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악연인가 기연인가
2화 악연인가 기연인가
많은 이들이 황금세가의 공자라고 하면, 다들 부러워하는 눈빛을 보낸다. 아무 걱정도 없고,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다가, 금으로 짠 수의를 입고 축복받은 생을 마감할 걸로 예상할 거다.
하지만 실제 황금세가는 어떤가. 태어날 때부터 숨이 막힐 것만 같은 감시 속에서 살아야 했다.
“우리 막내가 쥐약이라도 먹은 것 같은데.”
이렇게 금화청이 이렇게 혀를 내두르고, 금월상과 금수린의 눈이 커진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우리는 지금 전 강호인들에게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는 중이었다. 지킬 힘도 없으면서 돈이 많다는 죄로 말이다.
혹자들은 물을 수도 있겠다. 돈이 많으면, 그걸 힘으로 바꾸면 되지 않냐고. 하지만 이미 정도맹이 정파의 기둥으로 남아있고, 전통의 문파들이 지켜보는 데서 힘을 키우는 건 불가능했다.
우리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딱, 빛 좋은 개살구였다.
이 사실은 황금세가의 형제들뿐 아니라, 시종들까지 모두 아는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나와 형제들은 위축되어 살 수밖에 없던 거다.
그리고 내총관은 우리를 위축시키는 감시자들의 관리자였다.
다른 말로 하면, 앞잡이였다. 총관은 최대한 눈을 험악하게 부라렸다.
“공자님. 분수를 모르시는군요.”
“이제부터 주인 노릇 좀 해보려고.”
“지금 황금세가에서요?”
내총관이 비웃었지만 난 그냥 잠자코 있었다.
“공자님. 이번 일은 장로회의에 직접 회부해서 징계 수위를 정하겠습니다.”
내총관은 그렇게 말하고 부엌으로 씩씩거리며 들어갔다.
금화청은 어깨를 으쓱했다.
“너무 야속하게 생각하지 마. 형님이 알려주는 교육이야. 나도 그럴 때 있었지. 갑자기 화가 날 때. 내가 이곳에서 태어나는 걸 선택한 적도 없는데, 왜 이렇게 감시받고 답답하게 살아야 하냐는 생각이 들지. 근데 사람들한테는 굴레라는 게 있는 거야. 그 굴레는 사람 혼자 발버둥친다고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
“형님. 하나만 여쭤보겠습니다.”
금화청은 내 말에 눈이 가늘어졌다.
“왜, 무슨 발버둥을 쳤냐고? 자존심 싸움을 하자는 거냐?”
“아뇨. 제 질문은 그 굴레의 끝을 생각해보신 적 있으시냐는 겁니다.”
내 말에 금화청은 물론이고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고작 열두 살이 담기에는 낯설고 무거운 말이라고 생각한 듯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난 그들에게 답을 듣고 싶은 게 아니라, 여기 놓여있는 음식을 먹고 싶은 거였으니까.
돈이 많은 집안답게 음식들은 하나같이 훌륭하기 짝이 없었다.
당면에 간 쇠고기를 뿌려서 볶는 마의상수(馬蟻上樹)가 내 눈에 들어왔다. 내 젓가락은 쏜살같이 음식으로 향했다.
곧 당면의 쫀득함과 쇠고기의 고소한 맛, 사천식 양념의 매콤함이 같이 올라왔다. 생각해보니 음식다운 음식을 먹는 건 또 얼마만인지.
“맛있네요. 좀 드시죠.”
난 천천히 음식을 씹으며 느꼈다. 황당해 보이는 형제들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
옥묘각 앞. 난 옥묘각의 정문에 있었고, 내 맞은편에는 내총관. 주변에는 구경을 하는 시종들이 있었다. 그들도 나를 구경하듯, 나도 그들을 구경했다.
내총관이 두루마리를 폈다. 황금세가의 장로들이 모여 있는 곳, 금정회(金正會)에서 쓰는 두루마리였다.
붉은색 주단과 테두리에 정밀하게 자수된 금실. 저 두루마리를 만드는 데 쓰인 가격으로도 서민들은 한 달은 능히 살 수 있을 터였다.
“넷째 공자에게 품위 유지 위반의 책임을 물어 닷새 연금형을 명한다. 금정회.”
내총관은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엄숙하게 말했다. 주변을 둘러싼 시종들은 쌤통이라는 듯 의기양양하게 있었다.
그러면서 난 갈색 주머니를 하나 받았는데, 흔들어보니 벽곡단이었다. 연금 생활을 하면서 밥도 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 주머니를 받고 바로 옥묘각으로 들어갔다. 옥묘각 안에 거처하는 시종들도 모두 자리를 비웠다. 시종들이 거들어주면 징계의 의미가 퇴색된다고 했지.
전생에서 사람을 때린 적은 없었지만, 무단 외출로 연금형을 받은 기억이 있다. 그 나이에는 가장 힘들었던 걸로 기억한다.
“궁금하신 거나, 이의 있으십니까?”
내총관이 물었다.
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바로 옥묘각을 들어와서 문을 잠갔다.
주어진 시간은 닷새. 짧은 시간이었다.
*
금정회(金正會). 드넓은 황금세가의 부지에서 가장 고고한 자리에 위치한 곳. 부분적으로는 중앙의 대전보다도 화려한 그곳은 바로 황금세가 장로들의 거처였다.
건물로 통하는 유일한 계단은 총 높이가 오백 척에 가까울 정도로 높고 가팔랐다. 계단의 좌우에는 고가의 관상용 식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또한 건물은 세가의 일은 물론이오, 중원과 강호의 일을 논하고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화려했다.
“여기서 촉촉수가 나온다고?”
“이제 자네에게 적어도 석 점은 깔아놔야겠군.”
그러나 사실상 금정회 안은 여유롭다 못해 방만할 지경이었다.
장로들은 대개 은퇴한 무인들이었다. 대부분의 장로들은 세가의 내부적인 업무에 관여하지 않고, 그저 자리를 지키는 것으로 한 달에 은자 백 냥을 받아갔다.
장로들은 황금세가의 충성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개는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당연히 황금세가를 감시하기 위한 명문 문파들의 결정이었다.
“근데 이렇게 놀면서 돈을 받아도 되나 싶군.”
“황금세가는 원래 그런 곳이 아닌가. 사실상 세가는 중원이 지켜주고 있으니, 최소한의 사회적 환원이라고 해야지.”
“그것도 그렇군.”
은퇴한 무인들에게 황금세가의 장로가 되는 건 아주 행복한 일이었다.
일도 안 하고, 정기적인 수입을 얻을 수 있으니까. 물론 현역 때 꽤 무명(武名)을 날렸어야 가능하지만 말이다.
많은 장로들은 휴식의 개념으로 황금세가에 있지만, 안 그런 장로들도 더러 있었다.
바로 구석에서 보고를 받고 있는 이청명(李淸明) 장로가 그랬다.
이청명은 삼 년 전에 정도맹 교육훈련대장에서 은퇴하고 들어온 사람으로, 이번 금목환의 징벌에 가장 큰 목소리를 낸 사람이었다.
“넷째는 어떻던가? 갇히기 싫다면서 울고불고 했을 거 같은데.”
“아닙니다. 퍽 의연하게 들어갔습니다.”
이청명은 시종의 보고에 한쪽 눈썹을 약간 치켜 올렸다.
이청명은 본인이 황금세가의 수저 개수까지 외울 수 있다고 자부하는 몸이었기 때문이다. 지피지기 백전백승이었으니, 황금세가에 관련된 정보는 모두 분석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급으로 다뤄지는 정보는 역시 직계 자식들이라 할 것이다. 황금세가를 삼키는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부분이니까.
“그래? 뭔가 이상하긴 하네.”
사람이 바뀌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청명이 생각하기에 자식 중에 제일 위협이 안 되는 사람은 넷째였다. 어떤 욕심도 드러내지 않고, 시종들에게 무시를 당해도 못 본 척하고 넘어가는 게 금목환이었다.
근데 그런 사람이 하루아침에 바뀌어 시종의 뺨을 때리고, 당당해졌다는 건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일단 지금 옥묘각 연금을 좀 강화해놓는 수밖에 없겠군.”
당연히 황금세가를 먹으려는 건 이청명 장로뿐 아니었다. 여기는 온갖 군상들과 문파들이 모여 있었다. 황금세가에 얽혀있는 조직들은 이청명이 아는 것만 삼십개가 넘었으니까.
‘이러다가 계획이 꼬이는 건 아니겠지.’
이청명은 불안한 생각을 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어 떨쳐냈다. 황금세가를 먹는 것에 대해서, 자신들은 누구보다 앞서있었다.
*
내가 옥묘각의 문을 닫자마자 한 행동은, 창문들에 있는 주렴(珠簾)들을 전부 내린 것이었다.
아직 오시에 불과했는데도 햇빛이 완전히 차단되자 건물 전체가 어두워졌다.
수상하게 생각하겠지만, 이미 수상하다고 여길 사람들은 전부 여기고 있었으니 상관없었다. 시종들의 면면을 봤을 때, 장로들이 파견해서 나온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그것보다 중요한 건 지금 내 상황을 아는 것이었다.
평평한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눈을 감아봤다. 익숙한 기가 정수리의 백회혈을 타고 내 몸 속을 가득 채웠다.
‘다행이야.’
내가 전생에서 얻었던 능력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이 능력은 기연(奇緣)이라기보다는 악연(惡緣)에 가까웠다. 지하실에서 몇 년을 꼬박 묶여있을 때 얻은 능력이니까.
내 능력은 갇혀있던 중에서도 한계에 내몰리고 제 정신이 아니었을 때 열린 상단전이었다. 상단전이 열린 이유는 아마 극한의 육체적 고통과 피로에 시달린 나머지, 정신이 각성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처음 열렸을 때는 이걸로 도망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내가 아무리 무공에 문외한이더라도 상식은 알고 있다. 상단전은 임독양맥을 타통하고, 내공 안에 담겨있는 오행(五行)을 이해할 때 열리는 게 상단전이었다. 그래서 상단전이 열렸다는 건 극강의 고수라는 의미였다.
무공을 배우지 않은 사람이 상단전을 여는 경우는 연단에 두 갑자는 공들인 진인(眞人)들의 몫이니, 그들은 나를 보면 게거품을 물고 쓰러질 게 분명했다.
근데 상단전이 열린다고 바뀌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절맥도, 천재도, 천하제일인의 덕목이라는 무곡성(武曲星)도 아니었다.
상단전은 무공과 별개로 그저 이치(理致)에 대한 깨달음이었던 거다.
내게 일어난 변화는 예민함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초감각과 진실과 거짓, 껍데기와 실체가 자연스레 보인다는 정도였다.
대신 이걸로 탈출은커녕 지낭 역할을 더 훌륭하게 수행하기만 했지.
‘지금은 어떨까.’
상단전이 먼저 열린 채로 무공을 익힌 사람은 내가 알기로는 없다.
보통 아이 때는 백회혈이 열린 채로 태어나지만, 곧바로 닫히기 때문이다. 계속 열려있으면 아이는 기를 소화하지 못해 광증을 지니게 된다.
나는 그러니까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인간인 거였다.
“후우.”
깊은 심호흡을 하면서, 설렘과 두려움으로 내 하단전을 살펴본다. 어떠한 내공도 축적되지 않은 백지 상태였다.
이제부터 나는 선택해야 했다.
역시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악연에서 말이다.
내가 감옥에 계속 혼자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나마 즐거웠던 보름. 십 년의 세월 동안 유일하게 같은 감옥에 갇힌 사람이 있었던 기간이었다.
갇힌 사람은 한 명. 감색 도포를 입은 중년 남성이었다. 그는 나와 몇 번 대화하더니 혼자 이렇게 계속 중얼거렸다.
‘머리가 꽤 비상해 보이는군. 여기서 이렇게 묶여있는 것도 이해가 되네.’
‘자네 같은 사람이 마교에 도움이 되지 않고 정파의 무공 연구를 했다면···’
며칠이 지나고, 그와 꽤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때쯤 감색 도포의 남자가 꺼낸 말은 이것이었다.
‘자네, 태을신공(太乙神功)이라고 들어봤나?’
내 첫 기연은 다름 아닌 지옥 같은 과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