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무공 알려주셔야죠?
10화 무공 알려주셔야죠?
이청명 장로의 징계 소식은 빠르게 퍼졌다.
징계 결과는 보름 동안의 연금이었다. 허나 징계의 내용이 중요한 건 아니었다. 꼭두각시로 취급받던 황금세가의 직계, 그것도 꼬맹이 막내가 장로를 물 먹였다는 것은 세가 내에서 화제가 안 되려야 안 될 수가 없었다.
“지금 금정원은 어떨 거 같냐?”
“별 일 없을 건데요?”
“나를 뺑이치게 한 것치고는 성과가 너무 소박한 거 아니더냐?”
“아뇨. 이제 묘하게 어색한 상황으로 변했겠죠. 평화의 균형이 깨질 겁니다. 이제 금정원 사람들도 안에만 쳐박혀있지는 못할 겁니다. 바깥으로 나와야죠.”
나는 옥묘각 옥상 창문에서 금정원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금정원은 워낙 지대가 높은 곳에 있어서, 멀리 있는 곳인데도 어렴풋하게 보였다.
“너는 근데 대체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느냐? 도저히 네 나이에 할 수 있는 생각과 말이 아니지 않느냐.”
“그렇게 봐주시면 감사한거죠.”
내 대답에 곽진도는 더 이상하다는 표정을 했다.
사실 내가 이렇게까지 마구잡이로 움직일 수 있는 건 금정원 세력의 장력 때문도 있지만, 내가 전생에서 도전하기 전에 포기한 폐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폐인이 갑자기 활동적으로 변하니 사람들은 더 괴리감을 느끼고 경계하게 되는 거였다.
“그래서 그냥 금정원이 무너지기를 기다리는 거냐? 무너지면 오히려 문제 아니냐?”
“무너지기 전까지 시간이 있습니다. 금정원은 절대 쉽게 못 풀리는 매듭입니다.”
나는 뒷말을 하려다가 삼켰다. 쉽게 못 풀리는 매듭이기는 하지만, 내 쪽도 만만치 않게 풀어나가야 할 게 많다는 것을.
당장 황금세가 본가의 원주급 사람들도 날 보고 온 게 아닌, 곽진도를 보고 온 거였다.
내가 변화했다는 건 듣고 봤지만 다른 본가 사람들처럼 그렇게까지 감흥이 있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들은 애초에 날 본 적이 별로 없었으니.
그러니까 빨리 준비를 해야 했다. 할 수 있는 것부터. 작은 것부터. 작은 둔덕도 안 만져보고 성을 건축할 수는 없었다.
난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잠 조금 덜 잤다고 종아리 쪽에 뻐근함이 올라왔다.
“피곤해 보이는데, 안 쉬는 거냐?”
“앉아서 쉬었습니다.”
나는 허리를 돌리면서 곽진도를 바라봤다. 같이 앉아있는 곽진도는 하품하면서 날 마주봤다.
“왜?”
하긴 곽진도도 어제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러 돌아다니느라 잠을 거의 못 잤을 터였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같이 나가셔야죠.”
“뭐?”
곽진도가 황당하다는 투로 물었다. 나는 도리어 더 황당하다는 듯 받아쳤다.
“무공 알려주셔야죠?”
솔직히 말하면 곽진도가 내게 무공을 알려주겠다고 확언을 한 적은 없었다. 근데 그냥 여러모로 일이 있었으니 유야무야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아서 질러본 거다.
곽진도는 얼굴을 찡그러뜨리며 눈동자를 위로 올렸다. 뭔가를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내가 너를 제자로 받겠다고 말했느냐?”
“네.”
“···왜 나한테는 기억에 없지?”
곽진도는 투덜거리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가르쳐줄 거면서. 은근히 솔직하지 못한 아저씨였다.
*
나는 오랜만에 기철이를 불렀다.
“네. 어디로 가십니까. 공자님.”
기철이는 외총관을 보고 흠칫 떨었다. 외총관이라는 직함을 떼놓고 보더라도 험악하게 생긴 아저씨라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기철이는 나와 눈을 마주치자 더 떨었다. 기철이도 이청명 장로가 징계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 터였고, 그로 인해 내가 만만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도 확신하게 된 것 같았다. 기철이의 몸은 자연스럽게 무릎과 어깨를 접는 자세가 나오고 있었다.
“연공부(硏攻府)로 가자.”
“예?”
기철은 눈썹을 크게 추켜올렸다.
보통 우리 세가 내 조직은 원(院), 전(殿), 각(閣), 대(隊), 당(當)으로 서열이 나뉜다.
금정원 같은 경우가 그렇고, 또 황금세가의 가장 큰 부분, 상단의 경영을 맡는 곳은 금선원(金線院)이라 한다. 가문 내부의 처리만 맡는 곳, 상무당은 그래서 당인 것이다.
근데 상무당을 포함한 다른 당도 일이 바빠지게 됐고, 점차 인력이 많아지면서 조직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당이라고 칭하기는 애매한 부처들이 있었는데 그것을 부(府)라 통틀어 칭했다.
“···정말 죄송하지만, 공자님. 저는 연공부가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기철이는 고개를 숙였다. 알고 있을 확률 반, 모를 확률 반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모르는 모양이었다.
하긴 연공부는 황금세가의 사람들이 찾을 일이 아예 없는 곳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연공부는 장로들이나 세가 내 무인들을 위한 폐쇄형 연무장이었다.
굳이 강호에서 반쯤 발을 벗어난 장로들이 연공부에서 수련을 할 이유도 없고, 세가 내 무인들도 시정잡배들로만 모아놓아 유명무실하니 버려진 공간이 된 거다.
곽진도는 고개를 갸웃하고 나를 잠깐 기철이에게서 떨어뜨려놓았다.
“그걸 굳이 하인까지 부를 필요가 있었나. 그냥 내가 데려가도 무방한 것을. 연공부는 나도 안 간지 오래라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외총관님하고 제가 움직이는데 시종 하나 안 붙는 다는 건 품위에 맞지 않죠.”
“강호의 늙은이들이나 할 얘기들을 하는군. 네가 똑똑한 건 알겠지만, 벌써부터 허세에 찌든 게냐.”
곽진도의 그 말에는 조금의 질책마저 담겨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 의도가 제대로 전달된 게 아니었다.
“지금 저는 어떻든 세가에서 집중을 받고 있을 겁니다. 여기서 어떻게든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여주면 안 됩니다. 적들은 그 점을 지독하게 파고 들어올 거니까요.”
“···그렇구나.”
허세이면 어떤가. 속이면 아무 상관없었다.
“그래. 그럼 내가 일러줄 테니 시종은 앞으로 가서 우리를 인도하는 척을 하면 되겠구나.”
“맞습니다.”
“애 같은 맛이 없는 놈이 다 됐구나.”
그런 말을 하는 곽진도의 눈빛은 그래도 나를 처음 볼 때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곧 우리는 연공대로 향해 출발했다. 곽진도가 이르기를 연공부는 애초에 건축을 할 때부터 많이 안 써질 것을 고려해 가장 구석에 지었다고 했다. 그건 꽤 오래 걸어야 한다는 얘기였다.
우리는 가로질러 가지도 않았고, 뛰지도 않았다. 모두 내 품위론에 관련되어 있었다.
뒷발을 챘을 때 모래먼지가 안 일어날 정도로 걷고, 어깨를 펴고 얼굴을 꼿꼿이 세우면 자연스럽게 품위가 나오는 법이었다.
그것마저도 곽진도는 눈 여겨서 본 듯 슬쩍 물었다.
“무슨 걷는 법이라도 연습했느냐?”
“걷는 걸 연습하는 사람도 있답니까.”
“자세를 그렇게 똑같이 반복할 수 있는 건 무인이 아니면 힘든 일이다. 태산압정(泰山壓頂)은 그냥 위에서 아래로 긋는 게 아니야. 그러면 초식 이름이 왜 있겠느냐.”
대충 어떤 의미인지는 알겠다. 근데 나는 그냥 되고 있었다. 분명 몸이 좀 더 유연하기는 했다.
상단전에서 흘러나오는 기들은 세맥까지 고르게 퍼져 전 부분을 유연하게 만들고 있으니까.
계곡을 굽이치듯 세찬 운기는 못하지만, 조금씩 돌리는 동공(動功)은 가능했다. 점점 더 나는 기를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거다.
그걸 모르는 곽진도니까 날 이상하게 보는 거였다.
“아무튼 네가 대단한 일을 하기는 했나보구나. 지나가기만 하면 너를 쳐다보는군.”
“아직은 마음에 안 드네요.”
“뭐가 말이냐?”
나는 날 바라보는 사람들을 향해 머리만 뒤로 돌렸다. 나와 눈이 마주친 사람들은 모두 눈을 깔고 가는 길 가는 척을 했다.
“눈빛이 마음에 안 들어요.”
그 말에 곽진도는 헛웃음을 지었고, 기철이만 움찔 떨었다.
끊임없이 따라붙는 시선과 함께 나는 연공부에 도착했다.
연공부는 울타리도 없었고, 지붕에도 먼지가 엉겨 있었다. 문간에 있는 호랑이 조각과 고급스러운 건축 양식이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폐가 취급을 받았을 건물이었다.
“이렇게나 관리가 안 되고 있었군.”
곽진도도 연공부는 오랜만에 와보는지 회한에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기철도 처음 보는 듯 신기해했다.
물론 나 역시 처음 보는 것이었다. 연공부는 말로만 들어본 것이니까.
“그럼 기철아. 우리는 연공부 안으로 들어갈 테니, 넌 연공부 문간에서 기다리고 있어라.”
“···네? 아, 네, 네. 알겠습니다.”
기철은 눈을 부릅뜨고 허리를 꼿꼿이 폈다.
난 기철이를 등지고 연공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어디서 어긋났는지 뻑뻑해서 잘 열리지가 않았지만, 체중을 실어 몸으로 미니 곧 한 번에 젖혀졌다. 그 바람에 넘어질 뻔했지만 곽진도가 뒷덜미를 잡아줘서 넘어지지는 않았다.
“여기 부주(府主)도 공석인가보군. 하긴 부주가 있었으면 건물을 이렇게까지 방치할 수는 없겠지.”
곽진도는 손가락으로 천장 구석에 있는 거미줄을 훑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여기 부주는 삼 년 전부터 공석이었죠.”
“내가 세가에 없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구나.”
곽진도는 한숨을 쉬었다.
지금 시기로 따지면, 내가 알기로 곽진도는 한 오 년 정도를 외유하고 있었을 거다. 그리고 정말 그 사이에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렇다고 자책하지는 마시죠. 외총관님은 외총관님의 할 일을 위해 나가신 거 아닙니까.”
나는 일단 그렇게 덮어뒀다. 곽진도는 나를 오묘하게 바라보더니 다시 연공부 내부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곽진도는 아마 잠깐 의심했을 거다. 내가 곽진도의 외부 행동을 아는 것으로. 그런데 사실상 알 방법이 없으니까 넘어간 것이다.
왜냐하면 황금세가의 멸문을 막기 위한 그 단체는 아직 발족하기도 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곽진도가 무엇을 했는지. 세가를 위해서 어떤 것까지 포기했는지. 내가 확실하게 내 편으로 삼을 수 있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근거했다.
“그만 둘러보시고, 빨리 가르쳐주시죠.”
나는 계속 벽을 짚으며 돌아다니는 곽진도를 불렀다.
“똑똑해진 대신 예의가 없어졌군.”
“원래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그게 소름 돋는 점이라는 거다.”
곽진도는 그 말을 하면서 검을 꺼내 허공에 휙휙 휘둘러봤다.
“그야말로 검의 정석인걸.”
“검에도 정석이 있습니까?”
“검날을 받쳐줄 검병이 안정적이고, 좌우의 균형이 같으니 초식을 쓸 때 변명의 여지는 없겠구나.”
역시 우리 세가는 이런 쓸데없는 곳에 돈은 잘 썼다. 그 덕에 내가 여기서 좋은 검으로 무공 수련을 하는 거지만.
“그래. 무공이라. 일단 그것부터 다시 한 번 확인해야겠구나. 네가 내게 전에 펼쳤던 무공을 다시 한 번 펼쳐봐라.”
곽진도는 그리 말하며 내게 검을 던졌다. 일부러 그랬는지 검날 쪽으로 날아왔지만 가볍게 검병 부분을 잡았다.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난 싱긋 웃었다. 그는 분명히 내 식대로 해석한 이궁천뢰검법을 보고 놀랐었다.
그 이유는 이제는 대충 알 것 같았다. 왜냐하면 내가 펼친 게 이궁천뢰검법의 본류가 되는 무공일 것이기에.
“흐읍.”
잠깐 숨을 멈추고 다시 쉰다. 영혼의 맥박과 숨의 파장을 맞춘다.
부드러운 내공들은 기해에 잠깐 뭉쳤다가 천방지축인 어린아이처럼 온갖 세맥으로 뻗어나갔다.
그때보다는 보완된 검술이 나올 게 분명했다. 나는 엄청난 단서를 얻었기 때문에.
“외총관님.”
“왜?”
“이게 남해십이검이라고 하셨죠? 그렇다면 제가 펼치게 될 건 해남파의 무공이군요.”
“그래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을 알고 휘두르는 것과 모르고 휘두르는 건 차이가 있었다.
이궁천뢰검법은 번개처럼 쏘아나가는 형식이었으나, 내가 펼칠 건 부드럽다.
전에도 부드럽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게 이불의 부드러움인지, 살결의 부드러움인지는 몰랐다. 그러나 이제 알게 된 것이다.
내가 펼쳐내야 할 건 바다의 부드러움이었다.
부드럽지만 절대 꺾이지 않는. 어쩔 때는 고요하지만 어쩔 때는 사람을 압도하는 움직임. 전에는 투망을 생각해서 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해보겠습니다.”
나는 검을 휘둘렀다. 몸의 움직임은 거대한 물결과도 같았다.
기 역시 본인이 갈 곳을 직감적으로 아는 듯 맹렬하게도 돌았다. 칼끝이 암석에 부딪친 파도처럼 표표하게 흩어지는 게 보였다. 검날은 딱딱하지 않고 곧게 서있었는데, 어찌 저런 변화를 보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무엇보다 모르겠는 건, 그걸 내가 펼칠 수 있다는 일이었다.
움직여라, 움직여.
기와 검이 내게 한 입을 모아 말하는 듯했다.
그렇게 유유하게 이끌리던 내 움직임은 어느 순간 탁 끊어지게 됐다. 왜냐하면 내가 이궁천뢰검법도 네 초식밖에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허억.”
지금까지 숨을 참고 있었던 듯 갑자기 숨이 격하게 차오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흐르지 않던 땀도 비 오듯 쏟아졌다.
나는 숨을 가쁘게 내쉬며 주변을 바라봤다. 내 주변에 있는 흙에는 유려한 곡선이 물결처럼 그려져 있었다.
“너는···”
곽진도는 얼빠진 눈으로 내게 무언가 말을 하려했지만, 나는 순간 깊은 공동(空洞)으로 빠지는 아찔함을 느끼면서 의식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