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백현의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며 성 팀장은 오랜만에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언제나 포커페이스를 잃지 않는 게 그의 장점이다.
그렇기에 덩치 부하들은 그에게 두려움을 느꼈고, 머니앤캐시의 대표는 그를 신뢰했다.
그런 성 팀장의 감정이 파도치고 있었다.
다만, 입가에는 슬쩍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이런 거라면 나쁘지 않은 파도지.’
대부업을 하면서 가장 기분 좋은 순간이 이럴 때 아닐까?
제 발로 큰돈을 갚겠다니.
“백현 씨가 그렇게 자신 있게 왔으니 저도 기대가 되는군요. 사실 날짜 따위는 별 상관이 없죠.”
성 팀장이 손을 까딱였다.
어서 패를 까보라는 소리였다.
백현은 스마트폰을 조작했다.
잠시 후 성 팀장의 폰에 알림이 왔다.
미리 볼 수 있는 팝업을 확인한 그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3…3억…?”
정확히 말하면 3억하고도 1천 2백만 원.
312,000,000원.
이번에 백현이 송금한 액수였다.
“…….”
성 팀장의 입이 딱 다물렸다.
분명 많을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이건 예상을 뛰어넘지 않았나.
‘분명 두 달 전에 1억5천을 가져오면서 나랑 협상할 때만 해도, 이렇게 큰 금액은 당분간 다시 못 만들 것처럼 말했는데….’
그런 와중에 저번 달에도 상당한 빚을 갚기는 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고작 한 달 만에 3억이라니.
국내 최정상급 미튜버는 되어야 월 3억이라는 금액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건 연평균을 내었을 때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한순간이라도 비슷한 성과를 내었다는 점에서, 백현의 대단함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중요한 점이 하나 더 있었다.
“이제 제 빚은 다 갚은 거죠?”
지난 3개월 동안 누적으로 갚은 금액이 5억이 넘어갔다.
백현의 빚. 정확히 말하면 친구 보증 잘못 서줬다가 생긴 빚이지만, 어쨌거나 그 빚을 다 갚은 것이다.
“…….”
성 팀장은 잠시 대답을 못하고 그를 쳐다봤다.
대부업에 오래 종사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많은 사람을 만나봤다.
싹싹 비는 사람, 애원하는 사람, 되레 욕을 하고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사람, 정신을 고쳐먹고 착실하게 살며 조금씩 갚아나가는 사람 등.
온갖 인간들이 존재했지만 백현 같은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 무일푼 없던 고아 출신이 3개월 만에 5억을 갚아버리다니.
“…인정합니다. 백현 씨. 당신은 더 이상 우리 (주)머니앤캐시와 채무 관계가 사라졌어요.”
나직이 말하는 성 팀장의 말에 백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드디어…!’
아마 눈앞에 꼴도 보기 싫은 성 팀장이 없었다면 지금 무슨 환호성을 질렀을지 모른다.
이 감옥 고시원에 그리 오래 있지는 않았다.
6개월 정도밖에 안 되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얼마나 고통받았던가.
신체의 고통은 물론이고, 평생 여기서 살아야 할 수도 있다는 절망감이 뇌리를 가득 채웠다.
그건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감정이다.
성 팀장은 채무 계약서를 꺼내어 건네줬다.
“원본입니다. 복사본은 없고요. 이제 방 뺄 겁니까?”
“아뇨.”
백현이 고개를 저었다.
“전에도 얘기했잖아요. 혼자 나가지는 않을 거라고. 당분간은 좀 더 있겠습니다.”
자기 빚을 갚았다고 휙 하고 나갈 생각은 없다.
이렇게까지 될 수 있었던 건 혼자만의 힘이 아니다.
물밑에서 박세훈과 이용승, 컵라면이 계속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없던 시절부터 그들이 선의로 도와주지 않았다면, 이런 꿈같은 상황도 오지 않았겠지.
‘이제 남은 건 10억이다.’
백현이 다시금 자신을 다잡았다.
이 불편함은 동료들과 같이 해소하겠다.
그런 생각으로 백현이 성 팀장의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 * *
장성급이 된 후로 하게 된 작전에서 얻는 경험치는 어마무시했다.
몬스터의 레벨대부터 추가 공적으로 얻는 경험치까지.
능력 대비 레벨이 낮았던 언럭키는 급속도로 성장했다.
하루에 적으면 1개, 많으면 3개 이상씩도 레벨업을 한 것이다.
“정말 떠날 건가?”
“예.”
“하아….”
맥켈 대장은 한숨을 푹 쉬었다.
“다시 한 번 재고해 주는 것은…”
“이미 충분히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정입니다.”
“…그렇군.”
언럭키는 맥켈 대장에게 이제 그만 떠나겠다는 말을 꺼냈다.
레벨 150, 직위는 투스타. 소장을 달성했을 때 한 말이다.
“하지만 정말 안타까워서 그렇네. 자네라면 투스타가 아니라 금방 원수까지 될 수도 있을 거야.”
별 5개. 공중 요새를 총 책임지는 파이브 스타. 원수의 자리도 될 수 있다.
맥켈 대장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언럭키의 생각도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될 수도 있긴 하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여기 머무를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언럭키가 알기로 이전에 ’원수’를 찍어봤던 유저는 없다.
장군이 되었을 때 얻었던 업적을 생각해보면, 원수가 되었을 때도 무언가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필시 굉장히 좋은 것이겠지.
하지만 투 스타라는 지금의 위치에서 더 올라가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
‘일단 시간이 너무 많이 들어.’
가성비가 좋지 않다는 뜻이다.
이전처럼 어려운 작전 한 두개 한다고 팍팍 계급이 상승하지 않는다.
최상위권 장성이란 그런 위치였다.
게다가 단순히 공훈만 필요하지도 않다.
계급을 심사하는 4성장군들과의 친분도 쌓아야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력이 필요하다.
여러모로 복잡한 것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이 도시는 여기서 끝내는 게 낫지.’
다음 도시는 ’검신의 전당’이다.
처음부터 자신이 목표로 했던 곳.
애초에 공중 요새는 거쳐 가는 것만 생각했다.
신탁도 처리하고 성검을 얻기 위해서는, 다음 도시로 넘어가는 게 훨씬 나았다.
‘게다가 조금 더 성장하면, 랭커가 멀지 않았으니까.’
레벨 200 정도가 되면 랭킹 최하위권에 들어갈 수 있다.
지금 자신의 속도로 볼 때, 분명 3개월이 안 걸릴 거라 자부한다.
“후…. 알겠네. 하지만 언제나 자네가 이 공중 요새의 2성 장군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게.”
“물론입니다.”
“그래. 작별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지. 가보게. 장기 파견 나갔다고 생각하지.”
“알겠습니다. 언젠가 또 기회가 되면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 역시. 나도 가끔 다른 도시로 파견을 나가기도 하니, 그때 보면 좋을 듯하군.”
맥켈 대장과는 웃으며 악수한 뒤 헤어졌다.
* * *
-우웅
워프 게이트가 작동하는 특유의 공명음이 들렸다.
시야가 한 바퀴 회전하더니 보인 풍경은 경건했다.
맑은 하늘 아래 쭉 뻗은 평원.
아무것도 없이 자연만 존재하는 그 곳에, 거대한 신전이 있었다.
새하얀 신전은 위로 높은 게 아니고 옆으로 넓었다.
단층 건물이었는데, 도대체 면적이 얼마나 되는지 짐작이 안 될 정도로 평원 전체를 꽉 채우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게이트를 통과하자마자 언럭키에게 다가오는 사제 한 명이 있었다.
새하얀 법복을 입고 있는 여자였는데,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누군지 아십니까?”
“그럼요. 신탁의 주인되시는 분 아니십니까. 요 근래 도착하실 거라는 신의 신탁이 있으셨습니다.”
‘일기 예보도 아니고. 신탁이란 게 참 편하군.’
언럭키는 불경스러운 생각을 하면서도 마주 웃어주었다.
“과연. 정의와 검의 신 ’유스티아’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군요.”
앞으로 신관의 도움을 많이 받아야 할 텐데, 모시는 신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할 수야 있나.
자본주의적인 미소를 짓는 것에는 도가 튼 언럭키였다.
“유스티아님께서는 모든 걸 알고 계십니다.”
“그렇다면…혹시 신관님은 제가 여기 온 이유도 알고 계십니까?”
“유스티아님의 성검을 쟁취하실 생각 아니십니까?”
“맞습니다. 혹시 좀 도와주실 수 있으시진요?”
“안타깝지만 어렵습니다.”
신관은 고개를 저었다.
“검신의 전당은 모든 것을 혼자 이뤄내야 합니다. 제가 해드릴 것은 도전하시다가 빠져나오셨을 때 치료해 드리는 것뿐입니다.”
“음…그렇군요.”
언럭키는 살짝 아쉬우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검신의 전당은 그런 곳이었다.
전당에 도착한 유저는 도전을 할 수가 있었다.
드넓은 신전은 총 29단계의 방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1단계부터 차근차근 공략해 나가는 방식이었다.
각 단계를 공략해낼 때마다 경험치를 얻고, 운이 좋다면 스킬과 아이템도 얻는다.
단계가 높아질수록 클리어는 어려워지며, 보통 어느 순간 한계를 맞게 된다.
그러면 그 한계에 알맞은 단계에서 주구장창 반복 클리어를 하며 레벨을 높이고, 180레벨이 되면 도시를 벗어날 수 있었다.
“당신께서 원하시는 성검은 29단계를 모두 공략해야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렇군요…짐작은 했습니다.”
사냥이 없는 이상한 도시였지만, 이 곳은 검신의 전당이라는 이름답게 검사들을 위한 장소였다.
천공의 탑이나 공중 요새가 원거리 유저들 편의적인 곳이었다면 여기는 정반대.
검사가 아니라면 아예 전당에 도전 자체를 못한다.
오직 검사만을 위한 장소!
각 직업별로 이런 특이한 도시가 하나쯤은 있었다.
“예. 제 실력으로 해보이겠습니다.”
언럭키가 자신 있게 말했다.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 달이 지났습니다.]
[올마스터로서 새롭게 직업을 획득하실 수 있습니다.]
[기존 직업을 유지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새로운 직업을 획득한다면 ’신궁’ 직업의 성장세는 현 상태에서 저장됩니다.]
[선택할 수 있는 직업]
[1. 검사]
[2. 마법사]
[3. 궁수]
[4. 암살자]
[5. 사제]
당연히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띠링!
[사제를 선택하셨습니다.]
[한 달 동안 ’검왕(레전더리)’ 직업이 적용됩니다.]
[직업 특수 효과가 존재합니다.]
[검왕(레전더리) 보너스가 발동됩니다.]
[검 계열의 무기 사용 시 공격력 200% 상승.]
[검을 활용한 스킬들의 효과 150% 상승.]
[검을 사용할 때 신체 보정 작동.]
[검을 들고 있을 시 정신력 보정 작동.]
[기본 스킬로 ’검술 마스터리’ 가 주어집니다.]
[검을 활용한 공격에 ’물리력 + 마법력’이 적용됩니다.]
.
.
.
검왕.
올마스터가 되면서 가장 처음 플레이했던 직업이자, 만병지왕이라는 검을 다루는 직업 중 최고라고 손꼽히는 것.
‘여길 지나간 랭커들 중 극소수만이 29단계까지 클리어했다고 하지.’
하나같이 검사 계열 레전더리 직업을 얻었던 자들이다.
그들이 무엇을 얻었는지는 모르지만, 이 이후로 그들의 성장세는 폭발적이었다.
랭커들 중에서도 최상위권으로 분류되는 하이 랭커.
그 중에서도 상위권으로 올라간 것이다.
‘걔네들이 했는데 내가 못할 것도 없겠고.’
지금껏 얻은 업적, 능력들을 종합하면 비슷한 레벨 당시의 랭커들 중 그 누구보다 뛰어나다.
직업은 물론이고 능력치 역시 동레벨에서 압도적.
29단계?
‘39단계까지 있어도 싹 다 클리어할 수 있어.’
“사제님.”
“클로에라고 불러주십시오.”
“네. 클로에 사제님. 바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검신께서는 언제든지 방문자를 환영하십니다.”
클로에 사제는 장검 한 자루를 내밀었다.
“이걸 가지고 가 주십시오.”
“이건…?”
[검신의 수련용 장검]
-아이템 등급 : 노멀.
-검신의 전당에 입장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평범한 검이다.
처음엔 뭔가 싶어 눈을 빛냈던 언럭키의 호기심이 금방 꺼졌다.
노멀 검이라니.
“괜찮습니다. 저도 무기 있어요.”
많이 팔아 치웠지만, 이럴 때를 대비해서 들고 있는 유니크 급의 검만 해도 몇 자루 있다.
레벨 제한이 좀 낮은 것들이긴 하지만, 노멀 등급 검에 비교하면 천하제일 명검이겠지.
그러나 클로에 사제는 고개를 저었다.
“안됩니다. 첫 단계에서는 무기의 차별이 금지됩니다. 무조건 이걸 쓰셔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