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327화 (293/345)

327화

25장 6화 선조건

아직 한양에서 골동품과 유물 경매가 진행되는 동안 영국에서 사람을 보내왔다. 파머스턴은 의회 자문위원 겸 동아시아 현장 조사 담당자로 파견되었다.

명목상으로는 영국 의회가 보낸 일개 자문위원이지만 그걸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파머스턴쯤 되는 사람이 그냥 올리는 없고 현장을 파악하려는 작업이 확실하지.”

그는 25년 전에 조선을 압박하는 것을 넘어서서 아예 지배할 생각을 품었다. 조-청 전쟁의 발발을 촉진하고 계획을 누설하면서 조선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그 철저한 계획도 청나라가 너무나 나약해서 물거품이 되어버렸고 정치계에서 추방당했었지. 심지어 그로 인한 상처가 길이길이 영국의 발목을 쥐고 있는 상황이다.

이미 두 달 전에 남경에 방문한 파머스턴은 현장 조사를 마치고 한양에 발을 들였다. 앞으로 한 달 뒤인 1861년 3월, 청나라 전후 처리과정이 진행되는 이 중요한 시기에 말이다.

영국 국기가 휘날리는 군함 위에서 장성들과 함께 파머스턴이 내려왔다. 그는 주변에 모인 사람들에게 인사를 올린 다음 자신의 방문 목적을 밝혔다.

“우리 영국 의회의 결단으로 인하여 대한제국의 권위가 손상되고 이권에 손해를 입은 것 같습니다. 회담 전에 미리 사과의 말씀을 드리기 위해 방문하였습니다.”

영어가 아닌 어설픈 한국어이다. 중국어도 좀 배웠는지 발음이 섞이기는 하는데 못 들어줄 정도는 아니네.

파머스턴의 인사를 받은 사람은 젊은 황족인 이변, 본래 역사의 철종이자 이 역사에서는 얼마 전 사망한 경양군, 심양왕의 후계자로 새 심양왕에 오른 자였다.

본래 역사에서는 요절한 비극의 주인공이지만 여기서는 순조와 효명제의 총애를 받는 왕족 중 하나였다.

그는 인사를 받자마자 선을 딱 긋고 할 말을 하였다.

“이런 자리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주상폐하께서 심히 노하시어 접견을 거부할 것 같소.”

“제 잘못이 있는데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저 감내해야 할 일이지요.”

“알고 있다면 다행이오. 다만 나이가 고희(古稀)가 넘은 사람을 함부로 대할 수도 없는 일. 한양에 숙소를 마련할 것이니 푹 쉬다가 돌아가시오.”

예전 파머스턴의 행동은 옛사람들에게는 나라를 말아먹을지도 모를 흉악한 대죄. 요즘 사람들에게는 상세히 알지도 못하고 날뛴 머저리로 인식된다.

그런 점을 고려하여 일단 한양 안에는 들여놓겠다는 소리였다. 인사를 마친 파머스턴은 주변을 둘러보다 나와 눈이 마주치고 목을 끄덕이며 인사를 하였다.

표면적으로는 효명제에 대한 사죄를 하면서 속으로는 영국의회를 대표하여 나와 정책을 미리 논하겠다는 태도였다. 아니나 다를까 파머스턴은 동양의 법도대로 접근을 시작했다.

-영길리의 자문위원은 속히 물러나시오. 폐하께서는 접견을 허(許)하지 않으셨소.

열흘 정도 지났을까, 파머스턴은 삼 일에 한 번꼴로 궁궐에 들어와 접견을 요청했고 효명제는 이를 거부하였다. 오늘도 이들은 돌아가라는 명령에 숙소로 바로 복귀하였다.

삼궤구고두례나 양 무릎을 꿇는 절까지는 아니더라도 동방의 예법을 존중하여 몇 번의 거절 정도는 이해하겠다는 뜻이었다.

이윽고 효명제에게서 명령이 하달되었다. 잠시 나를 부른 효명제는 퇴근 명령과 함께 파머스턴과 대화를 나누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영길리에서 파견한 자문위원에게 매운맛을 보여주도록 하라.”

“매운맛이라 하셨사옵나이까?”

“그러하다. 예전에 역심(逆心)을 품고 이 나라를 뒤흔들려 한 자이니 박 후작의 혓바닥으로 그 매운맛을 보여주면 좋을 것 같구나.”

말로 혼쭐을 내주는 척 적당히 대화를 나누고 오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매운맛을 정말 보여줄 생각도 있어서 파머스턴을 내가 자주 가는 음식점으로 불렀다.

“이 건물은 뭡니까? 볼가네?”

“대한에서 매운맛을 가장 잘 다루는 사람이오.”

이미 각 도시에 11호점까지 생긴 대한제국 최초의 체인점, 볼가네 효종갱 본점이었다. 안으로 들어가 봤는데 익숙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주인장은 어디 가셨나?”

언제나 1층에서 바삐 움직이던 폴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의 아들이 효종갱을 옮기고 나서 나에게 대답해 주었다.

“부친께서는 넉 달 전에 미국에 돌아가셨습니다.”

“미국에? 혹시 미국에 있는 지인을 자유의 몸으로 만들기 위해 간 건가?”

볼가네 효종갱의 직원은 모두 흑인이다. 폴은 돈을 벌 때마다 지인들을 미국에서 사들여 이들을 가르친 다음 분점을 만들어준다.

어느새 흑인이 만든 해장국이 맛있다면서 멀쩡한 국밥집이 흑인을 고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는데 폴의 아들은 난처하다는 듯이 말하였다.

“아닙니다. 얼마 전에 국립이학대학의 박사들과 면담을 여러 차례 가지시고 함께 가셨죠. 듣자 하니 자신이 꼭 끼어야 할 일이 있다던데요.”

이건 좀 의외의 일이다. 폴은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벌어 친척과 친인척을 미국에서 사 오겠다고 했었다. 그런 사람이 박사들과 면담을 하고 미국으로 떠날 줄이야.

뭔 소문을 들었을까. 이 가게는 국립이학대학 연구진들이 밤을 지새우고 음식을 먹기도 하고 정치인들도 술을 거하게 마시고 해장하러 오니까.

도성에는 볼가네 해장국을 한 달 내내 방문하면 거기서 들은 소식만으로 사업을 할 수 있고 연구 관련 대화를 대충 베껴서 회사를 창업할 수 있다는 소문이 있다.

그래서 정말 중요한 이야기는 한 층을 더 올린, 4층에 둔 특별실에서 나누기 마련이다.

특별실을 빌리는 동안 파머스턴이 중얼거렸다.

“흑인들이 운영하는 가게라니. 참 대단한 사람들이군요.”

그는 가만히 있다가 가게 안을 한참 살펴보고 말하였다. 그의 입장에서 흑인들이 귀족들이 먹는 음식점을 운영하는 것 자체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 것 같았다.

“흑인이 가게를 운영할 수도 있지요. 이렇게 열심히 운영해서 돈도 많이 벌고 있습니다.”

“이런 데서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미국의 흑인들이 부러워하고 남을 재주입니다. 그들은 설령 노예 해방이 되어도 예전처럼 목화를 따야 하지 않습니까?”

“아, 미국에서 일어날 사태 말이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파머스턴은 어느새 미국에서 일어날 남북전쟁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였다. 그 전쟁에서 링컨이 이기고 흑인 해방이 되어도 그들은 결국 목화밭으로 돌아갈 신세다.

해방된 흑인들은 노예 대신 푼돈을 받는 인부로 목화밭에서 평생을 구르다 약 60년 뒤에 진짜로 해방된다. 파머스턴은 더 이상 말하지 않으려는지 괜히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매운맛을 보여주겠다고 하셨는데 입이 부르틀 것 같군요. 고추냄새가 사방에서 작렬을 하는데 눈이 아려올 지경입니다.”

“지나치게 매운맛은 안 보여드리도록 하지요. 일단 별실로 듭시다.”

두툼한 벽돌 벽에 단열재를 쌓아서 대화가 새어나가지 않게 만든 별실이 우리의 회담장이 되었다. 숯을 넣은 화로 위에서 내장탕이 조금씩 끓어오르며 운치를 더 했다.

내장탕을 한 숟갈 먹은 파머스턴은 칼칼한 맛에 정신을 못 차리면서도 손을 계속 움직였다.

어느 정도 배가 불러올 쯤 화로를 내려놓고 본론을 시작하였다.

“박 후작님 정도 되는 분이라면 우리의 계획을 알고 있을 것 같습니다만.”

“네, 처음 계획을 눈치채고는 뒤통수가 얼얼해질 지경이었지요.”

“머나먼 미래를 위해서 대응한 것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대한제국이 청나라를 모조리 집어삼키게 되면 여론도 청나라의 것으로 움직일 터. 그럼 어떤 꼴이 나겠습니까?”

파머스턴과 영국 의회의 명분은 간단했다. 지금까지 해 온 일이 있는데 거대 강국이 된 대한-청나라의 합체 국가가 복수를 천명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겠지.

인구는 최소 6억 이상, 국가 면적은 유럽 전체와 맞먹는 데다 기술력 또한 보증된 사상 최강의 국가다. 현실성 이전에 그 거대 국가가 완성되는 순간 세력 균형이 뒤엎어진다.

“그 거대국가가 영국뿐만 아니라 수많은 나라를 짓밟고 다니겠지요.”

“그래서 뿌리를 뽑기 위해 움직였습니다. 대신 저희도 체면이 있고 명분이 있는 법, 대한제국을 도와서 여러 가지 일을 해드리겠습니다.”

파머스턴은 나에게 간청하듯이 말하였다. 오래 살고 볼 일이라 생각하고 있자니 그는 다시금 강조하듯 말을 이어갔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첫 계획은 청나라를 산송장으로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불가능하게 되었지요. 우리 대한도 청나라가 그렇게 고꾸라질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기껏해야 반란군에게 호되게 당하여 구원을 요청할 줄 알았지요.”

“혹시나 대한 측에서도 엉겁결에 천명을 노릴 위치가 되었다는 말씀이신지요.”

파머스턴 이 인간 동방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운 것이 확실하다. 통사(通史), 종합적인 역사를 중심으로 배운 것 같은데.

상대가 멋대로 생각해서 그 생각을 붙박아 둘 겸 괜히 말을 하지 않고 고민하는 척을 하였다. 한참을 고뇌하는 척, 속내를 들켰다는 척을 하다가 조심스럽게 말하였다.

“틀린 말은 아니지요. 옆집이 불타서 불 좀 끄고 돈이나 얻어내려고 발을 들였는데 갑자기 집이 모조리 불타버리고 땅문서가 떨어진 격입니다.”

“그러면서도 땅문서를 기반으로 이득을 얻으려고 많은 행동을 하신 것 같은데요.”

“대응은 빠를수록 좋지요. 눈앞에 멸망한 청나라의 거대한 영토가 아른거려서 손과 발이 바쁘게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파머스턴은 다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미소를 지었다. 그의 입장에서 대한제국은 생각지도 못하게 청나라 전역을 집어삼킬 기회를 얻은 상황이다.

그 때문에 대처가 늦었고 틈을 영국이 교묘하게 파고든 것이다. 나는 파머스턴의 의견에 동조하듯이 욕을 하였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하던데 어떤 박쥐새끼가 기어 들어와서 일가친척을 다 이주시키지 뭡니까?”

“거 먼저 뿌리를 내린 사람이 임자 아닙니까? 저희도 호랑이를 위에 두어서 불편하기는 하지만 영원히 뿌리를 내려서 알뜰살뜰하게 나라를 집어삼키고 싶습니다만.”

“웃기는 소리 하지도 마십시오. 영국은 우리를 견제하기 위해 다른 국가를 덧붙여서 억지로 남경에 기어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파머스턴은 한 방 먹이고 카운터를 두들겨 맞았다는 듯이 생글생글 웃으면서 내 말을 들었다. 그 표정을 보면서 코웃음을 친 다음 내가 예측한 영국의 속내를 드러내 주었다.

“남경의 영구적 지배는 꿈조차 못 꿀 일이지요. 직접 다녀오신 분이니 영구 지배는커녕 오십 년을 버티기도 벅차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겁니다.”

“바로 보셨습니다. 부호들이 모조리 연줄을 대려 하고 수취권이나 조세권을 넘보기 시작하는데 어찌나 손이 빠른지 모르겠더군요. 참 대단한 작자들입니다.”

“그래 놓고 다른 국가에다가, 아마 일선 장성들에게까지 인도를 지배하듯 남경을 영구히 지배하겠다는 가짜 계획을 알려줘서 헛된 꿈을 심어두셨겠지요?”

“역시 박 후작님과 대화를 나누면 재미가 있다니까요.”

내 생각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돌아가기는 했는데 파머스턴은 더욱 즐거운 눈치였다.

그는 내 잔에 술 대신 콜라를 한 잔 따라주고는 코웃음을 섞어가며 이야기를 하였다.

“박 후작님이 우리 영국에 계속 남아있었다면 제 후임자가 되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사실 공표된 바로는 후작님과 조 총장 모두 빈민가 출신이지만 위장 신분 같군요.”

“위장 신분이라. 그럼 실제 신분이 다르다?”

이건 또 의외의 이야기다. 영국이 내 실제 신분을 어떻게 추측했을까?

파머스턴은 내 표정을 확인하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하였다.

“아마 연령은 지금 예순 정도 될 것 같군요. 가문은 대한의 전대 황제의 친척이고 젊은 시절부터 여러 훈련을 받은 다음 영국에 위장 잠입한 것 아닙니까?”

“호오. 하나 정도는 맞추셨습니다.”

나이만 맞춘 것에 불과하지만 영국 입장에서는 합당한 해석이다. 이런 능력자가 정말 빈민가에서 튀어나왔다면 말이 안 되는 일이라 나름 앞뒤를 쪼개 맞춘 것에 불과하지만.

“하나라도 맞췄다니 다행입니다. 그럼 이제 박 후작님의 이야기를 들을 차례군요.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외교는 한 대를 맞으면 한 대를 돌려주는 냉정한 관계이다. 가치외교이니 지원외교이니 하는 용어는 먼 훗날의 말이고 글래드스턴의 도덕외교는 우리 둘의 취향이 아니지.

이 무게추를 어떻게 배분할지는 미리 정해두었다. 나는 손가락 네 개를 펴고 하나를 접으면서 말하였다.

“우선 하나의 이득을 드리겠습니다. 서로가 의심하면 힘만 빠질 터, 조만간 회담에서 상세 비중을 정하여 다양한 국적의 군대를 파견하여 대륙을 보호하도록 하지요.”

“대륙을 보호하기 위한 군대 말씀이십니까?”

“어떠한 국가의 편도 들지 않고 대륙 내에서 일어나는 범죄, 폭력행위, 선전포고가 없는 침략 등의 국제법 위반 행위를 준수하는 군대입니다. 어떠하신지요?”

파머스턴의 생각대로라면, 영국 의회의 추측대로라면 대한제국은 중국 대륙을 집어삼키기 위한 야욕을 버리지 않을 국가이다.

그런 대한에서 먼저 자신들의 진출을. 다른 국가를 괴뢰국가로 만들어 영토를 넓히는 행위를 방지하는 것이다.

파머스턴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을 하였다.

“저희도 바라마지 않던 바입니다. 남경에서 민란이 발생하면 영국군 자체로는 진압하는 데 힘이 들 것 같은데 도움이 되겠군요.”

“남경은 내버려 두고 포르모사(타이완 섬)를 확고히 지배하려는 분들이니 당연하겠지요.”

파머스턴은 한 대 먹었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남경의 일시 지배로 대한제국의 천명 획득에 딴죽을 걸고 대만을 먹으려는 계획을 세운 것 같은데 이미 내 손바닥 안이지.

다음으로는 엄지를 접으면서 제안을 말하였다. 가장 큰 제안이자 영국이 당분간 큰 힘을 써야 할 제안이기도 하였다.

“다음으로는 러시아 제국의 반란세력을 지원해 주십시오.”

“해당 사항은 고려해 보지요. 다만 러시아 제국 내부에서도 체질개선으로 인한 반란 진압 준비를 했을 것 같습니다. 많은 노력을 기울여 봐야 할 것 같군요.”

이 인간의 외교적 수사를 해석하면 ‘러시아 제국이 준비를 했는데 지원해 봤자 쓸모없다, 못 한다.’라는 말이다. 괜히 꼬투리를 잡기도 싫으니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였다.

“정보가 늦으시군요. 지금 대한제국에는 시베리아를 건너온 러시아 이주민이 이십만 명이 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태상황께서 이들에게 군사 훈련을 시키고 계시지요.”

“시베리아를 넘어? 군사 훈련? 태상황께서?”

“동티단이라 불리는 군대입니다. 장비도 최고급에 훈련도도 높아서 공성전과 시가전에서 다른 병사 몇 명분의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파머스턴 입장에서는 모를 일이다. 정확히는 전 세계가 모르는 정보이다가 이제야 내가 공표한 것이지.

그는 여러모로 계산을 하다가 말하였다.

“그……. 그렇다면 시베리아를 건너오면서 단련된 이주민들이.”

“돌아갈 겁니다. 아마 몇 년이 지나면 훈련받은 병사만 삼만여 명이고 하나같이 실전을 방불케 하는 훈련을 거듭하였습니다. 이래도 고려해 볼 사항이십니까?”

“제가 바보로 보이십니까? 당연히 됩니다. 이번 기회에 러시아 제국을 적당히 나눠 버리고 그 과정에서 대한제국의 동방 패권을 도와드리도록 하지요.”

내가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러시아 제국은 공업화로 체질개선을 하며 국가 곳곳에서 문제가 불거졌다. 여기에 채권 판매도 막히고 농업 생산량도 둔화되어 버렸다.

파머스턴이 보기에도 3만여 명의 동티단 병력이, 시베리아를 건너오며 생존하고 전투 능력까지 배운 데다 최신 장비를 갖춘 이들이 끼어들면 승산이 있다 본 것이다.

이게 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크림 전쟁 강연으로 일어난 나비효과다. 좀 더 정확하게는 아일랜드부터 시작된 문제이지만.

거기까지 생각해 보니 영국에게 지워줄 적당한 짐이 생각났다. 서로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족쇄다.

“그다음은 독립 약속입니다. 우리 대한이 만에 하나라도 청나라를 거머쥐는 일을 염려했으니 같은 시선에서, 남경을 중심으로 영국이 청나라를 거머쥘 수도 있지 않습니까?”

“불가능한데요. 이건 외교적 수사가 아닌 확답을 드릴 수 있습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니 말씀드리는 겁니다. 남경을 훗날 독립시킬 정책 증명을 위해 아일랜드의 독립 약속을 해주시지요. 선례가 있어야 다음 일이 쉬워지는 법 아니겠습니까?”

파머스턴의 표정이 급격히 일그러지고 짜증을 섞은 말을 중얼거렸다. 상대가 답을 하지 않아서 나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중지를 접고는 말하였다.

“아일랜드 독립이 그리 큰 타격은 아니지 않습니까? 인도 식민지야 동인도회사를 통해 간접 지배를 하는 마당이라 같이 독립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는 것 같은데요.”

“차라리 추후 자치령으로 승격하는 조건이라면 모를까요.”

“이건 양보 못 합니다. 남중국 독립의 선례를 남기도록 아일랜드를 오십 년 뒤에 독립시키겠다고 하십시오.”

사실 아일랜드 독립은 별로 필요 없는 사항이다. 영국에게 타격을 입히려면 인도를 뱉어내야 하는데 이 건은 아예 불가능하다고 말하겠지.

대신 자존심에 왕창 상처만 입히고 큰 손해를 안 보는 아일랜드 독립을 요구한 것이다. 이건 대한제국의 분노를 드러내는 조건이었다.

파머스턴의 눈동자가 핑핑 돌아가면서 계산을 하였다. 그리고는 손뼉을 치면서 말하였다.

“생각해보니 안 될 것은 없군요. 조만간 협약을 위해 차기 총리후보가 방문할 것 같은데 이 친구의 짐으로 짊어지게 하면 될 것 같습니다.”

“말씀대로라면 글래드스턴이 방문할 것 같군요.”

“바로 보셨습니다. 도덕외교를 중심으로 삼은 친구이니까 이 정도는 해줄 수 있겠지요.”

글래드스턴을 설득해보라는 말인데 이 양반은 할 수 있는 인물이다. 마지막 세 번째 조건은 우리의 확실한 이득을 위해서 전제조건을 깔아주었다.

“마지막으로 붕괴된 청나라에 두 개의 세력을 만들 예정입니다. 하나는 이 나라의 후원을 받는 독립국가인 중화민국, 다른 하나는 원나라의 부활입니다.”

“괴뢰국가인 중화민국이 아닙니까? 거기에 원나라의 부활이라니 러시아가…….”

“그 러시아는 혁명으로 새로운 세력이 차지할 나라가 아닙니까? 그리고 중화민국이 괴뢰국가가 될 것이라 의심하시면 사람을 파견해 상세히 알아보던가 하시지요.”

파머스턴은 대화를 마치고 한참을 고민하였다. 어느새 화로의 숯이 다 타들어 갈 무렵,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확답을 내었다.

“외교적 수사를 제외하고 안 될 일은 없습니다. 다만 제 입장이 오로지 의회 자문위원인지라 추후 회담을 통하여 확정을 내셔야 할 것 같군요.”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이제 폐하를 알현할 차례입니다.”

파머스턴은 늙은 몸을 움직여 효명제를 접견하였다.

접견을 마치고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돌아간 파머스턴 다음으로 상대할 자는 차기 총리, 이워트 글래드스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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