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오늘의 무례를 용서하시지요
16화 오늘의 무례를 용서하시지요
이때 즈음을 가장 싫어했던 기억이 난다. 소만(小滿)에서 망종(芒種)으로 넘어가는 시기. 왜가리가 떼 지어 날아다니고 보리가 익어가는 때였다.
본격적으로 더워지는 순간이기도 했지만 이 빠질 수 없는 외출이 있다는 게 가장 컸다.
이제 와서 비로소 생각해보건대, 난 과거에서도 꽤 잘 살 수 있었을 것 같다. 잔머리를 굴릴 줄 알고 진법에 대해 능통했기 때문이다.
내가 도망치지 못한 건 그저 공포에 기인한 거였다. 나가면 괜한 해코지를 당하지 않을까. 괜히 튀면 팔다리가 잘리지 않을까.
그런데 실제로 팔다리가 잘려보니까 알게 된 게 있다. 생각보다 별 게 아니었다고. 매일 악몽을 꾸며 방구석으로 숨죽여 들어갔던 공포의 시간에 비하면 우스운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난 지금 이렇게 나와서도 바깥 풍경을 즐길 수 있었다. 지금의 내 성격이 원래 내 성격인지, 옛날의 내 성격이 원래 내 성격인지는 알 수 없었다.
새벽이슬을 담아 차가워 보이는 들풀. 누구의 땅인지 어지럽게 방치된 삼밭과 뽕밭. 질 좋은 비단처럼 끊임없이 펼쳐진 하늘.
전생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경치가 보이는 걸 보면 사람이 바뀌는 건 의외로 쉬울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막내야. 오늘 좀 넋이 나간 것 같구나.”
원래는 나에게 무관심했던 금월상이 따뜻하게 얘기하는 것처럼 말이다.
난 그에게 큰 은혜를 베푼 것도 아니고, 특별히 살갑게 대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서로의 속내를 조금이나마 보여줄 수 있는 정도. 딱 그 정도면 충분했다.
예측하건대, 금월상은 과거에도 세가를 되찾으려 노력했겠지만 힘이 부족하여 꺾였을 거다.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치기였겠지. 안 봐도 훤하다. 지금 우리가 가는 마차에 호위무사 하나 안 붙어있는 게 우리의 지위를 보여주고 있었다. 물론 마부가 세가의 호위무사 중 하나이기는 하지만 실력을 믿을 수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반란이 꺾였을 때 금정원의 세력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거다. 아마 금월상의 성격은 그렇게 바뀌어간 것이리라.
“화청이도 이 날만 되면 말이 없고.”
오늘은 계속 불퉁하던 금화청도 조용하니 마차 창틀에 팔을 얹고 그 위에 머리를 기대 바깥만 바라보고 있었다.
난 금화청을 곁눈질로 슥 봤다. 저 사람도 내가 바꿀 수 있을까. 그건 아직 모를 일이었다.
이번 외출은 꽤 의미가 많다. 이청명을 낚는 것과 형제들의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
형제들끼리 이렇게 다 가는 일정은 드무니 난 천재일우의 기회를 맞은 셈이었다.
“넌 어머니를 뵈러 가는데 아무 것도 안 챙겼어?”
금수린이 물었다. 그렇다. 우리는 어머니의 묘지로 가는 중이었다. 오늘은 바로 어머니의 기일이었다. 난 전생에서도, 지금에서도 어머니가 기억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녀는 날 낳으면서 죽었다고 하니까 말이다.
금화청은 고개를 돌려 나를 슬쩍 바라봤다.
“자기가 죽여 놓고 양심도 없을까.”
“화청아!”
금화청의 이죽거림에 금월상이 버럭 했다. 나는 그제야 금화청을 제대로 바라봤다. 그래. 금화청이 날 싫어하는 이유는 그거였다. 나를 낳으면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 그러나 그건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다만 현실에 충실할 뿐.
“준비한 건 있습니다.”
“뭐?”
“가보시면 알 겁니다.”
나는 그리고 다시 창문 밖으로 얼굴을 돌렸다.
원래의 금화청이라면 자신을 무시하는 거냐고 길길이 뛰었겠지만, 이번에는 지친다는 듯 다시 창문으로 얼굴을 돌렸다.
안정적으로 달리고 있던 마차가 울퉁불퉁한 산지로 넘어가니 위아래로 흔들렸다.
“속 안 좋아.”
금수린은 비위가 안 좋은지 바로 눈을 떨었다. 집 안에 오래 있어서 가뜩이나 하얀 피부가 더 하얗게 질려버렸다.
“금수린. 옥화산에 들어왔잖아. 무례한 말 하지 마라.”
“···그래.”
금수린은 살짝 발끈해서 뭐라 하려고 했지만, 금화청의 표정을 보고 참은 듯했다.
오래전에 묻어놓았던 기억들이 흙먼지와 함께 같이 떠오른다.
떠오르지도 않는 어머니의 기일. 금화청은 늘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는 했다.
진중하게 사색적인 모습을 보여주거나. 예의를 중시하는 모습을 보여주거나. 그리고 성묘를 마치면 나한테 한층 더 까칠하게 대하고는 했다.
“도련님들, 아가씨. 여기서부터는 마차가 못 올라갑니다요.”
소매가 없는 옷을 땀으로 푹 절인 마부가 외쳤다. 문가에 가장 가까이 앉아있는 금월상이 먼저 내리고, 금화청, 나, 금수린 순으로 내렸다.
그 다음은 그냥 산행이었다. 다행히 잎사귀가 넓은 나무들이 주변에 많이 심어져 있어 덥지는 않았다.
어제 올라오면서도 느낀 거지만 옥화산은 경사가 있었다.
금월상과 금화청은 저 멀리 앞서 올라갔지만 금수린은 기우뚱거리면서 천천히 올라갔다. 전생의 나는 머리만 박고 올라가서 금수린이 이렇게 위태롭게 올라가는 줄은 몰랐다.
“으앗!”
실이 끊어진 연처럼 흔들리는 금수린을 뒤에서 바라보다가, 금수린이 발을 헛디뎠다. 난 바로 그녀의 두 어깨를 잡았다. 그녀의 머리칼이 내 손등을 간질였다.
금수린은 내가 어깨를 잡은 게 무슨 소름이라도 돋는 듯 통나무처럼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그녀는 잠깐 목을 어색하게 돌리더니 나한테 웃었다. 돌리는데 무슨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미안. 신세를 졌네.”
“피할 수는 없으니까요.”
나는 그러면서 그녀의 어깨를 밀어 균형을 맞추도록 도와줬다.
“내가 여기 올 때마다 넘어졌는데, 잡아준 사람이 처음이라 어색하네.”
금수린은 앞으로 몸을 살짝 기울이면서 민망하게 웃었다.
“그랬나요. 큰형님은 잡아주셨을 법도 한데.”
“너 몰라? 큰오빠는 우리끼리 있으면 무조건 앞장을 서. 대장놀이를 하는 건지는 몰라도 말이야.”
그게 대장놀이는 아닐 텐데. 나는 금월상에게서 진심을 들어서 알고 있지만,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나도 형제들을 모르고 있는 만큼, 다른 형제들도 마찬가지였다.
“그건 아닐 거예요.”
“그런가? 하긴 큰오빠가 그런 성격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직접 물어보지 그랬어요. 대장놀이 하는 거냐고.”
“안 친한데 그걸 어떻게 물어?”
금수린은 진지하게 답했다. 참 공감가는 대답이었다. 형제들이라고 꼭 친해야 되는 건 아니니까. 우리는 이런 관계와 거리감이 익숙했다.
“그나저나 퍽 자연스러워 보이네.”
“뭐가요?”
“나랑 얘기하는 거. 너 나랑 처음 얘기하는 거잖아.”
그랬나. 금수린도 다가가는 성격이 아니었던 것 같고, 전생의 나는 말해봤자 입만 아프다.
“누님은 어색해요?”
“아니. 생각보다는 괜찮네.”
금수린은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다. 처음 보는 표정이어서 잠깐 넋을 놓았다. 내가 멍하니 바라보자 금수린이 내 팔뚝을 쿡쿡 찔렀다.
“왜, 누나 너무 예쁘게 생겼어?”
나는 잠깐 뭐라 해야 할 지 말문이 막혔다. 이게 진심으로 미추(美醜)를 가려달라는 얘기가 아니라 농담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미추를 가려달라고 해도 난 잘 모르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나는 다른 사람과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었다. 차라리 전략, 논리, 구결 해석 같은 것만 얘기해봤지.
내가 가만히 있자 금수린은 금세 풀이 죽었다. 기풍
“···아, 미안. 좀 친한 척한건가?”
“아뇨. 제가 말을 못한 건데요.”
우리는 그렇게 얘기하다가 어쩌다 어깨를 맞춰 걸었다. 아직까지는 금수린이 나보다 키가 컸다.
그래도 난 금수린을 신경 쓰면서 걸었다. 여전히 그녀는 비틀거리고 있어서 내가 주기적으로 잡아줘야 했다.
난 딱히 할 말을 몰라서 걸었다. 딱히 어색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허나 금수린은 어색하다고 생각하는지 계속 어깨 쪽이 움찔했다. 뭐라도 말하고 싶은 것 같았다. 그녀가 끝끝내 고른 말은 이거였다.
“그럼 이렇게 된 거 너한테 뭐 좀 물어도 되나?”
“그러세요.”
“너 갑자기 왜 이렇게 바뀌었어?”
“제가 보는 누님도 많이 바뀌어 보이네요.”
내 말에 금수린은 곰곰이 생각하는 듯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바뀌었다고 물어볼 정도로 많이 아는 건 아니었지.”
그렇게 시비조로 말한 건 아니었지만, 금수린은 대충 문맥을 통해 받아들인 것 같다.
“그럼 네가 나한테 궁금한 건 뭐야?”
금수린이 물었다. 사실 계속 처음부터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묻지 못할 질문이었다.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나는 진심으로 물었는데, 금수린은 눈을 끔뻑거리더니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은 듯 크게 웃었다. 그래도 그 예의는 갖추고 있어 웃음은 경박하지 않고 꽤나 우아해 보였다.
그 바람에 저 앞을 나가고 있던 금월상과 금화청이 우리 쪽으로 뒤를 돌아봤다. 금화청은 금수린이 크게 웃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입술을 삐죽거렸지만 굳이 말을 하지는 않고 몸을 다시 돌렸다.
물론 금수린은 그런 건 전혀 모르고 그냥 웃기 바빴다.
“어이가 없어서 웃기다. 얘.”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요.”
“너무 말도 안 되는 질문인데, 우리한테는 말이 돼서 웃겨. 우리가 다 같이 공감할 수 있는 농담이 있기는 했구나.”
금수린은 킥킥거리면서 내 어깨를 팍팍 쳤다. 아프지 않아서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그냥 내가 너무 형제들을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새삼스레 다시 들뿐이었다.
“나. 열다섯이야.”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넌 열둘이지.”
금수린은 그걸 말하면서 뭐가 그렇게 웃긴지 계속 웃음소리를 흘려댔다. 난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몰라 그냥 계속 걸었다. 아까와 똑같은 침묵이었지만 분위기는 좀 달랐다.
그렇게 금수린과 나는 곧 등령당으로 올라섰다. 굳이 금화청이 눈치를 안 줘도 깊게 파인 처마와 높은 섬돌을 보니 저절로 엄숙해졌다.
먼저 올라온 금화청은 헤매고 있었고, 금월상은 초조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오늘 같은 날에 등령당주는 어디 간 거야?”
금화청은 씩씩거리며 건물 주변을 계속 둘러봤다. 그래도 찾느라고 큰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다. 자신 나름 예의의 기준이 있는 모양이었다.
등령당주. 기억난다. 사실상 묘지기로 황금세가에서 늙은 시종 중 한 명을 뽑아서 꽂는 위치였다.
오늘 같이 제향(祭享)을 하는 날에 향과 축문을 준비하는 정도의 소일거리를 하는 사람으로 기억한다.
워낙 평소에 할 일이 없어서 이런 날에는 빨리빨리 나와 있어야 하는데, 등령당은 싸늘하기만 했다.
원래는 굳게 닫혀있어야 할 위패가 있는 중문(中門) 역시 열려 있었다. 중문 안에는 제사 준비가 하나도 되어있지 않았다.
“···목환아.”
금월상이 내 쪽으로 슬쩍 붙었다. 금수린은 눈치껏 빠졌다.
금월상이 이리 초조해하는 이유는 나 때문이었다. 오늘 등령당에서 변고가 생길 거라고 미리 언질을 줬기 때문이었다. 준비를 다 했다고 안심을 시켜놓기는 했지만 그래도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었나보다.
“바로 내려가야 하는 거냐? 아니면 기다려야 하는 거냐?”
“동요를 감추시고 기다리시죠.”
나는 경박하지 않은 손뼉을 쳐 금화청의 주의를 돌렸다.
“둘째 형님. 등령당주가 없다고 저희 할 일이 달라지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입 바른 말이구나.”
금화청은 삐딱하게 머리를 비틀었다.
“술, 과일, 포 같은 제수(祭需)도 없고, 기일비망록을 쓸 사람도 없고, 제기(祭器)가 준비되지도 않았고, 가장 기본적인 축문도 없다. 아니면 네 말은 대충 격식만 차리고 가자는 거냐?”
금화청은 내게 말을 씹듯이 뱉었다. 말을 놓고 보면 제례(祭禮)에 전혀 어긋남이 없었다. 그러나 그건 지금 이 상황에서 전부 지키기는 어려웠다.
지금 우리 등령당을 최소 스무 명이 감싸서 좁혀 들어오고 있었으니까.
금월상은 뭔가 눈치를 챈 듯 허리춤의 검을 철컥거렸다.
“···뭐, 뭐하는 거요? 형님?”
금화청은 갑자기 검병에 손을 대는 금월상에게 놀랐고, 그때 나는 어머니의 위패 앞으로 갔다.
옆에는 화섭자가 들어있는 죽통(竹桶)이 있었다. 돌려서 연 다음 입으로 바람을 강하게 불었다. 작은 불꽃이 화섭자에 붙고, 난 그걸 향에 옮겨 붙이고 죽통을 닫았다.
“어머님. 오늘의 무례를 용서하시지요.”
나는 위패에 향배(向拜)를 하고 나와서 사당의 중문을 닫았다.
닫자마자 검은 복면의 남자들이 우리 주변을 하나둘씩 유성처럼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