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감히 다가올 엄두도
64화 감히 다가올 엄두도
아이들의 몸도 점차 회복되고, 교육을 맡을 장로들도 무공에 익숙해져갔다. 사실 그들이 스승처럼 그 무공을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그냥 기본적인 자세를 봐주고, 나태하지 않게끔 하는 식의 사람만 필요했다. 그래서 무림맹에서 절정고수 네댓 명만 달라고 했던 거다.
그런데 반대로 황금공에 강운과 목현학이 관심을 보이니 알려주게 됐다. 그들이 구결을 알고 가르치면 더 효율이 늘어날 것이니 아이들에게는 좋았다.
“근데 너무 막 준 거 아니더냐?”
물론 지금 곽진도처럼 우려를 표하는 사람도 생겼다.
이제 어느 정도 체계가 생겨서, 나도 시간이 좀 남았다. 다시 연공부에서 곽진도와 함께 훈련을 시작해서 둘이 있는 시간이 좀 늘어났다.
“익혀주시면 오히려 좋죠.”
“아니, 아이들보다 네 문제라는 거다. 물론 참고가 되는 무공들이 있었다고 해도 그건 창작의 영역에 속한 무공이었다. 그런 걸 대수롭지 않게 주면 안 된다. 네가 당장 그 무공을 익히고 있지는 않지만, 그건 오히려 네 약점을 알리는 꼴이기도 하니까.”
“제 약점 하나 대신 칠십 이개의 장점이 생기면 이득이죠.”
난 연무장에서 수련을 하는 아이들을 창문 바깥으로 바라봤다. 맨 앞에 한유림과 팽차월이 열심히 무공을 수련하고 있었다. 확실히 명가에서 배운 기본기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또 그게 제 약점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건 극양절맥이나 구음절맥의 아이들이 배웠을 때 좋은 무공들이라 제가 굳이 익힐 필요도 없고요.”
“···그래. 뭐, 그렇다면야.”
곽진도는 내가 보는 곳을 똑같이 바라봤다. 아이들 앞에는 각자 만년한철로 된 철인형들이 서있었다.
그런 용도로 들여온 건 아니지만, 아이들의 견식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만년한철 인형을 보면서 놀라는 아이는 어느 정도 배움이 있는 것이고, 놀라지 않는 아이들은 어리거나 배움이 짧은 것이었다.
“하긴 강운과 목현학이 왔는데 기본기만 봐주면 좀 아깝기는 하지. 쟤들이 실력은 있으니까.”
“네. 그래서 좀 부탁을 드릴까 합니다.”
“뭘?”
“뇌기를 다루는 친한 형님이 있거든요. 강운 장로님도 뇌기를 다루신다죠.”
“누구···. 아.”
곽진도는 바로 알아챘다. 분명 황금세가에 무재가 뛰어난, 뇌기를 다루는 무인이 있었다. 금목환과 곽진도가 바빠서 이리저리 뛰어다닐 때도 묵묵하게 훈련을 했던 무인이.
*
“자, 다시 태산압정 백 번.”
“네!”
우렁찬 소리가 연무장에 울렸다. 강운과 목현학은 두 개의 검법, 금양검법과 금음검법을 봤고, 두 개의 심법, 금양심법과 금음심법을 모두 확인했다.
그러나 아직 이들은 이 상승의 무공을 배울 때가 아니었다. 먼저 몸과 검의 기초를 잡아놓고 배웠어야 옳았다.
그리고 또, 사실 강운과 목현학은 통칭 황금공이라 불리는 무공을 완전히 독파한 것도 아니었다.
기본적인 훈련을 시킨 뒤, 강운과 목현학은 슬쩍 말을 꺼냈다. 당장 그들의 대화거리는 오직 황금공이었다.
“···어제 금음심법을 읽어봤네.”
“난 금양심법.”
“검법도 대단했지만, 심법은 정말 완성도 있더군. 물론 이건 아예 절맥밖에 못 쓰는 심법이지만, 북해빙궁의 빙심공(氷心功)에도 밀리지 않을 것 같아.”
“확실히 심법이 더 대단하더군. 정말 알다가도 모를 놈이야. 이런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지금까지 조용히 있었다는 것도 놀랍고.”
금목환은 이미 태을신공이라는 종남 최고의 절학을 같은 종남파의 고수와 토론을 하며 수정을 한 경험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검법보다는 심법을 만드는 데 더 익숙했던 거다. 물론 이들이 그 사실을 알리는 없었다.
“불비불명(不飛不鳴)이라 하지 않던가. 횃대에 오래 앉아 있었던 새가 날개가 큰 법이지.”
“그런가. 확실히 영약에 절맥 걸린 아이들에 돈을 너무 사치스럽게 쓰나 했더니, 그런 것도 또 아닌 것 같네.”
목현학과 강운은 동시에 검을 내리치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원래라면 이 시기의 애들을 가르칠 때가 가장 힘들다. 무엇 하나 개념이 잡혀있지 않고, 또 인내심이 없어 힘들다고 내빼는 경우가 많다.
근데 이 아이들은 황금세가에서 목숨을 구함 받았기 때문일까. 누구 하나 나태하고 쳐지는 아이가 없다. 나중에 들어보니 가족들까지 모두 데리고 오고, 가족들의 거처까지 모두 마련해줬다고 했다.
아무리 어린 나이에 아는 게 적다고 해도, 그 은혜는 느낄 것이었다.
“이게 부자가 돈을 쓰는 방법인가. 확실히 보는 시야가 좀 다르군.”
“부로 따지자면 지금 황금세가 가주가 천하제일인 아닌가. 확실히 우리와 보는 눈이 다르겠지.”
강호에 배신, 간자가 시발점이 된 혈사가 워낙 많다보니, 돈만 있다면 이렇게 확실한 투자도 나쁘지 않은 듯했다.
그들이 다시 황금공에 대한 깊은 토론을 나누던 도중, 사람 세 명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들은 바로 입을 닫았다. 당장 옥묘각에 들어오는 인원 자체가 한정돼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 금목환은 무조건 끼어있다고 봐야 했다. 자신의 무공 수련이 끝나면 늘 아이들을 보고 가니까 말이다.
딱히 아이들한테 격려를 하는 것도 아닌데 올 때마다 아이들이 달려드는데, 은근히 부럽기도 했다. 아이들이 어른들의 관심이 필요한 것처럼, 어른들도 아이들의 관심이 필요하니까.
온 사람은 역시 금목환과 곽진도였다. 곽진도가 다시 금목환의 무공을 봐주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근데 뒤에 있는 곰 같은 체격의 사내는 어디서 본 듯했지만 기억은 나지 않았다.
“어쩐 일인가?”
“그냥 뭐, 구경 왔지.”
의례적으로 강운과 곽진도가 서로 인사를 건넸다. 곽진도가 뒤에 있는 곰의 소매를 잡아 앞으로 끌었다.
“이 녀석이 황금세가의 대공자. 금월상이라는 놈이네.”
“···아, 안녕하십니까. 금월상이라고 합니다.”
아. 강운과 목현학은 그때서야 기억이 났다. 전에 전투가 끝나고 중요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회의를 했을 때 있었던 아이였다. 너무 대충 봐서 기억이 안 났었다.
“그래. 강운이라고 하네.”
“난 목현학일세.”
“알고 있습니다. 일명만뢰 강운 대협과 비동형 목현학 대협을 모르면 무인이 아니죠.”
강운과 목현학은 금월상의 말에 서로를 쳐다봤다. 하긴 자신들은 중원에 꽤 알려진 무인들이었다.
황금세가에 와서 곽진도가 핀잔을 주고, 금목환은 아무 반응이 없고, 절맥에 걸린 아이들은 너무 어려 모르니 잊고 있었던 거다.
그렇게 보니 금월상이 좀 예쁘게 보였다. 좀 동정심이 들기도 했다. 같은 가문에서 동생이 천재라는 건, 형제로서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 일이었다.
“허허. 그저 옛 허명일 뿐이지.”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 인정받음에서 오는 만족감. 금월상은 꽤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 친구는 왜?”
목현학은 물었다. 곽진도 대신 금목환을 바라봤다. 이런 뜬금없는 상황은 금목환이 잘 만든다는 거다.
금목환은 목현학의 예상대로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아이들과 형님을 좀 같이 가르쳐주셨으면 해서요.”
허나 금목환은 목현학을 바라보지 않고 강운을 바라봤다.
“큰형님도 뇌기를 쓰시는 분이라서, 분명 가르침을 내려주시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음.”
강운이 살짝 고민했다. 오히려 화들짝 놀란 건 금월상이었다. 그는 금목환에게 머리를 살짝 기울였다.
“이런 말은 없었지 않느냐···”
“딱히 할 필요가 없어서요.”
“음.”
금목환은 옅게 미소를 지었다. 강운은 살짝 놀랐다. 저번에 만났을 때는 얼굴이 냉골이던데, 그래도 가족 앞에 있으면 좀 달라지는가 싶었다.
···그렇다면.
현재 강운과 목현학은 금목환의 재능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종리운도 무공을 만든다는 것까지는 모르니 말이다. 사실 이들은 제갈헌에게 비밀스러운 지령을 듣고 왔다.
금목환과 무조건 친해지고, 가능하면 무림맹과 많이 엮이게 하라는 것이었다.
“그럼 차라리 내 강뢰도법을 가르쳐주지.”
“···네?”
금월상이 깜짝 놀랐다. 그건 금목환도 의외라는 듯 눈썹을 살짝 치켜 올렸다.
“그러셔도 되겠습니까?”
“그럼.”
이건 강운 나름의 도박이었다. 분명 금목환과 같은 피라면 무공에 재능이 없지는 않을 터다. 당장 손에 박힌 굳은살이나 몸에 근육이 잡힌 것만 봐도 성실한 것 같았다.
자신의 절학을 전수해준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기는 하지만, 사실 슬슬 제자를 물색하기는 했었다. 이제 그의 나이도 지천명을 넘어서고 있으니 말이다.
자신의 제자도 키우고, 무림맹의 임무도 완수하고, 그야말로 일석이조의 순간이었다.
“감사합니다.”
금월상과 금목환이 동시에 목례를 했다. 강운은 살짝 뿌듯했다. 어쨌든 이건 황금세가에 빚을 좀 남긴 셈이었다.
“그 대신 우리 잠자리에 술이나 좀 넣어주게나.”
“아. 그건 이미 준비하고 있습니다.”
금목환의 말에 강운이 당황했다. 강운은 그냥 농담으로 한 건데, 준비하고 있다니. 당장 지금 옥묘각 별채에서 지내는 숙소도 호화스러웠다.
“지금 옥묘각 내부에 있는 가족들은 세가 외부로 옮길 예정이라서요. 그와 함께 장로님들의 거처도 증축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곳에 필요한 물품들은 전부 넣어드릴 겁니다.”
금목환의 말에 강운과 목현학이 어안이 벙벙해 했다. 감회가 새로웠다. 무림맹에서 숫돌 하나 사달라고 무림맹주와 싸우던 게 엊그제인데, 여기서는 뭐든지 다 해주겠다니 말이다.
물론 지금은 무림맹도 많이 바뀌었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렇게 궁상을 떨던 무림맹이 호화롭게 전각을 짓고 있고, 무인들을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그건 당장 알려질 수밖에 없었다.
무림맹 정도의 무인 집단이 움직인다면 분명 구파일방도 주시하고 있을 거다. 그리고 그들은 그 돈이 황금세가에서 나온 걸 알 터다. 그러면 금목환에게 시선이 쏠릴 것이었다.
확실히 목현학이 우려한대로, 금목환이 중원에 신성처럼 나타날 일이 머지않은 것 같았다.
“가주.”
목현학이 입을 열었다.
“네.”
“전장에 빛나는 칼을 들고 가면 안 되고, 흰 옷을 입고 가는 것도 안 된다네.”
“그렇군요.”
금목환이 짧게 답했다. 바로 대답하는 것을 보니 알아들은 것 같았다. 사실 비유라고 하기도 뭐한 말이었다. 대규모 전투에서 늘 쓰는 말이니까. 멍청하게 흰 옷을 입고 오면 홍차나 진흙을 묻혀야 했다.
그러나 금목환은 진흙과 홍차를 묻힐 때인 것이다. 원체 빛나는 옷을 입고 있는 아이가 아닌가.
말이 끝난 듯했지만, 다시 금목환이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흰 옷을 입고 나왔는데 진흙과 홍차를 묻힐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목현학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이 움찔했다. 이미 금목환은 그 격언을 알고 있던 것이다.
“감히 다가올 엄두도 내지 못하게 하면 되니까요.”
금목환의 그 말에 목현학은 입을 다물었다. 본인이 그런 각오라면 굳이 필요 없는 조언이었다. 이미 앞날을 생각하고, 또 그에 대한 대처를 만들어놨다는 것일 테다. 보면 볼수록 신기한 아이였다.
그때 저 멀리서 빠르고 바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한 사람이 느껴졌다. 오늘따라 옥묘각에는 방문자가 많았다.
다가온 시종은 짧은 머리가 단정한 시종이었다. 금목환의 전속 시종으로 돌아온 기철이었다.
기철은 오자마자 모두에게 허리를 꾸벅 숙이고, 금목환에게 서한 하나를 전달했다.
그 서한 중간에 찍힌 봉인을 보자, 곽진도의 표정이 먼저 변하고, 강운과 목현학이 동시에 변했다. 물결치는 파도 문양의 봉인. 해남파의 상징이었다.
“해남파 장문인께서 친서를 보내오셨습니다.”
“고맙다.”
금목환은 간단하게 말하고 봉인을 뜯었다. 해남파 장문인의 친서라. 가장 긴장한 건 곽진도였다. 금목환은 서한을 읽자마자 곽진도에게 보여줬다.
“장문인께서 스승님과 저를 초대하고 싶다는 군요.”
“···그러냐?”
곽진도는 표정을 감추고 헛기침을 했다.
방금 목현학이 우려를 했던 게 이렇게 바로 드러난 것이었다. 구파일방의 주목을 받더라도 숨겨라. 물론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이 많으니 금목환이 어떤 결정을 할지는 지켜봐야 했다.
곽진도가 은근하게 금목환에게 물었다.
“갈 테냐? 난 거절해도 나쁠 게 없어 보인다만···”
“가야죠. 제가 해남의 검을 쓰는데 입적도 못 올렸으니까요.”
금목환의 말에 목현학과 강운이 동시에 기함했다.
“뭐?”
“미친 거냐? 장문인한테 다 커서 맞을라고?”
그 둘이 알기에, 곽진도가 금목환에게 검을 가르쳐준지는 꽤 됐다. 장로가 외부에서 제자를 거둬오는 경우는 있어도, 이렇게 시간이 지나도록 입적을 안 시키면 파문감에 해당하는 중죄였다. 그렇지 않으면 문파의 체계가 난잡해지니 말이다.
“···시간이 없었다. 이해해주시겠지.”
곽진도가 체념한 말투로 말했다. 이미 금목환은 가기로 마음을 굳힌 것 같았다. 목현학에게 말했던 것처럼, 그는 무언가를 피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잘 갔다 오게.”
“물론 가주에게만 말하는 걸세. 한 사람은 잘못 갔다 올 예정이거든.”
“입 좀 다물게나.”
곽진도가 으르렁거렸지만, 이내 한숨을 쉬었다. 이건 본인의 잘못이 맞기 때문이었다.
해남의 장문인. 적유엽. 그가 이번 일을 호락호락하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
그리고 금목환이라는 사람의 재능을 보고서 넘어갈 사람도 아니었다.
어찌 하려나. 하지만 방도는 없었다. 지금이라도 달려가는 수밖에. 남해에서 풍겨오는 바다내음이 벌써 코끝에 스치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