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화
25장 4화 앞으로 잘하는 법
양주목의 마재, 31년 전에 조선시대에 떨어질 때 정약용이 늑대 무리에게서 우리를 구출한 마을은 예전과 다르게 많이 발전하였다.
내 의부(義父), 양아버지나 마찬가지인 정약용이 머물던 장소이다. 여기에 정약용을 도와 늑대 무리를 구출한 마을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일준이도 나도 목숨을 구해준 마을 전체에 후원금을 보내고 여러 혜택을 주었다. 31년 전에는 진창길이던 곳에는 내 후원금을 받아 보도블록으로 포장된 대로가 있었다.
“양조부님께서 한때 머무르시던 마을이 참으로 보기가 좋은 곳이 되었군요.”
“부친께서 간혹 자금을 보내시던 적이 있는데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복숭아나무와 자두나무는 열매를 맺었고 지금은 국화가 사방에 피어있습니다.”
나를 따라온 은찬이와 은진이는 마을의 전경을 바라보고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정약용이 살아 있을 때에는 몰라도 죽은 다음에는 마을 사람들이 나서서 심은 것이다.
이들은 우리가 베푼 자금으로 자연스럽게 집안이 융성하였으며 그 근본이 정약용에게 있음을 알고 있었다. 묘지로 향하는 길에는 수많은 국화가 자라고 있었다.
그 국화 언덕 한가운데는 내가 머물렀을 때 바로 앞집에 살던 사람. 의금부에 정약용과 나와 일준이가 끌려갈 때 발을 동동 구르던 사람이 있었다.
“외부대신님 아니십니까? 여기까지 어인 일이신지요?”
그는 저물어버린 국화 송이를 따내며 밭을 관리하다 나에게 인사를 올렸다. 어느새 일흔 살이 되어버린 노인의 인사를 가볍게 받아주었다.
“나라의 대업을 달성하여 여유당 선생님께 제사를 올리고 성묘도 겸하려 하네.”
“청나라에서 변고가 벌어진 적이 있었지요. 그 변고가 이 마을에도 해악을 끼쳤습니다.”
“마을에 해악이라?”
은찬이는 뭔가 안다는 듯이 쭈뼛거리며 나서려는 눈치였다. 그 모습을 보고 노인은 한숨을 깊게 내쉬며 은찬이를 잠시 바라보다 말하였다.
“이 마재에서 나라에 이바지하겠다며 군문에 나선 집안이 넷이나 됩니다. 그 가족 가운데 줄초상이 나서 장남과 차남이 모두 비명횡사한 집이 있지요.”
“군문에 나선 집안이 넷이라.”
우리가 보낸 돈이 들어오고 가세가 융성하여 자식들에게 학문을 가르칠 수 있었겠지. 다만 체계적으로 학문을 가르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기껏해야 의무교육을 이수하고 몇 년 정도 학문을 배워 출세의 발판을 디디려 할 것이다. 예전의 은찬이와 비슷하게 장교 생활을 이수할 생각이 앞섰겠지.
이미 조-청 전쟁으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부모 세대의 소문을 듣고 가급적 장교, 그게 아니더라도 글과 지식을 알고 있는 장기 복무 병사로 가닥을 잡은 것 같았다.
“언젠가는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고 있었지요. 그런데 차남은 기습을 당하여 죽고 장남은 한 달 내내 파상풍이라는 병을 앓다 이역만리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뭔가 말을 하고 싶은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파상풍이 제대로 걸리면 항생제를 마음대로 쓸 수 있는 현대에도 목숨이 위태로울 지경이다.
하물며 이 시대라면, 상처가 회복되고 있다 생각할 무렵 덮치는 파상풍은 막을 방법도 없다. 노인은 고개를 푹 숙인 다음 말하였다.
“감히 여쭈어 보겠습니다. 외부대신님은 전쟁을 막을 수 있었사옵니까? 혹여나 이번 전쟁을 방임한 것이 아닙니까? 그리하여 줄초상이 난 것이 아닌지요?”
“그런 말을!”
은찬이가 멋대로 나서려 해서 손을 들이밀어 제지하였다. 그리고는 노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다음 진실을 말하였다.
“그렇소. 내 양심을 걸고 그렇다고 말하겠소이다.”
노인은 내 눈을 바라보더니 시선을 회피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다시 국화를 다듬으려 허리를 숙이고 지나가듯이 말하였다.
“높으신 분의 뜻을 저 같은 민초가 알 리가 없지요. 그러나 조금이라도 사람이 덜 죽는 방법이었다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이미 벌어진 일을 어떻게 수습할 방법이 없다. 나는 정약용에게 성묘를 마치고 옛집으로 돌아와 제사를 올린 다음 하루를 푹 쉬고 돌아왔다.
돌아오는 동안 등 뒤에서는 두 자식을 잃은 부모의 곡소리가 들려왔다. 그 장례식에 차마 참가할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변명을 해봤자 내가 전쟁을 방치하였고 이를 이용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정약용의 말 대로 잘해야 하는 것. 단 하나이다.
* * *
다음 날 아침 효명제와 면담을 가졌다. 그는 피로가 가득한 눈으로 내 얼굴을 한번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들기면서 나에게 질문을 하였다.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마음속에 응어리가 진 것 같았는데 해소는 하였소?”
“앞으로 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명확히 깨우치게 되었사옵니다.”
“그러하면 되었소. 지금까지 태자와 외부대신에게 여러 일을 일임하였는데 이제 그 일을 정리할 차례요. 지금 청나라와 연관된 상황이 어떠한지 궁금하구려.”
효명제는 후방에서 물자를 공급하고 군사 관련 행정을 담당하였다. 이는 태자와 나의 판단을 존중한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알아서 처리한 일에 대한 보고를 효명제에게 순서대로 정리해 말하였다. 효명제는 모든 사항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답을 하였다.
“이미 설명을 들은 대로군. 그러하면 다른 국가의 움직임이 의문인데.”
효명제가 손짓하자 작전 지도의 남경 부분에 각 국가의 국기가 올려졌다. 영국의 깃발을 시작으로 남경 공략에 참가한 연합군의 국기가 하나씩 추가되었다.
여기에 대한제국과 일본의 국기는 좀 외곽에 떨어져 있었다. 효명제는 예전에 내가 올렸던 보고를 상기하듯이 불편한 심기를 담아 말하였다.
“내가 알기로 영길리는 옛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움직였소. 그러한 나라가 어찌하여 남경의 분할 정책을 논하고 남중국 일대를 분할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거요?”
“이유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처음은 경쟁국인 불란서의 견제이옵니다.”
“고작 불란서의 행동 때문에 실리를 버릴 것이라. 지금 변방 오지를 뚫고 지나가는데도?”
“그 기세가 참으로 위험할 지경입니다. 아마 가장 큰 영토를 차지할 것이옵니다.”
석달개를 앞세운 프랑스는 광주를 시작으로 종횡무진 진격하였다. 일대가 미개발 지역이건 뭐건 간에 협력자는 태평천국 최고명장 석달개다.
석달개 개인은 이미 1만이 넘는 병력을 확보하고 아편의 뿌리를 뽑았다. 가끔 화력지원을 할 때 프랑스군이 나서며 사실상 그의 놀라운 진격이 계속되었다.
내가 손짓하자 호남성 일부, 강서성 일부를 점령한 프랑스의 깃발이 올려졌다. 이제는 해안 일대를 먹어치우려는 모습이 한눈에 보이는 진격 속도였다.
여기에 베트남도 만만치 않았다. 국경을 접한 광주의 서쪽, 광서성을 야금야금 먹어치우고 경애(琼崖 - 현 하이난 섬)에도 발을 들였다.
“불란서는 한번 먹어치운 영토를 뱉어내지 않을 것입니다. 석달개라는 뛰어난 장수를 앞세워 대월과 영토를 나누고 일대를 대월과 연계하여 통치할 것이옵니다.”
“언제나 패권을 노리는 국가이니 당연한 일이지. 그다음 이유는 뭐요?”
“이건 신의 가정에 불과합니다. 하오나 실리를 추구하는 영길리 입장에서 생각하여 내린 결론이옵니다.”
다음으로는 내 손이 움직였다. 영국의 국기를 옆에서 가져와 타이완 섬 위에 올려다 놓고 효명제를 바라보면서 말하였다.
“두 번째 이유는 영길리의 속내이옵니다. 남경을 장기간 지배하는 대신 대만이라는 거점을 노릴 것이 분명하옵니다.”
“대만이라? 그곳은 유배지보다 좀 나은 장소인 데다 내륙에는 원주민이 사는 형편이지.”
“삼십 년 정도만 꾸준히 투자하면, 더군다나 영길리가 남경에서 거둔 세금을 투자하면 아니 될 일이 없사옵니다. 그 정도가 지나면 모든 사람이 영길리에 복속할 겁니다.”
영국은 영토를 정복한 다음 철저한 법률과 규칙에 의거하여 통치한다. 만약 영국에서 타이완 섬을 점령하면 가장 먼저 할 일은 토지 재분배와 이권 분할이다.
한족과 원주민 사이에 얽힌 일을 그나마 제국주의적 관점에서 정상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국가다. 수틀리면 모조리 죽이는 프랑스와 비교하면 선녀가 따로 없지.
효명제도 영국의 이러한 방침은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나에게 마지막 이유를 물어보았다.
“불란서를 견제하고 장기 통치가 불가능한 남경에서 세금을 거둬 영구적인 영토를 삼을 것이라. 그러하면 마지막 이유는 뭐요? 내가 보기에는 중요한 점이 빠진 것 같은데.”
“신의 판단으로는 영길리의 정치인들이 이 나라의 중흥을, 정확히는 천명을 주어 삼켜 청나라를 지배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사옵니다.”
“푸흡!”
효명제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웃음을 터트리더니 어떻게든 표정을 관리하였다. 그를 비롯한 대한제국의 중진들만큼 청나라의 실상을 잘 아는 사람이 없다.
청나라는 이미 망가진 국가이다. 지배층이 부패한 건 당연하고 그 아래도 대부분 부패해 있다. 이건 조-청 전쟁으로 확인된 결과이고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이미 엉망진창의 나라인 데다가 어설픈 개혁을 시도하며 더 망가졌다. 자기가 길을 걷다 혼자 자빠지고 시궁창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신세다.
그 엉망진창의 나라를 대한제국이 집어삼킨다면? 앞으로 50년 이상 돈을 퍼부어가며 올바른 제도를 주입하고 쉴 새 없이 부정부패를 처단하는 과정에서 아무런 발전도 못 한다.
그 과정이 끝나도 문제다. 인구 4억의, 아마 올바른 통치로 5억 5천만 명이 될 막대한 인구에 짓눌리고 여론이 휩쓸려 자연스럽게 중국의 일부가 되어버린다.
효명제는 상상조차 못 하였는지 한참 동안 웃음을 참다가 답하였다.
“웃어서 미안하군. 이 나라가 옛 만주족처럼 입관하여 황위를 노릴 것이라 생각하였는가. 애초에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대비하다니.”
“그게 올바른 방침이옵니다. 언제나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야 하는 법 아니옵니까?”
“그래도 너무 우스워서 말일세. 하긴 겉으로만 보면 이 나라가 삼정의 문란을 해소한 것처럼 청나라도 몇 년 이내에 제도를 정비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이기는 하지.”
효명제는 다시금 깃발을 움직였다. 북경 일대에는 외몽골을 묘사한 말 모양의 깃발을 들여다 놓고 연운항에는 중화민국의 깃발을 가져다 두었다.
“영길리가 중화민국이라는 국가를 모르고 있어서 다행일세. 그나저나 주제에서 어긋나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중화민국은 어떻게 해야 하나?”
효명제는 나에게 상소문을, 중화민국의 통령인 이홍장이 보내온 서신을 건네주었다. 그 서신에는 ‘조만간 형님이 통령에 오르면 왕위를 내려주십시오.’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그다음 상소문은 이한장이 보내왔다. 이 양반은 더욱 엉뚱하게도 ‘동생이 훌륭한 사람이니 왕위에 올라야 합니다. 대통령이 되면 왕으로 올려 주시옵소서.’라고 적혀 있다.
이게 말인지 방구인지 모를 지경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어떠한 지식도 없이 그냥 국가의 대표 = 왕이라 치환한 결과물이다.
내가 상소문을 돌려주자 효명제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리며 말하였다.
“이 형제는 뭘 생각하고 있는 건가? 장교가 멋대로 논한 민주주의고 뭐고 간에 선거인단도 없이, 제도도 없이 받아들이고 자신이 아닌 다른 형제를 왕으로 올려달라고 하였는데.”
“참 우애가 깊은 형제이옵니다. 그 우애도 이용할 방법이 있을 것 같사옵니다.”
설립할 때는 괴뢰국가를 만들 작정이었는데 이홍장과 이한장의 태도를 보니 영국 앞에서 표본으로 삼기 딱 좋은 세력이 중화민국이다.
이홍장은 전형적인 지휘관에 안목이 넓고 태도가 담대하다. 반대로 이한장은 내정을 관리하고 내실을 다지는데 능력이 있지.
이 두 형제는 서로 힘을 합쳐 본래 역사의 태평천국을 무너트리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런 형제를 앞세워 괴뢰 국가가 아닌, 자주국을 세우는 식으로 접근해야 할 거다.
“우애를 이용한다. 어떻게 이용할지는 모르겠지만 본론으로 돌아가세. 우리는 어떤 태도로 임해야 하는가. 이 영길리의 정책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겠는가?”
“신의 판단은 간단하옵니다. 영길리의 개입이 없었다면 천명을 거머쥐고 대륙을 호령할 생각을 품었지만 이 원대한 뜻이 영길리의 견제로 물거품이 된 것이옵니다.”
떡 줄 생각도 안 했는데 김칫국을 들이켠 놈이 있다. 그럼 떡을 쥔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떡을 주되 뭔가를 받아내야 한다.
대한제국은 영국의 쓸데없는 견제를 당했다. 그 쓸데없는 견제도 일단 시행한 순간부터 외교적 책임이 되어서 대한제국이 뭔가를 받아낼 수 있다.
“이 대한은 동방의 최대 강국이 될 기회를 상실하였사옵니다. 물론 여러 고민을 하고 뜻을 정하기도 전에 영길리의 남중국 분할 정책으로 기회조차 잡지 못하였사옵니다만.”
“거기에 홍수전을 사로잡는 세력에게, 아마 외몽골이 확실시된 이들에게 북경과 하북성 일대를 넘겨주는 꼴이 되었지.”
“바로 그것이옵나이다. 이 나라는 동방 최대 강국의 지위를 포기한 대신 내실을 다지고 최대 강국 대신 패자(霸者)가, 패권을 거머쥘 기회를 대신 얻어내려 하는 것이옵니다.”
“그러하면 노서아(러시아)를 견제해야겠군. 아주 확실하게 견제해야지.”
효명제도 대한제국에게 필요한 것이 뭔지는 알고 있다. 이미 청나라를 쪼갤 생각이고 영국이 쪼개자고 제안을 했으니 분열된 동방에 영향력을 행사할 세력은 러시아다.
아마 외몽골이 북경 일대를 집어삼키면 견제를 시작할 것이다. 그다음으로는 연해주와 사할린 일대를 노리며 차근차근 공세를 시작하겠지.
여기에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추가 명분으로 삼을게 확실하다. 다만 효명제는 대한제국에 있는 변수를 생각하지도 않은 채 말하였다.
“노서아의 힘을 빼놓을 방법이라. 영길리의 개입이 그 정도로 효과적이진 않을 것 같은데.”
“태상황께서 훌륭한 사람들을 육성하였사옵니다. 이들이 조만간 벌일 일을 감안하면 영길리의 힘이 조금만 들어가도 노서아가 뒤엎어질 것이옵니다.”
“태상황께서 뭘……. 아! 동티단 말이로군!”
조만간 삼강평원으로 돌아갈 동티단이다. 최고의 장비를 지급하고 공성전과 시가전 훈련을 마치고 실전까지 투입한 인재들이 대한제국에 있다.
여기에 동티단을 급하게 훈련하느라 숫자가 적을 뿐, 계속 유입되는 러시아 이주민들을 감안하면 그 수는 조만간 몇만 단위로 불어나고도 남는다.
“그러하군. 태상황께서 논하신 바에 의하면 동티단의 원대한 뜻은 노서아로 돌아가 포악한 간신을 쳐내는 것이라 하였네. 그 뜻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누구나 알고 있겠지만.”
“내란이 벌어질 때 동티단이 합류한 혁명군에게 약간의 힘만 보태도 될 일이옵니다. 노서아에서 이들보다 험난한 전투를 벌인 이들은 카자크 기병이 전부이옵나이다.”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면 대한제국의 후원은 물론 가르침을 받은 이들이 집권한다. 그 과정에서 협력한 여러 귀족들이 함께하겠지만 부수적인 세력에 불과하지. 그 혁명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영국이 관여하는 걸 요청할 생각이다.
효명제는 계산을 마쳤는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에게 명령을 하달하였다.
“조만간 벌어질 회담에서 최대 강국을 포기하고 패권을 거머쥔 것이라 말하게. 이를 기준으로 삼아 청나라를 분할하되 영길리에게도 막대한 짐을 지워주도록.”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하오면 폐하께서도 입을 맞추어 주시옵소서.”
“여부가 있겠는가. 외부대신의 말대로 짐이 심히 진노하였음을 드러내겠네.”
나를 돌려보내고 외국에 보내는 국서의 초안을 작성하려던 효명제의 손이 멈추었다. 그는 방에 새로 놓인 청나라의 유물을 확인하고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또한 회담이 열릴 때까지 여섯 달 정도 걸릴 예정일세. 그동안 국채(國債)를 사들인 투자자들을 우선으로 경매를 열 생각이라네.”
“유물의 경매 말씀이옵니까?”
내가 돌아오기 전 결정된 사항에 의하면 청나라에서 가져온 유물 14만 점의 배분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권리를 가진 유물 7만 점은 질이 좋은 유물을 제외하고 모두 민간에 판매한다. 이후 대여한 유물 7만 점과 합쳐 영구 소유권이 아닌 보관의 권리를 주고 각 박물관과 기관에 보낸다.
만에 하나 대여한 유물을 돌려줄 때 손실되었다면 보상처리를 할 예정이다. 그 경매가 지금 열릴 줄은 몰라서 저절로 가슴이 콩닥거리고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 경매는 고고학자들이 모이는 열흘 뒤에 개최될 예정이지. 참가할 생각이 있다면 서둘러 참가하도록 하세나.”
“폐하께서 신을 어여삐 보아주시니 참으로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효명제에게 인사를 올리고 물러났다. 우리 주머니 안에 들어온 유물 가운데 가치가 있는 유물을 언제쯤 살 수 있을까.
그런 마음을 품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조카사위 왔는가.”
“아…… 처숙부님 아니십니까?”
방 안에 들어가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리며 퀭한 눈빛의 김좌근이 주름살을 잔뜩 찌푸린 채 나를 노려보았다. 그는 짜증을 한껏 담아 나에게 말하였다.
“자네는 정신을 어디다 팔고 다니나? 아무리 성묘가 중요하고 제사가 중요하여도 산 사람을 먼저 보지 않고! 내가 기다리다 지쳐 먼저 집에 들어왔다네!”
하인들이 차를 내왔는지 김좌근은 녹차를 들이켜며 짜증을 섞어 나를 흘겨보았다. 그리고는 엄지와 검지를 모아 ‘ㅇ’ 자를 만들고는 말하였다.
“그 내가 말한 물건은 챙겨왔나? 조만간 경매가 열린다는데 화려한 물건이면 안 줘도 되고.”
“그리 좋은 물건은 아니지만 하나 챙겨왔습니다.”
청자로 만든 주제에 상감도, 아무런 특색도 없는 다층구를 김좌근에게 주었다. 그는 손가락을 넣어 안의 구슬을 이리저리 돌려보고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였다.
“참 특이하긴 한데 제대로 만든 것 같지도 않고. 이거 보게나, 이 방향으로 굴리면 안에서 턱턱 걸리면서 제대로 굴러가지를 않아.”
“적당히 작은 물건이라 하셔서 알아서 챙겨왔습니다만.”
“아니 뭐……. 내가 말한 바를 그대로 이행하여서 다행이긴 하군. 근데 내 취향은 아니라 경매에 내놔도 되겠나? 선물 받은 입장에서는 미안한 말이네만.”
이게 뭐가 중요한 유물이라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김좌근은 미리 가져온 나무상자에 청자 다층구를 넣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하였다.
“이걸 팔 생각은 아니고 그냥 ‘내가 이런 유물을 좋아합니다.’ 하면서 내 검약을 증명하려 할 생각이네. 오히려 화려하지 않은 유물이라 잘되었군.”
김좌근은 다 생각이 있다는 듯이 후련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졸지에 내 선물이 경매에 올라가게 되었는데 어떤 평가를 받을지 도저히 모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