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가주가 돼야 되거든요
52화 가주가 돼야 되거든요
봉추암 안으로 들어서니, 양옆은 싱그러운 대나무숲에 길은 마른 낙엽으로 잔뜩 깔려있었다. 낙엽이 쌓인 걸로 보아하니 최근에 사람이 들른 것 같지 않았다.
도리어 낙엽이 쌓인 길에는 해치기 어려운 완벽함까지 있었다. 감히 들어갈 수 없을 것만 같은 길이었다.
“재밌게 해놨군.”
난 감탄했다. 여기부터가 진법인 거였다. 만약 천기고에서 제갈헌의 진법을 살짝이라도 맛보지 않았다면 좀 헤맸으리라.
제갈헌이라는 사람의 진법 이해도는 굉장히 뛰어난 것으로 보였다. 자연스럽게 발을 돌리게 만드는 것. 이것이야말로 싸우지 않고 이기는 방식이었다. 난 진법을 한 번도 이렇게 써본 적이 없어서 꽤 신기했다.
사람의 의식을 건드리는 게 아닌, 무의식적으로 유도하는 방식. 굉장히 세련된 방식이었다.
나는 하늘로 손을 뻗어봤다. 살랑거리는 바람이 느껴졌다. 코끝에는 대나무 향이 느껴졌다.
진법 안에서 기는 순환되지 않는다. 규칙적으로 맴돌 뿐이다. 고여있는 기로 봤을 때 최근에 침입자는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러니까 딱히 호위를 두지 않았군.”
처음에 진법만 있고 호위는 없다기에 약간 불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이런 자연스러운 진법을 만들어 놓고 호위무사를 놓는 건 오히려 부자연스럽다. 그야말로 나무를 숨기려면 숲을 숨기라는 묘리를 잘 따르고 있는 거였다.
물론 아무리 자연스러운 진법이라도, 내가 여기가 진법임을 알고 있고, 상단전으로 기의 흐름을 따라가면 파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각 길마다 생문으로 나아간다. 수많은 갈림길, 나는 주변 풍광을 구경했다. 제갈공명이 남동풍을 기원했다는 배풍대, 그를 모셔놓은 사당인 무후궁까지.
무후궁 뒤쪽에는 파인 분지가 있었다. 그 분지 밑에는 얕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작은 집이 있었다. 회(回)자로 생긴 그 집은, 건물이 사방을 둘러싸고 중앙에 마당이 있었다.
마당에는 작은 평상이 있었고, 그곳에는 누가 누워있었다. 저것이 누구인지는 명확했다.
난 집 가까이 왔다. 가까이서 보니 이질적인 곳이었다. 무후궁, 배풍대, 봉추암은 모두 세월의 흔적에 닳고 이끼가 낀 모습이었는데, 이곳은 새 건물인양 깔끔했다.
정문 위에는 현판이 있었지만, 현판에는 어떤 글도 적혀있지 않았다. 난 그곳에서 잠깐 목례를 했다.
“아버지, 제가 왔습니다.”
난 그리고 문을 열었다. 주저하지 않고 마당 중앙에 있는 평상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내 아버지가 누워있었다. 딱히 어떤 검증이 없어도, 그 얼굴 안에는 나를 포함한 우리 형제들의 얼굴이 부분부분 담겨 있었다.
“귀식대법(龜息大法)이군.”
예상했던 것처럼, 아버지는 귀식대법에 걸려있었다. 혈을 눌러서 일부러 혈류를 느리게 하고, 심장박동을 느리게 해 신진대사를 늦추는 방식이었다.
무인이 스스로 혈을 점하여 할 수도 있지만, 아버지는 무인이 아니니 다른 사람이 해준 것일 터였다.
얼굴의 푸른 정맥이 비쳐 보일 정도로 창백했고, 옷을 들춰보니 하단전 부근 피부에 보라색이 얼룩져있었다. 내가 익히 알고 있는 무형지독의 증상과 완벽히 일치했다.
- 그런데 무형지독에 걸려있는 아버지를 봐서 뭐할 텐가. 자네가 가도 할 게 없을 터인데.
- 그냥 아버지를 보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 ···그렇군. 가족을 보고 싶은 데는 이유가 없는 법이지.
맹주와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눌 때는 이런 말을 나눴었다. 종리운은 그 말을 하면서 나를 짠하게 바라봤었다. 마치 아버지를 잃어버린 어린 아이 같았을 거다.
하지만 난 종리운에게 말한 것처럼 아버지의 얼굴만 보려고 온 건 아니었다.
내가 한창 묶여있을 때쯤, 그러니까, 지금 기준으로 십 년은 뒤에 있을 미래에 강호의 불가사의 중 하나가 밝혀진 거다. 그것은 바로 무형지독의 정체.
맛도 없고, 냄새도 없고, 형태도 없는 무형지독은 대체 어떤 것을 원료로 하고 있는가.
그 정체는 바로 마교 팔마(八魔) 중 하나인 독마(毒魔)에게 계승되어 내려오는 무공, 심독신공(深毒神功)이었다. 이름에 독이 들어간다고 해도 그것은 독이 아닌 무공. 무형지독이 수수께끼였던 이유도 독으로 접근해서 알지 못했던 거다.
그게 우연치 않은 기회로 알려지고 나서 꽤 많은 반향을 일으켰고, 그 책임을 지고 사천당문은 삼 년을 봉문했었다.
나에겐 있었던 일이지만, 지금은 아직 먼 미래의 이야기다.
그러니 내가 바로 온다고 결정한 것이었다. 무형지독은 독이 아닌, 사기(邪氣)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기라면 정순한 기운, 즉 내가 가지고 있는 태을헌원신공과 정반대되는 기운이었다.
“후.”
난 태을헌원신공을 일으킨 다음 아버지의 하단전에 손을 댔다.
순식간에 불쾌한 기운이 내 몸을 덮었다. 서늘하면서도 역한 감각. 감각이 더욱 노골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내가 태을헌원신공을 익히고 있어서일 거다.
“···윽.”
내 손목까지 보라색 기운이 통증과 함께 올라왔다. 내가 아무리 사기와 상극인 태을헌원신공을 익히고 있어도, 처리하는 건 꽤 어려웠다.
자그마치 마교 팔마 중 하나의 독문무공이다. 팔마는 삼화취정과 오기조원의 사이에 있는 고수들이었다. 그런 고수가 심어놓은 독이다. 당연히 해결하는 게 쉽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내 몸 밖으로 회오리 치던 푸른 기운의 끝에서 하얀색 기운이 나오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낼 수 있는 극성의 기였다.
사기가 고여있는 하단전에서부터 진기를 주입해나간다. 내 몸이 하얗게 타올랐다.
그때 내 허리춤에 있는 송로가 잠깐 진동을 했다.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아직 나는 송로를 내 것처럼 다루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
“···으.”
누워있던 아버지가 움찔하며 신음을 냈다. 장장 내가 아버지의 하단전에 손을 댄 지 사흘만의 일이었다. 내 몸은 땀에 잔뜩 절어있었다.
사기의 저항이 생각보다 극심하여 손을 뗄 수 없었던 탓이다. 내가 중간에 뗐으면 하단전에서 튀어나온 사기들이 세맥으로 다 퍼질 터였다.
곧 아버지가 찡그리며 눈을 떴다. 난 바로 하단전에서 손을 뗐다.
“정신이 드십니까?”
“너는 누구···”
아버지의 눈과 목소리는 한껏 경계를 담고 있었다. 내가 나를 설명하기도 전에, 아버지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혹시, 목환이냐?”
“네.”
“아니, 어떻게···, 대체···”
신기하게도 아버지는 날 알아봤다. 하긴 나도 아버지가 아버지인 걸 알아봤으니, 그렇게 신기한 건 아닐까.
아버지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아버지는 갑자기 자신의 볼을 꼬집기도 하고, 주변을 둘러보기도 하고, 손바닥을 쥐었다 펴기도 했다.
나는 가만히 그걸 지켜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리고 나서 내 볼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땀이 끈적여서 바로 뗄 줄 알았지만 아버지는 도리어 일어나 날 껴안고 울었다.
아버지도 날 본 건 고작해야 이 년이다. 그럼에도 슬픈 걸까.
“미안하다, 미안해···”
아버지는 계속 내 어깨 위에서 미안하다는 말만 읊조렸다.
처음 암굴에 매달려 있을 때 아버지를 원망한 날도 많았다. 왜 이런 집안에 태어나게 했고, 왜 이런 집안을 만들었는지 책임을 묻고 싶었다. 그래, 지금 우리 형제들이 느끼고 있는 감정과 유사할 터였다.
회귀를 한 이후에는 아버지에 대해 어떤 생각도 없었다. 전생의 감정은 퇴색됐고, 애초에 아버지에 대한 기억도 별로 없었다.
하지만 내 생각과 다르게도 무감각하지는 않았다. 그냥 뭔가 움찔거렸다. 그 움찔거림이 무엇인지, 나는 처음 겪는 것이라 몰랐다.
그렇게 한참 울고 난 아버지가 내 몸에서 떨어졌을 때, 그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좀 진정되셨을까요.”
“그래. 미안하구나.”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다. 그는 평상 위에 앉아서 내 눈치를 힐끔 봤다. 이제야 운 게 좀 민망해진 듯 내 눈을 피했다. 아버지는 자신 옆의 자리를 손으로 툭툭 두들겼다.
“서 있지 말고 여기 앉으려무나.”
“네.”
난 아버지의 말대로 옆에 앉았다. 아버지는 멍하니 그냥 내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알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그가 실종된 지 십 년이 지난 때다. 상황을 받아들일 시간은 줘야 했다. 곧 아버지의 입이 열렸다.
“네가 올해 몇 살이더냐?”
“열둘입니다.”
“···열둘, 딱 십 년이구나.”
그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인 아버지는 이제 내 얼굴을 보면서 실실 웃었다. 아까 펑펑 운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난 아버지의 상태가 사기에 물들어서 이상해졌나 의심했지만,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꿈이어도 좋은 날이구나.”
“꿈이 아닙니다.”
난 딱 잘라서 말했다. 꿈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했다. 아버지는 내게 알려줄 게 많았다.
아버지가 좀 정신을 차린 것 같아지자 이제는 내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세가에 어떤 일이 벌어졌고, 지금은 어떤 상황이고, 나는 어떤 경로를 거쳐서 아버지를 찾아왔는지 말했다.
이 내용들을 최대한 요약해서 말하려고 했지만 그래도 길어서 반 시진은 써야 했다.
물론 설명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근데 난 분명 무형지독에 중독되어 있었다. 그건 어떻게 된 것이냐? 지금 내 몸이 너무 가뿐한데.”
“음.”
난 잠깐 멈칫했다. 태을헌원진기를 얘기하는 건 불가능하다. 상단전을 얘기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약선(藥仙)께서 환약을 지어주셨습니다.”
“···그런 기연이 있었단 말이냐. 그렇게 바람처럼 다니신다는 분을. 그건 그렇고 약선님은 약선이시구나. 무형지독도 치료하실 정도라니.”
아버지는 내 얼버무림이 시원찮은 듯했지만, 삼선(三仙) 중 하나인 약선을 언급하자 그나마 믿어주는 듯했다. 정파 사람들에게 삼선은 거의 신적인 취급을 받으니 말이다.
아무튼 내용을 다 들은 아버지의 눈이 진지하게 변했다. 약 일 각 정도 침묵이 이어졌다. 이제 지금 현실이라는 걸 막 파악한 사람에겐 어려운 내용이었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아버지의 입이 열렸다.
“천주성, 형산파, 주산파. 그들이 우리 세가를 점거하고 있었다라. 근데 천주성과 주산파는 처음 들어보는 구나.”
나는 천주성과 주산파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설명을 했다. 천주성은 아직 사람들은 많이 모르지만, 의문의 정파 고수들이 모인 집단이며, 주산파는 보타암을 깨고 나타난 절강의 새로운 패자였다고.
“정파 세력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군. 이렇게 될 줄은 알았지만, 너무 빠르구나.”
아버지가 말했다.
“일단 이 아비가 왜 여기 있는지부터 말해야겠구나.”
“무형지독에 걸리셔서, 목숨을 부지하시려고 무림맹에 보호를 요청하신 걸로 아는데요.”
“그건 맞아. 근데 왜 무형지독에 걸렸는지부터 말해야겠구나.”
아버지는 말을 이었다.
“내가 중원의 상로를 점검할 때, 신장에서부터 정체불명의 물자가 이름 없는 상단을 통해 반입되고 있는 걸 알았다.”
“신장이면 마교군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지. 나는 계속 조사했어. 그 물건의 내용이 무엇인지. 최대한 감추려고 해도, 전 중원에 우리만큼 눈이 많은 곳도 없지 않느냐. 결국 내용물을 알아냈지.”
나는 아버지를 바라봤다. 아버지는 잠깐 말을 멈칫했다.
“이걸 너에게 말해주는 게 맞는지 모르겠구나. 내가 이것 때문에 여기 있는데 말이야.”
“괜찮습니다. 이미 아버지가 당한 순간부터 저희의 미래도 아버지와 비슷했겠죠.”
“···그건 그렇구나. 그래, 그 내용물은 고독의 알들이었다. 어림잡아 몇백 개는 되는 것이었지.”
고독. 난 그 말을 듣자마자 전생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내 인생의 반을 저당 잡히게 한 그 고독. 고독이 뇌를 파먹는 느낌은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누구도 모를 것이었다.
고독은 중원에서 절대 취급 불가였다. 고독을 키우고 쓰는 건 오직 마교였다. 마교는 대체 무엇을 준비하기에, 많은 고독들을 중원에다 반입시키고 있었을까.
중원이 아무리 넓다 하더라도, 고독이 발견되는 순간 정파 전체가 들고 일어날 게 분명했다. 그들로서도 꽤 위험 부담이 큰일이라는 거다. 난 고독을 숨긴 지역 후보들을 몇 가지 예상해봤다.
살수들과 온갖 범죄자들이 모여 산다는 운남 애뇌산(哀牢山)의 유곡(幽谷), 아니면 흑룡강(黑龍江), 길림(吉林)?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내가 예상하지 못한 곳이었다.
“그리고 그 고독은 섬서로 공급되고 있었다.”
“섬서요?”
그 말에는 나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섬서라면 화산파, 종남파를 비롯한 명문 문파들이 있는 곳이다. 그야말로 중원의 중심이 아닌가.
“그래. 나도 처음에는 믿기 힘들었다. 그건 섬서까지 가지고 올 정도로 마교가 중원에 깊숙하게 침투해 있었다는 의미니까. 그래서 난 그것들을 계속 추적해갔는데···”
아버지의 말은 그곳에서 끊겼다. 나는 짐작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무형지독에 당하신거군요.”
“나보다 그들이 빨랐던 게지. 그래서 나는 무림맹에게 섬서에 고독이 흘러들어왔다는 걸 간신히 전하고 여기 안가에 들어온 거야.”
나는 깊숙한 생각에 빠졌다. 무림맹은 중원 전체를 담당하지 않는다. 굳이 따지자면 문파들을 담당한다.
지역을 담당하는 건 그곳에 있는 대형 문파다. 섬서라면 화산, 종남의 지역. 거기까지 올 정도면 이미 화산, 종남만을 의심할 순 없다. 중원 전체에 내가 모르는 마교의 사람들이 많다는 말과 진배없었다.
···그렇다면.
난 전생에서 마교가 우리 세가를 먹은 게 어부지리거나, 둘째 형과의 밀약이 크게 작용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고 애초에 우리가 예전부터 마교의 목표였다면···,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했다. 우리 세가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잠식되어갔는지, 형산파와 주산파, 천주성은 어떻게 들어왔는지 면밀하게 봐야했다. 그들을 충동시킨 것이, 마교일 확률이 있었다. 아니, 많았다.
“아버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래.”
난 아버지를 바라봤다. 이제, 내가 여기 온 목적을 밝힐 때가 된 것 같았다.
“저희 가문의 직인. 금인은 어디 있습니까?”
“···갑자기 그건 왜 묻느냐?”
아버지는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금인이라면 가주의 상징이었다. 내 질문이 어떤 건지는 아버지도 알고 있을 거다. 다만, 못 믿어서 한 번 더 물어보는 것뿐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들은 게 맞았다.
“제가 가주가 돼야 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