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아직도 개판이구나
25화 아직도 개판이구나
회의장은 당연히 난리가 났다. 갑자기 내가 이청명의 목까지 벨 줄은 아무도 몰랐을 거였다.
그 충격적인 장면에 다른 건 모두 유야무야 되고 말았다. 예를 들면 이청명이 횡령한 돈은 어디로 갔는가, 같은 것. 어차피 묻는다고 해도 이청명이 다 썼다고 거짓말을 했을 터였다.
내가 이청명의 목을 베었다는 사실은 가문 안에 빠르게 퍼졌다. 개 중 헛소문이라면서 안 믿는 사람도 있었지만, 난 그들을 위해서 작은 선물을 준비해뒀다.
이청명의 머리를 옥사(獄舍)에 매어 다는 옥문(獄門)형과 함께, 반역자(反逆者)라는 문신을 얼굴에 새기는 자자(刺字)형까지 지시했기 때문이다.
“기철아.”
“흐읍, 네!”
그 이후로 기철이의 태도는 한 층 더 저자세로 바뀌었다.
내가 일부러 목소리를 깐 것도 아니고, 그냥 불렀는데도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대전으로 좀 가자꾸나.”
“네, 네?”
“왜 계속 바보처럼 구느냐. 원래 우리는 모여서 식사를 하는 게 규칙이거늘.”
“아. 네. 알겠습니다.”
기철은 우왕좌왕하다가 내 앞으로 옷가지와 장신구들을 한 아름 들고 왔다. 아니, 들고 온 것도 아니다. 그냥 내 앞에 넘어져서 쏟아버렸다.
넘어진 기철은 반사적으로 위를 봤는데, 나를 보니 바로 사색이 되어 머리를 땅바닥에 박았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됐다.”
난 내 아래에 친히 대령해놓은 옷가지들을 집었다. 장신구들은 필요 없었다. 괜히 치렁거리기만 한다. 어차피 점심을 먹고 곽진도와 또 연공부에 가야 될 거였다.
“안내해.”
“네.”
기철은 내 앞에 있는 옷들을 정리하고 바로 나를 안내했다.
이청명을 베고 나서 며칠이 지났다. 그 며칠 사이에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으, 막내공자님이다.”
“야, 야. 다른 곳으로 돌아가자.”
여전히 멀리서 날 보는 시종들은 내가 들리는 걸 모르는 듯 수군거렸다. 그들은 내가 들린다는 걸 모를 텐데도, 나에 대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고 있었다. 옛날에는 분명히 내게 미친놈이니, 뭐니 했던 시종들이었다.
원래 처음 이청명을 베고 난 직후에는 이 정도까지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청명과 같이 다니던 장로들이나, 이청명이 꽂았던 시종, 호위들이 며칠 안으로 모두 사라져버린 게 가장 컸다.
난 애초에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그게 천주성의 방식이었다. 실패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게 곧 승리라는 생각. 실패와 관련된 사람들도 모두 그들에게는 흔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실패의 흔적과 연관된 사람들은 처절하게 지워졌다.
물론 천주성을 좀 아는 사람들은 천주성이 한 일이라고 인지하겠지만, 일개 시종들은 전혀 아니었다. 그래서 시종들에게 나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나고 있었다.
“기철아.”
“네, 네!”
“요즘 시종들 사이에서 나에 관해 무슨 말이 오가는지 들려줄 수 있느냐?”
“음, 어···”
기철은 잠깐 머뭇했다. 난 짐짓 미소를 띠며 말했다.
“기철아. 넌 내 전속 시종이 아니더냐. 당연히 내 편이어야 하고, 내가 원하는 걸 우선적으로 처리할 의무가 있는 거겠지.”
“네, 맞습니다.”
“그럼 말하려무나.”
기철은 내가 그렇게까지 말하자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굉장히 많습니다. 반로환동을 한 고수라는 말도 있고, 마신과 계약해서 마술을 쓰는 것이라는 사람도 있고, 눈을 마주치면 죽는 저주에 걸린다는 사람도···”
“됐다. 그만 하자꾸나.”
그저 날 보면 도망가는 사람들밖에 없어서 정확히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는 몰랐는데, 저런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들이었다.
전생에서는 겁만 먹었던 내가 이제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아직은 무공을 모르는 시종들뿐이지만 말이다.
“다 왔습니다. 공자님.”
“그래.”
난 기철의 안내를 받으며 대전 안으로 들어갔다. 호위무사들의 허리 각도도 조금 넓혀졌다. 미세하지만 보인다.
그리고 그들의 허접한 무공 수위도 보였다. 옛날에는 그냥 우락부락하고 근육질이면 무공이 강한 줄 알았는데 그건 전혀 아니었다.
“음.”
그런 세가의 꼴을 보자 하니, 아직도 갈 길이 먼 듯해서 자연스레 침음이 나왔다. 호위무사들 역시 움찔 떨었다.
“기철아. 넌 여기 있어라.”
나는 기철이를 두고 갔다. 이제 사소한 것도 하나하나 바꿔야 될 때였다. 시종들이 내 식사 시간에 있는 건 불편했다. 기철은 바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식당으로 들어갔다. 금월상과 금화청, 금수린 역시 자리하고 있었다. 뭔가 사건을 겪고 이렇게 단체로 모이는 건 처음이라 좀 낯설었다.
“왔구나. 막내야.”
“네. 좋은 아침입니다.”
난 바로 의자를 끌어 앉았다. 그리고 각자 뒤에 긴장한 표정으로 서있는 시종들을 둘러보았다.
내 시선이 머무는 순간 시종들의 표정은 굳었다.
“생각해보니, 저희가 식사하는데 시종들은 좀 나가 있어도 되지 않나요?”
“응?”
금월상이 말했다. 시종들이 움찔했다. 난 이런 하찮은 일에 더 시간을 끌기 싫었다.
“시종들은 나가있어. 은수저 넣는 건 나도 할 수 있으니까. 괜히 불편하다.”
“네!”
시종들은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후다닥 나갔다. 명색이 시종들인데 자신 주인의 말은 들어보지도 않고 바로 나가는 걸 보면 지금 내가 어떻게 보이는 지 알만했다.
금월상은 자신의 허락도 없이 나간 시종의 뒤를 살펴보며 혀를 내둘렀다.
“···아주 공포의 대상이 다 됐구나.”
“의도한 건 아닙니다.”
나는 그래도 지금 상황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하나씩 바뀌어가는 거였다.
어떻게 보면 작은 일이지만, 시종들의 경시나 감시만 벗어나도 운신의 폭은 넓어질 수밖에 없었다.
“누님, 형님들도 이제 굳이 눈치를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몸은 좀 더 조심할 필요가 있겠죠.”
“그렇지. 사실 이청명 장로는 제거해야 할 세력 중 일부에 불과하지 않느냐.”
금월상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여줬다. 맞는 말이었다.
“오히려 이청명의 죽음 때문에 다른 세력들은 바짝 긴장을 할 거다. 우리의 움직임에 더욱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겠지. 어쩌면 이청명과 대놓고 적대할 때보다 더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그때는 누가 적인지 알았지만, 지금은 모두가 적이라고 상정하고 움직여야 하니까.”
“큰형님의 말대로 우리를 더 적대하고, 실제적인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세력도 생기겠죠. 하지만 더 눈치를 보는 곳도 생기고, 다른 세력과의 연합전선을 구성하고자 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요는 사람들이 이제 적극적인 행동을 보여줄 거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당장은 그들을 자극하지말고 최대한 조용히 있어야 한다는 거지.”
“그건 아닙니다.”
난 단호하게 말했다. 금월상은 내가 자신을 옹호해주는 줄 알았는지 내게 배신감을 느끼듯 쳐다봤다.
그때 곧 드르륵 거리는 소리와 함께 시종과 음식이 나왔다. 내총관이 없으니 주방의 시종이 음식을 내오는 역할을 맡은 거다. 그 역시 나를 보고 흠칫하더니 날 외면하면서 음식을 식탁 위에 올려놨다.
“···오늘은 취어(炊鱼)와 호락(蚝烙)과 작자계(炸子雞)입니다. 그럼 맛있게···”
“음식 설명은 안 하나?”
금화청이 물었다. 처음이라 많이 혼란스러워하는 듯 했다. 아니면 내가 앞에 있어서 그런 걸 수도 있고. 시종이 심하게 허둥지둥하기에 내가 그냥 끊었다.
“취어는 고추, 양파, 버섯, 파를 넣고 끓인 생선 요리고, 호락은 계란과 같이 굴을 부친 요리고, 작자계는 매운 양념으로 조린 닭 요리입니다.”
난 시종 대신 요리를 설명했다. 내가 볼 때는 황금세가의 유일한 장점은 무궁무진한 중원의 음식들을 모두 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까 말을 마저 하자면, 우리는 그렇게까지 몸을 사릴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과감하게 움직여야죠.”
“어찌하여 그러느냐?”
나는 대답 대신 은색 숟가락으로 취어의 대가리를 팍 찔렀다. 생선 육즙과 밑에 깔린 자작한 국물이 식탁 위에 튀었다.
“···이게 뭐···”
금월상이 물어보려고 했지만, 그의 입은 곧 닫혔다.
은색의 숟가락이 부식하는 소리를 내면서 검게 변했기 때문이다.
“우왁!”
금화청은 깜짝 놀라서 일어나고, 금수린은 너무 놀라서 얼어있었다. 곧 본인이 먹을 음식에 독이 담겼다는 건 꽤 충격일 터였다.
허나 자세히 생각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어차피 우리는 은수저로 독을 확인하고, 시종들이 먼저 먹어서 두 번 확인하니까.
그러나 내가 있으면 이제 시종들은 필요 없었다. 내 상단전은 기에 민감했고, 음식이 들어오기도 전에 난 독이 있다는 걸 알아 챌 수 있었다.
“저, 전 아무 것도 모릅니다! 전 그냥 음식을 나른 사람으로···”
“알아. 그러니까 주방으로 들어가.”
난 시종의 말을 끊었다. 시종은 우리들의 눈치를 보더니 주방 안으로 쏜살같이 도망갔다.
나는 은수저를 아예 그냥 취어 국물에 담갔다. 독을 얼마나 강하게 넣었는지 국물은 기포를 내면서 은수저를 순식간에 검게 변색시켰다.
“이래서 굳이 사릴 필요가 없습니다. 어차피 우리를 적대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어떻게 나오든 이렇게 위협을 가할 테니까요.”
형제들도 알고 있겠지만, 이건 암살 시도가 아니었다. 그저 위협이었다.
시종들도 있고, 은숟가락도 있는 상황에서 어찌 독살이 가능하단 말인가.
그저 우리는 이렇게 할 수 있다, 이런 걸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럼 더 위험해진 거잖아.”
금화청이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나에 대한 원망이 담겨 있었다. 난 주방 쪽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꼭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뭐?”
“위기는 곧 기회니까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음식이 맛있어 보였는데 아깝군요. 그래도 이번 건에 대한 책임은 물어야 합니다. 그건 월상 형님께 맡기겠습니다.”
“···넌 무엇을 하려느냐?”
금월상이 물었다.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답했다.
“아무 것도 안 할 예정입니다.”
금월상의 표정이 멍청하게 변했다. 난 솔직하게 말했을 뿐이었다.
*
금월상은 꽤 일을 명민하게 처리했다. 독은 재료를 고르는 과정에서 주입된 것으로 밝혀졌다. 허나 그걸 추적하기는 힘들었다. 우리 식탁에 올라오기 전까지 거쳐오는 손들이 워낙 많으니까.
대신 금월상은 음식이 들어오는 체계를 좀 더 간소화하게 바꾸었고, 기존에 있던 주방장과 시종은 세가 밖으로 쫓아냈다. 아무리 독을 직접 넣은 게 아니더라도, 그런 책임은 져야 했다.
“···하암.”
금월상이 그렇게 바쁘게 움직이는 동안, 난 정말 아무 것도 안 했다. 연공부에 가서 훈련을 하는 정도가 내 일과의 전부였다.
곽진도나 금월상이 내게 뭘 계획하고 있냐고 물어도, 대답해줄 건 하나 뿐이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
내 대답을 들은 그들은 답답해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낚시를 하면서 어떤 물고기가 낚아질지를 알려주는 건 불가능했다.
나조차도 황금세가에 붙어있는 세력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천주성은 큰 조직이니까 알고 있었을 뿐, 세력 중에는 한 몫이라도 챙겨보려는 군소방파도 있었다.
아마 독을 넣은 애들도 그런 애들일 거였다. 생각이 있다면 지금 같은 상황에 일을 벌이진 않을 테니까.
“생각해보니까 아직도 개판이구나.”
아무리 그래도 바로 식사에 독을 넣는 곳이 있을 정도라니. 직접적인 위협.
다행인 건 형제들이 그리 놀라지 않았다는 거다. 이미 성가장이라는 더 강하고 실제적인 위협을 맛 봤기 때문일 거다.
세가가 바뀌고 있는 만큼, 형제들도 바뀌고 있었다.
이 변화는 또 다른 변화를 불러올 것이었다. 난 그 예정된 변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변화를 기다리며, 가만히 창문 앞에서 소주천을 하고 있을 때, 조심스럽게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들어와라.”
기철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누구?”
“여상우 장로님과 양철목 장로님입니다.”
나는 그 이름을 듣자마자 픽 웃었다. 이게 바로 내가 기다리던 변화, 본격적인 지각 변동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