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생각보다 일찍 완성시켜서요
70화 생각보다 일찍 완성시켜서요
평소처럼 진시에 일어난 적유엽은 반수검 비급을 꺼내서 읽어보았다. 기초적인 무공이라 비급은 이미 필사가 많이 되어있었다. 어떤 이들은 반수검이 깊이가 없는 사특한 검이라고들 한다.
확실히 반수검은 중원 무공에 비해 실전적인 초식이 많이 들어가 있었고, 익히기 쉬우니 딱히 깊은 무학이라고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렇지 않지.’
반수검은 언뜻 보면 중원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저 살초 모음 같다. 하지만 거기서 더 깊이 보면 수많은 변화를 볼 수 있고, 더 나아가면 굳건하게 지키고 서있는 정(靜)을 볼 수 있을 터였다.
그러니 적유엽을 포함한 역대 해남파의 초절정 고수들이 결국 반수검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런 기본적이면서도 깊은 무공이기에 해남의 대표적인 절기들인 남해십이검, 비어쾌검이 나온 것이다.
금목환은 몸에서 풍겨져 나오는 기운으로 보나, 다져진 몸을 보나, 심계를 보나 확실히 비범한 아이였다.
무림맹의 사람이 두 명이나 왔고, 무림맹주의 제자까지 붙어왔다는 건 무림맹주가 지켜보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무림맹주의 제자가 진 것도 사실이라는 얘기였다.
그렇지만 금목환은 그 반수검에서 유의미한 변형을 절대 하지 못할 것이었다. 적유엽은 해남의 미래가 반수검에 있다고 생각해 최근 오 년 동안 집중적인 연구와 변화를 시도했기 때문이다. 곽진도는 그 사실을 모르니까 그러려니 했을 거다.
‘그건 본인 업보지.’
해남의 장로들과 일대 제자들이 오 년을 연구하고 변형시킨 반수검이다. 장로들도 반수검을 변형할 때 제대로 된 결과를 못 냈다. 반수검이 해남의 기본인 만큼, 이미 수많은 변화를 거쳤기 때문이다. 새롭게 만들었다 싶은 것도 이미 과거에 존재하던 것이다.
비범하다고는 하지만 어린 아이에게 이런 문제를 안겨준 게 미안하기는 하지만, 적유엽은 곽진도가 해남에 꼭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현재 해남 삼대제자들의 재능은 문파사(史) 역대에서도 손꼽힐 정도다. 이럴 때 곽진도 같은 초절정 고수가 한 명이라도 더 있으면 그들이 개화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될 터였다.
적유엽은 금목환의 여리여리한 얼굴을 떠올리며 일단 반수검을 덮었다. 바깥에서 인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장문인, 기침하셨습니까.”
그 목소리는 요즘 자신의 보좌를 맡고 있는 삼대제자 양초원이었다. 삼대제자들 중에서도 특출 난 재능을 뽐내고 있는 아이였다.
“그래.”
“이제 의식에 나가셔야 할듯합니다.”
“그래야지.”
적유엽은 바로 의식 때 입는 옷으로 갈아입고, 매듭이 다섯 개가 묶여있는 검을 허리춤에 매고 나갔다.
아직 의식이 시작하는 시간도 아니었지만, 외원으로 나가니 벌써부터 사람으로 북적였다. 익숙한 구파일방의 사람들도 많이 보였다.
적유엽은 준비하고 있는 삼대제자들에게 다가갔다.
“장문인을 뵙습니다!”
대략 사십 명 정도의 우렁찬 소리가 해남의 외원을 울렸다. 적유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제대로 해라. 오늘만큼은 내가 아니고, 너희들이 해남의 얼굴이다.”
“알겠습니다!”
이 의식의 명분은 삼대제자들이 남해십이검 시현을 하며 여타 검사들에게 깨달음을 주는 것으로, 아주 뜻 깊었지만 내막은 달랐다.
의식이 남해십이검 시현뿐 만이라면 사시에서 술시까지 할 수도 없거니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리지 않았을 터.
정작 이 의식의 목적은 해남파의 힘을 중원에게 과시하는 것이었다. 삼대제자들의 남해십이검을 시작으로, 해남파의 실전 무공 시현, 남해십이검의 새로운 변초, 장로들의 합격진 등이 나올 예정이었다.
이걸 본 중원의 사람들은 모두 구파일방에 가서 보고를 할 것이다. 해남은 아직 굳건히 구파일방의 위상을 지킬 것이라고.
그래서 이 의식은 구파일방의 말석을 다투는 해남파로서, 중원에서 떨어져 관심을 못 받는 해남파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의식이었다. 그래서 해남파는 이 의식을 매년 하며, 그 의식을 준비할 때도 최선을 다한다.
적유엽이 삼대제자들에게 당부한 것도 그런 차원의 말이었다.
“···후.”
적유엽은 살짝 한숨을 쉬었다. 사실 이번 년도 무공 연구에는 별 다른 진척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올해 보여줄 것도 딱히 마땅하지 않았다.
장문인으로서 할 일은 그들의 대표로서 무공을 닦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수많은 선배고인들이 지켜온 이 해남파를 더욱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당장 구파일방의 턱 끝까지 쫓아왔던 형산파가 알아서 무너져줬지만, 그래도 해남파는 안일할 수 없었다. 언제 어떤 집단이 새로 출몰할지 모르는 게 강호의 생리.
“올해는 좀 아쉽겠어.”
적유엽은 일단 마음을 그렇게 먹었다. 해남파 제자들은 충분히 일 년 동안 열심히 해줬다. 그렇지만 노력에 쏟은 만큼 안 나오는 때도 분명 있는 법이었다.
곧 적유엽의 축사와 함께 의식이 시작됐다. 이제부터는 제자들의 몫이었다.
삼대제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관례적으로 의식의 시작은 늘 해남파의 대표 검식, 남해십이검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역시 제자들의 검식은 훌륭했다. 이번 삼대제자들은 정말 인재가 많았다. 초식 하나, 하나가 펼쳐질 때마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작년에도 느꼈지만, 해남파의 이번 배분은 정말 대단하겠어.”
“정말 깔끔하군.”
적유엽은 그렇게 들리는 반응들을 청취하며 만족했다. 그나마 수확이 있으면 끊임없이 발전하는 삼대제자들이었다.
그렇다고 모두가 칭찬하는 건 아니었다. 적유엽은 검식이 제일 잘 보이는 자리에 서있는 무리들을 보았다. 그곳은 구파일방의 사람들이 모인 곳이었다. 그들은 바삐 입술을 움직이고 있었는데, 전음을 나누는 듯했다.
전음의 내용은 안 봐도 뻔했다. 작년과 다를 게 없다는 이야기겠지. 입술 움직이는 것만 봐도 칭찬인지 욕인지는 대충 알 수 있다.
‘빌어먹을 놈들.’
그렇게 의식에 참여한 외부 손님들을 둘러보던 적유엽은 살짝 갸웃했다. 저 멀리서 의식을 뿌듯하게 바라보고 있는 곽진도와 명재희라는 아이가 보였지만, 금목환과 갈유월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긴 이해는 됐다. 갈유월은 원체 잘 움직이지 않는 듯하고, 금목환은 반수검을 해석하느라 머리를 싸매고 있을 거였다.
“자. 지금부터는 일대제자들이 만들어 낸 비어쾌검의 변초들입니다.”
환호성이 다시 울렸다. 그러나 구파일방 사람들은 어떤 반응도 없었다. 원래 구파일방이란 이런 곳이었다. 자신들끼리 죽자고 견제한다. 필요할 때는 힘을 합치지만, 평소에는 생판 모르는 남보다 나쁜 사이가 많았다.
“오오.”
곧 비어쾌검의 시현이 시작됐다. 몇몇 사람들에게서 환호성이 울려 퍼졌지만, 좀 경지가 있어 보이는 사람들의 반응은 시원찮았다.
“작년과 별 다를 게 없는 것 같은데.”
“그렇군. 이번에 깨달음을 얻기는 힘들겠어.”
낭인 고수들로 판단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적유엽의 예민한 귀에 꽂혔다. 그렇다고 그들을 치도곤할 수도 없는 노릇. 겸허하게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 했다.
“···다음 순서를 진행하겠습니다.”
그렇게 해남파의 의식은 계속 됐다. 아직 해남파에게는 많은 무공이 있었다.
*
“이번 해남파의 새로운 무공들은 영 별로군.”
이제 구파일방 사람들은 전음도 하지 않았다. 기나긴 의식에서 제일 반응이 좋았던 건 삼대제자들의 남해십이검 뿐이었다.
구파일방 사람들이 해남파의 의식에 오는 이유는 간단했다. 해남파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보려고. 물론 그 와중에 동행한 삼대제자들이 깨달음을 얻으면 그건 그것대로 좋았다.
“그러게. 딱 이대제자들 수준이오.”
“새로운 무공이 중요한 게 아니라, 깊이가 있어야 하거늘.”
무당파의 목송과 화산파의 청수(淸水) 진인도 한 말씩 거들었다.
그들은 나름 흡족했다. 같은 구파일방으로서 해남파가 좋은 성취를 얻으면 경계되기 마련이었다. 오늘 의식을 보니 당장 올해는 걱정 안 해도 될 듯했다.
주변의 해남파 무인들은 그들의 말이 커질 때마다 불쾌감을 표시했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해남파의 의식을 해남파 사람이 망치는 셈이니까. 또한 해남파 사람들도 본인들의 의식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도 익히 알 터였다.
그렇게 의기양양하게 해남파 외원을 활보하던 그들에게 먹잇감이 눈에 띄었다.
바로 곽진도와 여자아이들 둘이었다. 특히 목송 옆에 붙어있던 청진은 갈유월을 보고 눈에 불을 태웠다.
목송은 그들에게 바로 아는 척을 했다.
“허허, 곽 대협. 여기서 또 보는구먼.”
곽진도는 그들이 다가오자 바로 인상을 찌푸렸다. 목송은 과장되게 좌우를 힐끗하며 밉살맞게 물었다.
“어? 곽 대협. 그 아끼는 상계 제자는 어디 있나?”
목송은 상계라는 발음에 힘을 주었다. 곽진도는 음산하게 말했다.
“그건 알 바 아니잖소. 그리고 큰 소리로 말하지 좀 마시오. 남의 문파 와서 너무 예의 없는 짓 아니오.”
“내 안타까워서 그러지. 같은 구파일방으로서 같이 나아가야 할 사이 아닌가.”
그들의 목소리가 슬슬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만큼 재미있는 구경도 없었다.
“나도 안타깝다네. 무당의 제자라는 녀석이 자신보다 어린 여자 아이의 일 초식을 맞고 기절하다니 말이야. 무당의 미래가 걱정되는군.”
목송 옆에 있던 청진은 얼굴을 붉혔다. 목송은 바로 맞받아쳤다.
“자네의 제자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상계의 장로를 하더니, 상계 아이를 제자로 받다니. 이번에 입적하러 왔다지? 장문인께서 과연 받아주겠는가?”
“그 입 닥치게나!”
곽진도가 고함을 칠 때, 누군가의 커다란 기가 저 멀리서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곽진도와 목송을 위시해서 무리의 사람들도 모두 소름을 느꼈다. 자연스럽게 그 기파가 날아오는 방향으로 사람들이 갈라졌다.
“무슨 소란인가?”
나타난 사람은 적유엽이었다. 적유엽은 의식을 계속 돌아다니며 보고 있었기 때문에, 구름 같은 무리가 눈에 안 띌 리가 없었다.
“아, 장문인. 오랜만에 뵙습니다. 무당의 목송입니다.”
“그래. 오랜만이군. 어쩐 일로 고성이 오가는 건가?”
적유엽은 질책하는 눈빛으로 목송을 바라보았다. 목송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곽 대협의 제자를 얘기했습니다. 상계의 장로를 하는 사람이 그 상계의 아들을 제자로 받아들이는 건 구파일방의 명예를 땅바닥으로 떨어뜨리는 짓 아닙니까. 마치 해남파가 황금세가의 가랑이를 기는 형국이니까요.”
“···말이 심하군. 목 장로.”
“비유가 적절치 못했나보군요. 죄송합니다.”
적유엽은 눈을 가늘게 떴다. 저 비웃는 표정을 보니 자연스레 살심이 무럭무럭 올라나왔다. 그렇지만 그도 알고 있는 거다. 당장 해남파의 사람들은 이 의식을 망칠 수 없다는 걸 말이다.
“그리고 이번 의식도 약간 아쉽더군요. 삼대제자들의 성취를 빼면 모두 발전이 없거나 오히려 퇴보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목송은 내심 웃었다. 같은 구파일방이라도 무당파와 해남파는 위세가 달랐다. 그걸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 알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무리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침묵했다. 적유엽과 곽진도의 분노를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목소리라도 내면 바로 그들의 검이 목을 날릴 것만 같은 살기였다.
그렇게 조용한 무리들 중에서, 누군가가 사람들을 비집고 나왔다. 모두가 그 용감한 이에게 시선이 갔다. 미려하게 생긴 남자아이였다. 그 아이는 주변을 둘러보지도 않고 적유엽 앞으로 나아갔다.
반수검을 보고 있을 게 분명한 금목환이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
모두의 시선을 받고 있던 금목환은 팔 사이에 낀 비급을 적유엽에게 건넸다. 하얀 표지에 표제도 없어 임시로 만든 책 같았다.
“반수검의 변형을 생각보다 일찍 완성시켜서요. 비급을 돌려드리겠습니다.”
금목환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정적에 감싸여진 무리들의 귀를 울리기는 충분했다.
적유엽은 가타부타 말없이 비급의 첫 장을 펼쳤다.
그리고 첫 구결을 보자마자 적유엽의 눈이 번쩍 떠졌다.
“지금 보여 봐라. 네가 만든 검식을.”
책의 첫 장을 뚫어지게 보던 적유엽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