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제가 세가를 바꾸겠습니다
7화 제가 세가를 바꾸겠습니다
내가 앉자 다른 사람들도 어정쩡하게 따라 앉았다.
식사는 이어졌지만 말은 한 마디도 오가지 않았다. 나로서는 조용히 음식을 즐기는 게 좋아서 오히려 편했다.
식사가 끝나고, 금화청도 더 싸울 생각은 없었는지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식당을 빠져나갔다. 금수린도 눈치를 보고 빠져나갔다. 금월상도 내게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지만 그냥 밖으로 나갔다.
“공자님.”
내가 식당에서 빠져나오자 기철이 기다렸다는 듯 바로 옆으로 붙었다. 안에서 큰 소리가 나고, 장로들과 외총관 같은 사람들이 오니 불안했을 터였다.
내게 붙는 꼴이 강아지가 주인에게 가는 것과 같이 처량하면서 하찮아 보였다.
역시 사람은 다루기 나름이었다. 전생에는 기철이 내 정보를 팔고 다녔다지만 아직은 아니니까. 과연 뺨의 효능이 어디까지 가련지 지켜볼 예정이었다.
“기철아.”
“네.”
역시 아직까지 기철은 나를 무서워하고 있었다. 나는 짐짓 기철에게 최대한 고압적으로 말했다.
“상무당으로 가서 작은 말뚝 좀 가져와라.”
“말뚝이요?”
난 그냥 아무 말 없이 기철을 바라봤다. 기철이는 흠칫 떨더니 목을 아래로 숙였다.
“몇 개 말씀이십니까?”
“네가 들고 올 수 있을 만큼. 최대한 많이.”
기철의 입은 다시 벌려지려다 이내 닫혀졌다. 호기심과 공포 사이에서 공포가 이긴 것 같다.
곧 기철은 고개를 꾸벅이더니 상무당이 있는 북서쪽으로 모래먼지를 흩날리며 뛰어갔다.
나도 옥묘각으로 가서 준비할 게 많았다.
*
상단전을 최대한 열었다. 머리에는 좀 충격이었는지 귀에서는 매미소리까지 났다.
천천히 걷는다. 발뒤꿈치부터 땅에 얹는대도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손으로 벽을 스치면 균일해 보이는 벽의 작은 요철(凹凸)이 전부 느껴졌다.
기감 역시 마찬가지다. 땅 밑에는 물이 흐르는 곳도 있고, 나무뿌리가 있는 곳, 뜨거운 불이 흐르는 곳도 있으며, 동물들이 파놓은 구멍으로 바람이 흐르는 곳도, 철이 묻혀있는 곳도 있었다. 나는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내가 서있는 곳이 어떤 기운이 강한지 느끼고 있었다.
간이로 하는 진법은 눈속임에 가깝고 이내 자연의 기에 밀려 파해 된다. 제대로 된 진을 만들려면 이러한 사전 조사가 필요했다.
“진짜 막내 공자님한테 광증이 들었나봐.”
“그냥 눈에 띄지 말자. 지금 눈에 보이는 거 없는 것 같은데.”
옥묘각 밖을 서성거리는 나를 멀리서 바라보는 시종들도 있었지만, 뒷얘기를 몇 번 나누다가 사라지고는 했다.
이미 내 머릿속에는 벽으로 막혀있는 건물을 단면으로 잘라 조감하며 내외부로 여러 가지 진법을 설계하고 있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묶여있을 때보다 머리가 훨씬 빨리 돌아가는 것 같았다.
옛날에는 진법 한 개를 구상할 때 이 각을 썼다면, 지금은 세 개를 구성할 수 있었다. 이 역시 상단전의 효능인 것 같았다.
“시간이 좀 부족한데.”
설계를 끝나고 드는 생각은 그것이었다.
곽진도는 식당에서 나가면서 입술을 오물거렸다. 안에 있는 사람은 못 들었겠지만 나는 그의 말을 정확하게 들었다.
말로만 듣던 전음입밀(傳音入密)이었다.
- 자정 때 찾아갈 테니 준비하고 있어라.
저렇게 견제를 받고 있는데 어떻게 자정에 찾아온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내가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곽진도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다.
그때 멀리서부터 나무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니 기철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수레를 끌고 있었다.
“오호.”
난 기철 쪽을 보고 살짝 놀랐다. 그냥 손에 한 아름 들고 올 줄 알았는데, 저렇게 수레까지 동원해서 가져올 줄은 몰랐다.
곧 기철은 내가 서있는 쪽으로 헉헉거리면서 왔다.
“왔습니다. 공자님.”
“꽤 많이 받아왔구나.”
난 수레를 보면서 말했다. 수레 안에는 작은 원통형의 나무들이 빼곡하게 쌓여있었다.
이렇게까지 많이는 필요 없었지만 나중에 쓸 곳이 있으리라.
“혹시 상무당에 무슨 말을 하면서 말뚝을 달라고 했느냐?”
“그냥 옥묘각 울타리에 보수할 곳이 많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구나. 잘했다. 들어가서 쉬어라.”
내가 말뚝을 원한다는 걸 알려줘도 상관은 없었다. 열두 살이 진법을 쓴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니까.
“보좌하지 않아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래.”
기철은 일곱 번 뒷걸음질을 치고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제 귀한 손님을 맞이할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야 했다.
본격적인 작업의 시작이었다. 자시까지는 반나절이 남았다. 곽진도 같은 고수를 맞이하는 진법을 제대로 설계하기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말뚝들을 왼쪽 허리에 한 아름 끼고 다시 기운을 추적했다.
*
자정. 옥묘각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시종들은 해시 초에 자신들의 건물로 들어간다.
역시 시간에 딱 맞춰서 묵직한 기감이 느껴졌다. 저 멀리서, 느릿하게 오지만 거인이 걸어오는 것 같은 압박감이 들었다.
전생에는 곽진도가 얼마정도의 무인이었는지 모르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느꼈던 기도 중에는 가장 강맹했다.
천천히 방에서 나와 계단을 내려갔다. 내가 현관의 중앙에 딱 도착하자 문이 두들겨지는 소리가 났다.
“열려 있습니다.”
밤을 배경으로 들어오는 곽진도는 낮에 본 것보다 위협적으로 생긴 듯했다.
부리부리한 눈과 짧게 하늘로 솟은 머리카락, 커다란 몸이지만 군더더기는 느껴지지 않는 압박감이 크게 다가왔다.
“안 보던 사이에 예의가 없어졌구나. 어른이 왔으면 빗장이 풀어져 있어도 열어줘야지.”
“그런 예의 별로 안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내 말에 곽진도는 살짝 움찔하더니 나를 훑어봤다. 그의 눈은 지금 우리 세가의 사람들과 비슷한 눈빛이었다. 갑자기 바뀐 걸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이다.
“많이 맹랑해졌구나. 그래, 정말 이청명 장로를 너 혼자 징계 제청을 한 거냐?”
“그럼 달리 누가 있습니까?”
“월상이가 시킨 줄 알았지. 내가 아는 너는 그런 걸 할 사람이 아니니까. 넌 겁쟁이에다가 비겁하기까지 않느냐.”
곽진도가 말했다. 일부러 겁쟁이와 비겁자에 목소리에 강세가 들어갔다.
“과거에는 그랬죠.”
“지금은 다르단 말이냐?”
“네.”
내 단호한 대답에 곽진도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래. 뭐, 과거보다는 현재가 중요하지. 그럼 말해줄 수 있겠느냐? 왜 이청명 장로의 징계를 제청했으며, 그게 안 먹힐 걸 알면서도 한 이유는 무엇이냐?”
“외총관님을 보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곽진도는 내 말이 뜻밖이라는 듯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곧 그는 의아한 목소리로 돌변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외총관님께 직접 서찰을 보낼 수 없으니 그렇게 보낸 겁니다. 제가 장로 징계 제청을 했다는 내용을 보면 분명히 오실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옥묘각의 현관에 침묵이 감돌았다. 곽진도의 눈동자에 혼란이 일었다.
당연히 그럴 것이었다. 지금 나와 곽진도의 친분은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까. 내가 미래에서 와서 그의 성격과 생각을 꿰뚫고 있다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터였다.
“그러니까, 네가 나를 불렀다?”
“네.”
“황당하구나. 내가 온다고 확신한 이유는 무엇이냐?”
“누구보다 세가의 쇄신을 바라는 분이지 않습니까. 직계인 저희가 겁내지 않고 바뀌면 분명히 도와주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내 말에 곽진도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더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었다. 난 그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말을 이었다.
“제가 세가를 바꾸겠습니다. 저를 도와주시죠.”
쐐기를 박는 내 말에 곽진도는 오물거리던 입도 다물어버렸다. 말하는 대신 내 눈동자를 노려봤다.
얼마간의 정적 후에 곽진도가 침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제대로 알고는 있느냐?”
“알고 있습니다.”
곽진도의 눈이 강하게 흔들렸다. 나는 알고 있다. 그가 황금세가를 얼마나 바꾸고 싶어 하는지. 그 이유까지는 몰라도, 그것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러면 그게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도 알겠구나?”
“외총관님이 도와주시면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처구니가 없구나.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말을 함부로 담느냐?”
“보여드릴까요?”
나는 그 말과 함께 천천히 움직였다. 곽진도의 눈은 느리게 움직이는 나를 따라왔다. 여전히 그 눈빛은 불신과 혼란으로 가득 차있었다. 하지만 난 그 틈에서 새로 생긴 아주 작은 감정을 보았다. 바로 기대감이었다.
“그래.”
곽진도의 말과 함께 내가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섰다.
쿠구궁.
순간 거센 바람이 불고 빽빽한 장대비가 쏟아졌다.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와 창문이 흔들렸다.
바람은 상식적인 수준의 바람이 아니었다.
쨍, 쨍.
옥묘각의 유리가 하나씩 깨지고, 기둥들이 서서히 땅에서 뽑혀나가기 시작했다. 곧 옥묘각의 건물은 줄이 끊어진 연처럼 하늘 위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제야 곽진도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지 눈치를 챘다.
“···진법이냐?”
“네.”
이렇게 강한 바람인데 건물은 날아가고 사람은 서있는 건 이게 환상이기 때문이었다. 아마 곽진도는 창밖에 비바람이 불때까지도 눈치 채지 못했을 거다.
내가 심혈을 기울여 최대한 기의 흐름이 어색하지 않는 선에서 진법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실제적으로 느껴야 할 감각과 원하는 기능을 넣어야 했으니 퍽 어려운 작업이었다. 그래도 상단전 덕택인지 작업은 생각보다 여유 있게 끝난 건 다행이었다.
“이 정도 진법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을 네가 아는 거냐?”
“아뇨. 제가 만든 겁니다.”
우리 사이에는 진법이 만들어내는 가짜 폭풍우가 쳤다. 내가 느끼는 것처럼, 곽진도도 비가 옷을 적셔 축축하다는 느낌을 받을 거였다.
그의 말대로 이 정도 진법을 구현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니 곽진도가 믿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곽진도는 천천히 비를 뚫고 내게 다가와 머리를 비뚜름하게 기울였다.
“지금 내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거냐?”
“아뇨.”
순간 목에 칼이 닿는 현실적인 감촉을 느꼈다. 등허리에 땀이 나고 몸이 떨렸다. 그는 공포로 내 대답을 강요할 생각이었다.
난 곧바로 상단전의 기를 움직였다. 백회혈에서 풀린 실타래 같은 기가 자연스레 온 몸으로 뻗어나갔다. 기가 돌면 돌수록 내 몸은 진정할 수 있었다.
내 몸에서 부드러운 태을헌원심법의 기운이 나왔다. 나름 보름동안 진전해서 그런지 타인이 느낄 정도로는 축기가 되어있었다.
허나 기의 양보다 중요한 건 내공의 정순함이었다. 곽진도는 역시 그 기운을 알아보고 경악했다.
“···넌 뭐하는 놈이냐?”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저 세가를 제대로 돌려놓고 싶을 뿐입니다.”
“네가 나한테 바라는 게 뭐냐?”
곽진도는 물었다. 이제 나를 보는 눈빛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마치 사람이 아닌 불가사의한 생물을 보는 정도의 눈빛.
오래도 돌아왔다. 난 드디어 내 목적을 꺼낼 수 있었다.
“무공을 알려주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