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형님
3화 형님
모든 문파에는 각자 대표하는 무공들이 있다. 소림사의 역근경(易筋經), 무당파의 청허심법(淸虛心法), 화산파의 자하신공(紫霞神功) 등.
굳이 무공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더라도, 명문 문파들의 무공을 논하는 건 흥미로운 이야기였기에 모든 사람들이 각 문파의 대표적인 무공 정도는 알고 있었다.
내가 오랫동안 갇혀있어 정신을 놔버렸을 때도, 태을신공이 종남파 직계들에게만 전승되는 비전(秘傳) 심법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산화겸 아저씨. 지금은 종남에 있겠지.’
감옥에 갇혔던 이는 종남의 장로, 산화겸이었다. 개인적으로 마교를 추적하다 걸렸다고 했었다.
그 아저씨를 본 건 며칠 되지 않았다. 내게 태을신공을 일러주고 곧 끌려 나가 죽었으니.
그래도 내 기억에는 여전히 그의 목소리가 뚜렷했다.
‘지금 나는 우리 종남의 태을신공 구결을 수정하고 있다네. 자네는 머리가 좋아보이니 도움이 될 것 같은데.’
‘근데 그 구결 이렇게 쉽게 알려줘도 되는 겁니까?’
‘뭐 어때. 우리밖에 없는데. 사실 살 가망성도 없어 보이고.’
‘살 가망성도 없는데 구결은 왜 알려줍니까?’
‘그래도 무인으로서 궁금한 건 궁금한 거라네. 내가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지. 어떤 성취를 이뤘는지 말이야.’
난 그렇게 산화겸에게 태을신공의 원 구결과 수정된 구결을 들었고 그것을 비교했다.
그 구결을 다 들었을 때, 난 무인이 아닌데도 태을신공이 뛰어난 무공이라고 생각했다.
그 구결에서 느껴지는 심후한 깨달음을 얼핏 봤기 때문이었다.
내가 느낀 건 맞았는지, 산화겸은 태을신공이 어느 심법에도 다 어울리는 신공이라고 말했다. 유일한 흠은 너무 정순한 내공을 받다보니 축기가 느리다는 정도였다.
그래서 이 깨끗한 몸에는 가장 적격인 심공이었다.
‘···그러나 이걸로는 안 돼.’
태을신공은 절학이기는 하지만 다른 상승의 무공과 어울려야 그 빛이 발하는 무공이다. 너무 느리기 때문이었다.
원래 태을신공은 기해(氣海)에서부터 하완(下脘), 건리(建里)을 천천히 자극하면서부터 올라가는 것이었다.
산화겸의 불만도 바로 축기의 속도였고, 구결을 수정한 것이다. 물론 나와 같이. 우리는 계속 감옥에 묶인 채로 구결들을 오가며 수정해갔다.
나는 무공에 대한 지식이 없었지만 오행과 사상에 대한 것들의 수정을 도왔다. 사실 구결은 실전적인 검로가 적힌 것이 아니라서 내가 다하기는 했지만.
아무튼 그래서 우리의 수정본은 기해에서 바로 중완(中腕)을 첫 번째 거점으로 삼는다. 태을신공의 안정성과 방향성을 믿고 빠르게 나아가는 거다.
우리는 그 수정본을 태을헌원신공(太乙憲原神功)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물론 당연히 실험해본 적은 없다. 우리는 운기행공을 할 상황이 못 됐으니까.
태을헌원신공이라는 미래의 무공이, 지금 나한테서 처음 나오는 것이었다.
‘될까.’
잠시 불안감에 휩싸였지만 곧 떨쳐냈다. 이런 잡념은 주화입마의 원인이 될 수 있었다.
마음을 굳게 먹고 태을헌원신공의 구결을 속으로 읊으며 심호흡을 했다.
순식간에 몸이 더워지고 냄새나는 땀이 흘러나왔다.
무인으로서의 첫 걸음이었다.
*
“흡, 흡!”
금월상의 기합 소리와 함께 검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났다.
손목과 팔목은 정직하게 나가고 있음에도 검 끝은 화려하게 흔들렸다. 패(覇)의 끝에 이르러 변(變)까지 도달한, 상승의 경지였다.
“후우.”
“공자님. 쉬엄쉬엄 하시지요. 그러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실수하시면 어쩌시렵니까.”
물을 담은 접시를 건넨 노인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금월상은 피식 웃었다.
“박 노야는 내가 그렇게 걱정이 되나보군.”
원래 황금세가도 지금같이 승냥이 떼만 돌아다니는 건 아니었다. 몇 대를 거슬러서 황금세가를 보좌해온 가문도 있고, 충심이 있는 사람도 있었다.
박 노야 역시 세가에 충성심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또한 금월상을 어렸을 때부터 같이 돌봐줬으니 그들의 유대는 끈끈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 금월상의 거처에 숨겨진 연무장을 만든 것도 오롯이 박 노야의 몫이었다.
“상승 무공을 익히시다 걸리면 장로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어떡하나. 장남으로서 최소 동생들은 지켜야 할 것 아닌가.”
박 노야가 걱정하는 건 그것이었다. 황금세가의 자제들은 이제는 꼭두각시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최대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강호에 위협이 안 되는 쪽으로만 움직일 수 있었다.
현재 금월상이 이궁천뢰심법과 이궁천뢰검법을 오 성에 도달한 게 장로들에게 알려지면 보복이 들어올 게 분명했다. 그래서 금월상은 최대한 건물 안에서 수련을 하고, 바깥에서는 수련을 한 티를 내지 않는 것이었다.
금월상은 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이궁천뢰검법을 일 초식부터 팔 초식까지 둔검으로 펼치면 정확히 반 시진이 걸렸다. 일정에 예민한 황금세가 사람들은 그렇게 자기만의 시간 계산법이 있었다.
“슬슬 시간이 됐군.”
“진짜 가시렵니까?”
박 노야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은 축시(丑時)였다. 황금세가의 직계들은 자야 할 시간이라는 거였다. 이걸 어기고 나간다면, 그것만으로도 징계가 있을 수도 있었다.
“가야돼.”
금월상이 가려는 곳은 옥묘각이었다.
“막내 공자님은 닷새 뒤에 그냥 만나시는 건 어떻습니까?”
“아니. 그러면 늦어. 말했잖아. 아무도 못 본 것 같지만, 목환이의 눈동자가 갑자기 붉어졌었다고. 외총관님이 설명해준 적이 있어. 광증이 생기면 눈동자가 붉어진다고.”
“막내 공자님이 하루 아침에 광증에 걸렸다고요?”
“나도 안 믿기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사람이 바뀔 리가 없지 않나.”
분명히 박 노야도 다른 시종들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지만 이해가 안 된 건 사실이었다.
막내 공자가 그렇게 갑작스레 변했다니. 마치 귀신이라도 들린 것이 아닌가. 세가에서는 그런 소문이 알음알음 들리고 있었다.
“최대한 빨리 확인해야 돼. 갔다 올게.”
금월상은 준비한 검은 홑옷을 걸치고 거처인 건곤각(乾坤閣)을 나섰다.
여기서 옥묘각까지는 경공을 쓴다는 가정 하에 단 일 각. 분명히 짧은 시간이지만 금월상에게는 길었다.
기감을 펼쳤을 때, 사람들은 빼곡하게도 많았다. 경계를 하는 사람도 있고, 지금까지 일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금월상은 가장 사람의 밀도가 적은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더럽게도 많군.’
그래도 금월상의 경공은 일개 시종들에게 걸릴 정도로 만만하지는 않았다. 건물이 얕다 싶으면 타넘어서 그들의 시야 위를 점했고, 사람이 너무 많다 싶으면 그림자 속에 숨어서 휴식을 취했다.
옥묘각으로 가는 길은 힘들었다. 갑작스레 나무 위에 올라가야 할 때도 있었고, 숨을 멈춰야 할 때도 있었고, 눈을 딱 감고 달려야 할 때도 있었다.
이제 그 고난은 끝이었다. 옥묘각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주위에 기감을 펼쳤을 때 걸리는 사람도 없었고, 누군가 뒤를 쫓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긴장을 놓은 금월상은 바로 옥묘각의 벽으로 붙었다.
쉬이이이익.
그때, 금월상의 귀로 뱀이 기어가는 소리와 함께 안개가 자욱하게 꼈다.
“···젠장.”
누가 봐도 부자연스러운 안개였다. 이게 무엇인지 금월상은 알고 있었다. 진법.
“뭔가가 있기는 한가본데.”
연금형을 받을 때 주변에 진법까지 까는 건 듣도 보도 못했다. 분명 막내한테 변고가 있는 게 분명했고, 금월상은 더욱 조급해졌다.
진법이 발동됐다면 분명 바깥에서도 보일 것이고, 누군가가 이곳으로 찾아올 거였다. 여기서 금월상이 걸리면 차후 상황을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금월상은 북쪽으로도 뛰어보고, 동쪽으로도 뛰어보고 했지만 진법 안은 계속되는 안개였다.
그렇게 금월상이 될 대로 되라 하면서 눈을 감고 달릴 때, 누군가 뒤에서 그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금월상은 순간적으로 졸린 목 때문에 기절하고 말았다.
*
내가 태을신공으로 내공을 운용할 수 있게 되었어도 바위를 들 수 있는 초인이 된 건 아니었다.
그저 무인으로서 기초를 잡아놓은 정도. 물론 이번 닷새 동안 어떻게 강해질지, 어떻게 대처할지 세밀하게 짜놓으려고 했다.
근데, 갑자기 이렇게 금월상을 낚게 될 줄은 몰랐다.
지금 내 앞에는 기절한 금월상이 눈을 감고 대자로 누워있었다.
“뭐지?”
근본적으로 드는 의문이었다.
처음에는 내 감각이 이상해진 줄 알았다. 운기행공을 하는 도중 주변의 기운이 어그러진 걸 파악했고, 곧 이어 상단전을 열어 주변을 탐색하니 사람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사람이 있는 곳으로 슬쩍 가보니까 금월상이 눈을 감은 채 제자리 달리기를 하고 있던 거였다. 뭔가 다급해보이기에 목을 낚아채서 옥묘각 안으로 들어오기는 했다.
그래도 난 그 의문을 딱히 오래 끌 필요는 없었다. 그냥 깨워서 물어보면 되니까. 난 금월상의 뺨을 후려갈겼다.
“억.”
금월상은 한심한 소리를 내면서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러자 쭈그려 앉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난 거두절미하고 바로 물어봤다.
“뭐합니까?”
“응?”
금월상은 아직 본인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나는 그러나 금월상한테 들일 시간이 많지 않았다.
“직계 통행 금지시간에는 왜 나왔고, 건곤각에서 왜 옥묘각으로 넘어왔고, 진법에는 왜 갇혀있던 겁니까?”
내 냉엄한 말투에 금월상이 흠칫 떨었다. 그러더니 곧 그의 눈빛이 씁쓸하게 바뀌었다. 금월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숨을 쉬었다.
“···역시, 그렇구나.”
“뭐가요?”
“혹시 환각이 보이거나 환청이 들리지는 않더냐?”
“예?”
나는 눈살을 확 찌푸렸다. 옛날에 환혼공에 한창 당할 때는 그런 건 기본이었다. 그러나 이 깨끗한 몸으로는 당연히 보고 들은 적이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금월상은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서 독백을 했다.
“그렇지 않으면 말 한 마디 없던 동생이 이렇게 말대꾸를 하고, 사람 뺨을 때릴 리가 없지. 광증이야. 광증이 틀림없어.”
나는 할 말을 잠시 잃었다. 내 변화가 그렇게도 보일 수 있다니. 적어도 장로들의 변화는 생각했지만, 형제들의 변화는 눈꼽만치도 생각하지 않았다.
“갑자기 뭔 소리입니까? 광증이라니.”
“넌 모르겠지만, 네 눈동자가 잠깐 붉게 변했다. 그건 분명 상단전 이상으로 인한 증상이다.”
“그래요?”
내 상단전이 이상하기는 하지. 일반적이지 않은 과정을 거쳐 열렸으니.
그런데 눈동자가 붉어지고, 그걸 또 광증과 연결시키는 건 나로서는 당황스러웠다. 제일 당황스러운 건 금월상이 옥묘각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근데 제가 광증인 것과 여기에 온 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동생이 광증에 걸렸는데 당연히 와야 하는 것 아니더냐?”
난 그 말에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이 놀랐다.
왜냐하면 난 그런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금월상이 어떤 사람인지도 난 정확히 모른다.
사실 생각해보면, 난 어릴 때 형제들과 만나지 않고 최대한 집에만 있었더랬다.
“그렇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간과하고 있었다.
지금 난 내 인생을 다시 시작하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인생이 재시작하는 걸 보고 있는 셈이었다.
만약 까칠하던 형제들을 내 편으로 만들 수 있다면, 가문을 지키기는 한결 더 수월할 터였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와중, 갑자기 저 멀리서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기감이 느껴졌다.
금월상도 느낀 듯 표정이 굳어버렸다.
“진법이 발동돼서 확인하러 오는 모양이야.”
그렇겠지. 그나저나 바깥에 진법을 설치했는지는 나도 몰랐다. 어차피 나갈 계획이 없었으니까 몰라도 됐지만, 내 생각보다 나를 의식하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었다.
“형님.”
“응?”
“밖에 있는 무곤진(霧困陣)은 기감을 헷갈리게 하는 진입니다. 최대한 내공을 일으키지 않은 채로, 가까운 벽을 짚고 손을 떼지 않은 채로 가면 쉽게 탈출할 수 있습니다.”
“···응?”
진법에 대한 거라면 중원에서 날 따라올 사람은 없을 터였다. 내 앞에서 진법을 쓰다니, 코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지금은 가만히 계십시오. 발끝도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잠깐 보여줘야겠다. 제대로 된 진법이라는 건 무엇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