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파상격성(波相激聲)
28화 파상격성(波相激聲)
콰콰쾅!
연공부 안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울렸다. 내공의 파동을 가두는 진법이 연무장에 설치되어 있지 않았더라면, 세가 내 어디서든 들을 수 있을 정도의 굉음이었다.
파상격성(波相激聲). 이때부터는 본격적으로 내공이 들어가게 되는 초식이었다. 지금까지는 내공이 없어서 삼 초식인 의련만장까지밖에 못 펼쳤지만, 해모환을 복용한 이후부터는 사 초식까지 펼칠 수 있었다.
이 초식의 특징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은 굉음.
나도 처음 들었을 때 깜짝 놀랐다. 파상격성이라는 초식의 이름에서 예상을 했어야 했지만, 그렇게나 크게 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커다란 소리에 맞게 이 검은 내가 지금까지 익힌 초식 중 가장 패도적이었다.
그만큼 온 몸의 근육과 내공을 다 써야 했고, 이 초식을 한 번만 펼치면 난 녹초가 되곤 했다.
“이게 맞나.”
몇 번을 해봤지만 갸웃했다. 감각이 뭔가 이상했다. 자연스러운 기의 흐름이 아니었다. 잠깐 검집에 칼을 넣고 쉬었다.
의련만장까지는 내공도 거의 안 쓰고 쓸 수 있는 초식인데, 파상격성부터는 갑자기 소비해야 되는 내공의 양이 확 올라갔다.
마치 첫 번째 초식부터 세 번째 초식까지 써야했을 내공을 전부 쏟아 부어야 한다는 듯이. 이 정도 굉음을 내려는 파괴력을 가지려면 그게 맞긴 하지만.
초식의 순서도 좀 이상한 듯했다. 의련만장은 잔잔한 물결이 만장에 퍼지는 듯한 유려한 만검이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초식이 이렇게 패도적으로 변한다니.
“오늘도 안 오시나.”
난 잠깐 연공부 문을 열고 바깥을 나왔다.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으니 살짝 답답해서 바람을 쐬고 싶었다.
내가 이렇게 확신을 못 갖는 이유는 곽진도가 없어서 그랬다.
내가 죽였으니, 자연스레 스승인 곽진도가 이청명 죽음의 후처리를 맡게 된 거다.
이청명 죽음의 후처리가 오래 걸린 건 천주성의 결단이 컸다. 천주성은 생각보다 황금세가에 많은 인력을 넣고 있었고, 그들이 순식간에 사라지니 메워야 할 부분이 많아진 거다.
그리고 곽진도는 그 구멍 난 것들을 차례차례 우리 것으로 메우고 있었다. 이미 우리에겐 준비된 과정이어서 다른 세력들이 따라올 새가 없었다.
감시자로 꽉 찼던 세가에 슬슬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감시망에 구멍이 뚫리니까 지금 내게는 직접적인 감시가 붙은 거다. 북서쪽에 크게 뻗은 측백나무 뒤에 한 명, 일 장도 되지 않는 호수 안에 한 명, 호수 뒤 수풀에 엎어져있는 한 명, 연공부 전각 위에 한 명. 이렇게 총 네 명.
그들이 아무리 완벽하게 숨었다고 생각한들, 예민한 상단전은 그들이 흘리는 기를 모두 잡아내고 있었다.
곽진도가 내게 떨어질 때부터 붙어있었던 놈들이었다.
“너 인기 많다.”
연공부 마루 모서리에 앉아있던 명재희가 총총 달려와서 내게 소곤거렸다. 적어도 명재희가 있는 동안에는, 명재희가 기철이가 하던 일을 대신을 하기로 했다.
내가 그렇게 말했을 때 기철이의 표정은 좋아하는 것 같기도 했고, 섭섭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알아.”
“내가 무슨 말하는지는 알아?”
“나 쫓아다니는 사람들 얘기하는 거잖아.”
내 대답에 싱글거리던 명재희는 김빠진 표정을 했다.
“뭐야. 어떻게 알았어.”
“그냥 알아. 넌 어떻게 알았는데?”
난 오히려 명재희가 아는 게 궁금했다. 그들 역시 나름 기감을 잘 숨기고 있었다. 내가 상단전이 없었더라면 못 알아챌 정도로.
명재희의 답변은 내 기준에서 상단전보다 상식에 어긋나있었다.
“호수에 서있는 바위에 물이 튀어있고, 저 나뭇가지가 어색하게 내려가 있고, 매일 수풀에 돌아다니던 벌도 없고.”
“대단하네.”
난 진심을 담아서 말해줬다. 머릿속에 과거의 풍경을 세밀하게 저장해놓는다는 거다. 말은 안 했지만 분명히 동물의 흔적과 사람의 흔적을 구별하는 방법도 있을 거였다.
“근데 한 사람 더 있어. 전각 위에.”
“어?”
명재희가 깜짝 놀랐다. 순간 그녀의 머리가 위로 올라갈 뻔했지만, 초인적인 목근육으로 참은 것 같았다. 역시 재능 하나는 확실한 아이였다. 난 입술에 손가락 하나를 폈다.
“큰 소리 좀 내지마. 그리고 이제 그만 수군거려야 돼. 의심할 수도 있으니까. 지금부터는 나한테 경어 쓰고.”
“···알겠습니다. 공자님.”
명재희는 내게 눈빛으로 욕을 하면서 상냥한 목소리를 냈다.
성질이 있어보여서 그렇지, 적어도 일처리 하나는 완벽한 애였다.
내 전생 열둘은 어땠었는지 자연스럽게 떠올려졌다. 말할 것도 없지.
난 연공부 안에서 사슬에 달린 철추(鐵椎) 두 개를 끌고 나왔다. 몸통은 쇠사슬에 머리에는 무거운 철구(鐵球)가 달린 무기였다.
연무장에는 별의 별 무기가 있었는데, 그중 몇 개를 가져온 것이다.
명재희는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어린 아이가 보기에는 가히 흉악한 크기이기는 했다. 나는 철추의 쇠사슬들을 좌우 발목에 묶었다.
요즘 곽진도가 없으니 무공에 진척이 느린 듯하여, 기초 체력을 단련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건 건물 안에서는 할 수 없어 부득이 밖에서 하는 거였다. 이제 내가 무공을 배우는 건 공공연한 일이라 보여줘도 상관없었다.
“후우.”
난 잠깐 하늘을 바라보았다. 차라리 무공이나 초식은 상단전의 힘을 빌려 쉽게 따라갈 수 있지만, 기초체력은 정말 내 정신력과의 싸움이었다.
발 한 걸음을 무겁게 내딛었다. 벌써부터 숨이 차왔지만 멈출 생각은 없었다.
*
명재희는 하늘을 바라보는 척을 하며 전각 쪽으로 슬쩍 눈을 돌렸다. 검은 눈자위의 흔들림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였다. 은영조는 눈동자를 간수하는 법도 훈련하는 곳이니까.
‘어디 있다는 거야.’
솔직히 명재희는 자존심이 상했다. 은영조 안에서도 천재 취급을 받고, 신뢰를 받는 그녀는 기감이나 신법 쪽에서는 한 번도 밀려본 적이 없었다.
그건 각주가 초감각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재능에 가까운 영역이었고, 명재희는 그걸 내심 자부심으로 가지고 있었다.
근데 저 쇠공을 미련하게 끌고 다니는 녀석은 한 사람이 더 있다고 말해줬다.
그렇다고 자신을 기죽이기 위해서 거짓말을 할 녀석도 아니었다. 며칠 보지도 않았지만 그건 확실했다.
명재희는 턱을 손에 받치고 금목환을 바라봤다. 볼 게 그것밖에 없기도 했다.
남의 수련 장면은 보는 게 아니니까. 이렇게 기다리는 건 오히려 편했다. 은영조에서 제일 많이 했던 훈련이 바로 참는 거니까.
비연각이 다 그렇지만, 특히 은영조는 잠입과 암습에 관한 훈련만을 집중적으로 했다. 그런 자신보다 기감이 좋다면 대체 뭐하는 애일까. 그리고 훈련 방법은 뭐 저렇게 구식인 것이고···.
금목환에 대해서 생각하면 할수록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 중에서도 제일 큰 꼬리는 이것이었다.
조심스럽게 품 안에서 말 안장 모양의 은덩이를 꺼냈다. 바로 금목환이 준 원보였다.
일반 서민들은 평생 한 번 만져보기도 힘들다는 그것.
‘이거 십 분지 일 벌려고 얼마나 많이 죽였더라···’
비연각의 다른 조 사람들을 만나면, 언제나 자신의 어린 외형을 보고 특별 취급을 받는 아이라고 오해를 한다. 가뜩이나 짜증날 일 많은 세상에서 더 짜증나게 하는 요소다.
그들은 자신이 은영조에서 작전성공률의 수위를 차지하는 걸 알면 기함을 하곤 했다. 물론 그것마저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저 금목환이라는 아이는 자신한테 뭘 봤는지는 몰라도 대뜸 개인적인 임무를 주고 원보를 줬다.
공교롭게도,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 지금 나한테 붙어있는 애들 다 처리해.
금목환이 원보를 쥐어주면서 속삭이던 말. 실패라고는 생각지도 않는 말투였다.
그때 명재희의 거미줄 같은 감각에 무언가 움찔 걸렸다. 전각 위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으니 느낄 수 있는 감각. 찾았다.
이제 사람들의 위치, 감각을 기억해 놨다. 명재희는 그렇게 기억한 사람들을 놓친 적이 없었다.
‘사람 잘 봤다는 건 알려줘야지.’
명재희는 그런 생각을 했다. 저 딱딱한 표정의 아이에게, 기대보다 더 일을 잘해서 놀라게 해주면 얼마나 재밌을까, 하고.
어쨌든 자신에게 원보라는 커다란 걸 준 사람이다. 자존심으로 생각해도 그를 실망시키기는 싫었다.
허공에 발을 구르던 그녀가 몸을 일으켜 사뿐 땅을 밟았다. 당연히 흙먼지 한 톨 올라오지 않았다.
*
금정원은 예상대로 시끄러웠다. 내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자마자 아주 빠르게 정적으로 돌아갔지만 말이다.
“회의 중이신데 죄송하군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주변을 빠르게 둘러봤다. 저 구석에 여상우와 양철목도 보였다.
다른 장로들의 반응들은 가지각색이었다. 그저 내가 왜 왔는지, 단순한 호기심에 찬 눈빛도 있었고, 심히 당황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그런 표정으로 나와 적대하고 우호하는 세력을 구분할 수는 없었다. 중앙에 앉은 내 편, 곽진도도 엄청 혼란스러운 눈빛이었으니까 말이다. 곽진도는 내게 떨떠름해하며 물었다.
“무슨 일로 온 거냐.”
“스승님을 뵈러 왔습니다.”
곽진도는 회의장을 잠깐 둘러보다가 책상을 짚고 일어났다.
“오늘은 여기까지 합시다.”
난 그 말에 대드는 사람이 한 명 정도는 있을 줄 알았는데 잠잠하기만 했다. 곽진도도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었다.
곽진도는 바로 문을 열어 나왔고, 난 그 뒤를 따랐다. 곽진도는 금정원 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고 나도 따라들어갔다.
“여기 왜 온 게냐?”
“스승님 뵈러 왔습니다.”
나는 아까와 똑같은 대답을 했다.
“다른 목적이 있던 거 아니었더냐?”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지금은 좀 중요한 때가 아니더냐. 난 천주성이 없어져서 장악하기 쉬울 줄 알았더만···”
“규합했군요.”
말이 끊긴 곽진도는 살짝 민망한 듯 헛기침을 했다.
“···그래. 역시 머리 돌아가는 건 빠르구나.”
난 바로 생각했다. 지금 단일로 천주성에 못 미치는 세력들은 갑작스레 나타난 불균형에 당황하고 있을 터였다.
“그렇지. 그 무림맹하고 붙어먹은 건 각주한테 들었다. 그래서 지금 무림맹이 많이 도와주고 있지.”
“어떻게든 다시 감시자들을 채워 넣고 싶은가보네요.”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 같다. 옛날엔 조용히 있던 장로들도 발언을 하기 시작했거든. 정체를 감출 때가 아니라는 거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족할만한 성과였다. 심지어 규합까지 해줄 줄은 몰랐다. 각자 세력들이 달라 규합하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는데, 이 정도로 빨리 규합한 거보면 이미 논의가 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상관은 없었다. 딱 봐도, 규합을 해봤자 별 볼일 없는 족속들이었다. 아까 곽진도가 회의 중단 선언을 했을 때 아무도 입을 못 연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래. 근데 나는 왜 찾아왔느냐? 뭐 신변에 문제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닙니다.”
감시가 붙기는 했지만 명재희가 처리할 수 있었다. 내가 온 첫 번째 이유는 무공 때문이었다. 파상격성이 내 내공을 확 잡아먹고, 의련만장과 이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기 때문이다.
“그럼 뭣 때문에 온 거냐?”
나는 입을 열려다가 번쩍 드는 생각에 멈췄다.
세력들의 규합. 그런 거대한 파도와 흐름은 한 번에 떡하니 나타나는 게 아니었다.
물 밑의 흐름은 격하게 된지 오래였을 거다. 어쩌면 몇 년 전부터 말이다.
지금 보기에는 갑자기 규합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준비는 차근차근 되고 있었다는 거다.
그렇다면 의련만장은 단순히 여유로운 물결이 아니라, 내부에 거친 파도를 숨기고 있는 잔잔함이라는 거였다. 뜻하지 않게 온 깨달음이었다.
내가 퍼뜩 상념에서 깨자, 곽진도는 옆에서 호법을 서주고 있었다.
“그 깨달음이 내게 물으려던 것과 관련이 있었나보구나.”
“네.”
“그러면 이제는 묻지 마라. 그건 온전히 네가 찾아낸 답이고, 나랑은 다를 수 있으니까.”
곽진도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면서 살짝 한숨을 뱉었다.
“뭔가 스승으로서 해주는 게 없는 것 같구나.”
“아뇨. 그건 아닙니다. 지금 저랑 이렇게 얘기하시는 것만 해도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난 풀 죽은 스승님을 달래줬다. 여기 내가 온 두 번째 목적은, 그냥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거였다.
그것만으로도 다른 장로들은 애가 탈 게 분명하니까. 거기다가 명재희가 감시자들까지 처리한다면, 토끼굴 앞에 검불을 태우는 격이었다.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다 움직이고 있군요.”
창밖을 바라봤다. 고요해 보이는 밤이지만, 명재희라는 비수가 날아다니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