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화
24장 3화 갉아먹기
황하를 넘어 기차노선을 따라 진군하기를 열흘, 마침내 5월 말이 되어 슬슬 날이 풀릴 무렵이 되어 선발대가 북경 남동쪽의 항구 천진(天津 - 현 톈진 항)에서 접촉하였다.
“태자께 부여왕이 인사를 올립니다.”
요동 일대의 사단 3개에 추가 병력을 편성한 이최응이 태자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러자 태자가 앞으로 달려 나가서 손을 맞잡으며 반갑게 맞이하였다.
“이런 머나먼 곳에서 만나게 되니 더욱 반갑습니다. 그간 고생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고생이라기보다는 번잡한 일이 많았습니다. 어찌나 많은 병력이 합류하였는지.”
“그 병력 편성 관련한 문제는 제장들에게 일임하도록 하지요.”
병력을 재편성하는 며칠 동안 선발대가 홍수전의 북경 방어선을 분석하였다. 지금까지 수집한 정보와 목측(目測)에 의거한 정보를 비롯한 다각적 정보가 수집되었다.
“완벽한 지도는 아니지만 작업에 참가하였다 탈주한 북경 백성들의 정보도 포함되었습니다. 이 지도가 홍수전의 참호 방어선의 추정 지도입니다.”
홍수전의 참호는 세 겹으로 구릉과 언덕을 끼고 구성되었다. 태자는 지식이 부족하니 한 걸음 물러서서 평가만 하였고 이최응이 눈치를 보고는 평가를 내렸다.
“그럭저럭 참호선이 견고하기는 한데 뭐 이리 넓단 말인가.”
“중요한 사항을 고려하지 않고 무턱대고 참호를 파두었지요. 그래도 인력이 많다 보니 여유가 있었나 봅니다.”
전열보병 시대의 참호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 설치해야 하는 물건이었다. 지형적 이점이나 아군 병사들의 사기는 당연히 고려해야 할 요소이다.
참호는 수동적이고 적의 공격을 버텨내는 임시 진지이다. 성이나 요새처럼 적의 목표물이 아니라 우회할 수도 있고 희생을 감수하고 진입할 수도 있다. 물론 북경으로 향하는 주요 길목에 참호가 있어서 일부는 공략할 필요가 있었다.
어재연은 이 참호 진영에서 특이한 사항을 분석하고 말하였다.
“탱자나무로 진입을 막으려다 나무가 부족해서 인력을 사용한 것 같습니다. 참호 앞에 크고 넓은 구덩이를 파서 물을 부어 넣었지요.”
“이 넓은 지형에 구덩이……. 거의 해자 수준의 물건을 만드는 게 인력으로 가능하다는 말이오?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썼을까.”
“북경과 그 주변에서 사로잡은 백성 이십만 명을 동원하였습니다.”
홍수전의 참호는 철조망도 기관총도 없다. 그 부족한 참호가 일제돌격에 뚫릴 것을 염려해 진흙 구덩이를 만들어 두었다.
진흙 구덩이라기보다는 해자에 가까운 물건이다. 목측에 의존한 불안정한 지도인데 이걸 통해 봐도 참 대단한 물건이네.
“가장 좁은 진흙 구덩이의 폭이 네 보(4.8m)라, 이놈이 제정신인가?”
“듣자 하니 탈주한 사람들이 식수가 부족해서 탈주하였다는데 이해가 가는 일이지요.”
이최응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주변 장수들을 바라보았다.
증언에 따르면 이 구덩이는 딱 무릎 깊이에 진흙을 채워둬서 몸을 숨기지도 못하게 만들어두었다더라. 임시방편치고는 나쁘지 않은 방어시설이지만 뚫을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태자는 뒤에서 이 내용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앞으로 보름 정도만 버티면, 그동안 놈들이 함부로 고개도 못 들게 만들면 구덩이가 자연스럽게 굳어버리겠군. 비가 내리면 시일이 좀 더 지체되겠지만.”
“설령 비가 내린다 해도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적의 참호에 비가 들어차면 안이 모조리 진흙탕이 되어 비참한 꼴이 될 터. 거기에 총도 쏠 수 없습니다.”
가뜩이나 건조한 기후인 북경이라 6월까지 비가 내릴 확률도 희박하다. 만에 하나 비가 내린다면 홍수전의 매치락 머스킷은 몇 발 쏘지도 못하고 무용지물이 되어버린다.
반면 대한제국의 갑식, 진식소총은 사용에만 주의하면 언제라도 방포할 수 있다.
태자는 방어선 뒤에 있는 북경의 지도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그러하면 비가 내리는 날을 기다리거나 보름만 버티면 되지 않겠소? 홍수전은 후방에서 원군이 올라올 것이라 판단한 것 같지만 그 원군은 박 후작 덕분에 무용지물이 되었소.”
이미 전해둔 사실이라 제장들은 물론이고 이최응까지 날 보며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태자의 말대로 보름 정도 기다린 뒤 전투를 진행하는 것으로 갈피가 잡혔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부족하다. 철조망이 참호전에서 악명을 떨친 이유는 적의 진격을 막고 아군은 언제나 해체할 수 있는 도구라서 가능한 일이다.
반면 진흙 구덩이는 지형지물이다. 이 장소는 적과 아군 모두가 건널 수 없는 위험지대이며 이로 인해 홍수전의 병력들도 참호 밖으로 함부로 나오지 못한다.
“감히 의견을 내놓아도 되겠습니까? 지금 이 상황에서 적도 아군도 나서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하니 조금씩 이득을 보아 적의 전력을 갉아먹으면 어떠하겠습니까?”
본격적인 교전을 벌이기 전에 상대의 전력을 조금이라도 약화시킬 필요가 있다. 자리에서 일어나 참호와 진흙 구덩이가 묘사된 지도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홍수전은 십혈포에 호되게 당하여 병력을 일제돌격 시키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기회를 노려 참호에 틀어박힌 적들을 일방적으로 쏘아 죽이시지요.”
홍수전은 나름 꾀를 부렸지만 근본적인 차이, 병장기의 질을 뒤엎지는 못했다. 탄환과 자원을 많이 소모하더라도 적의 전력을 미리 줄여놓을 작전을 추천하였다.
* * *
지금까지 겪은 일이 꿈결과도 같이 흘러갔다. 경주의 촌구석에서 병사로 살아온 나, 최시형이 왜 이런 끔찍한 장소에 있단 말인가.
나름 병사로 오랫동안 근무하고 군대에 말뚝도 박았다. 심지어 참교(參敎 - 소위) 지위를 달자 동향 사람인 장교 최제선이 날 위해 여러 배려를 해주었다.
이후 청나라에 파견되어 부교(副校 - 중위)가 되고 첫 전투를 치르며 수많은 적을 죽이고 공훈을 세웠다. 내 소대 대원들이 죽인 적만 따져도 백 명이 훌쩍 넘어가겠지.
그러나 32명에 달하는 소대원들이 떼죽음을 당하게 생겼다. 눈앞에 펼쳐진 광활한 초원 너머의 참호를 공격하라는 명령이 내려지고 어제 사전 작전 교육까지 끝났다.
-대대! 횡대로 진형 변경! 개인 거리를 유지한 채 산개하라!
이백 보 거리까지 이동하여 무릎 쏴 자세로 적을 공격하라. 참호를 점령하라는 명령도 아닌, 참호 앞으로 진격하여 공격하고 돌아오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처음에는 속 시원하게 참호로 돌격하자며 항명을 하였다. 그러나 참호 앞에는 진흙 구덩이가 가득하여 허우적거리다 총에 맞아 죽을 것이라 하였다.
“미치겠네. 정말 참호 앞으로 진격해야 하나?”
“명령이잖소. 설마 높으신 양반께서 우리를 덮어놓고 죽이려고.”
첫 전투에서는 참호 안에서 신나게 태평천국이라는 미치광이들을 쏘아 죽였다. 그러나 이번 전투에서는 우리가 상대의 참호로 다가가야 한다.
병사들이 자연스럽게 불만을 토해냈다. 뒤를 돌아보자 그 든든한 십혈포도 사정거리 밖에 설치되어 있고 우리가 전멸하면 투입할 후발대만 대기하고 있었다.
“다들 염려하지 말고 구령에 맞추어 천천히 나아가도록.”
입에서는 이런 말이 나왔지만 내 상태도 정상이 아니다. 저절로 오금이 떨려오고 입안에 침이 마르며 뱃속에 무거운 덩어리가 꿈틀거리는 것 같다.
-각 소대! 점검을 실시하라!
점검이라는 말이 들리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멍하니 있다가 주변 병사들의 시선을 느끼고 해야 할 일을 지시하였다.
“장구 확인! 탄환 수량을 확인하라!”
“확인 완료!”
“공이를 젖혀 장전 유무를 확인하라!”
“장전 확인!”
확인 작업이 고작 일 분도 걸리지 않아 종료되었다.
평상시에 하였던 훈련이 너무나 철저한 나머지 다들 긴장하다 못하여 속이 터질 것 같은 상황에서도 손이 제대로 움직였다.
마침내 진격의 시간이 다가왔다. 웃옷 위에 걸친 고무 두루마기(트렌치코트) 안에 땀이 차서 후덥지근하였지만 온몸이 서늘해지고 정강이가 엿가락처럼 흐느적거리는 것 같다.
-퉁!
산발적인 포격이 떨어지고 천둥벽력 같은 소리가 진영 안을 넘나들었다. 몇몇 병사들이 겁에 질려 몸을 움츠려서 이들의 등을 두드리며 다독여 주었다.
“으하이익!”
“대포병 사격이 시작될 거다! 염려하지 말라!”
곧이어 아군 진영에서 대포병 사격이 날아들었다. 적의 화포가 점차 사격이 줄어들자 다들 돌격 시간이 다가왔음을 알아차리고 기도를 올렸다.
“하느님 아버지 간절히 비오니 제발 사지만은 성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소대장님! 저 돌아가고 싶습니다!”
얼마 전 첫 실전을 치른 이등병이 눈물을 그렁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도 도망가고 싶지만 항명은 최소 십 년 이상의 징역이라 고개를 가로저어 거절하였다.
그 순간 울분이 치밀어 올랐다.
지금 이 전선에 서 있는 사람들은 모두 백성의 평안과 나라를 위해 이 한 몸 불사르겠단 마음으로 나선 사람들이다.
우리가 이 자리에서 도망치면 다음 희생양은 누구겠는가. 사람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놈들이 청나라를 차지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다음 전쟁에서 살육에 미친놈들이 우리 대한을 엄습한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내 자식도, 내 친척도 그리고 이 이등병의 친인척들 모두가.
“그래! 나도 돌아가고 싶다! 그러나 우리가 이 자리에서 발을 멈추면! 저 악적들이 청나라를 모조리 차지할 것이다!”
“그래도 아무 상관 없지 않습니까!”
“네 선임이 유 상등병이었지. 그가 어떻게 죽었나? 자신의 죽음을 불사하고 상대를 한 명이라도 더 죽이려는 놈들이 늘어나면 훗날 어떻게 되겠나!”
-투쾅!
적의 참호 주변에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굉음과 흙먼지가 주변을 메웠다. 아군 진영 후방에서도 포성이 들리며 돌격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려주었다.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던 이등병은 모자를 고쳐 쓰고 총을 바로잡았다. 포로를 사로잡으려다가 단검에 목젖이 뚫려 비명횡사한 선임을 떠올렸겠지.
저들이 청나라의 거대한 대륙을 모조리 먹어치우면 그 총구를 대한에 돌린다.
이 명제를 알아차린 이등병은 총을 고쳐매고 말하였다.
“유 상등병님이 제 목숨을 건사해 주셨으니 이제 제가 이 나라 백성의 목숨을 건사할 차례입니다. 제가 죽으면 꼭 사망 소식을 계림 신문에 올려주시지요.”
“너도 경주 출신이었군. 알았다! 그럼 내가 죽으면 그 소식을 네가 계림 신문에 올리도록!”
-전 병력! 진군하라!
더 이상 망설일 것은 없었다. 불경을 외우는 사람, 천주교의 기도를 올리는 사람, 조상의 가호를 비는 사람이 한 몸이 되어 발걸음을 옮겼다.
일제사격이 적진을 강타하며 흙먼지를 일으켰다. 쉴 새 없이 포격이 내리 찍히는 가운데 후방에서 더욱 큰 목소리로 명령이 하달되었다.
-참호에서 삼백 보 거리까지 속보로 진군한다!
“전원! 속보로 진격하라!”
“속보랍신다! 모두 뛰어라!”
모두가 한 몸이 되어 대략 한 보(1.2m) 간격을 유지한 채 돌격하였다. 넘어지거나 접질리는 병사가 없는지 유심히 살피며 달려가자 다음 명령이 하달되었다.
-전원! 포복 대형으로 진군!
그 순간 핑! 하는 소리가 여럿 들리고 병사 한 명이 탄환에 정강이를 맞아 바닥에 자빠졌다. 의무병에게 손짓을 하여 치료해 후방으로 이송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땅에 몸을 맞댔다.
무릎 높이의 수풀 속에 온몸을 감추고 땅바닥을 허우적거리며 나섰다. 그런 순간에도 소대장으로서 소임을 다 하기 위해 자세를 조금 높여 주변을 살피며 사거리를 가늠했다.
“놈들이 일제사격을 준비하나 봅니다!”
“준비하라 그래! 라이플이면 몰라도 머스킷이면 절대 안 통한다!”
삼백 보, 이백오십 보 그리고 이백 보.
마침내 이백 보 조금 안쪽에 도달하자 진군 정지 명령을 하달하였다.
“진군 정지! 작전을 이행한다!”
적진에서 일제사격을 실시하였는지 총성이 연신 들려오다 멈췄다. 불행 중 다행으로 우리 소대원 모두가 바닥에 엎드린 덕분에 아무런 희생자도 없었다.
하달된 작전에 의하면 이 거리가 최적의 간격이라 하였다. 미숙한 머스킷 사수는 제대로 쏘지도 못하고, 능숙한 머스킷 사수라면 아주 간신히 사격을 명중시킬 수준의 거리.
나와 같이 갑식 소총을 사용하는 병사라면 절반 이상의 탄환을 명중시킬 수 있는 거리이다. 호흡을 가다듬고 포성이 몇 발 울린 다음 명령을 하달하였다.
“전 소대원! 무릎 앉아 쏴!”
“무릎 앉아 쏴!”
제발 눈먼 탄환이나 노려서 쏜 라이플 탄환이 내 몸에 맞지 않기를 빌고 또 빌며 총을 조준했다. 그 순간 내 실책을 알아차렸다.
“망할, 이백 보보다 조금 멀어!”
재차 진군 명령을 내려야 하나 고민하는 순간 이미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개머리판을 어깨에 붙이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아직 올리지 않은 채 참호를 노려보았다.
그 참호 안에서 시뻘건 웃옷을 입은 적의 형상이 보였다. 우리와 같이 얼룩덜룩한 옷을 입었다면 드러나지 않을 모습이다.
대충 머리와 어깨까지 내놓은 꼴을 보니 명중시키기 힘들 것 같았다. 숨을 참고 방아쇠를 당겨 한 발을 쏘았지만 예상대로 명중하지 않았다.
“그래 명중할 리가 없지! 참호 안에 저렇게 틀어박혀 있는데!”
적의 사격이 재개되자 희뿌연 화약 연무가 참호 안에 들어찼다. 주변에서 매캐한 지린내와 총성이 들리는 것을 보니 내 소대원들도 응사하고 있다.
첫 사격은 허공을 가로지르고 명중하지 않았다. 다시 호흡을 정돈하여 그 희뿌연 연기 속에서 움직이는 빨간색 점을 향해 총을 발사하였다.
장전을 하며 살펴보니 참호 아래로 가라앉는 빨간색 점이 보였다. 적의 얼굴조차 확인하지 못 하는 먼 거리라 명중탄인지 자기가 자빠진 건지도 모르겠다.
탄을 쏜 다음 레버를 젖혀 ‘팅’ 하는 탄피 배출 소리를 듣고 방아쇠를 당긴다. 이 반복 작업을 일곱 번 모두 마친 다음에 땅바닥에 엎드려 명령을 하달했다.
“상황 보고! 피탄 당한 소대원은 즉각 응답하라!”
어떠한 소대원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금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여 개머리판을 분해하고 탄환을 장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주변에서 침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대장님! 소총 기능고장입니다!”
“수리해! 못 하겠으면 탄환 다른 병사에게 넘겨주고 후방으로 빠져! 부상병 나오면 의무병과 함께 인솔해!”
32명의 소대원 중 처음 돌격 당시 부상을 입은 병사를 제외하면 아무도 탄환에 맞지 않았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내 옆에 있던 이등병이 눈을 굴리며 말하였다.
“이…… 일방적인 싸움입니다! 우리의 총탄은 맞는데 적의 총탄은 안 맞습니다!”
“멍청한 놈아! 라이플 사격에 주의하고 눈먼 유탄에도 주의해야지!”
처음 일곱 발은 덮어놓고 빨간 점만 대충 노려서 쏘았다. 이제는 조금 더 욕심을 내서 약간씩 조준을 하고 일곱 발을 발사하였다.
소대원 전원이 조준사격을 실시하여 빨간색 점이 속속들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 대신 소대원 중 한 명이 탄환에 맞아 자리에 고꾸라졌다.
“으아아악! 사람 살려!”
“박! 박 일등병이 탄환에 당했다! 후방으로 이송해!”
물론 상대도 우리에게 대응하기 위한 라이플을 갖추고 있었다. 박 일등병이 어깻죽지에서 피를 쏟으며 쓰러지자 또 다른 특이한 총성이 들리며 빨간 점들이 속속들이 가라앉았다.
“저격부대다! 진식 소총으로 놈들의 병사들을 노려 쏘고 있다!”
주춤하던 병사들이 다시금 바닥에서 탄환을 장전하고 몸을 일으켜 세워 사격을 실시하였다. 고작 소대원 중 두 명이 중상을 입었을 뿐 아직 30명의 소대원이 남아 있다.
이후 쉴 새 없이 탄환을 내뿜었다. 아주 운수가 좋아야 명중시킬 수 있는 적과 달리 우리는 제대로 노려 쏘면 간혹 명중탄이 나오는 정도의 사거리를 유지하였다.
-병력 교대하라! 전열 병력 후퇴! 후방 병력은 돌입하라!
7발의 탄환 뭉치를 7개 챙겨와 이제 마지막 탄환 뭉치를 장전할 무렵 후퇴 명령이 떨어졌다. 후방에서 병력들이 또 달려오는 모습을 확인하고 퇴각 명령을 이행하였다.
“후퇴하랍신다! 후퇴하라는 명령이다!”
32명의 소대원 중 2명이 중상을, 1명이 심장을 맞아 즉사하였다. 그 시신을 등에 업은 채 소대원들과 함께 본영으로 퇴각했다.
나머지 29명의 소대원은 모두 경미한 부상만 입은 채 인원 보고를 마쳤다. 의무대에 소대원을 이송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참령(參領 - 대대장)에게 보고를 마쳤다.
“여 이등병이 사망하였습니다. 이외의 부상병 두 명 발생.”
“고생이 많았군. 앞으로 후발 부대가 돌입할 예정이니 장구를 정돈하도록.”
온몸에 흙칠갑을 한 채 보고를 마치자 몸의 상태를 알 수 있었다. 제대로 설 수도 없고 온몸에 땀이 뒤범벅이 되어 머리가 어지럽고 속에서 신물이 올라왔다.
가까스로 고무 두루마기를 벗자 땀이 한 바가지는 쏟아져 내렸다. 머리가 어질어질해 전장에서 들려오는 은은한 총소리를 들으며 소금 섞인 물을 한 사발 들이켰다.
“앞으로 몇 명이 죽고 몇 놈이나 죽일지 모르겠군.”
아까 전까지 도망치고 싶다며 울먹거리던 이등병은 동기의 시신에서 장구를 벗기며 울먹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두 눈에는 열의가 불타올라 다음 전투에서는 더욱 능숙한 모습을 보여줄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지나치게 겁을 먹었지만 이제는 겁을 먹을 필요가 없다. 적의 심혈을 기울인 전략을 우리 대한제국이 정면으로 분쇄하였다.
태평천국이 앞으로 며칠을 버틸지 모른다. 그러나 참호 안에서 떼죽음을 당한 놈들이 나중에 우리와 어떤 방법으로 맞서 싸울지 궁금하기만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