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화
아직 해도 뜨지 않은 꼭두새벽.
오전 6시쯤 기상하는 백현이지만 오늘은 1시간 일찍 일어나 씻고 준비를 마쳤다.
오늘은 해야 할 큰 일이 남아있었다.
“스읍. 후우.”
긴장된 마음을 애써 심호흡하며 날려냈다.
적응 했다지만 매달 이맘때쯤 되면 어쩔 수 없이 몸이 반응했다.
성 팀장을 만나는 날.
오늘은 그를 만나 빚을 갚아야 했다.
백현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그를 찾아갔다.
꼭두새벽인데도 성 팀장은 깔끔한 수트 차림에 올백머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빚 갚으러 왔습니다.”
“때맞춰 잘 왔군요.”
백현을 보고 그가 피식 웃었다.
“여기 장부입니다.”
백현이 노트 한 권을 건넸다.
그의 지난 한 달 입출금 내역과 매출 등이 적혀 있는 장부였다.
박세훈이 공들여 작성한 것으로, 순이익은 딱 천만 원에 맞춰져 있었다.
그를 영입한 것은 신의 한 수 였다.
“예. 확인했습니다.”
성 팀장은 펼쳐보지도 않았다. 대충 흘긋 보더니 대답했을 뿐.
“…열어보지 않아도 괜찮습니까?”
“굳이 볼 필요 있나요. 박세훈 씨가 담당했으면 그보다 더 정확할 수가 없을 텐데.”
성 팀장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이만 가 보세요.”
“…….”
뭐지?
성 팀장과 눈을 마주치면서도 백현은 의아했다.
이렇게 순순히 그냥 보내 줄 사람이 아니다.
이번 달도 그에게 보낸 송금액은 정확히 10,500,000원.
천만 원은 이자와 빚을 갚은 거고 50만원은 성 팀장의 커미션이다.
당연히 백현의 이번 달 매출은 지난달과 마찬가지로 천만 원을 훌쩍 넘겼다.
이걸 어떻게든 붙잡고 늘어질 거라 생각했다.
아무리 장부가 완벽하다지만 백현은 어쩔 수 없이 성 팀장의 손아귀 위에 있지 않은가.
되도 않는 트집을 잡아 물어뜯기 시작하면 감당하기 어려웠다.
헌데 이렇게 그냥 보내주다니.
‘무슨 꿍꿍이지?’
백현은 의아해 하면서도 문을 닫고 성 팀장의 방을 나섰다.
***
백현이 나가고 난 뒤.
성 팀장은 문을 바라보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고민이 많을수록 얼굴이 차갑게 가라앉는 게 그의 특징이다.
지금 얼굴은 감히 부하들조차 질겁해 물러날 만큼 싸늘해보였다.
“언럭키…. 예상 이상의 성장세야.”
그에게 스트리머를 하도록 허가해 준 것은 그의 가능성을 믿었기 때문이다.
5억이라는 빚과 어마무시한 이자율. 사실 작업장에서 매일 굴려봤자 그 돈을 다 회수하기는 힘들다.
떡잎이 있어보였고 하는 짓이 당돌해서 기회를 준 거였다.
헌데 요즘 들어 보이는 모습은 심상치 않았다.
서서히 시동을 거는 미튜브나 월벤의 분위기만 보더라도 언럭키의 떡잎이 어느 정도인지는 잘 알았다.
그 역시 월드 사가를 사업장으로 이용하는 터라 보는 눈은 있었다.
레벨만 낮을 뿐, 언럭키는 잠룡이었다.
그것도 조만간 훨훨 날아오를게 확실한!
하지만 그를 붙잡을 방법이 없었다.
장부를 파봐야 나오는 건 없다.
백현의 통장을 강제로 빼앗아 살펴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박세훈은 이런 면에서 프로 중의 프로다.
지금 그가 여기 갇힌 신세라고는 하지만 빚더미에 쌓이기 직전에 만지던 돈의 자릿수가 몇 개이던가.
‘진작에 대포 통장 파서 옮겨놨겠지.’
아무리 여기에 갇힌 몸이라고 하지만, 숨겨둔 수가 몇 개나 있는 남자가 박세훈이었다.
성 팀장의 계획은 그 때부터 틀어졌다.
원래는 백현을 손아귀에 쥐고 서서히 압박하려고 했다.
어차피 지금 그는 자신에게 메인 상황이니 천천히 옥죄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박세훈이 돕는 순간 자신의 손을 벗어났다.
그렇다고 함부로 건들 수도 없다.
한때는 상사이기도 했던 그로부터 여러가지 도움을 받고 있었다.
자문부터 해서 몇몇 통장은 그가 관리하고 수시로 투자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그는 아마 그 기록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반쯤 불법적인 것도 많은데 이걸 경찰이나 (주)머니앤캐시의 대표에게 찌른다면?
그게 아니더라도 앙심을 품으면 계좌 몇 개는 박살이 날 수가 있었다.
그러니 성 팀장은 군침만 흘릴 수밖에.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직 백현은 그의 손에 있었다. 시간을 들여 차츰차츰 공략하다 보면 넘어올 것이다.
성 팀장의 눈빛이 번뜩였다.
***
“뭐? 그 놈이 그냥 보내줬다고?”
“네.”
“쓰읍. 이상하네. 내가 아는 성강호는 그럴 놈이 아닌데. 안되더라도 귀찮게 찔러봤어야 한단 말이야.”
박세훈이 턱을 쓰다듬었다.
아침 식사 도중 백현은 성 팀장을 찾아가 이번 달 빚을 갚았다는 얘기를 했다.
그 이후로 계속 저 상태다.
“장부가 완벽해서 그런 건 아닐까요?”
“그럴 리가. 아무리 내가 장부를 잘 만들고 지금 만지고 있는 그 놈 계좌 가지고 압박했다지만 이렇게 쉽게 물러날 놈이 아니야. 얼마나 독사같은 놈인데.”
독사.
백현은 그 별명이 성 팀장과 너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항상 냉정한 표정에 깔끔한 외관. 백현은 그가 흐트러진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꼭두새벽부터 정장에 올백머리를 고집할 만큼 자기관리가 철저하며, 일 하는 건 더 철저하다.
그러니 이 닭장 감옥에 빚쟁이들을 모아놓고 불법적인 월드 사가 작업장을 유지할 수 있었겠지.
“뭔가 있다. 안 하던 짓을 하는 거면 무조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거지.”
박세훈은 확신했다.
성 팀장이 자신을 잘 아는 만큼 자신 역시 그를 잘 알았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알고 있었다.
지금이야 항상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과거 자신의 밑에서 일하던 신입 시절에는 아니었다.
구르고 뭉개지면서 인간적인 모습도 많이 보였었다.
그 때 파악한 그의 심성은 아마 본인 스스로도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
“그건 내가 알아볼게.”
“네. 잘 부탁드릴게요.”
“뭘. 다 월급 받고 일하는 건데.”
박세훈이 밥과 김치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백현은 처음에 농담 삼아 무보수로 일해 줄 수 있냐고 말하긴 했지만, 바로 이번 달부터 월급이 들어왔다.
옛날 그의 씀씀이에 비교하자면 푼돈이었지만 지금은 굉장히 큰 금액이었다.
유저 언럭키, 스트리머 언럭키가 그만큼 잘 나간다는 뜻이었다.
자신의 팀원들에게 그 정도의 돈은 줄 수 있을 만큼 말이다.
“돈 받았으니 그만큼 일은 해 줘야지.”
말은 그렇게 하지만 박세훈의 내심은 조금 달랐다.
여의도에서 잘나가는 증권맨일 때는 수많은 사람들이 옆에 달라붙어 있었다.
하지만 알거지가 된 후 어떻게 되었던가.
돈 좀 빌려달라는 사람들, 좋은 소스 없냐는 사람들이 전부 연락을 끊었다.
어려울 때 옆에 있어주는 사람이 진짜라는데, 자신은 가짜들만 데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 감옥 속에서 만난 백현은 달랐다.
물론 그 역시 별 수는 없었겠지만, 아무것도 없는 자신을 믿어 준 첫 사람이 아닌가.
그걸 위해 자신도 최대한 열심히 해 볼 생각이었다.
‘슬슬 준비 해야겠네.’
식사를 마치며 박세훈은 다짐했다.
백현과 이용승, 그리고 자신.
셋이나 이 지옥을 탈출하려면 해야 할 게 한둘이 아니다.
미리미리 움직여야 했다.
***
-띠링!
[레벨업!]
레벨이 올랐다.
“후우.”
언럭키가 참았던 한숨을 가볍게 내뱉었다.
땀이라도 닦으려고 했지만, 사실 땀 자체가 나지를 않았다.
대부분의 전투는 해골 병사들에게 맡겨두고 손만 까딱거리는데 무슨 더위를 느끼겠는가.
사실 처음에는 약간의 걱정도 있었다.
검왕 때도, 사신 때도. 항상 몸을 움직여 사냥했던 언럭키였다.
이런 전투가 지겨워지지 않을까 싶었지만…
‘짜릿해. 최고야. 세상에 이런 일이 있다니!’
아니었다.
14구의 해골들은 몰려다니며 몬스터들을 휩쓸고 다녔다.
데저트 웜은 보통 4~6마리가 한 번에 나타나는데 그 정도는 포위해서 충분히 처리할 수 있었다.
가끔 더 많은 숫자가 나타나거나 혹은 준보스몹급이 등장할 때도 있었다.
“쿠르르륵!”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땅이 부서지더니 거대한 지렁이가 대가리를 들이밀었다.
지금까지와의 놈과 다른 게 있다면, 피부가 붉다 못해 시뻘겋다는 점이었다.
[레드 데저트 웜]
-레벨 : 69.
일반 데저트 웜들은 65~67 정도의 레벨이었는데 이 놈은 그보다 한 수 높았다.
이 곳 데저트 웜 서식지의 준보스몹 역할을 하는 개체였다.
당연히.
“큰 거 한 마리가 또 왔구나!”
평범한 놈보다 경험치를 훨씬 많이 준다.
환호한 언럭키가 양 손을 휘저었다.
해골 병사들이 달려가기도 전에 그의 손아귀에서 시작된 검은 빛이 놈을 휩쓸었다.
“쪼그라드는 근육, 체력 약화, 둔화.”
디버프 세례가 녀석을 멈칫거리게 만들었다.
스킬명은 같아도 일반 흑마법사들이 거는 디버프와는 다르다.
마력 수치가 130이 넘는 언럭키의 디버프 아닌가.
게다가 레전더리 아이템 중에서도 그 수준이 높을 게 분명한 그레고녹의 홀로 펼쳤다.
성공 확률과 효과가 말도 안 되게 높아졌다.
“쿠르르르륵….”
레드 데저트 웜이 비틀거리며 힘 빠진 소리를 냈다.
준보스몹답게 더 크고 단단하고 강력한 놈이지만 이 정도만 만져주면 충분하다.
약해진 사자는 달려드는 하이에나 떼를 이길 수 없다.
-덜그럭 덜그럭.
-덜그럭 덜그럭.
해골 병사들이 두 눈두덩이에서 귀화를 넘실거리며 놈을 덮쳤다.
레드 데저트 웜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약해졌음에도 강력한 한 방이 있기에 그걸로 몇 마리나 되는 해골들을 반파시켰다.
아쉽게도 완전히 역소환 시키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건 치명적이었다.
“다크 힐.”
지켜보던 언럭키가 손을 까딱였다.
하반신이 부서져 바닥에 쓰러져 있던 해골에게 검은 빛이 흘러들어가더니, 곧이어 놈이 멀쩡해진 상태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레드 데저트 웜의 눈빛이 절망감으로 물들었다.
“쿠르어어어어-!”
괴성을 지르며 발악해봤지만 해골들은 노련하게 놈을 사냥했다.
결국, 녀석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쓰러졌다.
-띠링!
[적을 처치하셨습니다.]
[소량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네크로 엠페러’ 특성으로 획득 경험치가 10% 상승합니다.]
차오르는 경험치가 달콤하다.
일반몹처럼 이 놈 역시 경험치 10% 상승 특성이 붙는다.
자잘한 잡몹과 달리 더 큰 보너스가 붙기에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아쉽게도 레벨업 한지 얼마 안 되어 한 번 더 레벨업을 하지는 못했지만 이 정도면 충분했다.
[현재까지 처치한 몬스터의 숫자 : 1000 / 1000]
[사이드 퀘스트를 성공하셨습니다.]
이 놈이 딱 천 마리째.
퀘스트를 완료했으니까.
물론 언럭키는 퀘스트 메시지를 시야 한 켠으로 치워버렸다.
이건 지금 당장 쓸게 아니다.
“또 가자.”
지금 레벨이 62.
여기서 등장하는 몬스터 수준을 생각하면 최소한 65까지. 넉넉하게 67까지는 키워도 된다.
도시와 다르게 여기는 사냥터를 함께 나눠 쓸 다른 유저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아예 마음껏 뽕을 뽑을 생각이었다.
큰돈을 들여 사냥터를 대여해도 시간 제한이 있는데 여기는 그런 것 따위는 없다.
던전에 비하면 몬스터 집적도도 훨씬 높으니, 이만한 천국이 또 어디 있을까!
-덜그럭 덜그럭.
-덜그럭 덜그럭.
앞서가는 언럭키의 주변을 해골 병사들이 흉흉한 기세와 함께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