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345화 (311/345)

345화

에필로그

사각사각 거리는 사과 깎는 소리가 귓전을 간지럽혔다. 여기에 왼손과 왼팔에 빼곡하게 쑤셔 박힌 침(針)으로 인해 피가 몇 방울 흘러 피비린내가 느껴졌다.

잠시 호흡을 정돈하고 오른손을 움직여 신문을 넘겼다. 이제는 관직에도 나가지 않아도 될 몸이 되어버려서 신문을 읽고 세상 정세를 파악하는 것이 낙이었다.

“드디어 러시아 혁명이 막을 내렸군.”

1865년 4월에 시작된 러시아 혁명은 거의 6년을 꽉 채운 1871년 2월 끝났다. 결국 ‘근왕 혁명군’이라는 공산주의 혁명군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함락하며 최종 승자가 되었다.

앞으로 남은 일은 러시아 제국이 점령한 각 지역의 분할과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배상, 그리고 새로운 정부 수립이었다. 워낙 복잡한 일이라 부족한 머리가 딱딱 아파온다.

새 정부 수뇌는 드미트리가 담당했다. 그는 삼 년 동안 임시로 서기장 자리를 역임한 다음 제도를 개편한 이후 또 다른 혁명 용사에게 권력을 넘겨주기로 했다던가.

“후작 어르신께서는 이 일을 예측하셨습니까?”

옆에 있던 이토 히로부미는 직접 깎은 사과를 담은 접시를 건네주었다. 예전과 다르게 어엿한 사업가가 된 녀석에게 코웃음을 친 다음 말하였다.

“내가 예측하기는커녕 제대로 개입하지도 않았지. 어디까지나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한 일이야.”

반사적으로 왼손을 움직이려 했는데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신문을 잡고 있던 오른손으로 사과를 한 입 베어 먹고는 이토 히로부미에게 답해주었다.

“내가 모든 일을 예측할 수 있다면 이런 몰골이 되지는 않았겠지.”

“중풍은 쾌차할 수 있는 병이라 하였습니다.”

“그럼 뭘 하나, 여섯 달째 반신불수 상태인데.”

작년 6월경의 일이었다. 총리대신 자리를 언제쯤 내려놓을까 고민하던 찰나, 갑자기 피로가 몰려오고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면서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를 않았다.

당시에는 늙은 몸이 피로가 격심해서 문제를 일으켰다 생각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자 갑자기 왼쪽 눈의 시력이 떨어지고 격심한 두통이 밀려왔다.

이 시대에는 중풍, 현대에는 뇌졸중으로 불리는 병이 내 몸을 엄습한 것이다.

“백방으로 약을 사용해 보았지만 별 차도가 없더군. 그나마 한쪽 눈과 왼팔 그리고 왼다리만 망가진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하나.”

죽지는 않았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의 몸이 되었다. 잠시 벽에 걸린 괘종시계를 확인하고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의원을 불렀다.

“거기 의원 있나? 시간 되었네!”

방 밖에 대기하고 있던 의원이 달려와 내 몸에 빼곡하게 박힌 침을 하나하나 뽑아냈다. 그나마 감각이라도 돌아오면 모르겠는데 감각도 없어서 내 몸이 멀쩡한지 모르겠다.

중풍은 현대라면 수술로 해결할 수 있는 병이지만 이 시대에는 불치병이나 마찬가지다.

순간 만 70세이면 오래 살았다고 생각하려다 내 공식적인 나이가 떠올라 자책하듯 말하였다.

“일흔이면 몰라, 예순이 절반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 꼴이라니.”

“더 오래 사셔야지요. 손자가 장성하는 모습도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손자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지. 내가 가장 걱정한 건 이등박문 자네라니까.”

그 말을 들은 이토 히로부미는 능청맞게 눈웃음을 짓고는 말하였다.

“제가 어떤 몸입니까? 박 후작 어르신의 후원을 받고 사업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듣자 하니 우유 사업이라 하던가? 성공은 했고?”

“우유 사업이 아니고 연유 사업입니다. 아시다시피 사람은 어린 시절 맛본 물건에 익숙해지기 마련이고 지금 북경은…….”

요약하면 대한제국의 덕분에 연유를 먹은 북경의 어린 시민을 공략하겠다는 말이었다. 한참의 설명을 마친 이토 히로부미는 능글맞은 표정으로 말하였다.

“제가 보기에 이 사업은 반드시 통합니다. 미국에서 넘쳐나는 분유와 우유를 사들여 어린아이에게 안전한 분유를 먹이길 권고하는 사업을 생각해 두었습니다.”

“그래서 파브르와 협력했고?”

“물론이죠! 장 앙리 파브르의 통조림은 세계 최고의 물건이니까요!”

어린 시절을 가혹하게 보낸 이토 히로부미는 어느새 과거의 상처를 모두 극복하고 사업가가 되어 있었다. 이미 한양 신문에 광고를 올릴 정도로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고 있다.

이 정도 재주면 어디 가서 굶어 죽을 신세는 안 될 거다. 녀석은 머리를 긁적거리고는 날 염려하듯이 말하였다.

“앞으로 좋은 일이 많이 있을 겁니다. 저도 조만간 혼사를 구할 것인데…….”

“소문을 듣기는 했지. 벌써부터 정분(情分)이 여럿 나서 아내가 둘이라 하던가.”

“잠시 스쳐 지나가는 인연일 뿐입니다!”

“영웅호색이라는 말이 있지만 작작하게. 그러다가 육혈포를 맞아 죽을지도 몰라.”

내가 키운 녀석인데 어디서 비명횡사 당하는 꼴만큼은 막아봐야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대화를 나누는데 밖에서 익숙한 그림자가 서 있었다.

“부친께 인사를 올립니다, 소자 방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이제 이 집의 주인은 네가 아니더냐. 어서 들어오도록 하여라.”

내 장남 은찬이가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와 인사를 하였다. 평상시라면 인사를 잘 받아줬을 텐데 몸이 불편해서 제대로 인사를 받지 못해서 아쉬울 뿐이다.

녀석은 결국 정치에 입문했다. 대한제국은 슬슬 황제 한 명이 감당하기 힘든 국가가 되어갔고 각계각층의 전문가가 필요한 실정이었다.

시범적으로 도입한 의회제도에 발을 들이고 최종적으로는 군부대신이 목표라던가.

녀석은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약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은찬아, 네가 내 그늘 아래에서 짓눌린 것은 이해한다. 그러나 이 아비도 조만간 세상을 떠날 몸이 아니더냐. 그때에도 지금처럼 몸을 움츠리고 있을 것이냐?”

“그저 부친께서 언제나 강건하기를 바라는 자식의 마음일 뿐입니다.”

“알겠다. 그러하면 잠시 해를 쬐고 싶으니 날 부축해 주지 않겠느냐.”

은찬이의 부축을 받아 대청마루로 나갔다. 일흔 살이 되어 눈도 침침해지는데 그 나이에도 정약용은 어찌 그렇게 활발하게 움직였을까.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미리 주변을 정리해두기는 했다. 얼마 안 있으면 양위를 실시할 효명제와도 대화를 나누었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유언을 남겨두었지. 그 서글픈 표정을 생각하니 저절로 눈물이 나올 지경이다.

그 감상을 마치기도 전에 또 다른 손님이 찾아왔다.

반신불수가 된 나와 달리 늙었을 뿐 몸이 아직도 정정한 일준이였다.

“넌 뭔 다 늙어빠진 뒷방 늙은이 몰골을 하고 있냐.”

“몸이 성하지 않으면 뒷방 늙은이 맞지.”

“이러다가 나까지 우울해지겠다. 잠깐 우리 집으로 오기나 해라.”

일준이가 밀어주는 휠체어를 타고 녀석의 집에 들어갔다. 에이다는 일 년 전에 말년을 고국에서 보내고 싶다면서 영국으로 돌아갔고 자식들도 모두 출가(出嫁)한 상태다.

“혼자 있자니 적적해서. 더군다나 내가 생각한 이야기를 들을 사람은 너밖에 없지.”

“또 새로운 이론을 적립하셨나? 아니면 쓸 만한 제자를 찾았나?”

“지금은 테슬라를 가르치는 재미가 쏠쏠하긴 해. 아무튼 내 제자들은 다 잘 먹고 잘살고 있기는 하다.”

일준이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녀석이 제자 자랑을 한 것이 몇 번이나 되는데 파스퇴르같이 성공한 제자보다는 본래 역사에서 실패한 인생을 살아간 사람들을 이야기하였다.

“파브르야 통조림 공장 자문가로 일하면서 전 세계의 곤충을 연구하지.”

“파스퇴르는 어때?”

“요즘은 파상풍 백신 연구를 시작하더라고. 녀석도 참 고생이 많아.”

녀석은 이미 닐슨 학파라는 명칭으로 불릴 정도로 많은 제자를 육성했다. 각계각층에서 수많은 인재를 포섭하고 이들을 적재적소에 할당하는 방식이었다.

“넌 좀 어떠냐? 세계정세는 어때?”

“아무리 보아도 세계대전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고 일어나도 총력전은 아닐 것 같고.”

나도 할 이야기가 많았다.

유럽 정세는 빈 체제의 붕괴 이후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아귀다툼을 벌였다. 여기에 프랑스는 이탈리아와 영국을 끌어들여 ‘수직 동맹’을 형성하였고.

여기에 아일랜드가 독립하고 러시아가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다. 미국은 링컨이 암살을 피하면서 흑인 해방 정책을 고수한 덕분에 어느 정도 화합구도를 이루었고.

물론 이토록 많은 변수를 알고 있음에도 내 몸이 불편해서 제대로 된 계산을 못 하겠다.

“솔직히 말해서 백 년 정도 더 살고 싶은 마음이 있어. 사학도로서 이런 세상의 변화를 모두 알고 분석하고 연구하고 싶은 마음이 다시 샘솟고 있거든.”

“너도 나이를 먹으니까 젊은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는구나.”

“그렇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지. 이 나라는 어떻게 될까.”

지금 상황에서 대한제국이 멸망할 이유는 없다. 세계대전이라는 변수에 직격탄을 맞아도 국체(國體) 정도는 유지할 덩어리를 갖추어 두었고.

중국이 통일되어 전면전을 걸어도 버티고도 남을 정도의 전력을 갖출 나라이다.

이미 인구는 4,900만 명에 달하고 증가율이 연간 3%대라서 20세기 중반쯤 되면 3억에 육박할 거다. 아마 황실 정도야 서서히 입헌군주정으로 개편하겠지만 그건 먼 훗날의 일이고.

여기까지 생각하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 기억을 현대에 가져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생각을 해본 것이 있어. 우리가 조선시대에 처음 떨어졌을 때 기억나냐?”

“기억나고말고. 아직도 가끔 그때의 꿈을 꾸는데.”

“나도 같은 꼴이지. 근데 말이야 얼마 전 꿈을 꿨는데…….”

일준이는 말을 흘리더니만 괜히 뺨을 긁적거리면서 아리송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네 소원은 내 능력을 모조리 발휘할 수 있는 곳으로 보내달라고 했었지?”

“그렇지, 프랑스 유학을 다녀와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후의 이야기지만.”

“그럼 내 소원 기억하냐?”

“네 소원? 학과장이 되어서 지도교수를 족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던가?”

생각해 보니 소원은 제대로 이루어진 것 같았다.

나는 평상시에 감추고 있던 모든 능력을 발휘했고 일준이는 학과장은커녕 총장이 되어서 세상의 인재들을 가르치고 있고.

“그게 이루어진 것 같아?”

“엄밀히 따지면 아니지.”

아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일준이의 소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바로 그거다. 우리의 소원이 달성된 형태가 원숭이 손 괴담처럼 애매하게 곡해한 것도 아니고 네 소원만큼은 제대로 이루어졌잖아?”

“그럼 네 소원은 지도교수라는 주체가 빠져 있으니까 안 이루어진 것 같다고?”

“아주 잘 알고 있네. 이 세상에 내 지도교수는 없잖아.”

뭔가 아리송한 기분이 들어서 저절로 몸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왼손의 힘이 빠지면서 몸이 고꾸라졌고 일준이가 내 몸을 낚아채서 넘어지지 않게 하였다.

“고맙다.”

“아무튼 네 소원은 대충 이루어진 것 같은데 내 소원은 어떻게 될까?”

“그야 대상을 찾을 수 없어서 못 이루어진 것 아니야? 아니면 다른 지도교수로 바뀌든가.”

“내가 보기에는 아니올시다. 나랑 지도교수 나이 차이가 여섯 살인 거 알지?”

일준이의 지도교수는 남자 기준으로 최연소 타이기록인 만 28세에 교수가 되었다. 이론상 일준이가 석박사 통합과정을 거쳤다면 29세에 박사를 취득하고 바로 교수가 될 수 있다.

지도교수가 계속 권력의 밖을 맴돌고 일준이가 치고 올라간다면 어떻게 될까. 50세쯤 되어서는 학과장이 되어 정말 지도교수를 족칠 수도 있다.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우리는 이미 조선시대에 와버렸고.”

“지금까지 네 소원을 들어줬잖아? 그럼 이제부터는 내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서 현대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더라고.”

“그럼 인생을 한 번 더 살라고?”

일준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자니 우리가 본래 겪은 현대가 떠올라서 저절로 숨이 막혀오고 호흡이 가빠졌다.

“야! 야! 진정해라 좀! 내가 보기에는 말이야 우리가 바꿔놓은 세상으로 갈 것 같아.”

“그건 검증되지 않은 예측에 불과하잖아? 더군다나 우리가 바꿔놓은 세상이랑 기존 세상이랑 차이가 뭔데? 네 소원을 들어주려면…….”

“본래 인생은 내가 학과장이 되어서 출세하는 과정 자체가 문제 아니냐? 파벌 다툼에서 밀려난 교수 아래에서 박사 학위를 따봤자 연줄 끊긴 연 신세인데. 어떻게 학과장까지 가냐?”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였다. 이놈의 소원이 원숭이 손 형식으로 이루어진다면 일준이의 아래에서 대립하는 교수가 나타났을 테고 그 교수를 학과장 시절의 일준이가 박살 냈겠지.

반면 일준이는 세계 최고의 학자가 되었다. 이 괴리감을 확인해 보니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듣고 보니 그렇긴 하네. 네 소원을 제대로 들어준다는 전제라면 바꿔놓은 세상에 가겠고.”

“난 지도교수를 족치기는 뭘 족쳐! 지금 이 능력이면 실험의 달인이 되는데!”

“그 정도로 자신이 있냐?”

“있다마다. 현대의 도구랑 비교하면 이 시대의 실험기기는 도끼질로 회 썰어내는 수준이야. 실험 성공률이 두 배는 올라갈걸?”

일준이의 희망찬 목소리를 듣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우리는 영혼이 빙의한 것이 아닌 몸 자체가 과거로 건너온 사람들이라 쓴소리가 절로 나왔다.

“난 중풍 치료가 가능해서 좋기는 한데 넌 떨리는 손으로 실험이 되겠냐?”

“아니다, 그냥 말을 말고 난 현대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우리가 일궈낸 새로운 역사의 현대로 기존의 몸을 가진 채.”

“착각은 자유고 생각도 자유지. 아무튼 우리의 인생은 여기서 막을 내려야 할 것 같아.”

다시 휠체어에 올라 집으로 돌아갔다. 정말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이 기억만 가지고도 논문 수십 편을 뚝딱 작성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품고 몇 달을 보냈다. 그러나 나에게도 한계가 찾아왔다.

“으윽! 두……. 두통약을 좀 가져오너라!”

“나리, 편찮으신지요.”

갑자기 머리가 쪼개질 것 같은 두통이 엄습하면서 시야가 일그러졌다. 몸이 말을 더욱 듣지 않았고 머슴은 내 얼굴을 보더니만 새하얗게 질려서 약을 가져오기는 했다.

그리고 약을 채 넘기지도 못하고 의식을 잃었다. 다시 일어나니 이미 한밤중이 되었고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여 있었다.

“아버지! 정신을 차리셨습니까!”

은찬이의 목소리가 물속에서 외치는 것처럼 아득하게 들려왔다. 드문드문 이어지는 생각으로 따지고 보니 아마도 뇌졸중이 재발하여 뇌혈관이 하나 더 터졌을지도 모른다.

“여보! 정신 좀 차려봐요! 여보!”

“모…… 안. 들려.”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았지만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었다. 일준이가 예측한 대로 현대로 돌아갈지도 모르지만 지금 내 목숨이, 지금 내 가족이 중요하지 않은가.

조금이라도 가족을 더 보고 싶다. 그러한 일념을 가지고 꺼져가는 시야를 바로잡으려 노력했다. 울먹이는 은찬이의 얼굴을 바라보려 했지만 초점이 흐려지고 시야가 어두워졌다.

“계속 정, 저…….”

뭐라 말하는지도 모르고 손의 힘이 풀려나갔다. 손을 잡은 아내의 체온이 점차 아련하게 멀어지면서 온몸의 감각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 * *

그리고 어둠만이 남아 있었다. 이게 어둠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공간에서 하염없이 주변을 돌아보고 몇 날 며칠이 지났는지도 모를 시간을 보냈다.

그 시간이 지나갈 때마다 조선시대에서 기억을 다른 사람이 체험한 일을 상세히 들은 것처럼 정리할 수 있었다.

누군가가 내 머릿속을 매만져 기억을 차곡차곡 책으로 정리한 것 같다. 이런 불편한 기분 속에서 어느 순간 몸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으헉!”

절로 비명이 나오려다 가까스로 억눌러 참고 눈을 질끈 감자 저벅거리는 낙엽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가늘게 뜨니 방금 전 보았던 서낭나무가 우뚝 서 있었다.

아니다, 방금 전 본 것이 아니고 거의 50년 전에 본 서낭나무였지. 그런데도 너무나 익숙하고 조선시대의 기억이 옛일처럼 아련하게 느껴졌다.

“현상아 왜 그러냐. 뭐 문제라도 있어?”

십자성호를 그은 일준이는 태연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녀석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만 성큼성큼 걸어서 우리가 들어온 길로 향했다.

“일준아?”

“돌아가야지 뭘 해. 산책하러 와서 뭘 그리 오래 머물러 있냐.”

내 앞에 서 있던 일준이는 태연하게 몸을 돌려 산길을 걸어 내려갔다. 그 순간 머릿속이 요동치면서 심장이 쿵쾅거렸다.

대체 뭘까, 난 제대로 된 기억도 아니고 애매한 방식으로 기억이 정리되어 현대로 돌아왔다. 그런데 나와 같이 돌아왔어야 할 일준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세계선 분리? 이걸 뭐라 하지? 나와 일준이가 각기 다른 세상으로 돌아왔나? 혹시 내 소원은 모두 이루어져서 새로운 미래가 아닌 기존의 미래로 돌아왔나?

-삐로리로링

일준이의 스마트폰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녀석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더니만 더듬거리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녀석이 이 세상을 살던 사람이라면 태연하게 전화를 받겠지. 자기가 쓰던 전화기를 못 쓰는 사람이면 내가 아는 일준이다!

“야! 이런 중요한 순간에 장난질이냐!”

“으악! 악! 미안!”

이놈은 내가 돌아간 것을 확신하고 장난질을 쳤다. 그것도 보통 장난이 아닌 돌아온 순간에만 할 수 있는 장난을!

다짜고짜 달려들어 녀석의 엉덩이를 걷어차자 일준이는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바닥에 떨구고 앞으로 자빠졌다.

“아오! 내리막길에서 걷어차냐!”

바닥을 두 바퀴 구른 일준이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 머리통에 손날을 한 방 먹여주자 녀석은 과장된 몸짓으로 몸을 허우적거리고 말했다.

“너 과거에서 나한테 빚진 거 알지? 네가 죽을 때 내가 있었냐?”

“그때는 정신이 없어서. 그러고 보니 내가 죽은 게 아니고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오르네.”

참 우스운 일이었다. 그때 느꼈던 감정을 다시 체험할 수는 있지만 제3의 인물의 인생을 본 것처럼 주관이 섞이지 않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인식되었다.

컴퓨터로 따지면 우리가 현대에 가지고 있던 기억이 본래 하드디스크에, 조선시대의 기억이 백업용 외장하드처럼 달려 있지 않을까.

그 덕분에 70 먹은 중늙은이의 기억을 꺼낼 수 있는 28세의 몸으로 돌아왔다. 일준이는 날 살펴보더니만 퉁명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내가 엿새 동안 널 지켜봤는데 잠시 집에서 옷 갈아입는 사이에 죽어 자빠지냐.”

“내가 그렇게나 오랫동안 혼절해 있었다고?”

“아무튼 난 네가 죽고 오 년을 더 살다 심장병으로 죽었어. 에이다도 그때쯤 죽었고.”

혼자 남겨진 일준이를 생각해 보니 참 외롭고 고달픈 삶이었을 것 같다. 녀석은 내 표정을 한참 동안 뜯어보더니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장난 좀 쳤어. 내 예상이 맞았지?”

뭐라 할 말이 없어서 머리를 긁적였다. 정말 일준이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현대로 돌아올 줄이야,

그런데 바닥에 떨어진 스마트폰에서 벨소리가 들려왔다.

“맞기는 맞았는데 심장 떨어질 뻔했네. 전화나 받아.”

“이거 어떻게 받는 물건인지 모르겠는데.”

일준이는 스마트폰이 아닌 원통 형태의 물건을 집어 들었다. 기술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는데 녀석이 측면에 있는 문양을 누르자 원통이 펼쳐지면서 얇은 판이 되었다.

-통화를 시작합니다.

저게 롤러블 디스플레이였나. 본래 현대에는 시제품도 제대로 안 나온 물건인데 일준이 덕분에 기술이 발달한 것이 분명하다.

일준이도 떨떠름한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화면이 자동으로 화상통화 상태로 전환되었고 화면 속에서 이모의 얼굴이 보였다.

-일준이니? 현상이 석사학위 받아서 친척들 모이기로 했잖아. 지금 어디쯤 왔니?

내가 석사학위자라고? 왜? 갑자기? 어째서? 그 생각을 하는데 이모는 일준이를 살펴보고는 궁금한 듯이 물어보았다.

-뭐 사고라도 났니? 어디 다쳤어?

“아 아니야 엄마, 그냥 산길을 좀 걷다가 넘어졌어.”

-잔칫날에 큰일 날 뻔했네. 아무튼 늦지 않게 돌아오렴.

나와 일준이의 시선이 교차했다. 아무튼 난 석사가 되어서 다행인데 일준이는 더듬거리면서 두서없이 말했다.

“발전, 이건 발전이야. 아마 핵융합도 상용화되었겠고 텔로미어 재생약이나 뭐 아무튼.”

“일단 세상이 확 바뀐 것 같으니까 적응부터 하자고. 운전하는 것조차 문제인데…….”

확실한 것은 공기의 질이 다르다. 미세먼지가 들끓어 건너편 산도 제대로 보이지 않던 본래 역사가 아닌, 우리가 바꿔나간 새 역사 덕분인지 시야가 탁 트여 있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주차장의 자동차는 바로 찾을 수 있었다. 정확히는 내가 근처를 스쳐 지나가자 생체인식이 되어 자동으로 잠금이 해제되고 운전석 문이 조금 열렸다.

“미쳤네. 미쳤어. 우리 집이 그리 돈이 많은 집도 아닌데.”

억 소리가 나오는 외제차 수준에서나 볼 수 있는 기능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운전석에 앉아 보니 자동차의 구조 자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기껏해야 내비게이션이 접이식으로 된 게 전부인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내비게이션이 나에게 질문을 하였다.

-기존 목적지로 자동운전을 시작합니다. 운전대를 잡아주시고 제동장치에 발을 올려주세요.

“어 음……. 어……. 일단 집으로?”

“시간 있으니까 한적한 카페에 들러. 일단 자동운전 기능이나 확인해 보자고.”

“알겠어, 자동운전 시작. 주변에 사람 적은 카페로.”

-운전을 시작합니다. 칠 분가량 소요됩니다.

큰 도로까지 나와야 하는 자율주행을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이놈의 차량은 얼마나 정교한지 알아서 주차장에서 빠져나와 도로로 진입하고 알아서 운전을 하였다.

일준이는 운전대를 잡고 있는 나와 달리 스마트폰 사용법을 익혀나가기 시작했다. 녀석은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는 흥분을 담아 말했다.

“미친! 미친! 두 번째 핵융합 발전소 상용화가 성공리에 이루어졌대!”

“대한이냐?”

“그렇지. 대한제국은 아직도 대한제국이고 첫 번째 핵융합 발전소는……. 미국이네.”

그건 좀 아쉬운 일이기는 하다. 기술 선도국가로 자리매김한 것 같은데 정작 자본력에서는 미국을 못 이기는 것 같네.

그래도 이런 멋진 세상을 살아볼 가치는 있는 것 같았다. 자동차가 알아서 주차를 마치고 카페에 들어가자 종업원이 인사를 하면서 메뉴를 물어보았다.

“어떤 음료를 드릴까요?”

“걸러서 만든 가배 두 잔이요.”

무심코 조선시대에 하던 말이 새어 나왔는데 점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작업에 돌입했다. 메뉴에는 정말로 <걸러서 만든 가배>, 드립커피가 존재하고 있었다.

자리에 앉고 어떻게든 스마트폰을 사용하려고 애썼다. 내가 사용하고 있는 스마트폰에는 여러 정보가 들어 있었는데 운수 좋게도 내 학적 증명서 관련 어플리케이션도 있었다.

아마 내가 본래 몸으로 돌아오기 전의 ‘나’는 석사학위를 자랑하려고 이 물건을 설치했겠지. 거기에는 놀라운 정보가 있었다.

“군대 안 다녀와도 되네. 일단 모병제라는 점에서 합격.”

“군대 안 가는 것이 그렇게 좋으세요? 미세먼지 수치가 나쁨인데 25 나오는 걸 보고 좋은데.”

“나쁨이……. 25?”

초미세먼지 13, 미세먼지 25로 나쁨 수치가 찍혀 있었다. 이 얼마나 경이로운 기술 발전인지 감탄하는데 일준이는 또 다른 지표를 확인하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말년에 지구온난화를 경계하는 논문을 작성하다가 죽었거든. 그런데 1877년을 기준으로 ‘닐슨 온도’라는 기준이 세워지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온도를 관리하고 있네.”

“그럼 지금의 지구온난화 정도는 어느 수준인데?”

“닐슨 온도 기준 0.5도 상승, 이십 년 전 기준으로 0.1도 하강.”

일준이는 팔짱을 끼더니만 나를 흘겨보았다. 그리고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땅덩어리에 집착하시는 사학과 석사님께서는 지구온난화를 해결하셨나요? 못 했죠? 자, 쓰레기죠? 인류를 구할 수 없죠?”

“개 풀 뜯어먹는 소리 하고 자빠져있네!”

“주문하신 걸러서 만든 가배 나왔습니다.”

커피 맛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비슷해서 다행이다. 일준이의 실실 웃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저절로 배알이 꼴려오고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그토록 개고생을 해서 땅덩어리를 늘리는 동안 일준이는 인류의 멸망을 막았다.

그런데 문득 생각이 나서 일준이를 흘겨보면서 말했다.

“기술이 너무 발전했는데 너 따라잡을 수는 있겠냐? 그것도 석박통합과정을?”

“그건 그러네. 랩 들어가자마자 기존 기억을 다 수정해야겠네.”

“난 1870년 이전 역사를 고스란히 기억하는데 넌 머리통 깨지게 생겼는데.”

“에이 몰라, 정 적응 못 하면 일 년 휴학계 내고 공부나 해야지.”

혹시나 몰라 지갑을 꺼내 물건을 확인해 보았다. 지폐와 동전의 도안도 바뀌고 신분증은 운전면허증 하나만 있는 상황이다. 주민등록증? 그런 건 없다!

순간 스마트폰을 써서 지도를 확인하려다가 꾹 눌러 참았다. 위대하고 아름다운 대한제국의 지도는 이런 공공장소에서 볼 수 없는 물건이다. 보다가는 다른 사람이 너무 흥분한 나를 경찰에 신고할지도 모른다.

대신 TV를 보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카페는 한적한 장소에 있어서인지 본래 역사에서 사용하던 LCD TV가 매달려 있었다.

“텔레비전 보려고? 여기서는 전기뒤주라 부르네, 이건 옛말이고 전주라고 줄여 불러.”

“저기요! 전주 좀 틀어도 될까요?”

종업원이 카운터에서 다가와 리모컨을 건네주었다. 전원 버튼을 누르자 화면이 들어왔는데 하필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대한제국의 출산율이 급격히 감소하고 있습니다. 십이 년 전 인구증가율이 일 퍼센트 이하로 떨어진 가운데.

인구증가율이라는 용어가 쓰일 줄이야. 아무려면 어떤가라는 심정이었는데 이번에는 미국 이야기가 나왔다.

-다음으로 경제 소식입니다. 미국 대통령 닐 크레이그는 탄소포집 관련 세금을 조절할 것을 대한제국에 요청하였습니다. 이에 대한제국 경제부 장관은…….

듣도 보도 못한 닐 크레이그라는 대통령이 화면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리 보아도 동양계와 아프리카 계통이 섞인 대통령은 대한제국을 견제하는 발언을 하였다.

‘핵융합이 만병통치약이 아닙니다! 탄소 포집으로 지구온난화를 중단시켜야 할 의무를 가진 발전 수단입니다! 이제 탄소 포집 관련 혜택을 줄이도록 합시다!’

“저 양반 암만 봐도 몽골계네.”

“유명한 사람이라더라. 텍사스의 크레이그 가문이면 미국 수위권의 경제 거물이라네.”

미국 특유의 자국 이기주의는 이 세상에서도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결국 스타팅 포인트를 잘 만난 세계 최강국이지만 그나마 이기주의 수준에서 끝나서 다행이기도 하지.

내가 커피를 홀짝이자 일준이는 뉴스가 끝난 TV 채널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사레가 들려 커피를 코로 뿜어버렸다.

“푸확! 억! 으걱!”

“뭔 짓거리냐? 바닥 다 젖었잖아.”

“지금 고개나 돌려봐라. 누가 화면에 나와 있는지 보라고.”

“푸웁!”

나도 커피를 코로 뿜어버렸다. 화면에는 본래 역사의 중국 유명 정치인. 습유평이 멋들어진 양복을 차려입고 화기애애한 미소를 담은 채 인사를 올렸다.

-여러분! 중화 인민 여러분! 이 투표를 확인하시는 전 세계의 시청자 여러분! 정말 반갑습니다. 저 국민 MC 습유평이! 중화 인민 대투표의 중계를 담당하였습니다!

“국민MC?”

“중화 인민 대투표?”

-대한제국에서는 이번 대투표를 기념하여! 옛 청나라의 국보 10점을 무료로 반환하였습니다. 물론 이것만이 전부라 생각하지 마세요! 돈을 내고 가져온 문화재도 있습니다!

-있어요! 있어요!

-참으로 길고 오래되었으며 슬프고도 비통하며 마침내 고국의 품으로 돌아온 문화재입니다. 우리의 각고의 노력 끝에 대한으로 팔려간 유물을 거의 다 회수할 수 있었지요!

그걸 제 돈을 주고 샀다고? 정말로? 말이 되는 소리인가 방구인가 했는데 방청객들이 함성을 질렀다.

습유평도 감동이 벅차올랐는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는 가슴 위에 손을 얹고 방청객들에게 당당하게 말하였다.

-모택동 총통이 남긴 훈시를 기억합시다. 문화는 어느 무엇보다 소중하며 선조의 유산은 후손에게 반드시 전해주어야 한다! 그럼 투표는 무엇이다?

-후손에게 떳떳한 모습을 보이기 위한 양심의 표현이다!

-다들 잘 아시는 군요, 하긴 모르는 사람이라면 저어어어어어기 탄광에 들어가야죠! 물론 저도 함께 들어가서 석탄을 캘 거구요. 그럼 중화인민 대투표! 삼십 분 뒤 시작합니다!

생방송이라는 문구를 보면 발달한 기술 덕분에 자막이 실시간으로 입혀진 것 같았다.

나도 일준이도 할 말을 잃고 조용히 커피를 마시다 일준이가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뭔 미친……. 문화는 어느 무엇보다 소중하며 선조의 유산은 어쩌고 어째?”

“많이 변하기는 했잖아. 그런 점에서 모택동의 변화도 이해는 되는데.”

“역사를 잘 모르는 내 뇌가 터져나갈 것 같은 꼬락서니인데. 그건 그렇다 치고 이 상표는 또 뭐야? 아디디스가 아니고 왜 아디야? 디스를 팔아먹었어?”

일준이는 내가 뿜은 커피로 젖어버린 후드티 상표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아디(Addy)라는 상표명과 기묘할 정도로 익숙한 콧수염, 그리고 2:8 가르마의 머리카락이 있었다.

이 세상은 얼마나 변해 버린 것인가.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어서 저런 꼴이 난 것인가.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아서 스마트폰을 켰다. 그리고 내가 죽고 나서 벌어진 일부터 확인했다.

(본편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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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생활의 본편은 막을 내렸습니다.

이제는 박현상의 이야기가 아닌, 그가 죽고 현대로 돌아오는 100여 년 동안 일어난 에피소드를 외전 형식으로 알려드리겠습니다.

이전 작품에는 시대 순서가 아닌 제 마음대로 서술하여 여러 혼란을 끼쳐드렸습니다. 이를 반성할 겸 차근차근 시간 순서대로 외전을 진행하겠습니다.

외전 연재일은 5월 22일입니다. 월 수 금 연재 예정이며 변동 사항이 발생할 경우 공지를 통해 알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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