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5화
24장 4화 돌파(1)
북경 외곽의 방어선 공격은 소총의 우월한 사정거리를 이용한 기선 제압으로 적을 참호 내부에 묶어두는 것이 대전제다. 여기에 다른 압박수단을 동원하여 손해를 키운다.
적이 이 손해를 무릅쓰고 15일 동안 버티면 총공세, 만약 폭우가 쏟아지기라도 하면 대규모 진격을 감행한다.
그 작전이 닷새 동안 진행되었다.
“사람이 수없이 죽어나가고 소총이 수없이 날아가는구나.”
병력을 한번 투입하면 처음 투입한 제대(梯隊)는 약 4%의 사상자를, 2차로 투입한 제대부터는 2% 이하의 사상자가 생긴다.
그나마 전 병력을 투입하는 것이 아닌 교차소모 형식으로 투입해서 전체적인 손실을 관리하였다.
여기에 한번 투입되면 40발 이상의 탄환을 소모한다. 그 결과물이 쉴 새 없는 총기수입과 총 자체의 파손으로 인한 교체작업이었다.
지금도 진영 후방에서는 소총 부품이 쉴 새 없이 배급되고 시범 사격으로 영점을 잡기까지 하였다. 여기에 후방 의무시설에도 부상병이 쉴 새 없이 치료를 받고 있었다.
사기도 진작시킬 겸 태자와 함께 부상병을 위무(慰撫)하려 병실로 들어갔다. 그러자 부상병들이 몸에 붕대를 감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올리려 하였다.
병실로 사용하는 막사는 최대한의 청결을 유지하기 위해 하얀색으로 가득하였다. 후방에 이미 배치된 증기세탁기가 쉴 새 없이 가동하여 이 하얀색을 더욱 청결히 유지하였다.
오염에 대처하기 위한 순백색의 막사, 여기에 순백색의 침대 위에는 새하얀 환자복을 입은 장병들이 누워 있었다. 이들은 태자의 얼굴을 확인하자 바로 대응하였다.
“태자 전하께서 당도하시니…….”
“누워서 쉬게. 예의와 법도가 있더라도 사람이 먼저 아닌가.”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던 병사가 태자의 말에 자리에 도로 누웠다. 최대한의 청결함을 유지하기 위해 군의관들은 쉴 새 없이 움직이며 내부를 청소하고 오염된 물건을 가져갔다.
한편에서는 수술이 막 끝난 병사들이 전우들에게 수혈을 받으며 삶의 끈을 이어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 군의관의 대표인 황도연이 태자에게 인사를 올리며 말하였다.
“이런 누추한 장소에 당도하실 줄이야. 제 부족한 의술이 태자전하께 누가 될까 염려할 뿐이옵니다.”
“혜암(황도연의 호) 의원은 예전에 오사만(오스만 제국)에 다녀올 적에도 실력이 뛰어나기로 명성이 자자하지 않았소. 직접 이야기를 나눠본 사람이 왜 그러시오.”
“이 부족한 실력을 칭찬해주시니 태자전하의 은혜를 어찌 감당해야 할지 모를 일이옵니다.”
대한제국 최초로 설파제를 사용하고 개복수술을 실시한 황도연은 누가 뭐라 해도 이 자리에 있을 최고의 인재였다.
그는 병실 내부를 돌아보며 사정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폐하께서 은혜를 내리시어 국제 구호협회에 사람을 보낸 덕을 톡톡히 보았습니다. 당시에 얻은 경험을 밑천으로 삼아 이 나라의 병사들을 치유하고 있사옵니다.”
“당시의 경험이라. 땅의 주인이 세 번이나 바뀌던 경험 말이오?”
황도연의 국제 구호협회는 말 그대로 아수라장 한복판에서 병사들을 치료하였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경험을 쌓고 지금 그 경험으로 병사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그러하옵니다. 그에 반해 한 나라의 병사들이 처음부터 출혈을 막고 가급적 온전한 상태로 옮겨지니 치유하는 일이 사리에 옳고 이치에 맞게 되었사옵니다.”
“부상을 입은 병사들이 오는구려. 의원의 본분에 맞게 어서 치료하시오.”
황도연은 목례만 올리고 바로 병사들을 향해 달려갔다. 그의 휘하에 있는 군의관들을 시켜 수많은 병사들을 분류하고 즉각 치료에 돌입하였다.
끓였다 식힌 물로 환부를 세척하고, 일준이가 만든 요오드팅크로 다시 소독한다. 이후 부상 상태를 분류하여 즉각 대처에 돌입하였다.
“이 환자 혈액형은 을(乙)형이야. 출혈량이 많으니 두 각 정도 수혈하고 탄환 적출 수술을 하도록. 여의치 않으면 절단하고.”
“알겠습니다! 자네는 뭘 하나! 을형 혈액형을 가진 건장한 장병을 두 명 데려오게!”
대한제국군 규정에 의거하여 웃옷 안주머니에는 혈액형이 표기되어 있다. 이 혈액형을 기준으로 출혈이 심한 병사에게 즉각 수혈이 실시되었다.
이 모습을 보니 훈련소 시절에 달달한 음식을 얻어먹겠다고 팔뚝부터 내민 기억이 떠오른다. 반면 태자는 고무관을 통해 전달되는 혈액을 보면서 만족한 듯이 말하였다.
“저러한 방식이면 쉽사리 목숨을 구할 수 있겠군. 본디 피라는 것이 한번 흐르면 기력과 함께 채워지는 것인데.”
“수혈이 만능은 아닙니다. 그 이후에도 해야 할 일이 많고도 많지요.”
사정거리 밖에서 명중한 머스킷 탄환이라 위력이 약해져 있다. 그래도 급소를 맞으면 즉사에, 위험한 곳을 맞은 병사는 회복하지도 못 하고 명을 달리할 정도의 위력이다.
당연히 의사들은 정신없이 몸을 놀려 중상자들의 삶의 끈을 이어갔다. 탄환 적출, 봉합, 지혈을 비롯한 기타 치료를 마치고 마무리로 엄청난 양의 설파제를 투여하고 있었다.
이런 치료에도 사망자가 간간이 생겨나자 태자가 고개를 숙여 이들에 대한 위로를 하였다. 그리고는 이 삶의 전쟁터에서 나가자는 눈치를 하며 몸을 돌렸다.
“더 이상 있어보았자 뭘 하겠소. 우리는 밖에서 들어온 사람들, 온몸에 세균이라는 질병을 덕지덕지 달아둔 꼴이니 어서 나가도록 합시다.”
“옳은 말씀이옵나이다.”
다음 순서로 병실에서 병사들을 위로하자 작전 회의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자리에 착석하자 사단장들 가운데 현장에 파견된 장성을 제외한 이들이 모두 들어왔다.
어재연을 대신하여 이최응의 휘하에 있던 사단장 이용희(李容熙)가 작전 경과를 보고하였다. 점점 더 상세하게 수정되는 작전 지도에 여러 요소가 추가되었다.
“지난 닷새 동안 병사들이 제법 손해를 보았습니다. 대신에 우리도 많은 이득을 얻었지요.”
추정 교전비는 1:15 혹은 그 이상, 지금까지 병사 오백여 명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고 태평천국군은 최소 칠천여 명 이상이 죽거나 부상당하였다.
그나마 돌격보다는 훨씬 나은 형편이다. 추산 피해가 오천 명을 훌쩍 넘어설 수준이다.
“생각보다 손실이 크구려. 외부대신이 보기에는 어떠하오.”
“감내할 만 한 손실입니다. 닷새 만에 적의 세력이 눈에 띄게 위축되었습니다.”
물론 감내할 수준이지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다. 일준이에게 급히 서신을 보내 봤는데 독가스는 꿈에도 꾸지 말라고 딱 잘라서 답이 왔다.
염소가스나 시안화수소 계열 가스는 어떻게든 가능한데 아군 희생이 커서 못 주겠다더라. 그렇다고 내가 원하는 최루가스 계열은 엄두도 못 내고.
대신 다른 장성들이 내 방식을 개량하고 발전시켜 적용했다. 이용희는 사상자 추정 도표를 보여주면서 결과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우리 병사들이 가랑비에 옷이 젖듯 조금씩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반면 상대는 장대비에 두드려 맞은 꼴이 되었는데 이 위에 우박이 내릴 조짐이 보이지요.”
“그간 참호를 많이 연장했나 보구려.”
“바로 보셨습니다. 예정보다 참호 설치가 조금 빨리 진행되어 이레 정도가 지나면 적 참호선 앞에 십혈포를 배치할 수 있을 겁니다.”
후방 진영에서 시작된 참호는 점차 태평천국군의 진형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십혈포의 유효 사정거리인 300m까지 참호가 연장되면 바로 십혈포를 운반해 설치할 예정이다.
“이미 여러 실험을 통해 십혈포를 평지에 방열하면 손해가 크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반란군이 간혹 사용하는 강선 소총의 사정거리를 감안할 때 저격당할 가능성이 크지요.”
“청도 조차지에서 벌인 전투에서 십혈포 사수 세 명이 당한 전적이 있지. 다만 참호 안에 십혈포를 두면 조준도 난해하고 포병 사격에 당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청도 조차지에서 사용하는 개틀링 건의 무게는 전비중량 기준 240㎏에 달한다.
이 괴물을 설치하는데 6명의 숙련병 기준으로 15분, 분해하는 데도 동일한 시간이 걸린다. 설치를 시작하면 사실상 30분 동안 포격에 노출되는 꼴이다.
태자의 이야기를 들은 이용희는 다 생각이 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막사 밖으로 손짓을 하여 새로운 물건을 보여주었다.
“지금 황하를 점거한 해군의 협조를 받아 좋은 물건을 여럿 가져왔습니다.”
“이건 수동 십혈포 아니오?”
일준이가 만들어낸 괴물 대신 상식적인 물건이 수동 십혈포다. 본래 역사와 별반 차이가 없는 녀석이며 크랭크를 돌리는 방식이라 분당 발사속도는 60발 이하로 제한된 물건이고.
대신 무게는 75㎏에 불과하고 바퀴가 달린 삼각대를 사용할 수 있어 갑판 위에서 이리저리 옮길 수도 있는 여러 장점이 있다.
이용희는 이 십혈포를 손등으로 두드리며 말하였다.
“여기에 십혈포 운용이 가능한 해군 장병도 오백여 명 정도 데려왔습니다. 대신 그 자리에 육군에서 사용하는 십혈포와 장병을 보내 틈을 메웠사옵니다.”
“놀라운 일이구려. 내가 내린 명령을 이런 방식으로 이행하다니.”
“태자전하께서 소장에게 모든 전력을 동원하라는 명을 내리신 덕분이옵니다.”
태자가 내린 명령은 ‘사용 가능한 모든 전력’을 동원하라는 방침이었다. 당연히 육군이던 해군이던 태상황과 황제 아래의 통수권자, 태자의 명령을 들을 의무가 있었다.
이용희는 이런 명령을 적당히 이용하여 육군과 해군의 병장기를 교환한 것이다. 육군에 비해 가뜩이나 투자가 부족하고 활약도 적은 해군 입장에서 이 권고를 받아들인 것 같다.
육군과 달리 청록색 군복을 입은 해군 병사들이 십혈포를 막사 밖에서 이동시키고 즉각 방열하였다.
그 모습을 감상한 이용희는 태자에게 자랑스럽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참호 안에서 이리저리 십혈포를 옮기고 아예 참호 밖으로 꺼내서 방열할 수도 있사옵니다. 반란군 입장에서 어떻게 볼지 궁금하지 않사옵니까?”
“해군도 공을 세울 길이 열려 아주 열심히 일할 것 같구려.”
“바로 보셨사옵니다. 전공에 목이 마른 병사만큼 우수한 인재는 또 없사옵니다. 옛 시대라면 창칼을 들고 무턱대고 달려들어 고혼(孤魂)이 되겠지만 이제는 아니옵나이다.”
태평천국군도 불길하게 파고드는 참호를 확인하고 뭔가 대처를 하려고 꾸물거리고 있었다. 이용희는 전방에서 들려오는 보고를 종합하여 이 대처에 대해서 논하였다.
“적이 택할 방도는 세 가지이옵니다. 하나는 방어선을 사수하는 것, 다른 하나는 천천히 퇴각하고 후속부대가 시일을 지체시키는 것, 마지막 하나는 덮어놓고 돌격하는 것이지요.”
“뭘 해도 손실이로군. 나라면 후속부대를 남겨두고 시일을 지체시키겠소.”
“바로 보셨사옵니다. 만 명 정도를 희생시키고 퇴각하는 것이 옳겠지요. 물론 상대가 덮어놓고 돌격하면 더욱 재미있을 것 같사옵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더라도 태평천국에게 남은 것은 방어선 붕괴 외에는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도 불리한 교전을 펼쳐야 하는데 점점 더 상황이 악화되어 간다.
수동 개틀링 건이 들락거리면 참호 밖으로 고개조차 내밀지 못하고 움츠리게 된다. 비라도 내리게 되면 참호 안에 갇혀서 총탄을 상대로 총검을 내밀어야 하고.
여러모로 개운한 기분이 들어서 만족스럽다. 내가 내놓은 전략을 장수들이 개량하고 발전시키는 모습을 보면 이 나라의 군사기술 발달에는 더 이상 손을 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개인 막사로 돌아가 각지에서 보내오는 소식을 기다렸다. 아마 보름 정도 지나면 프랑스가 첫 병력을 상륙시킬 시기라 다음 조율도 필요하던 차였다.
“박 후작님, 공친왕 전하께서 후작님께 접견을 요청하였습니다.”
“알겠네. 내가 직접 나가보지.”
증국번은 후방에서 휘하 병력을 훈련하고 공친왕은 최전선까지 나와 병사들을 독려하였다.
그런 사람이 접견을 요청할 줄은 몰랐는데 이유가 다 있었다.
초췌해질 대로 초췌해진 공친왕은 내가 막사 밖으로 나서자 눈을 부릅뜨고 달려와 내 양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간곡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변란이 일어나고 시일이 두 달이나 지났네. 그에 대해 논할 바가 있는데.”
“알겠습니다. 처소에서 논의를 하시지요.”
공친왕의 막사는 나름 청나라 왕공족임을 존중하여 회의용 막사보다 크고 튼튼한 재질이었다. 푸른색 천을 대량으로 사용한 막사 안에는 청나라 물건들이 가득하였다.
옻칠을 하고 화려한 금으로 상감한 탁자에 마주앉자 공친왕이 눈을 흘기며 말하였다.
“궁금한 사항이 있네. 어찌하여 이 나라의 영웅호걸들이 응하지 않는 건가?”
공친왕은 그나마 자신의 지분을 챙기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어떻게든 의병들을 규합하고 각 지방에서 도주한 팔기군을 끌어들여 병력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그 병력이 내가 깔아놓은 안배에 의해 거의 모이지 않는 실정이었다. 나는 정중한 표정으로 공친왕에게 이 문제점에 대해 답해주었다.
“저희가 맺은 약조를 다시 살펴봅시다. 공친왕 전하께 복속되기를 청하는 자와 피난민 가운데 의탁하기를 원하는 자를 모두 배정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래. 그 사실은 명심하고 있네.”
공친왕은 홍수전이 격파되면 자신의 기반을 토대로 북경을 장악해 대한제국과 거래를 할 생각이었다. 많은 것을 빼앗기더라도 나라를 되찾을 수 있는 기반 정도는 마련하려고.
그래서 태평천국에게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의병으로 끌어들이려 하였다. 문제는 내가 지금까지 해온 일 때문에 이런 작업이 불가능하였다.
홍수전의 반란에 직면한 청나라 백성들은 만주족과 태평천국 모두를 혐오하고 있었다. 그의 장밋빛 상상과 달리 극히 일부만 대한제국에게 몸을 의탁하였다.
“피난민 삼만여 명에 제대로 몸을 건사하지도 못하는 만주족 사천여 명으로 뭘 하겠나?”
내가 뿌려놓은 밑밥 덕분에 모든 일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지금까지 전쟁에 휩쓸린 피난민이 사십여 만 명 정도가 생겨났는데 이들 대부분이 대한제국에 신변을 의탁했다.
이들은 각지의 항구로 들어온 지방 사단의 예비 병력과 보조 인력들이 통제하고 있다. 이 임시 거주지 편성작업에 소모된 병사가 만 명에 보조 인력이 삼만여 명에 달하고.
반면 청나라 조정에 신변을 의탁한 자들은 삼만여 명에 불과하였다.
이런 사람들은 소식이 늦은 자들이거나 만주족에게 붙어먹고 살아서 후환이 두려운 이들이겠지.
공친왕은 분노로 눈꺼풀을 씰룩거리며 의심과 분노를 담아 말하였다.
“혹여나 우리를 속여 피난민을 죽이고 만주족을 학살하고 있나?”
이제는 분노를 넘어서서 우리를 의심하기까지 하였다. 피난민을 덮어놓고 죽이는 건 총탄 낭비라 당당하게 답하였다.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당장 전선에서 사용할 총탄도 부족해질 시점인데요.”
“그럼 더더욱 말이 안 되는 일 아닌가! 내 청나라의 왕공족이자 대한과 약조를 맺은 사람으로서 명령을 내리겠네. 지금까지 이 나라 백성과 논한 일을 모두 고하게!”
평상시에는 사리에 밝고 이치에 맞는 말을 하던 공친왕은 이제는 판단조차 제대로 못 할 정도로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있었다.
당장 윽박지르고 내부 사정이니 말할 수 없다고 핀잔을 줄 수도 있지만 꾹 참고 현실을 알려줄 때도 되었지.
“그럴 때는 명령이 아니고 권유이지만요. 자료를 드릴 테니 읽어보시지요.”
공친왕에게 현실을 알려주기 위해 이홍장과 주고받은 서신의 일부를. 대외적으로 공표할 수 있는 거래 장부를 보여주었다. 여기에 청나라 피난민들에 대한 서류도 보여주었다.
식자층을 대상으로 삼은 간단한 설문조사였다. 대한제국을 얼마나 도울 것인가를 상, 중, 하의 세 가지 분류로. 만주족을 얼마나 도울 것인가도 동일한 분류로 설정했다.
대한제국에 대해서는 세 항목 모두가 골고루 분포되어 있었다. 그래도 하, 돕지 않겠다는 응답이 다른 두 항목에 비해 상당히 적었다.
반면 만주족은 압도적으로, 약 85%가 하를 차지하고 아예 죽이겠다는 방식의 응답 거부까지 있었다.
그나마 북경 내부라면 좀 나은 형편일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 시점이고 대한제국이 북경을 해방하면 최소 절반 이상의 백성들이 우리의 편을 들어줄 거고.
공친왕은 몇 번이고 서류를 확인하였다. 개중에 저주가 섞인 글귀, 만주족의 봉분을 죄다 뒤엎어버릴 것이라는 증언을 몇 번이고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말이 안 되는 일이야! 이 말도 안 되는 꼴을 어찌…….”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라를 잘 다스려 백성들이 평안하였다면 뜻이 일치하겠지요. 그렇게 되었으면 만백성이 전하의 아래에서 충성하였을 것 같습니다.”
공친왕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현실을 부정하는 것 같이 뭐라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여기에 쐐기를 박아주었다.
“이 상황을 보아하니 각 지방에서 올라온 만주족 병사들이 적은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태평천국의 목표가 되거나 이곳저곳에서 습격을 당해 몸조차 건사하지 못하였겠지요.”
“그래도 북경이 수습되면 사람들이 더 많이 몰려올 것 같은데.”
더 이상 말을 못 하는 꼴을 보니 공친왕은 북경을 함락시키는 데 공헌하여 나라의 기반을 마련할 생각 같았다.
물론 만주족이 공헌을 할 거다. 그 만주족은 공친왕의 지휘를 받지 않고 외몽골 기병과 합동작전을 벌일 사람들이지만.
이미 공친왕이 청나라 황실을 부흥시킬 최후의 수단도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 사실을 굳이 말하지 않고 공친왕에게 할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저희는 언제나 신뢰와 공정을 바탕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군대로 만들고 훈련을 시켜 병사로 탈바꿈하는 작업은 모두 전하의 손에 달려있음을 명심하십시오.”
내 예상대로라면 공친왕이 만들어낼 수 있는 병력은 잘해야 3만여 명이다. 이마저도 말이 병력이지 뱃살이 뒤룩뒤룩 찐 만주족이 대부분을 차지할 수준이다.
그도 이 현실을 알고는 있었다. 다만 한 나라의 왕족으로서 어떻게든 국체(國體)를 유지하기 위하여.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을 온존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많은 결실을 맺을 수 있기를 기원하겠습니다.”
다음 날, 공친왕은 막사에서 나아가 피난민들을 만나보고 설득하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아무런 결실을 맺을 수 없는 그와 달리 대한제국은 착실히 적을 몰아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사태가 급격히 진전되는 계기가 생겼다.
방어선에 도달하고 도합 11일이 지날 무렵, 저녁부터 먹장구름이 끼더니 급기야 한밤중부터 비가 내렸다.
“전 장병 기상! 우천이다! 동이 튼 직후 적진을 향해 돌격한다!”
잠에서 깨어난 병사들은 짜증을 부리는 대신 환호성을 질렀다. 지금까지 허송세월을 하게 만든 방어선을 뚫고 적진으로 돌입할 기회라 생각하였다.
“드디어 저 참호를 뚫는다!”
“오래 기다렸다! 마침내 때가 당도하였다!”
한밤 내내 내린 장대비는 동이 틀 무렵 이슬비가 되었다. 적의 화약이 폭삭 젖어버리고 머스킷을 쏠 수 없는 반면 대한제국의 병사들은 조심해서 총을 쏠 수 있는 상황이다.
혹시나 몰라 잘 보관된 머스킷을 시범 발사하였다. 습도가 급격히 높아지며 불똥이 제대로 튀지 않았고 가까스로 한 발을 발사하고 재장전을 하자 완전히 침묵하였다.
“전군! 돌격준비!”
“진흙 구덩이를 주의하며 돌격하도록!”
전방과 후방을 가리지 않고 병사들이 기세를 올려 전열로 나아갔다.
지금쯤 홍수전 휘하 장수들이 어떤 결단을 내릴지가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