사람을 노예로 팔아넘기던 자들이야.”

“이야기는 들어 두었습니다. 청나라에 있는 수많은 객가 중에서 성미가 급하거나 다른 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반란군에 대거 합류한 것 같더군요.”

애초에 그런 부류의 객가들이 홍수전의 편을 들어주었으리라.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사람이면 양귀비 재배를 권고하고 밀매에 나설 정도로 정신상태가 썩어빠지지는 않았다.

이들 가운데서도 반란에 참여할 정도로 열정적이며 싸움을 즐기던 이들이 핵심 세력이다. 그런 이들이 변을 당하면 그 폭력성이 더욱 심해지리라.

“하물며 모두가 약탈에 취하고 피를 본 상황에서 저런 일이 벌어졌네. 결국 대사관에 남은 사람들은 반란군에게 피를 계속해서 보게 될 저주를 심어둔 격이야.”

“그러하면 북경 내부 사정을 예측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전까지는 한간(漢奸 - 한족 배신자)이라는 누명을 제시했었지. 이제는 서역인의 개라는 명분으로 닥치는 대로 죽일 걸세. 그것도 아주 잔혹한 방식으로.”

의화단의 난이라는 사례도 있어서 예상은 해두었는데 입맛이 쓰기는 하다. 임칙서의 망령이 지금도 내 머리 위에서 호통을 칠지도 모르겠네.

그렇다고 무턱대고 달려들어서 이 나라의 백성이자 군인들을 개죽음으로 몰아넣을 생각은 없다.

어재연은 한양에서 내려온 보고에 대해 이야기하며 회의를 마무리하였다.

“미리 준비한 대로 대응병력을 편성해 두겠습니다. 조차지 장벽을 끼고 전투를 벌이면 적의 포격이 엄습할지도 모르니 전방 십 리(4㎞) 권역에서 적을 막아설 겁니다.”

“필요한 준비는 모두 할 것이라 믿겠네. 적도가 언제 엄습할지 모르는 형편 아닌가.”

“염려 마십시오. 제가 생각하는 가장 비겁한 방법을 계속 훈련시켰습니다.”

공친왕이라는 폭탄이 조차지에 온 이상 홍수전은 반드시 대한제국에 싸움을 걸 수밖에 없다. 물론 이 명분 덩어리는 지금도 현실을 모르는 채 허둥거리고 있었다.

증국번은 사태를 분석하며 이성적으로 대처하려 노력하였다. 반면 공친왕은 회의가 끝나기 무섭게 나를 호출하고는 진격을 독촉하였다.

“한시라도 빨리 왕공족과 우리 만주의 일원을 구원하지 않고 뭘 하나? 저 역도들이 북경을 이 잡듯 뒤지며 학살을 저질렀고 이제 그 손길이 북경 외곽에도 뻗어 나갈 것인데.”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하지 못할 일이 있습니다. 북경에 머무르는 반란군의 병력이 추산 육만여 명이지요. 여기서 보낼 수 있는 병력의 여덟 배가 조금 안 됩니다.”

“그래도 새로운 무기를 사용하고 훈련도 철저히 되어 있는데…….”

공친왕은 하루라도 빨리 북경을 탈환하라는 부탁 아닌 부탁을 하였다. 이 근거로 자신의 장밋빛 환상을, 아직도 청나라의 현실을 외면한 채 상상의 나래를 펼쳐나갔다.

그 상상의 나래에 어울려 줄 이유는 없다. 홍수전의 병력은 추산 6만에 실시간으로 증가하여 5만 대군 정도는 뽑아낼 수 있다. 반면 조차지의 병력은 1만2천이 조금 넘는다.

원정군이 아닌 단일 공세로 최대 편성해도 8천여 명의 병력에 불과하다. 이 정도라면 전열보병의 물결에 신식 무기의 우위가 덮여 버릴 숫자 차이다.

결국 한양의 추가 병력으로 최소 단위의 원정군이 편성되어야 진군이라도 해볼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공친왕이 펼치는 상상의 나래는 끝없이 늘어나고 있었다.

“제대로 된 군대가 진군하면 각지에 분열되어 있는 관군이 힘을 모을 걸세. 그렇게 되면 군세는 쉽게 확보할 수 있으며 수적으로 우세를 점할 수도 있을 것 같군.”

“말이 쉽지 그리 녹록지 않은 일입니다. 정보를 계속 모아본 결과 홍수전의 반란군은 진격 과정에서 고의로 낙오병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들의 수효가 제법 많습니다.”

“고작 낙오된 병사들 따위가 뭘 한다는 말인가!”

“주방팔기(지방군) 정도는 쉽게 격퇴하고 있다더군요.”

예전부터 준비해 온 전신 연락망이 완전히 두절되지는 않았다. 북경과 남경 사이를 거미줄처럼 엮은 연락망인 데다가 대운하 근처는 인력으로도 소식이 어느 정도 전달되는 곳이다.

그 연락망에서 홍수전이 낙오병처럼 남겨놓은 잔존 병력이 주방팔기를 격퇴하고 지방 도시를 장악한다는 연락이 들어왔다.

홍수전은 낙오병에게 미리 명령을 내려 지방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제아무리 낙오병이라도 말조차 제대로 못 타는 주방팔기는 격퇴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겠지.

그 계산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사실 격퇴도 아닌 적의 진군을 확인한 지방 팔기군이 붕괴해 도주한다는 보고를 보여주니 공친왕도 눈을 질끈 감고 말하였다.

“저 역도들을 언제쯤 짓밟을 수 있다는 말인가.”

“성부사단에서 지원 병력이 온 다음에야 발을 뻗어볼 수 있을 겁니다.”

이게 병사의 피해를 줄이는 현실적인 결론이다. 이마저도 홍수전이 북경을 수비하면서 시간을 끌면 요서회랑을 넘은 요동 사단들과 함께 진군해야 북경을 뚫을 수 있겠지.

그마저도 지원군이 도착하고 북경의 남쪽과 북쪽 방면을 모두 뚫고 나갈 필요가 있었다.

공친왕이 계속 보채려 해서 아예 협상 조건에 쐐기를 박았다.

“더군다나 반란군과의 관계도 문제입니다. 이들이 대한에 우호적으로 나서고 화의를 추진하면 전하를 앞세워 괴뢰 정부를 만들어야 합니다.”

“어차피 해야 할 일 아니던가.”

“전하께서도 다른 국가에 다녀오신 적이 있지 않습니까? 멋대로 왕족을 황위에 올려 괴뢰 국가를 만드는 행위는 여러모로 지탄받기 마련입니다.”

물론 지금 돌아가는 꼴을 보면 홍수전이 먼저 대한제국을 공격할 것 같은 상황이다. 더군다나 대사관 폭발로 태평천국군에게 계속 적을 보여주어야 홍수전의 권력도 유지된다.

물론 대사관 폭발 같은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고. 증국번이 내 눈치를 보고 있는데 이 양반도 머리를 잘 굴려서 부족한 정보를 채워나가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겠지.

“폐하께서 의식을 찾지 못하고 황후폐하와 의비 그리고 태자가 감금되어 있는데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아마 의비는 처형당했거나 조만간 처형당할 겁니다. 홍수전 입장에서는 증거도 인멸하고 민심도 달랠 필요가 있지요.”

둘 다 의비가 살아남는 것은 기대도 안 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헤로인으로 황제를 식물인간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혐의를 덮어쓰고도 남을 인물이지.

공친왕은 여기서 끝난 것 같은데 증국번은 아직 할 말이 있는 듯이 눈을 굴려댔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돌아보고 내 대처에 의심을 하듯이 질문을 툭 하고 던졌다.

“지금 손해를 보더라도 역도의 싹을 잘라낼 준비를 하셔야지요. 시일을 끌면 각 지방으로 퍼져 나간 역도들이 세력을 양성할 터인데 얼마나 고생을 할지 굳이 말해야 하겠습니까?”

“나도 다 생각이 있으니 염려하지 마시오.”

“최소한 연락망이 유지되는 방면으로 사람을 보내야 합니다. 그래야 토벌을 할 때 대한의 피가 덜 흐르겠지요.”

그 귀찮고 기나긴 토벌 작업은 서양의 군대가 할 일이지. 대한제국은 홍수전의 핵심 세력을 분쇄하고 이득을 모두 본 다음 군수품을 팔아넘기면 된다.

며칠이 지나고 홍수전의 반란군이 공식 사절을 보내왔다.

정확히는 반란이 시작되고 13일, 가장 바쁜 시기에 보내온 사절이라 내부 정비 이전에 할 말이 더 많다는 소리다.

“본관은 태평천국의 승상이자 하 대신(夏 - 군사 관련 직책)을 역임하는 풍운산이요.”

“지금쯤 북경에 계실 분이 어찌하여 이런 조차지까지 오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그야 대한의 잘잘못을 논하고 조차지의 반환 또한 요청하러 왔소이다.”

말은 대한이라 하는데 조차지의 반환이라는 용어 선택이 잘못되었다. 군사 행동 자제 정도의 권고라면 들어줄 수는 있는데 그냥 다 내놓고 물러나라니.

더군다나 풍운산은 홍수전과 함께 태평천국의 초창기부터 참가한 주요 인물이다. 이 주요 인물조차 과격한 언사를 할 정도로 상황이 안 좋다는 증거이다.

“일단 협상을 논하는 자를 거부하지는 않습니다. 무슨 내용인지 들어나 봅시다.”

대놓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풍운산에게 시간을 끌면서 조차지의 방어체계를 보여주었다. 관문을 통과할 때마다 잠시 시간을 끌면 되는 일이지.

풍운산은 청도 조차지의 방어체계를 확인하기 위해 눈을 굴려댔다. 든든한 콘크리트 장벽과 사방에 놓인 윤형 철조망을 확인하며 어떻게 공략해야 하는지 계산하는 것 같았다.

회담 장소는 일부러 4층 전각으로 두어 내부를 훤히 볼 수 있게 하였다. 풍운산이 창문을 열며 주변을 확인할 시간을 준 다음 본격적으로 협상을 진행하였다.

“이토록 빠르게 방문하였을 줄은 모릅니다. 혹여나 우리 대한에 원하는 것이 있습니까?”

“그렇소. 단도직입적으로 논할 것이니 우리가 원하는 것은 세 가지요. 첫째는 영웅약을 이 나라에 들인 반역자 공친왕의 반환이오.”

“신병 보호를 요청한 분인데 굳이 보내드려야 합니까?”

풍운산은 그 굵직한 눈썹을 꿈틀거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나름 위엄을 세우려고 수염도 잘 염색해서 시커멓게 만든 다음 땋아서 멋을 냈는데 그 수염이 푸들푸들 떨리고 있었다.

“다음으로는 대사관 폭발과 관련한 후속 조치요. 대한에서 주선한 화약 거래로 인해 영길리 대사관에 화약이 쌓여 있었고 이것이 터져나갔소이다.”

풍운산은 파편에 맞아 종이가 찢어진 쥘부채를 보여주었다. 그러고는 이를 내 눈앞에 들이대고는 으르렁거리듯이 말하였다.

“이로 인하여 영길리 사람들을 보호하려던 승상이자 내 벗인 홍인간이 폭발에 휩쓸렸소. 시신도 못 찾을 정도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지.”

“그렇군요. 아마 이 조차지에도 수많은 폭약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계시겠습니다.”

“그 정도는 아니오. 황제께서는 자신의 사촌동생을 잃은 원통함을 억누르고 서역인들을 보호할 작정이시지. 서역인들이 만주족에게 납치당하였는데 찾아주시구려.”

내부 꼴이 참 잘 돌아가는 증거지. 오죽 명분이 없었다면 이런 말을 할까. 여기에 서양인들을 보호한다는 개 풀 뜯어먹는 소리도 하고 있다.

만주족이 잡아간 서양인들을 다시 잡아들여서 공개처형 형태로 민심을 달래려 하리라.

두 번째 개소리도 넘어간 다음 마지막 세 번째 제안을 들어주었다.

“마지막으로 조차지에서 퇴거하라는 명령이오. 만주족이 이 나라를 팔아먹기 위해 맺은 조약이며 새로운 나라에는 조차지가 없을 거요. 약간의 보상은 해드리겠소이다.”

“보상은 둘째치고 기한은 언제까지입니까?”

“좀 바쁘겠지만 열흘 뒤요.”

좀 바쁘다는 수준이 아니다. 대한제국에서 사용하는 모든 선박을 동원해서 사람과 최소한의 물자만 옮겨도 열흘이 걸린다. 하물며 공장 집기나 각종 도구를 옮기려면 일 년은 걸리리라.

풍운산조차도 이 제안이 말이 안 되는 걸 알고 있는지 눈을 흘기며 시선을 회피하였다.

그걸 보고 기한을 열흘로 규정한 이유가 무엇일지는 대충 이해했다. 나는 풍운산의 세 가지 이야기를 하나하나 반박할 생각으로 첫 요구사항부터 파고 들어갔다.

“영웅약의 안전 검증은 당시 조정 관리로 있던 홍 좌도어사께서 하였는데 반역자라 따지면 홍 좌도어사, 지금은 태평천국의 황제 되시는 분도 반역자가 아닙니까?”

“어허! 당시에는 지식이 부족하고 시일 또한 부족하여 기초적인 검증밖에 하지 못하였소! 여섯 달을 내리 복용해야 해악이 드러나는 약을 어찌 알겠소!”

내 지적을 들은 풍운산은 목소리를 높이고는 헛기침을 몇 번 한 다음 변명 아닌 변명을 하였다. 당연히 내줄 수 없는 사람이라 규정을 들먹이며 거절했다.

“그래도 안 됩니다. 공친왕은 보호를 요청한 사람이며 자기 의지로 조차지에 발을 들였습니다. 따라서 자기 의지로 나가지 않는 한 저희도 귀국 권고만 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힘으로 끌어내면 어찌 대처할 작정이오?”

“뭐 피를 보시겠다면야 방도가 없습니다만. 그리고 만주족에게 납치당한 생존자 말입니다만.”

홍수전 입장에서는 북경에서 막 탈출한 생존자가 만주족에게 끌려간 입장이다. 하늘을 날거나 전신을 귀로 듣는 능력이 없는 한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지.

그 생존자는 지금 한양에서 중점 관리를 받고 있다. 이 사실을 알려줄 겸 풍운산이 절대 기대하지 않는 답을 해 주었다.

“저희도 생존자를 통해 당시의 이야기를 들어 두었습니다. 듣자 하니 대사관 앞에서 대규모 학살이 일어났고 생존자들이 다 탈출하지도 못하고 폭음이 들려왔다 하더군요.”

“대규모 학살? 말이 되는 소리를 하여야지!”

“수백여 명의 생존자가 운이 좋게도 요서회랑을 통해 대한의 품으로 들어왔습니다. 이들의 증언이 서양의 열국에 퍼져나갔고 어제 답신이 도달하였습니다.”

풍운산을 더욱 압박할 겸 옆방으로 가서 가짜 답신을 작성했다. 유럽 열강들을 끌어들일 생각이라 안 되면 이런 구도를 만들 작정으로 작성한 답신이다.

[본국의 생존자들에 대한 보호 및 반란세력의 징벌을 위한 병력 파견 예정]

영국은 아마 세포이를 보낼 거고 프랑스는 대육군 병력을 보내겠지.

이 가짜 답신을 확인한 풍운산은 격분하여 탁자를 내리찍고 일어선 다음 고함을 쳐댔다.

“미쳤소! 서역의 군대가 어찌하여 이 대륙에 들어와 군홧발을 앞세운다는 거요!”

“생존자를 개돼지보다 못하게 썰어 죽인 놈들이 말이 많아!”

풍운산의 호위가 앞으로 나서고 대한제국 병사들도 앞으로 나서서 서로를 노려보았다. 잠시 말을 끊고 모두를 진정시킨 다음 마지막 제안도 반박하였다.

“열흘 이내에 퇴거하라는 말은 절대 들어줄 수 없군요. 이미 병력들과 하급 지휘관들이 폭주하여 피를 볼 생각으로 멋대로 진군하고 있을 것 같은데요?”

“그건…… 아니오! 우리는 대한제국의 개입을 염려하여 병력을 진군시킬 뿐이오.”

내 예상대로 태평천국의 폭주가 시작되었다. 청도 조차지에 공친왕이 있다는 말을 듣고 더 많은 피와 약탈을 제물로 삼아 멋대로 진군하였으리라.

홍수전 입장에서는 이를 막을 방법도, 제지할 명분도 없다. 설령 제지할 수 있다 하여도 민심 이반이 시작되면서 더 많은 병사들이 명령을 안 듣는 악순환이 시작되리라.

더 이상 협상을 진행할 이유도 없었다. 열흘이면 성도사단 병력이 어느 정도 도착하고 현재 있는 조차지 병력으로 방어전을 한 번 펼칠 수 있겠지.

“그 말을 다 믿지는 못하겠습니다. 조차지에서 십 리 앞에 병력을 파견할 것이니 원하면 그 병력을 뚫고 나서 재차 협상을 진행해 주시지요.”

“굳이 조차지를 끼고 싸우지 않는 이유가 뭐요?”

“그야 조차지 안에 서역 생존자들을 보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조만간 열강에서 파견한 병력들이 상륙할 장소라 터를 비워둬야 합니다.”

말 그대로 폭주하는 병력에 날개를 달아주는 꼴이다. 누가 지휘관이건 간에 이 사실이 공표되면 태평천국군은 청도 조차지를 공격하기 위해 개떼처럼 몰려들겠지.

풍운산은 협상이 결렬된 걸 안타까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명분이 생겨 잘 되었다는 듯이 홍수전이 전달한 선전포고를 공식으로 제출하며 으르렁거렸다.

“우리는 열흘이라는 시간을 주었소.”

“알고 있습니다. 저희도 열흘이라는 시간을 드릴 테니 묫자리나 파두시지요.”

앞으로 열흘 뒤, 혹은 좀 더 빠르게 태평천국과의 첫 전투가 시작되리라.

우리가 공격 측이라면 애꿎은 희생자가 속출하겠지만 방어하는 입장이라 모든 화력을 투사할 기회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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