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제 예상보다 훨씬 더 빨리 오셨군요.”
클로에 사제는 자신을 찾아온 언럭키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절 너무 과소평가하신 거 아닙니까?”
“그럴 리가요. 빠를 거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 이럴 줄은 몰랐지만요.”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다시 생각해보니 제가 과소평가한 게 맞는 것 같군요. 전당을 29단계까지 한 번의 포기도 없이 돌파하신 분은 처음이었는데. 사과드리겠습니다.”
“사과하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언럭키가 급히 손을 내저었다.
어떤 보상을 줄지 모르는 그녀에게 굳이 필요도 없는 사과를 받고 싶진 않았다.
잠시 웃던 그녀는 곧이어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지금부터 유스티아님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파앗!
클로에 사제의 몸에서부터 신성한 빛이 터져 나왔다.
눈동자가 하얗게 변하더니, 등 뒤로 반투명한 천사의 날개가 돋아났다.
“그 분께서 제 입을 빌려 직접 말씀하실 겁니다.”
언럭키는 기세에 압도되어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났다.
정의와 검의 신. 유스티아가 눈앞에 빙의했다.
[아이야.]
목소리부터 달라졌다.
공간이 울리는 듯한 목소리는 자그마한 클로에 사제의 몸에서 나왔다기엔 너무 컸다.
그녀의 등 뒤로 희끗한 여신의 형상이 맴돌고 있었다.
언럭키는 냅다 고개를 박았다.
“신이시여.”
[너의 활약을 잘 보고 있노니라. 성검의 주인으로서 걸맞은 무력이었다.]
“감사합니다.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네가 검의 길만 걷는데 아니라는 점이다. 평생을 추구해도 끝을 보기 힘들게 검의 길일진대. 어찌 한눈을 파려고 하느냐.]
언럭키는 올마스터라는 직업을 적재적소에 활용하고 있었다.
필요할 때마다 직업을 바꿔댄 것이다.
신이 보기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은 거고.
물론 그 정도로 당황할 언럭키가 아니었다.
“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원해서 모든 것을 추구하는 길로 간 게 아닙니다.”
직업 뽑기에서 우연히(?) 나왔다.
[알고 있다. 너희 모험가들이 스스로의 운명을 뽑아서 개척해나간다는 것은.]
신도 직업 뽑기를 안다는 듯한 눈치였다.
언럭키는 살짝 안도했다.
어쩔 수 없이(?) 올마스터가 되었다는데 뭘 어쩌겠는가.
[그렇다면 본인이 그 운명을 부여해 줄 수도 있느니라.]
그때 유스티아가 다시금 말했다.
동시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띠링!
[정의와 검의 신 유스티아가 직업을 제안합니다.]
[검왕(레전더리)직업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수락하시면 기존의 직업 올마스터(레전더리)가 삭제되고 검왕(레전더리)로 대체됩니다.]
‘??’
언럭키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아니…여기서 이딴 제의를 한다고?’
큰일났다.
월드 사가 인생 최고의 위기가 닥쳤다.
‘이, 이걸 어쩌지?’
정신 차리자.
호랑이한테 물려도 제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고 했다.
물론 신과 호랑이 따위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너무 크긴 했지만…
“신이시여!”
[말하거라.]
“비록 우연찮게 받게 된 운명이지만 저는 지금의 운명을 만족하며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뭣이!? 검의 길을 무시하는 건가??]
“…절대 그런데 아닙니다. 당연히 검은 제 인생의 동반자로 생각할 정도로 존중합니다. 평생 가도 짐작이 안 될 정도로 길고 험한 곳이죠. 제 운명이 아니었다면 저도 검의 길을 갔을 겁니다. 그러나 이미 부여된 운명. 저는 제 운명에 순응하고 다른 무구의 길도 만족하면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
혓바닥에 모터라도 단 듯 두다다다 내뱉은 변명이 통했을까.
[가시밭길을 스스로 걸어가려고 하다니. 내 좀 편하게 해주려고 했건만. 본인의 뜻이 그렇다면 잘 알겠다.]
‘후우.’
언럭키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마터면 다운그레이드 당할뻔했네.’
올마스터의 직업 안에 검왕이 포함되어있다.
원한다면 계속 검왕을 플레이하는 것도 가능하고, 아니라면 한 달에 한 번 다른 거로 바꿀 수도 있다.
그런데 기껏 제안한다는 게 검왕이라니.
바보가 아니라면 선택할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언럭키는 튀어나오려는 불만의 감정을 최대한 자제했다.
괜히 불손한 눈초리로 쳐다봤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크흠. 신이시여. 저는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30단계를 도전하기 위한 자격을 갖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하다.]
“허락만 해주신다면 이 몸을 불사르더라도 도전에 성공해 보이겠습니다.”
레전더리 최상급의, 지금도 성능이 미친 수준인 성검을 업그레이드해준다고 하는데.
당연히 몸을 불살라서라도 성공해야지.
[패기가 넘치는구나. 나는 그런 후배 검사들을 좋아하는 편이지.]
신이 웃었다.
조짐이 좋았다.
[좋다. 내 특별히 그대에게는 그냥 평범하게 전당의 30단계를 주지 않고 다른 임무를 내려주겠다.]
“……? 그냥 원래대로 주셔도 저는 충분히 만족합니다만?”
[내가 만족을 못하겠구나.]
“…알겠습니다.”
[보아하니 너는 예전부터 리바 델 레이와 악연으로 얽힌 사이였던 것 같구나.]
악연.
그 말에 언럭키는 살짝 의문이 들었다.
글쎄. 게네들과 내가 진짜 악연일까?
‘따지고 보면 도움받은 게 한두 개가 아닌데.’
자신이 이렇게 빨리 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들의 비중이 컸다.
아이템, 퀘스트, 스킬, 경험치…
퍼다 준 게 한두 개가 아닌 것이다.
“물론입니다. 저와는 이제 이 땅에 같이 살 수 없을 만한 원수입니다.”
열심히 표정 관리하며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주었다.
[그렇다면 리바 델 레이를 없애거라. 성검을 들고 있는 그대라면 충분하다.]
그 직후 메시지가 나타났다.
-띠링!
[신탁 퀘스트가 발동합니다.]
[신탁 퀘스트 : 리바 델 레이의 던전 5개 없애기.]
-퀘스트 등급 : X.
-퀘스트 설명 : 점점 세력을 넓혀가는 리바 델 레이는 그들의 비밀 병기들을 만들기 위한 던전도 보유하고 있다. 근처 도시들에 던전의 위치가 표시된다. 해당 던전을 찾아가 리바 델 레이의 흔적을 지워라.
-퀘스트 보상 : 대량의 경험치, 성검의 진화.
* * *
밤 12시.
접속을 종료한 백현은 열심히 월벤을 둘러보고 있었다.
“내 얘기가 많이 늘었네.”
커뮤니티 자유게시판에는 여러 주제가 우후죽순 나타난다.
대부분은 랭커 누구누구가 이랬다 저랬다 등. 월드 사가 최고의 스타들에 관한 이야기가 많았다.
그런 커뮤니티의 주제 중에 언럭키에 대한 내용도 있었다.
-언럭키 레벨업 속도가 역대 유저들 중 최고 아닐까?
-전당은 29단계까지 스트레이트로 깨버리니까 보상 누적되면서 얻어가는 경험치가 장난 아니더라.
-빨리 랭커 되서 다른 랭커들 뚝배기 깨는 거 보고 싶네.
언럭키의 성장세가 심상치 않았다.
전부터 유망주 소리는 수도 없이 들었지만, 이번 라이브 때는 명백히 그 이상을 보여주었다.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이 29단계까지 검신의 전당을 돌파한 것.
하이 랭커들 조차도 못 했던 일이며, 현시점 하위권 랭커들이 검신의 전당으로 되돌아간다고 해도 비슷한 퍼포먼스를 못 보여준다는 의견이 많았다.
백현도 동의했다.
‘이제 하위권 랭커급이라고 할만하지.’
최근에 얻은 업적과 아이템으로 인해 급격한 성장을 이뤄냈다.
레벨은 아직 180으로, 200레벨부터 랭커로 불리는 걸 따지면 조금 부족하지만, 그 정도의 차이는 월등한 스펙으로 메꿀 수 있었다.
자신의 게시글을 보던 백현은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가자 커뮤니티를 좀 자제했다.
그가 잠을 줄여가며 월벤에 들어온 이유는 정보를 좀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신탁 퀘스트가 문제란 말이지….”
검신 유스티아가 내린 신탁 퀘스트.
성검의 진화를 위해서라도 이건 무조건 성공해야 한다.
다만 장기적인 여정이 될 것 같다.
그녀가 말해준 리바 델 레이의 던전은 총 5개로, 가장 고레벨의 던전은 레벨 240 언저리에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있었다.
차근차근해야겠지만 당장 할 수 있는 것도 있긴 하다.
“도시 빌루스의 던전. 어릿광대의 놀이터.”
검지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던전 어릿광대의 놀이터에 대한 걸 월벤에 검색해봤다.
역시나 나오는 정보는 없었다.
공개된 던전이 아니라는 뜻이다.
“하아. 이러면 이제 일이 좀 복잡해지는 건데.”
백현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공개 던전이라는 뜻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는 걸 수도 있고, 아니면 어느 길드가 독점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둘 다 문제였다.
미공개 던전이라면 탐험가가 아닌 백현이 찾기는 어렵다.
도시에서 단서를 찾아 조합하고 여러 번의 실패를 겪으며 시간을 갈아 넣어야 한다.
행운의 무지개 스킬이 있긴 하지만, 그것도 아무 때나 터지는 능력이 아니다.
운에 기대야 하는데…
‘맨날 운이 좋으면 내 닉네임이 언럭키일 리가 없잖아.’
게다가 이 경우면 차라리 낫다.
다른 길드가 소유한 던전이라면 더욱 골치가 아파진다.
외부인인 백현이 던전을 쓸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월벤을 종료했지만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계속 고민에 빠졌다.
뾰족한 해결책은 나오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백현은 피곤한 기색을 아침을 먹고는 접속 준비를 했다.
-띠링!
-메일이 도착했습니다.
“음?”
그때 메일 알림이 왔다.
그가 일부러 알림 신청을 해 놓은 발신자는 많지 않았다.
그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인 대룡 미디어에서 연락이 왔다.
[안녕하세요 언럭키님. 이번에는 빅드래곤 길드로서 부탁을 하나 드리고 싶어 연락드렸습니다.]
정확히는 빅드래곤 길드와 대룡 미디어를 겸업하고 있는 정신찬에게서였다.
움찔한 백현이 자세를 다잡았다.
염화 오러 스킬북 때문에 4억이라는 빚을 졌다.
물론 그 중 절반은 미션금으로 갚을 수 있게 되었지만, 아직 입금 날짜가 아니라서 정산을 못 받았다.
빚쟁이가 저자세가 되는 건 당연한 일.
그가 조심스럽게 메일 내용을 확인했다.
[언럭키님의 활약은 저희도 항상 지켜보고 있습니다. 정말 대단하신 라이브 방송이었으며…(중략)…이번에 연락드린 건 다름이 아니고 던전 공략에 대한 도움을 좀 받고 싶어서입니다. 도시 빌루스에 저희 길드가 소유한 ‘어릿광대의 놀이터’ 라는 던전이 있습니다.]
“어?”
여기까지 보던 백현이 움찔거렸다.
굉장히 익숙한 이름의 던전이지 않나?
[길드 성장 차원에서 구매한 곳인데 공략을 너무 많이 실패해서 공략에 대한 도움을 좀 받고 싶습니다. 전에 스킬북을 판매하고 달아놓았던 빚을 이번 기회에 쓰고 싶군요. 물론 최근 언럭키님의 몸값을 생각해 의뢰 착수금과 성공금은 당연히 따로 지불하겠습니다.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메일을 다 읽은 백현이 방금 전 본 것들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던전을 공략해달라는 거네.”
도시 빌루스에 있는 던전 ‘어릿광대의 놀이터’.
자신이 찾던 곳인데 거길 공략해달라고 한다.
염화 오러 스킬북을 시세 그대로인 4억에 구매한 대가로 언젠가 도와주겠다는 빚도 달아놓았는데, 그걸 쓰면서까지 부탁해왔다.
심지어 의뢰 착수금과 성공 보수까지 준단다.
“…운빨 미쳤네. 나 오늘 뭐 되는 날인가?”
진짜 언럭키가 아니라 럭키로 닉네임 갈아야되나?
일석삼조.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백현이 당장 답신을 작성했다.
[하겠습니다! 무조건 할게요! 하게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