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황금세가만을 위한
61화 황금세가만을 위한
무림맹에서도 느꼈지만, 내가 아는 인식과 일반 사람들이 아는 인식이 좀 다른 부분이 있었다. 옥묘각도 난 그리 넓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옥묘각에 절맥에 걸린 아이들과 아이들의 가족을 포함한 이백 명이 넘는 사람이 거처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그걸 지금껏 나 혼자 쓰고 있던 거다.
난 대전에 가기 전에 옥묘각을 들렀다. 아직 아이들은 요양 중이겠지만, 경과를 보기 위해서였다.
내가 조심히 옥묘각 안으로 발을 들였을 때, 난 제일 먼저 한 남자와 마주쳤다. 불혹은 되어 보이는 얼굴이었으니, 아이의 아버지일 터였다.
그 남자는 날 보자마자 발치에 번개라도 떨어진 듯 모든 동작을 멈추더니, 갑자기 부복을 했다.
“아이고, 가주님.”
내가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생각을 하던 찰나, 남자의 소리를 듣고 온 사람들이 순식간에 구름떼처럼 몰렸다.
그들 모두 아이의 가족들이었다. 그들 역시 남자와 같이 날 보자마자 바닥으로 바짝 엎드렸다.
“가주님께 미천한 인간이 인사 올립니다.”
“오셨습니까. 가주님.”
모두의 인사말은 각양각색이었지만 그들의 말투와 내용은 대개 비슷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조아리는 건 처음이었다.
“일어나시지요. 여러분의 아이들은 세가의 사람이지만, 여러분들은 세가의 사람이 아니니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난 그들 중 한 명을 일으켜 세웠다. 처음 나와 눈이 마주친 남자였다.
그는 내 손이 닿자 순식간에 석상이라도 된 듯 굳어버렸다.
“이렇게 하해와 같은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 그러겠습니까.”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이의 목숨까지 살려주시고, 집도 주시고, 식사까지 나눠주시니 저희에게는 가주님이 요순(堯舜)이십니다.”
“맞습니다. 가주님이 저희를 살리셨습니다.”
아래층이 소란스럽자 이층에 있던 아이들도 어느새 나를 훔쳐보고 있었다. 나는 다시 사람들을 일으켜 세웠다. 내가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자 슬슬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일어났다.
“아이들을 좀 봐도 될까요?”
“당연합니다. 제가···”
“아뇨. 휴식 취하는 아이들이 깰 수 있으니 저 혼자 조용히 갔다 오겠습니다.”
내가 그러고 계단 쪽을 바라보자 계단에 숨어있던 아이들이 다시 이층으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난 사람들을 무르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내가 다 올라갈 때까지 사람들은 날 계단 아래서 바라봤다.
*
한유림은 계단을 올라오려는 금목환을 보자 바로 아무 방으로 숨어버렸다.
이제 그녀도 여기가 어디인지 알았다. 바로 중원제일상가라는 황금세가였다. 너무 건물이 번쩍번쩍하다 싶었더니, 다 이유가 있던 거다.
“뭐야?”
침대에서 누워 있다가 눈을 뜬 건 팽차월(彭磋越)이라는 남자애였다. 금목환에게 질문을 한 눈매 사나운 소년.
한유림도 그의 이름을 듣고 깜짝 놀랐었다. 팽가하면 당연히 중원인들은 하북팽가라는 명가부터 떠올리지 않는가.
실제로 팽차월은 하북팽가에서 나온 아이였다. 그러나 먼 방계여서, 절맥을 고쳐도 본가의 무공을 전수받지 못해 버려졌다고 했다.
“···조금만 숨을게.”
“뭘 숨어?”
팽차월은 한유림을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쳐다봤다. 한유림은 솔직히 금목환을 지금 볼 수 없었다. 창피했다. 정말 금목환은 자기의 말대로 치료를 해주고, 밥을 먹여주고, 재워주기까지 했다.
한유림은 강호에서 혈혈단신으로 장장 칠 년을 살았다. 그 칠 년 동안 중원에서 만나본 수많은 사람들 중에 금목환 같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간 겪었던 수모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창기(娼妓)를 하라는 말을 듣고, 흑도 무뢰배들은 실제로 범하려고도 했다. 문파에서 배운 무공과 구음절맥의 음기가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당했을 테다.
그런 경험을 가진 한유림에게 금목환의 행동은 거짓이라고밖에 생각이 안 됐던 거다.
“가주님한테 사과해야지.”
숨은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던 팽차월이 말했다. 한유림도 알고 있다. 사과를 해야 했고, 은혜를 입은 것에 대해 감사를 해야 했다.
알고 있지만, 한유림은 괜히 심술을 내며 답했다.
“바로 가주님이 입에 배어버렸네.”
“그럼 가주님이지. 뭐라고 해?”
팽차월이 순수하게 물었다. 사실 이미 아이들은 한유림을 제외하고는 팽차월과 비슷한 반응이었다. 평생 절맥이라는 이유로 의지할 곳 없이 자랐던 아이들에게 의지할 곳이 생긴 셈이니까. 이미 아이들은 금목환에게 충성할 준비가 만반이었다. 가족들도 황금세가에 은혜를 갚으라고 신신당부를 하는 마당이니.
“너도 버려진 사람이잖아. 거두어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버려진 거 아니야.”
팽차월의 말에 한유림은 얼굴을 홱 돌렸다. 큰 소리가 나올 뻔했지만 아직 자고 있는 아이들이 많아서 소리를 죽였다.
“그리고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은 것 같은데.”
“강호인인데 나이가 뭐가 중요해?”
“됐어.”
한유림은 입술을 씹었다. 자신은 버려진 게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이 모두를 버리고 나온 셈이었지. 문득 다시 불타는 보타산이 떠올랐다. 어머니와 같이 지냈던 암자도···.
아. 한유림은 내심 탄식했다. 그녀는 그 날 생각을 하기만 하면 악몽을 꿨으니까. 오늘도 무조건 악몽이 예약되어 있는 셈이다.
팽차월은 한유림의 심정도 모르고 다시 쏘아댔다.
“만약 사과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억지로 사과시킬걸.”
“할 거야.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좀 조용히 할래?”
한유림은 짜증을 내고 다시 문을 살짝 열어 틈을 봤다. 금목환은 복도를 조용히 돌아다니며 방을 하나씩 확인하고 있었다.
금목환은 자신과 나이가 같거나 어려 보였다. 그런데 가주직에다가, 그에 걸 맞는 어른스러움까지 갖추고 있었다.
문득 한유림은 깊은 공포를 느꼈다. 만약 여기서 버려진다면 어떡할까. 버려지지 않더라도 지금 모든 이의 은인인 금목환에게 암수를 썼다는 것 자체가 기피의 대상이 될 거였다.
보타암에서 사매들과 놀았을 때의 추억. 그건 싸늘한 바람이 부는 중원에서 그녀가 품고 있는 유일한 불씨였다.
자신에게 다시 따뜻한 시간이 왔는데, 그만 놓쳐버리고 만 것일까. 한 순간의 실수로.
한유림은 결심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지만, 사과와 감사인사는 해야 했다. 물론 안 받아주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할 때, 갑자기 바깥에서 문이 열렸다. 문 뒤에서 쭈그리고 앉아있던 한유림은 머리를 부딪치며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여기서 뭐하나.”
한유림은 위를 올려다봤다. 아름답지만 싸늘한 얼굴. 금목환이었다.
“오셨습니까. 가주님.”
팽차월은 바로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금목환은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몸은 좀 어때?”
“괜찮습니다. 그나마 저는 운기조식을 할 줄 알기 때문에.”
“아, 맞다. 너 하북팽가라고 했지.”
“네, 맞습니다.”
금목환의 말투는 차가웠지만 내용은 막상 차갑지 않았다. 또한 팽차월의 말투에서는 존경심이 벌써부터 뚝뚝 묻어나왔다.
한유림을 그걸 보면서 천천히 일어났다. 금목환이 다시 그녀에게 얼굴을 돌렸다.
“원래 네 방이야? 남자랑 여자는 나눠놨을 텐데.”
“···아니. 아니요···”
한유림은 고개를 푹 숙였다. 경어도 익숙하지 않았고, 어떻게 사과할지도 몰랐다.
“그럼 왜 여기 있어?”
“···으, 음.”
입에서 맴도는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한유림 본인도 답답했다. 그때 금목환이 입을 열었다.
“넌 괜찮아?”
“응?”
“응이라고 하면 안 되지. 난 가주인데.”
“···아, 죄송합니다.”
너무 갑작스럽게 물어서 반말로 대답하고 말았다. 보타암에 있을 때는 유일하게 경어를 쓰던 사람이 어머니여서 영 입에 붙지 않았다.
“괘, 괜찮습니다.”
“그래.”
금목환의 할 말은 그게 끝이었다는 듯 바로 등을 돌려 나가려고 했다. 그때 한유림이 순식간에 경공으로 돌아가 금목환의 앞길을 막았다.
앞길이 막힌 금목환은 한유림을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할 말이 있으면 하라는 것 같았다.
“···그, 죄, 죄송했습니다···”
한유림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존심일까. 민망함일까. 부끄러움일까. 아직 본인의 감정을 완전히 파악하기에는 그녀의 나이는 너무 어렸다.
“이해해. 그럴 만했어.”
금목환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금목환은 한유림과 눈을 맞췄다.
“넌 중원에서 힘든 일을 많이 겪었을 테니까. 날 도저히 믿을 수 없었겠지.”
“그걸 어떻게···”
한유림은 놀랐다. 당연히 자신의 과거를 여기서 밝힌 적은 없었다. 혹시 금목환은 자신을 보타암에서부터 쫓고 있었던 걸까. 그러나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절망 속에 빠져있는 사람은 한 눈에 보여.”
한유림은 흠칫했다. 금목환의 말과 얼굴에는 조금의 농담기도 없었다. 사실 한유림은 황금세가가 정파들에게 먹혀 있다는 정세도 몰랐다. 그런 그녀가 본 금목환은 그저 부잣집 공자님이었다. 근데 그런 걸 대체 어떻게 안단 말인가.
“사과는 받아줄게. 일단은 영약의 기운이 다 해소가 안 됐을 테니 방에 가서 휴식하고 있어.”
금목환은 그렇게 말하고 한유림의 어깨를 툭툭 쳐줬다. 정말 최악이었다. 사과는 커녕 위로만 받다가 끝나는 꼴이었다. 존경하는 어머니가 뭐라고 하셨던가. 그렇게 금목환이 지나가려고 할 때, 한유림은 뭔가 울컥했다.
“윽.”
한유림의 입에서 붉은 피가 흘러 땅바닥에 떨어졌다. 영약을 먹고 휴식을 취해야 할 때, 경공을 쓰고 심마까지 걸리니 기혈이 꼬인 것이었다.
기맥에서 오는 통증에 한유림이 허리를 구부렸을 때, 갑자기 등 쪽에서 따뜻한 기운이 들어왔다.
한유림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그게 금목환의 기운이라는 걸 직감했다.
금목환의 따뜻한 기운은 곧장 꼬인 기맥을 풀고, 뭉쳐있는 영약의 기운을 다시 안전하게 흩어놓았다. 진기도인(眞氣導引). 타인의 내공을 자신의 내공으로 이끌어주는 기술이었다.
진기도인은 내공에 깊은 깨달음이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기술이었고, 또 영약을 먹은 사람을 진기도인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숨 크게 쉬어.”
뒤에서 금목환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유림은 곧장 크게 호흡을 했다. 단전에서 나온 호흡에 금목환의 따뜻한 기운이 전신으로 퍼졌다. 정말 빠져나오고 싶지 않을 정도로 편안한 기운이었다.
곧 금목환은 등에서 손을 뗐다. 신기했다. 기혈이 꼬인 걸 이렇게 쉽게 풀다니. 옛날에 한유림이 기혈이 꼬였을 때 일류 이상의 사매들도 한 시진이나 걸려 끝냈던 걸 일 각도 안 돼서 끝내버린 거다.
“괜찮지?”
“···네.”
금목환의 말에 한유림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가주님.”
“너희는 내 사람들이니까 당연한 거야.”
금목환은 그렇게 말하고 방을 나갔다. 한유림은 멍하니 있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눈물이 났다. 지켜보는 팽차월은 아무 말도 안 했다. 한유림은 그저 서서 흐느꼈다. 왜 우는지는 본인도 몰랐다.
*
아이들은 모두 괜찮았다. 확실히 영약도 최고급들로 사놓아서 그런지 부작용도 달리 없는 것 같았다. 중간에 한유림이라는 아이가 피를 토하긴 했지만, 기맥이 꼬이는 건 은근히 흔한 일이고, 위중하지도 않으니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나는 현재 본원 가주 집무실에서 온갖 책을 펼쳐놓고 있었다. 하오문이 사온 무공들이었다.
“···많기도 하지.”
다시 느끼는 거지만, 정말 많았다. 나도 이렇게 많이 들어올 줄은 몰랐다. 심지어 삼선 중 하나인 약선의 무공까지.
일단 이들이 어떤 거에 재능이 있을지 모르니, 모든 무기를 기본적으로 다룰 수 있게끔 하고 싶었다. 당장 검법이 서른 개, 부법이 여덟 개, 편법이 세 개. 다른 무공들도 겹치는 것들이 많다.
이것들을 모두 가르칠 수는 없으니 이 무공들의 장점을 통합시켜 새로운 무공을 만들 계획이었다.
아직 아이들도 준비가 안 됐고, 강운과 목현학도 올 시간이 아니었다.
난 이 시간에 최대한 많은 무공을 만들어야 했다. 지금까지 중원에 없었던, 황금세가만을 위한 무공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