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한 건당 원보 하나
27화 한 건당 원보 하나
꽤 곤란한 상황이 됐다. 금월상도 부르자마자 바로 왔고, 시종도 보내준다고 하자마자 당일에 올 줄은 몰랐다.
“시종 먼저 뵈시겠습니까? 대공자님 먼저 뵈시겠습니까?”
일견 어처구니없는 질문이었다. 당연히 우선 순위가 대공자에게로 가는 게 맞았으니 말이다. 만약 그게 진짜 일반적인 시종이었다면 말이다.
굳이 나한테 물어봤다는 것은 기철도 들어온 시종이 내게 온 손님이라는 걸 알아낸 것이다.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정하던 그 기철이는 이제 어느 부분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눈치가 많이 늘었구나.”
“무슨 소리신지 못 알아들었습니다.”
“좋아.”
나도 눈치 챘지만, 저 시종은 여상우가 붙여준 연락통이었다.
현재 무림맹과의 관계가 이득이 되느냐, 금월상과의 관계가 이득이 되느냐···로 따지면 여지없이 무림맹이었다.
“당연히 형님 먼저 뵈어야지.”
“네, 알겠습니다.”
기철이 나가고 곧 금월상이 들어왔다. 난 금월상을 만나기 전 하나의 생각을 떠올렸다.
사실 이청명 장로의 목을 벤 건 형제들과 상의된 이야기는 아니었다. 물론 상의할 필요도 없는 이야기였다. 그래도 형제들의 위축 심리를 더 자극시키는 부작용이 있지 않을까 생각은 했었다.
지금 그 생각이 기우(杞憂)였다는 게 밝혀졌지만 말이다.
“세상에. 난 살면서 그렇게 재밌는 놀이는 처음 봤구나. 그 머리를 발로 차서 몇 번 좌우로 왔다 갔다 하는지 세어보는 데, 내 눈이 돌아갈 지경이란다.”
“거기에 홀수, 짝수로 돈을 건다는 말씀이시죠.”
“그렇지! 자, 보거라. 오늘 내가 동전 삼십 개를 육십 개로 불리고 왔지.”
금월상은 웃으면서 가죽 주머니를 뒤집어서 탈탈 털었다. 황금세가에는 어울리지 않는 색깔의 동전이 옥묘각 책상 위에 마구 튀고 돌아갔다.
“우리를 핍박하던 녀석의 최후가 그런 꼬라지라니, 어찌나 시원하던지! 아, 너도 같이 하겠느냐?”
“아니요.”
내 단호한 대답에 금월상은 금방 시무룩해졌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이상한 놀이가 생긴 모양이었다.
옥사에 걸어놓은 이청명의 머리가 도박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었던 거다. 걸어놓기 전, 부패되는 걸 막으려고 소금에 절여놓았는데 그렇게 이용되고 있었다.
“큼, 좀 천박한 장난을 했구나.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단다. 품위가 없는 짓이었지.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구천은 제대로 보내줘야 하거늘···”
금월상은 갑자기 자세를 바꿔서 진지한 표정을 했다. 그러면서 눈을 굴리며 내 눈치를 봤다. 난 금월상이 오해했다는 걸 알았다.
“저희를 해하려 한 놈인데 구천을 제대로 가는지 알게 뭡니까. 그저 전 시간이 없을 뿐입니다.”
“···아. 그런 거냐? 하하.”
금월상은 그러면서도 계속 내 눈치를 봤다. 내 진심을 계속 살펴보려는 것 같았다.
확실히 금월상은 첫 인상과 다르게 좀 애 같은 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너무 어린 나이에 가족을 짊어져야 된다는 부담감 때문에 무리를 하고 있었는데, 나 때문에 본 모습이 나오는 걸 수도 있었다.
“아무튼 뭐, 줄 게 있다고?”
“네. 선물입니다.”
그래. 이청명의 머리를 가지고 축국(蹴鞠)을 하든지, 투호(投壺)를 하든지 내 알 바는 아니었다.
난 한 쪽 팔로 책상을 쓸어 동전들을 옆으로 밀어놓고 옥합을 꺼냈다.
“뭔가 심상치 않아 보이는구나.”
금월상은 그렇게 말하면서 볼을 긁었다. 뭔가 나한테 선물을 받는 게 민망한 모양이었다.
난 선물을 잡으려는 금월상의 손이 덜 민망하도록 옥합을 앞까지 밀어줬다.
“열어보시지요.”
금옥상은 헛기침을 하면서 열었다. 바로 전에 맡았던 쿰쿰하고 알싸한 향이 퍼졌다.
난 살짝 후회했다. 이럴 거면 건곤각 가서 줄 걸. 이 정도로 냄새가 강하면 어딘가에 밸 텐데 말이다.
금월상은 향을 맡자마자 입을 떡 벌렸다.
“독각화망의 내단이구나.”
“맞습니다.”
영약이라면 강호에 사는 무인들이라면 언제나 보기를 희망하는 것. 서화(書畵) 속에서만 봤던 독각화망의 내단을 보니 감개가 무량한 듯했다.
“이게 정말 나한테 주는 선물인 것이냐?”
“그럼요.
금월상은 옥합에 손을 대면서도 얼떨떨한 듯했다.
오랜 침묵이 흘렀다. 금월상은 계속 옥합을 보며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저 내단이 그렇게 좋은 걸까 싶었다. 그때 금월상은 옥합을 다시 내 쪽으로 밀었다.
“아니다. 이건 내가 받기에는 과분하구나. 솔직히 무공의 오성도 네가 훨씬 뛰어나지 않느냐.”
“아뇨. 그건 아닙니다.”
이제 나도 무공을 배우니까 보이는 건데, 금월상은 생각보다 무공에 대한 재능이 뛰어났다.
몸 안에 도는 진기의 흐름을 봤을 때, 금월상이 익힌 이궁천뢰심법의 성취는 사 성에서 오 성 정도로 되어보였다. 아무리 이궁천뢰검법에 맞는 심법을 얼기설기 만들었다지만, 그래도 창시자는 오기조원에 도달한 고수 곽진도였다.
그걸 벌써 그 정도까지 성취했다는 건 재능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그저 상단전이 열려 있어 무공을 더 쉽게 익히는 것이고, 진짜 재능에 가까운 쪽은 금월상이었다.
“제가 먹는 것보다 형님이 드시는 게 훨씬 나아서 드리는 겁니다. 영약도 사람과 무공에게 맞는 게 있지 않습니까. 독각화망의 내단이 제가 익힌 심법보다 이궁천뢰심법에 훨씬 어울립니다.”
나는 다시 옥합을 금월상 쪽으로 밀은 다음, 옆에 밀어놓았던 동전으로 선을 그었다.금월상은 옥합을 다시 두 손으로 감쌌다. 여전히 그는 주저하는 것 같았다.
“가족을 위해서라도 드시지요. 형님이 빨리 고강해지면 제가 얼마나 든든하겠습니까.”
내가 말했다. 금월상의 부산한 손이 그제야 멈췄다.
“···그래. 이해했다.”
“뜻을 헤아려주시니 감사합니다.”
금월상은 묵색 옥합을 품에 넣었다. 미간으로 오므려진 눈썹이 꽤 비장하기까지 했다.
“요즘 들어서 우리가 비로소 가족이라는 걸 느끼는 듯하구나.”
“우리가 한 번도 가족이 아니었던 적은 없었죠.”
나도 금월상의 표정을 보니 새삼 많이 바뀌었다는 게 느껴졌다. 적어도 나와 금월상의 관계는 훌륭하게 변했다.
금월상은 내게 고마움을 연신 표시하며 건곤각으로 돌아갔다. 아마 빨리 영약을 먹고 운기조식을 하고 싶어 혈맥이 근질근질할 거였다.
이제는 시종을 만날 때였다. 금월상과의 대화는 약 이 각 정도. 그렇게 오래하지는 않았다.
“기철아. 시종 데려오거라.”
난 바깥을 향해 말했고, 거의 바로 준비됐다는 듯 문이 열렸다. 기철은 곧 시종을 들이고 문을 닫고 나갔다.
그 시종은 시종답지 않게 당당한 표정을 하며 성큼성큼 들어왔다. 난 그 시종을 보자마자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원래 사람이 움직일 때는 공기를 가르는 법이다. 그런데 저 시종이 걸을 때는 공기가 길을 터주는 듯했다. 신비한 신법이었다. 상단전이 아니었으면 아예 눈치도 못 챘을 거다.
그러나 내가 이상하다고 느낀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일단 난 시종을 당연히 남자라고 생각했지만 여자였고, 당연히 어른이라고 생각했지만 나와 비슷한 나이 또래였다.
시종은 사랑방 책상 앞으로 다가와 의자에 앉았다.
“어차피 나 무림맹 사람인 거 아니까, 굳이 예의 안 차려도 되지?”
“뭐, 그건 상관없는데.”
그리고 가장 예상하지 못한 건, 어디서 본 것만 같은 낯익은 얼굴이라는 거였다.
색목인을 연상시키는 창백한 피부, 커다란 눈망울과 대비되게 작은 코와 입, 귀. 난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관찰했다. 분명 어디서 봤다고 생각했다. 그게 어디였더라. 떠오를 것 같으면서도 안 떠오르자 답답했다.
“뭘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봐?”
소녀는 목소리를 긁었다. 다친 고양이가 갸르릉 거리는 소리와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난 결국 그녀의 정체를 떠올리지 못하고 입을 열어야 했다.
“자기소개부터 하지. 황금세가의 막내인 금목환이야.”
“비연각 은영조 소속 명재희.”
난 그 이름을 듣자마자 답답했던 머릿속이 확 맑아지는 걸 느꼈다.
그래. 내가 기억하기 힘들어 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제 떠올랐다. 내가 지하감옥에 갇혀있었을 때 그녀는 전생에 내 목을 벴던 사람이었다. 쉽게 떠올리는 게 이상했다. 사실상 스쳐지나간 인연이니까.
그때는 은영조 조장 명재희였는데, 지금은 그저 조원인 거다. 하긴 나이대가 조장을 맡기는 불가능하니까.
“인생사 오리무중(五里霧中)이라더니.”
나는 탄식했다.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던 사람을 여기서 만나게 되다니.
당연히 그녀에게 무슨 원한이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죽는 게 나았을 인생에서 죽여준 사람이니까. 그래도 목을 벤 사람과 다시 마주하는 건 생경한 경험이었다.
“뭐?”
“아니, 반가워서.”
나는 웃었다. 명재희는 코웃음을 친 다음 몸을 돌려 무릎을 꼬았다.
그녀를 봤던 건 전생에서도 짧은 순간이어서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성격이 꽤 까칠했던 걸로 기억났다.
“참고로 날 부려먹을 생각은 하지도 마. 난 받은 만큼만 일하거든. 각주님이 나한테 하달한 임무는 오직 연락.”
나는 씩 웃었다. 황금세가에서 만났던 사람들은 어딘가 경직되어 있거나, 예의가 제대로 잡혀있는 사람들뿐이었다.
길들여진 가축만 보다가 야생동물을 보는 느낌이었다. 말하는 꼴을 보면 벌써 인생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 같았다.
“너 몇 살이야?”
“열두 살.”
“동갑이네.”
명재희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했다. 허나 난 그녀에게 관심이 있었다. 이건 어떻게 보면 기회였다.
수많은 조원들 중에서도 조장을 맡는 건 한 사람이다. 그러면 적어도 명재희한테는 그만한 잠재력이 있다는 거였다.
명재희는 가만히 있다가 말을 덧붙였다.
“사실 잘 몰라. 난 열둘이 아닐 수도 있어. 엄마도 아빠도 없거든. 그냥 언니들이 그렇게 말하니까 그런 줄 아는 거지.”
“그렇구나. 언니들도 은영조에 있는 사람들인가?”
“아니. 내가 은영조로 들어온 건 다섯 살 때였고, 그 전에 날 돌봐준 사람들 얘기하는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전생의 명재희였다면 이런 얘기는 안 했을 터였다. 까칠한 것과 별개로 그녀도 아직은 침묵을 물고 있기에는 치악력이 약한 나이였다.
“그 분들과는 아직 교류하고 지내?”
“그럼. 매달 키워준 값도 내고 있어. 나한테는 은인들이거든. 내가 지금 위험수당 있는 임무를 뛰고 있었는데, 이런 수당 없는 임무를 맡았으니 굉장히 기분이 안 좋아.”
“그렇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윤곽이 보이는 듯했다.
“돈을 되게 중요하게 생각하는구나.”
“그래. 너같이 부잣집 도련님은 모르지. 언니들이 나한테 말해준 게 있어. 인생의 가치는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번 돈의 총합이라고 말이야.”
어린 아이한테 말하기는 부적합한 말이었다. 고아인 명재희를 거둔 그녀들도 뭔가 제대로 된 사람들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난 그 언니들한테 감사해야 했다.
저런 그릇된 가치관을 심어준 것 때문에, 쉽게 그녀를 꾈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말이다.
“좋아. 그럼 은영조에서 네 연(年) 봉급은 어떻게 돼?”
“은자 다섯 개 정도?”
“그럼 그 네가 맡고 있었던 위험수당은?”
“은자 하나.”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누구는 원보를 떼 단위로 해쳐먹는데, 누구는 은자 한 냥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했다.
“아까 부려먹지 말라고 했지?”
“그래.”
“그럼 부려먹는 거 말고, 내가 돈을 지불하고 네가 하는 계약 형태는 어때?”
명재희는 눈을 아래로 깔았다. 길다란 속눈썹이 창문에 비친 햇빛을 반사시키고 있었다. 꽤 고심을 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마침내 장고 끝에 입을 열었다.
“계약이 뭔데?”
이번에는 내가 잠깐 할 말을 잃었다. 난 이성을 빠르게 되찾고 계약에 대해서 설명해줬다. 최대한 열두 살의 눈높이에 맞춰서.
명재희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내 심드렁한 표정으로 변했다.
“안 돼. 난 네 옆에 있는 게 임무야. 그리고 비연각은 그렇게 개인 임무를 받아주는 데가 아니야. 각주님한테 걸리면 난 죽어.”
나는 내가 생각하는 금액을 말했다.
“한 건당 원보 하나.”
금액을 들은 명재희는 맹수를 마주친 짐승처럼 바짝 얼어버렸다. 연 당 은자 여섯 개 정도 버는 그녀에게는 심히 충격적인 금액일 터였다.
동전 열 냥은 은자 한 냥이고, 원보는 은자 오십 냥의 가치다.
평민 한 사람의 일 년 생활비가 은자 두 냥이면, 일 년 중산층 가정 생활비가 은자 열 냥 정도라는 건데 지금 나는 그 다섯 배를 제안한 거다.
아무 말 없이 눈을 깜빡거리던 그녀는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노, 놀리는 거지? 나도 바보는 아니야. 황금세가 직계들은 그 많은 돈을 한 푼도 못 쓰고 감시당하고만 있는 머저리들이라며?”
계약이라는 단어 뜻을 모르는 아이도 황금세가의 현실을 알고 있다라. 꽤 씁쓸한 일이었다. 물론 지금은 바깥사람들은 생각하지도 못하는 일들이 세가 안에서 일어나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일부분 중 하나는, 내가 이청명이 해먹은 원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난 바로 아래의 마루를 뜯고 그 밑으로 손을 쭉 뻗었다.
“···진법이네.”
정보를 다루는 곳 출신이라 그런가, 그녀는 바로 은둔진을 알아봤다. 지금 그녀의 눈에는 내 팔이 반으로 잘려 바닥 밑으로 사라진 걸로 보일 거다. 그렇게 진법으로 숨겨놓은 곳에 원보들이 있었다. 난 원보 하나를 꺼낸 다음, 다시 마루를 끼웠다.
“선금으로 줄 수도 있어.”
난 멍하니 날 보는 명재희 앞에서 원보를 흔들었다.
명재희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원보를 정확히 추적해간다. 이제 명재희도 내가 하는 말이 농담이 아닌 걸 알았다. 그녀의 눈동자와 목소리가 떨렸다.
“뭘 시키려고 그렇게나 줘?”
아까 비연각을 들먹이면서 못 하겠다고 하는 건 기억도 안 나는 듯한 표정이었다.
“너는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지.”
내가 본 그녀의 신법으로는 충분한 일이었다.
앉아있던 명재희는 어느새 내 앞으로 다가와 눈을 불태우고 있었다.
“빨리 말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