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천공의 탑 지하.
폐쇄된 통로를 내려가면서 이아손은 뿌듯했다.
‘확실히 총령 각하의 말씀을 들어서 손해보는 일은 전혀 없군.’
두바르의 어쌔신 로드.
이아손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직위에 있었다.
그러나 실력으로 된 것은 아니었다.
원래는 조장급 중 하나이며 어쌔신 로드의 오른팔이었지만, 그 로드가 지금은 영주가 되어버리며 승진했다.
반쪽짜리 어쌔신 로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언럭키를 따라 도시를 떠난 것에는 진정한 어쌔신 로드가 되겠다는 야망도 있었다.
그리고 이 천공의 탑에서, 그 목표에 한걸음 더 가까워졌다.
최소 수십 년은 되었을 함정들을 돌파하고 그 시절의 어쌔신들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걸 설치했는지 연구했다.
그 와중에 깨달음도 얻었고 죽을뻔한 위기도 여러 번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은신한 채 숨어다녔지만 몬스터들에게 들킬 뻔한 적도 있었다.
그 모든 과정을 겪다보니 한 발자국 올라선 것이다.
그러면서 언럭키에 대한 존경심도 한층 더 올라갔다.
처음엔 상의도 없이 자신을 이런데로 보내버린 그에게 원망마저 품었건만.
범인은 역시 성인의 큰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이렇게까지 함정을 잘 해체한 스스로가 대견스러웠는데, 언럭키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잘 가다가 갑자기 멈춰서더니, 뜬금없이 벽을 부숴 적의 침입을 미리 알아채 공격했다.
이아손은 거기서 큰 충격을 받았다.
몬스터가 아니라 적이 침입한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항상 경계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미리 예측한 것이다.
단순히 눈으로 보고 함정을 해체하는 걸 넘어서, 반쯤은 예지의 영역인 것!
‘저것이…내가 나아가야 할 어쌔신 로드의 길이다!’
명령을 받아 행동만 해서는 저렇게 될 수 없다.
능동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이아손은 언럭키를 보며 큰 깨달음을 얻었다.
***
‘휴우. 하마터면 큰일날 뻔 했네.’
폐쇄된 통로에서 갑작스럽게 벌어진 전투.
적들은 뜬금없이 공격해온 리바 델 레이 측 병력이었다.
두 세력 다 당황했지만 먼저 정신을 차린건 언럭키였다.
통로를 부술 때부터 예측하지 않았던가.
불길한 붉은색과 기분 좋은 파란색.
두 가지 색이 함께 흘러나오는 벽을 보고 필시 안좋은 일이 있겠구나 싶었다.
그렇기에 기습적으로 리바 델 레이 측을 공격, 놈들을 거의 전멸시켰다.
-띠링!
[레벨업!]
기분 좋은 빛에 휩싸이며 언럭키가 미소지었다.
던전에서 마주친 놈들이기에 이 놈들도 보너스 경험치가 적용되었다.
“성왕 폐하. 죄송합니다. 몇 명은 놓쳤습니다.”
“괜찮다.”
성기사 한 명이 면목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기선을 제압하고 저주를 풀었으며 강력한 축복을 건게 언럭키였다.
심지어 가장 앞서서 망치를 휘둘렀다.
‘마치 추기경님이 현역 시절에 언월도를 휘두르던 모습 같았지.’
그런 상황에서 남은 잔당이라도 자신들이 마무리 했어야 했는데.
결국 몇 명이 살아서 밖으로 빠져나갔다.
“지금부터라도 쫓아가면 되지. 너무 자책할 필요 없다.”
어차피 리바 델 레이 분타를 공격해야 하는 언럭키이다.
오히려 몇 명이 살아서 돌아간 게 잘 된 걸 수도 있다.
‘뒤를 밟아서 쫓아가면 어디에서 지내는지 알 수 있겠지.’
굳이 드넓은 바깥의 땅을 수색할 필요도 없을 테고.
“폐하….”
너그럽게 자신을 용서해주는 언럭키의 모습에 성기사는 감동을 받았다.
어찌 이렇게 인자하실 수가!
그 후 언럭키와 성기사들은 지하 통로를 주파했다.
갈수록 언럭키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젠장. 아주 몬스터의 씨가 말랐군.’
부서지고 발동된 함정들은 자주 보였지만 몬스터는 하나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이 폐쇄된 통로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와는 전혀 다른 상황.
리바 델 레이 놈들이 반대쪽에서 들어오면서 싹 처치하고 왔기에 그런 모양인데, 짜증이 치솟았다.
기껏 얻은 최초 보상 던전인데 이런식으로 망치다니!
“이아손. 혹시 이 쪽 근처는 몬스터가 별로 없었나?”
“아뇨. 많았습니다. 오히려 저희가 지나쳐온 곳보다 더 바글바글했죠. 그래서 은신을 유지하며 함정을 해체하기 꽤 힘들었습니다.”
“…….”
혹시 몰라 이아손에게 물어봤지만 돌아온 답변은 더욱 기분만 망칠 뿐이었다.
‘나중에 다시 보면 이 원수를 갚아주마.’
역시 리바 델 레이 놈들은 도무지 용서할 수가 없는 세력이었다.
그래도 인내심을 갖고 나아가다보니 출구에 도착했다.
단단하게 닫혀있는 문.
-끼익.
살짝 문을 열고 밖을 바라봤지만…
“캬아아아”
“크라라라!”
“샤아아!”
시뻘건 눈으로 노려보는 악마들의 눈알 수만 개와 시선이 마주쳤다.
-쾅!
“…돌아가자.”
언럭키는 바로 다시 문을 닫았다.
***
그 후, 언럭키와 성기사들은 천공의 탑으로 되돌아왔다.
“허어. 악마들이 그렇게 많았습니까?”
“예. 빼곡하더군요.”
복귀해서 곧장 추기경을 만났다.
그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차를 마셨다.
한 쪽에 언월도를 세워놓고 근육질의 터질듯한 사제복으로 차를 마시는 모습은 이질적이면서도 어울렸다.
“바깥에 악마들이 많은 건 알고 있긴 했습니다만, 오래전의 결사대가 왜 실패했는지 알겠군요.”
폐쇄된 통로를 통과해서 문을 열었을 때, 언럭키가 본 것은 수많은 악마 대군들이었다.
레벨 90 초반의 브렉토부터 레벨 110 이상의 고층에서 볼법한 악마들까지.
“최소 만단위는 되었습니다.”
그런 놈들이 바글바글거렸다.
아무리 몬스터 좋아하는 언럭키라도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는다.
거긴 누웠다간 발목이 뎅겅 잘릴 수준이었다.
‘성기사 10명, 사제 2명. 나랑 이아손이랑 호야까지 합하면 대충 열다섯. 그런 파티로 나갔다가는 바로 죽었을거야.’
레전더리 직업이고 성왕이고 뭐고간에, 악마들이 공격 한번씩만 쏘아보내면 지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만단위의 적을 평야에서, 그것도 바로 앞에서 마주친다는건 그런 의미였다.
“그래서 말인데, 통로를 뚫었으니까 세인트크리스 교단에서 나서는 것은 어떻습니까?”
언럭키가 은근슬쩍 제안했다.
원래는 폐쇄된 통로 혼자서 다 먹고 바깥도 혼자서 다 먹으려고 했는데, 그건 불가능하다.
배 터져 죽는 것보다는, 남과 나누는 것이 낫다.
세인트크리스 교단이라면 반쯤 수족처럼 부릴 수 있을 테니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
“으음. 그건 좀 어렵습니다.”
“아니 왜요?”
추기경은 곤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언럭키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바깥의 악마 정벌. 당연히 신을 따르는 저희들이 해야하는 의무이지요. 그러나 신도들에게 마냥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이미 수십년 전에 결사대 사건이 한 번 있었다.
수많은 신도들이 당시 추기경의 말만 믿고 따랐다가 떼죽음을 당했다.
지금은 간신히 피해를 회복했지만 그때의 공포는 아직도 짙게 배어 있었다.
“자율 모집을 받아도 지원하는 신도는 없을 겁니다. 최소 앞으로 몇 년은 더 흘러 상처가 회복되고 강해져야 합니다.”
악마 정벌에는 동의하지만 지금은 나설 수 없다.
그런 각오가 있었으면 진작에 지하 통로를 열고 돌파해 나갔으리라.
“성왕 폐하의 계시에 도움을 드리지 못해 너무나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
추기경은 그리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 곳의 영주나 다름없는 자가 저렇게까지 하는데, 마냥 고집을 피울 수는 없었다.
“후우. 알겠습니다.”
***
언럭키는 천공의 탑 2층 외곽부를 멍하니 걷고 있었다.
그 좋아하던 사냥도 마다한 채, 지금은 곰곰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걸 어떻게 해야하나.’
혼자서 나가는건 답이 없다.
추기경이 지원해줄 수 있는건 처음부터 데리고 다녔던 성기사 10명과 사제 2명.
그 수준으로 밖에 나갔다가는 금방 죽어서 아이템이나 떨구겠지.
‘NPC가 안되면 유저들을 끌어들이면 되긴 하는데….’
사실 해결책은 간단하다.
세인트크리스 교단에서 굳이 결사대를 모집할 필요 없이, 도시에 넘쳐나는 유저들을 밖으로 보내면 된다.
죽어봤자 24시간 접속 불가에 아이템 드랍 페널티밖에 없는, 불사의 군대.
그게 바로 유저다.
심지어 숫자도 많다.
여기는 그나마 사냥터 적체 현상이 없지만, 당장 도시 두 개만 뒤로가도 줄서서 사냥터를 이용하곤 했다.
그 넘쳐나는 숫자의 유저들을 조금만 밖으로 내보내도 언럭키가 원하는 만큼 길을 뚫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갈리가 없지.’
유저들은 바보가 아니다.
사냥에 미친 언럭키마저 답이 없어서 통로를 나가지 않고 되돌아왔는데, 일반 유저들은 볼 것도 없이 후퇴할 것이다.
‘일단 마법사나 궁수들은 절대 안 나갈 거야.’
천공의 탑은 원거리 유저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장소였다.
하늘 위로 날아오는 악마들은 저항 수단이 없었다.
그냥 머리 위로 스킬을 대충 쏘면 얼추 맞는 것이다.
마나가 다 떨어질 때까지 공격만 하면 되는데, 그들이 미쳤다고 밖으로 나가겠는가.
위험부담도 없고 효율도 좋은 여기에서 사냥하지.
‘마법사랑 궁수가 안나가면 전사들도 안나갈거고.’
뒤에서 지원해줄 원거리 딜러가 없으니, 전사들도 꺼려할 것이다.
그런 악순환이 반복될 게 뻔하다.
“후우.”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렇게 멍때리는 주인과 달리, 호야는 부지런히 움직였다.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다가 언럭키에게 후다닥 달려왔다.
“뀨르!”
“어, 호야. 잘 놀다 왔어? 간식 줄까?”
“뀨르르! 뀨르!”
호야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더니 바닥에 골드와 몇몇 아이템들을 퉤퉤 뱉었다.
그 사이에는 노란색으로 빛나는 레어급 아이템도 있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죽은 유저들이 떨어트린 드랍템을 재빠르게 챙겨온 것이다.
‘이건 팔면 꽤 짭짤하겠는데?’
누가 볼새라 잽싸게 인벤토리에 챙겨넣은 언럭키가 호야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아이구 우리 이쁜 호야. 참 잘했어요~”
“뀨르!”
“다음에도 또 이런 거 가져와야 한다? 이왕이면 더 크고 좋은 걸로. 레전더리 아이템같은 거 말이야. 알았지?”
“뀨르?”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호야.
그러나 언럭키가 머리를 계속 쓰다듬자 연신 좋아서 몸을 비틀었다.
“뀨르르르!”
“그래. 그래. 너 방금 고개 끄덕였다. 형이랑 약속한 거야.”
호야랑 놀다보니 복잡한 머릿속이 그나마 좀 풀리는 것 같다.
***
다음날 아침.
“백현 씨. 표정이 왜 그래?”
“왜요?”
“왜라니. 거울 좀 봐봐. 이러다 곧 쓰러지겠는데?”
식사 시간에 만난 박세훈은 백현을 보며 놀랐다.
그의 말에 백현은 거울을 들여다봤다.
부엌 한 쪽 구석에 걸려있는 거울은 오랫동안 청소하지 않아 때가 잔뜩 꼈지만, 얼굴을 보는 것 정도는 어찌어찌 가능했다.
“…어우.”
백현조차 스스로의 얼굴을 보고 놀랐다.
“그치? 백현씨 본판이 잘생겨서 그나마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현실에 좀비가 나타났다고 오해했겠어.”
“그러네요.”
백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어제 잠을 좀 설쳐서요.”
월드 사가에서의 고민은 접속을 종료한 후에도 이어졌다.
바깥으로 나가야 리바 델 레이 분타를 찾아서 공격하든 말든 할텐데, 나갈 수가 없었다.
이걸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계속 끙끙거렸지만 좋은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매일같이 하루 종일 월드 사가에 접속해있는건 피곤한 일인데, 거기다가 잠까지 제대로 못잤다.
그러다보니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밥이나 먹죠.”
“그래.”
대충 밥과 김치를 가지고 자리에 앉은 백현과 박세훈, 이용승.
매일 아침 시간은 세 사람이 간략하게 회의를 하는 시간이다.
앞으로의 계획을 상의하기도 했고, 지금 현 상황을 되짚을 때도 있었다.
백현은 지금 자신이 하고있는 고민을 털어놓고 함께 머리를 맞대볼까 싶었다.
“일단 오늘은 내가 먼저 할 말이 있는데.”
그때 박세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음….”
그러더니 잠깐 주저하던 그는 곧.
폭탄을 던졌다.
“…우리 라이브 방송 한번 해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