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이게 명분이라는 말이지
51화 이게 명분이라는 말이지
난 바로 천기고를 나왔다. 검을 챙겼으니 더 볼 건 없었다.
“나왔군.”
나오자마자 종리운이 나보다 내 허리춤을 봤다. 이미 내 허리춤에는 검이 메어져 있었다. 칼자루에 있는 회색 끈은 칼날을 가리기 위해서 감아 놨다.
칼날도 이가 많이 빠져있어서 낡은 끈인데도 베어지지 않았다.
“···특이한 취향이군.”
“이게 끌렸습니다.”
“허허.”
종리운은 웃었지만 목소리에 안타까움이 듬뿍 담겨 있었다. 나의 선택이라고는 했지만 내심 기대하던 무기들이 있던 모양이었다.
“신투행전도 있고, 천룡검식(天龍劍式)이 쓰여진 용아(龍兒)도 있건만, 왜 그런 고물을 갖고 나온 건가. 물론 신병이기에 의존해서는 안 되지만, 좋은 기회가 아니었던가.”
“저한테는 이게 끌리더군요. 그게 전부입니다.”
나는 내 검을 바라봤다. 밖에서 보니 더욱 초라했다. 아까 내 몸을 왔다 간 기운은 온데 간데 없었다. 몰래 내공을 불어넣어 불러보려 해도, 그 검은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난 느꼈다. 무엇보다 정순한 기운을. 종리운은 못 느끼니 그 검이 폐품처럼 보이는 거였다.
“큼, 그 검은 송로(松露)라고 하네. 종남파의 이십이대 장문인 벽리항(壁理恒) 선배께서 쓰신 물건이지.”
종남파라. 확실히 지금 내 심결은 종남파의 태을신공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이 검이 반응을 한 것일까. 역시 인연이란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몰랐다.
내가 생각하는 동안 종리운은 계속 말했다.
“그런데 그 검은 그냥 그분이 쓰셨다는 것에 의미가 있네. 칼 자체는 명검이 아니야. 실전용 검이라면 한참 잘못된 선택이지.”
종리운은 계속 아쉽다는 듯이 내 검을 바라보면서 혀를 찼다. 내가 부탁이라도 한다면 한 번 더 들여보내줄 기세였다. 하지만 난 이 검이 마음에 들었다.
“송로라. 좋은 이름이군요.”
“그렇게나 마음에 든다면.”
결국 그렇게 송로는 내 검이 됐다. 그 다음에 할 일은 명확했다.
우리에겐 아직 몇 가지 할 이야기들이 남아있었다.
*
종리운은 두 손을 깍지 껴서 턱을 가리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검은 가죽주머니가 있었다. 방금 금목환이 떠나기 전 선물이라고 준 것이었다.
주머니의 입구는 헐렁하게 풀어져 있었고, 그 안에는 노란 용액에 담긴 누군가의 머리가 있었다.
“여러모로 당황스럽게 한단 말이야.”
이 머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다. 들었으니까. 형산파 장문인, 남악검군의 장남이라고 했지.
금목환은 황금세가 습격에 대해서 주산파보다 형산파, 특히 옹소후가 책임이 크다고 했다. 충분히 무림맹이 나서서 징벌할만한 일이었다고도 했다. 금목환의 얘기를 들어보면 응당 그러하기는 했다.
사파와 연합한 것도 모자라, 문파의 제자들을 팔다니. 정파의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시켰다.
“여기까지 읽고 있었다니. 정말 천 년에 한 번 나올 천재인가.”
지금 종리운, 제갈헌의 생각은 공통적으로 무림맹의 영향력이 너무 약하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것은 구파일방의 덩치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무림맹은 현재 정파 내에서도 굉장히 애매한 상태였다. 온 전력을 끌어 모아 싸우면 구파일방 중 하나는 상대할 수 있겠지만, 그들은 싸워주지도 않았다.
싸워주는 순간 구파일방에게 위협이 된다고 인정하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파일방들은 자신들끼리만 이권 다툼을 했는데, 외부에서 공격이 들어오면 순식간에 단합해 맞섰다. 그게 그들이 강호를 지금까지 주름잡고 있는 이유였다.
- 명분이 부족하다니까요. 명분이. 꼬리를 건드리면 저들은 자르면 그만이야. 확실한 몸통이 있어야지. 그래서 저번에 괜히 소림사랑 엮인 상단 하나 털었다가 욕만 봤잖아.
제갈헌이 했던 말들이 떠오른다.
소림사 속가제자가 운영하는 태화상단이 검증되지 않은 환단을 팔고 있었을 때 이야기였다. 그 환단은 내공을 십 년을 늘려주는 대신 주화입마가 올 수도 있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성분을 살펴보니 소환단과 비슷하게 제조를 했지만 값비싼 물질이 싼 물질로 대체됐던 것이다. 종리운이 주목한 건 일개 상단이 소환단의 연단법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장부를 까보자 상단이 막대하게 거둬들인 이득 중 일부는 소림사로 흘러간 걸 확인했고, 무림맹은 바로 상단을 친 다음 소림사까지 겨냥했었다.
당연히 소림사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무림맹이 소림사에게 어떤 해명을 원할 때도, 소림사는 그저 속가제자 개인의 일탈이라고 짧게 언급한 게 전부였다.
그 이후로 검존 종리운에 대한 풍문들이 전 중원에 나돌았다. 기루에 가서 남자아이들을 떼로 불러서 노는 버릇이 있다든지, 일곱살 이하 아이들을 고아먹는 기벽이 있다든지, 하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이었다.
그런 이야기의 특성상 근원을 알 수 없었지만 누가 퍼뜨리는지는 명확했다.
이게 구파일방이 기어오르는 세력을 상대하는 방식이었다.
“이게 명분이라는 말이지.”
종리운이 깔끔하게 보관된 옹소후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밀었다. 목을 벤 흔적 외에는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다. 이 역시 금목환의 실력일 터였다.
형산파. 구파일방이 아니기는 하지만 커다란 문파다. 충분히 구파일방 입장에서는 신경이 쓰일 거다.
장문인 아들의 목을 베었다는 건 구파일방에게도 충분히 자극되고도 남을 얘기다. 또한 그토록 제갈헌이 부르짖던 명분도 있다.
정파의 썩은 부분을 증명하여, 무림맹이 중앙으로 나갈 수 있게끔하는 명분.
종리운은 가죽주머니를 다시 끈으로 칭칭 동여맸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금목환이라는 사람은 정말 알 수가 없었다.
강호에 그렇게 밝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강호의 돌아가는 생리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으니 말이다.
- 근데 공자, 이 옹소후가 그러한 악행을 했다는 걸 어떻게 증명해야 하나? 형산파는 분명 인정하지 않고 날뛸 거 아닌가?
- 증언할 삼대제자들이 저희 세가에 있긴 합니다.
- 증언 따위로 그들이 수긍을 하겠는가.
- 그렇죠. 근데 증명이 필요합니까?
···
- 오히려 증명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가치 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힘 아니겠습니까.
일단 운남에 있는 제갈헌에게 돌아오라는 서신을 보냈다. 지금 상황을 간략하게 적었다. 아마 제갈헌은 바로 돌아올 것이었다.
무림맹의 방향성이 앞으로는 많이 바뀔 예정이었다.
*
아무쪼록 옹소후의 머리가 큰 도움이 되기를. 난 무림맹이라면 잘 써줄 거라고 믿었다. 우리가 쓰면 모욕이지만, 무림맹이 쓰면 정의다.
무림맹의 영향력과 힘이 커지면, 동맹 관계인 우리도 편해진다. 형산파가 어떻게 반응할지는 모르나, 남악검군의 성격이 그렇게 불같다지. 어떤 선택을 할지는 아직 모르나, 붙어주면 붙어줄수록 우리는 좋다. 그게 형산파 몰락의 시작일 테니.
아버지는 생각보다 가까운 적벽(赤壁)에 있었다. 무한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 하긴 무림맹 본단과 가까워야 유사시에 대처가 가능할 터였다.
남창과 무한보다도 가까운 곳. 지체할 여유는 없었다.
마지막으로 나가며 무림맹 건물을 뒤돌아보았다. 그때 누군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멀리서 느껴졌다. 난 그쪽으로 홱 돌았다. 나를 바라보던 사람은 내가 머리를 돌리자마자 휙 안으로 숨었다. 채 내려가지 못한 머리카락 때문에 알겠다. 갈유월이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었던 걸까.
난 다시 돌았다. 그 순간, 나는 뭔가를 잊지 않았나, 생각이 들었다.
옆을 바라봤다. 아, 정말 깜빡하고 있었는데 명재희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무림맹에 같이 왔었다.
하지만 굳이 찾을 필요는 없었다.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이고, 무림맹의 안가다. 최대한 적은 사람이 가면 좋겠지. 나는 정문 호위무사들에게 종이와 붓을 빌려, 명재희에게 먼저 집으로 돌아가라는 서한을 쓴 다음 발을 옮겼다.
*
쿵. 쿵. 쿵. 땅이 흔들리는 소리가 울리면 한 명씩 날아가서 벽에 박혔다. 개중에는 머리부터 부딪쳐서 기절한 사람이 있었지만, 그건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장문인에게 가슴팍을 차인 형산파 비각의 무사들은 흉통 때문에 숨을 못 쉴 지경이었으니까.
“그래. 시간을 한 달을 줬는데 고작 절강에서 목격된 게 끝이라고.”
옹진수는 그것만으로 분이 풀리지 않는지 벽에 붙은 정보원들에게로 걸어갔다. 정보원들은 제대로 몸을 가누지도 못하면서 일어났다.
“그리고 바로 주산파가 황금세가를 쳤다지? 네놈들 돌머리로는 그 중간에 아무런 인과가 없다고 생각 되는 거냐?”
“아닙니다. 하지만 주산파가 황금세가를 치는 데 실패한 이후로 급속도로 궤멸해서 정보가···”
어렵사리 일어난 정보원은 옹진수의 솥뚜껑 같은 손에 뺨을 얻어맞고 다시 쓰러졌다. 짚단처럼 쓰러진 정보원의 귀에서는 피가 흘러나왔다.
“쓰레기 같은 녀석들!”
옹진수는 아무리 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옹문규와 삼대제자들은 황금세가 근처인 남창에서 목격된 게 마지막이고, 옹소후는 며칠 이후 혼자서 절강에서 목격됐다고 한다.
일류 무사에다가 형산파 장문인의 아들인데 어떤 강호에서 위협을 받을까 생각하여 굳이 인력을 들여 찾지는 않았고, 때 되면 돌아오겠거니 했다. 물론 복귀 지연에 대해서 흠씬 두들겨 팰 준비는 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산파가 황금세가를 쳤다는 이야기를 뒤늦게 듣고 나서야 옹진수는 부랴부랴 파견된 아들들을 찾았다.
대체 중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옹소후가 홀로 절강에서 목격된 것도 이상하고, 잘 잠식하고 있던 주산파가 갑자기 일어나서 황금세가를 공격한다는 것도 이상한데, 제일 이상한 건 황금세가가 그걸 막았다는 것이었다.
덩달아 황금세가에 반 이상 전력을 쏟아부은 주산파는 황금세가를 쳤다는 이유로 무림맹에게 순식간에 궤멸 당했다.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는 몰라도 찝찝했다. 옹소후가 거기 엮여있을까 봐 불안했다. 형산파 정도의 문파가 흑도와 얽혔다는 걸 알면 파급력이 무시무시할 터였다.
구파일방에 들어가겠다는 일념 하나로 했던 봉사활동, 구호활동들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는 거다.
“일단 우리 아들들의 신원을 먼저 찾아야 된다. 죽었으면 죽었다는 정보라도 들고 와. 안 그러면 네놈들이 대신 죽을 터이니.”
옹진수의 목소리가 살벌하게 울렸다. 엉망진창이 된 정보원들은 모두 꼿꼿이 허리를 폈다.
“존명!”
옹진수는 정보원들이 나간 다음 어질러진 장문인실을 둘러봤다. 깨진 화분, 찢어진 산수화, 얼룩진 피.
뭔가 어두운 음모가 형산에 드리워진 것 같았다. 이 구릿한 냄새. 옹진수도 형산파의 장문인을 하면서 온갖 더러운 꼴을 봤고, 행하기도 해봤다. 그래서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대체 누가, 이 남악의 맹주인 형산파를 겁도 없이 건드린다는 말인가.
아들들의 신변에는 무조건 이상이 있을 터다. 아니, 있어야 했다.
그래야 명분이 생기니까.
누군지는 몰라도, 대 형산파를 건드린 대가는 치러야 했다.
*
적벽에 도착하는 데는 채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해모환은 이미 모두 흡수해서 내 기가 되었고, 기의 운용마저 만족스러웠다.
무한에서 적벽까지 죽어라 달릴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조절을 해서 나가면 경공을 계속 쓸 수 있었다.
살면서 경공을 가장 오래 쓴 날이어서 그런가. 방축귀매신법이 삼 성의 성취에 도달하기도 했다.
“적벽의 봉추암(鳳雛庵).”
적벽은 처음 와보는데, 옛날 큰 전투가 벌어진 곳이라 유적지처럼 되어있었다.
봉추암을 통과하여 배풍대(拜風臺), 무후궁(武侯宮)으로 들어가야 했다.
유독 천재가 많은 제갈 세가에서도 가장 천재였다는 제갈공명. 그를 기리는 무후궁이라 그런지, 애초에 제갈헌이 진법을 만들어서 보호를 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걸 무림맹의 안가로 쓰고 있던 거다.
종리운은 그 진법의 파훼법을 써주려고 했다. 난 그게 완성되는데 얼마나 걸리냐고 물었고, 반 시진은 걸린다고 해서 그냥 됐다고 하고 나왔다.
반 시진 정도 늦춰진다고 아버지의 신병에 이상이 생기는 건 아니겠지만 굳이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드디어 아버지를 볼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