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네가 그 무공의 대종사겠구나
36화 네가 그 무공의 대종사겠구나
형산파 삼대제자들의 무공 견식은 끝났다. 당연히 삼대제자들이니 기초적인 무공이 많았고, 완성도도 형편없었다.
그래도 형산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알기에는 문제없었다.
“···이게 끝입니다.”
연공부 안에서는 형산의 삼대제자들이 숨을 헉, 헉 몰아 쉬고 있었다. 곽진도의 눈에 살짝 한심함이 스쳤다. 그리고 내 귓전에 속삭였다.
“내가 요즘 너만 보다 보니까, 네 또래 애들이 너무 하찮아 보이는구나.”
“괜찮았던 것 같은데요.”
“진심인 게냐? 형이든, 깨달음이든 뭐 하나 제대로 된 게 없지 않느냐.”
“아뇨. 그냥 형산의 무공이 말입니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다. 그들이 보여준 건 기본적인 구향검법, 월성검법(越城劍法)이었다. 그걸로도 충분했다. 원래 일이관지(一以貫之)다. 기본을 알면 그 문파 무공의 묘리를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고생하셨습니다.”
난 형산파의 삼대제자들 곁으로 갔다. 그들은 여전히 내가 옆으로 가면 흠칫했다. 나는 그 일관된 반응에 피식 웃었다.
“말했잖습니까. 우리는 당신들을 죽일 이유가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공자님은 저희의 은인입니다. 그런데도 몸이 반응하는 건 어쩔 수 없군요.”
“괜찮습니다.”
사실 난 이제 그들에게서 볼 장은 다 본 셈이었다. 뭔가 더 캐낼 것도 없었다. 그들이 무슨 무공을 숨기고 있다는 생각은 안 했다. 그들은 오히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게 없다고 안타까워하고 눈치를 봤으니 말이다.
“저희는 세 분을 보내드려도 됩니다만, 분명 지금 나가기는 불편하시겠죠. 원래 살인멸구를 당해야 할 사람이 살아나오면 늘 그런 법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그럼 저희랑 잠시 같이 있으시죠.”
“···그, 그래도 됩니까?”
“저희 내원 무사로 일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나는 그렇게 말했다. 삼대제자들은 내게 벌떡 일어나 고개를 푹 숙였다. 아마 그들은 나가서도 어떻게 살지, 미래는 어떻게 될지 고민일 터였다.
그런 점에서 나는 최대한 많은 사람이 필요했다. 사람을 부릴 때 필요한 돈은 곧 썩어넘쳐나게 된다. 다만 다른 명문 세가의 눈치를 보는 사람들이 안 들어올 뿐.
이제 그것도 곧 해결해야 할 테지만 말이다.
어찌 됐든 나는 사람이 부족했고, 그들은 미래가 없었다. 공정한 거래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들은 내게 연신 감사함을 표했다. 난 그들에게 대충 추천장을 써주고 연공부에서 내보냈다.
“별의 별 사람들을 다 끌어모으는구나.”
“나름 중요한 일입니다.”
“글쎄다. 저런 허술한 친구들 몇 있다고 정세가 바뀌진 않을 것 같다만.”
분명 곽진도의 말도 맞았다. 그래도 내가 본 내 또래 중에서는 가장 깔끔했다.
그래도 형산이라는 명문 문파의 제자들이다. 어릴 때부터 갈고 닦인 실력과 자세가 어디 가는 게 아니었다. 나름 호위무사로 쓰기에는 아까운 재질이었다.
“우리는 세력을 키워야 하고, 저들은 우리의 첫 걸음이라고 생각해야죠.”
“세력보다는 당장 앞이 중요하지. 그래, 저들 무공을 봐서 뭐 나오는 게 있더냐?”
곽진도는 물었다. 물으면서도 큰 기대는 안 하는 듯했다. 난 말하기 전에 먼저 물었다.
“형산의 무공 기반이 도가(道家)였나요?”
“그것도 모르고 있었느냐?”
“잘 몰랐습니다. 보면서 알았죠.”
“보면서 알았다는 것도 신기하구나. 몰랐다는 게 더 신기하지만.”
도가 계열 무공처럼 유유해서 미루어 물었더니 역시 맞았다. 나는 모래가 있는 연무장 안으로 들어갔다. 먼저 눈으로 보면서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난 아무 말 없이 그림을 그렸다. 종이는 모래판, 붓은 검이었다.
머릿속에서 형산의 무인들의 움직임이 그대로 재생됐다. 구석에서부터 모래에 사람과 검의 움직임이 그려졌다.
처음에 같이 들어왔던 곽진도는 흠칫하고 휙 날아 연무장 바깥으로 나갔다.
“···미친놈이군.”
곽진도의 그런 말이 들려오는 듯했지만 나는 검을 멈추지 않았다. 지금 나는 형산의 무공을 그림으로 그리면서 익히는 중이었다.
물론 그들이 보여준 형에 갇힌 검법이 아닌, 더 핵심인 묘리를 배우고 있는 것이었다.
곧 나는 월성검법의 초식의 그림까지 마쳤다. 어느덧 모래판에는 마치 신비로운 동굴의 벽화마냥 연속적인 검객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처음에 기수식부터, 일 초식 검형구향(劍衡九向)을 할 때는 검을 어떻게 움직이는지. 멈춰있는 그림인데도 불구하고 다음 그림을 보면 어떻게 움직일지 예상이 됐다.
“정말 장관이구나.”
“어쩌다 보니 그림이 됐군요.”
나는 검을 허리춤에 넣었다. 여기서부터 시작이었다.
“이제 여기서 형산을 파훼할 무공을 만든다는 거구나. 남악검군이 들으면 곧장 네 목을 베러 달려올 말이지.”
“제가 만든 무공을 배운다고 해도 어찌 하수가 고수를 이기겠습니까. 다만 약점을 건드리는 것뿐입니다.”
내가 만들 무공은 형산의 묘리를 완전히 뒤집은 무공이 될 거였다. 그러나 내 말대로 삼류 무사가 이 무공을 배운다고 일류 형산의 무사를 이길 수는 없다.
“예를 들면 옹문규가 제게 썼던 자개충천이라는 쾌검 있지 않습니까. 그건 유(柔)의 묘리로 곡선을 그리고 순식간에 쾌(快)로 변환해야 합니다. 고수들은 물 흐르듯 바꾸겠지만, 유에서 쾌로 변환할 때 끊기는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깨달음 대신 형을 먼저 외운 사람들이 많을 테니까요.”
“그건 그렇지. 역시 무공을 보는 눈이 남다르기는 하구나.”
“그러니 저는 유에서 쾌로 변환할 때 그 틈을 노리는 초식을 만들겠죠.”
이미 내 머릿속에는 구향검법, 월성검법을 할 때 움직임과 기의 흐름이 다 저장되어 있었다. 난 여전히 못미덥다는 표정을 지은 곽진도에게 웃어줬다.
“무공 이름은 파형검법(破衡劍法)으로 하겠습니다.”
“네가 그 무공의 대종사(大宗師)겠구나.”
“그렇죠.”
곽진도의 실소에 난 고개를 끄덕이고 검을 뺐다. 이제부터 움직여야 했다. 어떻게 해야 형산의 검법을 효과적으로 역이용할지 말이다.
*
언제나 그랬지만, 요즘도 내 일정은 단순하기 짝이 없었다. 연공부에 가서 파형검법을 만들고, 옥묘각에 와서 명재희에게 보고를 받는 식이었다.
지금 이미 전쟁은 시작된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렇게 물 밑으로 오가는 정보들이 점점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명재희는 내게 종이를 넘겼다. 황금세가의 장로이자 형산파의 간자에게 사람을 붙인 결과가 나온 것이다.
“주산파랑 연합이라.”
“와, 형산파 하나랑도 힘들 텐데.”
명재희는 그렇게 말했지만 난 별로 힘들 거라는 생각은 안 했다. 분명히 확신했다. 이 싸움은 압도적으로 끝날 거다. 그래도 그런 개인적인 예상까지는 말 안 하기로 했다.
이번에는 꽤 재미있는 정보들이 많았다. 무림맹 무사들이 남창으로 들어왔다는 정보였다. 형산이 공식적으로 시비를 걸어올 경우를 대비해 미리 들여온 것이다. 물론 중원의 눈치가 있으니 황금세가 장원으로 들어오는 게 아닌, 남창에 주둔시키는 것이었다.
“이 사람들은 언제 출발했는데 벌써 온 거지?”
“그거야 난 모르지.”
무림맹은 호북(湖北)의 무한(武漢)에 있었다. 남창하고는 가까웠다. 일반 사람들도 한 나절이면 오는데, 무인들이니 반 나절이면 올 터였다.
난 종이를 계속 펼쳐서 봤다. 그곳에는 무림맹 무사들의 총 몇 명인지, 절정에 이른 무사는 몇이고, 일류는 몇이고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총 사백 명에다가 절정이 삼십 명, 일류가 백 명.”
괜찮은 전력이었다. 그러나 형산파와 주산파를 상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전력이었다.
단체 전투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명재희도 갸웃했다.
“그걸로는 좀 부족하지 않나?”
“부족하지.”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래도 이건 무림맹이 줄 수 있는 최선의 수였다. 이걸 메우는 건 나의 몫이었다.
그래도 눈에 띄는 이름이 있었다. 어디서 들어본 것만 같은 이름이었다. 내가 들어본 정도의 이름이면 고수라는 뜻인데.
“청무대장(淸霧隊將) 천지약. 이 사람은 얼마나 강한 사람이야?”
“무림맹 안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지.”
“그래? 성격은?”
“고수들 성격이 다 그렇듯 개차반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인들의 지휘는 자신이 해야 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을 설득 시켜서 병권을 잡아야 된다는 거다.
“지금 이 사람들 어디에 있어?”
“빈 장원 하나 빌려서 들어가 있을걸.”
“안내해.”
나는 바로 일어났다. 명재희는 볼을 긁으며 살짝 머뭇거렸다.
“찾아오라는 얘기는 없었는데.”
“그냥 가는 거야.”
“···음. 일단 난 안 가는 걸 추천해.”
명재희는 내 눈을 피하며 말했다.
“우리는 그냥 정보를 하는 사람들이라 별 생각은 없는데, 거기는 천생이 무인들이라 아무래도 상계에 대한 인식이 그리 좋진 않거든. 그냥 걔들은 맹주의 명령을 들으러 온 사람들이고.”
“괜찮아.”
만약 상계를 깔보는 시선이 있다면, 오히려 더 가야 했다. 앞으로는 전 중원의 편견에 맞서야 했다. 우리 편부터 납득시키지 않으면, 적들을 납득시킬 수는 없었다.
*
“황금세가 막내공자가 곧 여기로 방문할 거랍니다.”
“듣던 대로 열심히 사는 소협이군.”
평범한 장원의 방. 한 사람은 서 있고 한 사람은 앉아있었다. 서 있는 사람은 중년에다가 피부가 거칠었는데, 앉아있는 사람은 나이는 고작해야 이립을 갓 넘은 것 같고 피부도 백옥같았다.
“비연각주가 그렇게 칭찬했으니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긴 했어.”
“그렇다고 직접 오실 필요까지 있었습니까?”
서서 말하는 사람은 청무대(淸霧隊)의 대장. 천지약이었다.
천지약은 당황스러웠다. 언제나 원정은 대장으로 가야지 편했다. 모실 사람이 하나 생기는 순간 그때부터 피곤한 거다.
근데 가장 피곤한 사람이 왔으니 당황스러울 노릇이었다. 심지어 몰래 하는 잠행이었으니 같이 온 청무대원들도 몰랐다.
현재 여기 무한에 무림맹주 종리운(鍾離雲)이 있다는 걸 말이다.
“고작해야 상계의 아이일 뿐입니다. 무재가 뛰어나면 얼마나 뛰어나겠습니까.”
“자네는 궁금하지도 않은가. 사람 보는 눈이 그렇게 까다로운 비연각주가 인재라고 할 정도면 어떤 정도의 사람인지 말이야.”
종리운은 여상우가 보낸 보고서들을 다시 펼쳤다. 지금까지 황금세가에서 보내온 보고서들이었다. 요 몇 년간 황금세가의 추이가 여기 전부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갑자기 막내공자가 바뀐 이후부터 급속도로 바뀌고 있는 중이지. 우리도 이렇게까지 깊숙이 관여할 줄은 몰랐고 말이야.”
종리운은 다시 한 번 재미있는 시를 읽는 것처럼 보고서를 탐독했다.
금목환이 움직이면서 한 일들이 하나의 과장도 없이 적혀있었다.
곽진도를 부른 일, 이청명 장로의 목을 벤 일, 형산의 양자를 벤 일. 거침이 없으면서 계산이 제대로 서 있는 행동들 뿐이었다.
과연 무림맹의 기 센 무사들 앞에서는 어떤 행동을 보여줄지 궁금하기만 했다.
그때 문이 똑똑 두들겼다.
“막내공자가 도착했답니다.”
“빨리도 왔군.”
종리운은 빙그레 웃었다. 종리운의 반응을 보니 천지약도 덩달아 궁금해졌다. 무림맹주가 이렇게 호기심을 보내는 사람이 많지는 않은데 말이다. 대체 어떤 점이 그를 남창으로 이끌었는지.
혹여 잔재주나 언변으로 현혹하는 기술만 가지고 있다면 크게 실망할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