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88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장소열은 어린 황금세가의 가주를 바라봤다. 어린 아이답게 작은 체형이지만 근육은 적당히 붙어 있었다.
변(變), 쾌(快)만 집중해서 익힌 검사의 몸 같았지만, 막상 중검의 묘리를 섞을 때에도 무게감이 있었다. 그건 검을 휘두를 때 완급 조절이 경지에 달했다는 뜻이고, 균형 잡힌 몸을 무공을 쓰는 곳에 극대화하는 외공(外功)의 깨달음도 익히고 있다는 뜻이다.
내공이 일천하지만 장소열과 그나마 맞수가 되는 건 오로지 그 때문이었다. 마치 내공을 감추고 있는 초절(超絶)의 고수와 상대하는 느낌.
이것만으로도 대단하지만, 이것뿐이라면 저 아이는 질 수밖에 없었다. 근데 이제 와서 검법을 버리고 권장법이라.
“···혹시 나를 기만하는 거냐?”
장소열은 마교의 교도기는 했지만 무인이기도 했다. 최소한의 호승심이 없다면 초절정까지 올라올 일도 없었다.
언제 곽진도가 깨어나서 참전해도 모르는 상황이지만, 물어보는 건 그 때문이었다.
“아니.”
그래도 금목환은 기만을 하는 성격은 아닌 듯했다. 검을 땅바닥에 버린 금목환은 진지한 눈빛이었다.
“혹시 주력이 검법이 아닌 권장법이더냐?”
“아니.”
장소열은 금목환의 짧은 대답에 묘하게 기분이 나빠졌다. 심지어 그 확실한 대답에도 장소열의 의아함은 해결되지도 않았다.
전설로만 내려져오는 반로환동의 고수인지, 아니면 소천마를 뛰어넘는 천고의 기재인지.
그 의아함을 해결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그럼 죽어라!”
장소열의 권강이 금목환에게 직선으로 쏘아졌다. 강기만 내보내는 건 일종의 시험이었다.
내공을 숨기고 있으면 압박을 받지 않을 거고, 내공이 없다면 압박을 받을 것이다. 두 개의 움직임은 차이날 수밖에 없다.
“음!”
아무리 단련해도 본능은 못 숨긴다. 순간 장소열은 금목환의 신음성과 눈가가 떨리는 걸 봤다.
금목환은 사선으로 달려 나갔다. 장소열은 살짝 갸웃했다. 정면으로 마주 오는 상대로 저 움직임은 나쁘지 않다. 단, 절정 이하의 사람들한테만 말이다.
장소열은 바로 발목을 틀어 금목환의 앞길로 가로질렀다.
“날 뭐로 보는 거냐!”
장소열의 권강이 금목환의 어깨로 향했다. 금목환은 공격이 날아오는 쪽으로 몸을 비틀어 간신히 피했다.
이제 확실히 알아낸 것 같았다. 저 천고의 기재에게도 시간은 유한한 자원이었다. 장소열이 어림잡아 봤을 때 금목환과 나이 차이는 최소 이십 년 이상이었다. 그 말은 내공의 차이도 극심하다는 것.
장소열은 권강을 최대한 부풀렸다. 강기의 구현은 아직 힘든 일이고, 그만큼 효율이 떨어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게 최고의 전략이었다.
“···강기가 이 정도구나.”
금목환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무슨 남의 비무를 보는 것 같은 말이었다.
숨을 끝까지 끌어올린 장소열의 두 주먹에 권강이 부풀었다. 금목환의 몸 두 배는 되는 듯한 크기의 철구(鐵球)를 양손에 매단 것 같았다.
금목환은 이미 권강이 모이기 전에 뒤로 멀어지고 있었지만, 경공도 장소열이 더 빨랐다.
곧장 장소열은 금목환의 앞에 나타났고, 올려다보는 금목환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쿠구구궁!
권강이 움직이면서 땅을 긁으며 굉음을 냈다. 금목환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 듯 두 팔을 크게 회전시켰다.
장소열에 비하면 얇은 두 팔에 하얀 진기가 엷게 둘러졌다. 누가 봐도 당랑거철(螳螂拒轍)을 떠오르게 하는 격돌이었다.
닿기도 전에 확신한다. 이건 질 수 없는 격돌이었다.
“안일했구나!”
쾅!
“커···흑!”
금목환의 꽉 닫힌 입술에서 피가 새어나왔다. 꾹 참기는 했지만, 강기가 몸을 헤집는 격통은 참을 수 없었던 거다.
“더 보여줄 건 없는 게냐?”
장소열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깨달음으로부터 나오는 섬세함은 힘으로 제압해야 됐던 거다.
금목환은 그 상황에서도 뭐라도 반격을 해보려고 했는지 손을 휘젓기는 했지만, 장심의 몇 군데와 팔뚝 아래쪽 같은 쓸모없는 혈만 건드렸다. 오랜 무인 경험으로 봤을 때 막 휘두른 게 확실했다.
“그나마 검법이었으면 좀 더 버텼겠구나.”
장소열이 말했다. 금목환은 몸을 구부린 채로 입에서 선홍빛 피를 계속 흘리고 있었다. 검은색 피가 아닌 선홍빛 피는 내상을 의미했다.
‘끝났군.’
장소열이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금목환이 고개를 들었다. 등은 여전히 굽힌 채였다.
저 정도로 피가 끊임없이 흐를 정도면 통증을 참기 힘들 텐데, 금목환의 눈동자는 섬뜩하리만치 고요했다.
“아무리 재능이 있다고 해도 어리면 우물 안 개구리일진저. 넌 너를 지켜줄 천류유성검을 먼저 찾았어야 했다.”
장소열은 흐흐, 웃었다. 이제 긴장도 풀렸다. 의아함이 벗겨진 금목환은 그제야 제 나이로 보였다. 반로환동이라니. 그런 전설에 진지하게 위축됐던 자신이 우스웠다.
“스승님은 내가 지켜야 할 분이지, 나를 지키는 사람은 따로 있다.”
“그건 또 뭔 헛소···”
장소열의 말을 다 기다리지 않고 금목환이 움직였다.
금목환의 앞으로 고꾸라지는 듯하다가, 곧 신강의 고운 모래처럼 흩어졌다. 장소열은 피식 웃었다. 지금까지 보여준 금목환의 움직임 중 가장 빨랐지만, 그래도 장소열의 눈에는 훤히 보였다. 아주 여유롭게 장소열은 두 손바닥을 금목환 쪽으로 밀었다.
내공이 부족한데 정면대결을 한다는 건 자살행위. 장소열은 금목환이 포기를 했다고 생각했다. 손과 손이 맞부딪치기 직전, 그 찰나에 말이다.
허나 장소열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뒤에서 무언가 위협적인 게 날아오고 있었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살기의 위협이 아닌, 진짜로 오싹한 한기가 엄습했기 때문이었다.
그제야 장소열은 한 사람을 놓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금목환에게 너무 신경을 집중하느라 정말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보타암의 계집이 남아있었군.”
그래도 장소열은 여유로웠다. 한유림이 필사적으로 검을 내려치며 날아오고는 있었지만, 이제 금목환도 여유로워진 판국에 한유림은 말할 것도 없었다.
도리어 기억을 살려준 한유림에게 고마울 정도다. 금목환을 처리하면 한유림도 격살하는 게 가능했으니까.
장소열은 몸을 한 바퀴 강하게 돌리면서 더 파괴력이 강한 발뒤꿈치를 금목환에게, 상대적으로 약한 한유림에게 손등을 쳐냈다.
쿠구궁!
장소열이 한 발로 내딛고 있던 지반이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간결하지만 묵직한 타격 소리가 장소열의 양쪽에서 울렸다.
한유림은 회전력을 담은 손등에 허리를 가격당해 저 먼 벽으로 날아갔고, 금목환은 팔 하나를 올려 세워서 막았지만 막은 게 아니었다.
그 와중에 어이가 없는 건, 금목환 자신도 몸을 못 가눌 지경인데 한유림 쪽으로 기파를 흘려 정확한 타격을 방해했다는 거다. 원래라면 머리를 노렸던 타격이었다.
“하. 마지막까지 추한 모습만 보여주는 구나.”
짜증이 난 장소열은 금목환이 옆으로 붕 떠서 균형을 잡지 못할 때, 파리를 낚아채듯 금목환의 목을 잡았다.
재미없게도 비명소리 같은 건 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싸움도 마무리를 지을 때였다.
무인 대 무인의 싸움에서 일 각은 굉장히 짧은 수준이었지만, 한참 어린 아이들을 상대했다는 점에서는 너무 길었다.
“꼬마야. 대체 뭘 하는 거냐? 권장법을 아예 모르는 것 같은데. 정녕 네가 날 기만한 거냐?”
장소열은 금목환에게 물었다. 움직임은 좋았고, 무공의 형태도 어느 정도 배운 듯했다. 그러나 검법과 다르게 완숙하지도 않았고, 파괴력도 없었다.
무슨 의사가 안마라도 하듯 손가락으로 의미 없는 부분을 찌르는 게, 금목환이 권장법으로 보여준 전부였다.
그 와중에 자신의 목숨이 위험한 순간에 다른 사람을 지키는, 정파 특유의 역겨운 가식까지.
“그만 가라. 이제 지치는구나.”
얼음 같았던 금목환의 눈도 호흡이 부족해지니 초점이 흐려지는 건 똑같았다. 몽롱해보이는 금목환이 손을 천천히 올려 장소열의 팔꿈치 바깥쪽 가로금 끝, 그 밑으로 이 촌(寸)이 떨어진 수삼리(手三里)를 눌렀다.
훌륭한 재목이었으나, 마지막까지 이런 꼴을 보여주는 걸 보면 큰 그릇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장소열은 그렇게 생각하고 손바닥 아귀힘을 넣으려고 했다.
“···어?”
그때, 꼿꼿이 서있던 장소열의 몸이 나무토막이 무너지듯 바닥으로 엎어졌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땅바닥에 엎어진 장소열은 어떻게든 움직이려 했지만 움직여지지 않았다. 마치 마혈(痲穴)을 짚인 것 같이 말이다.
당황하고 있는 장소열의 앞에, 넘어질 때 같이 내팽개쳐진 금목환이 천천히 일어났다.
몽롱했던 눈빛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고요해져 있었다.
*
주먹에 응축해놓은 강기가 보였다. 신기했다. 강기를 맞상대하는 건 처음이었다. 피부의 돌기들이 오싹하게 솟았다.
천혜침법. 확실히 삼선 중 하나가 만들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책의 깊이가 남달랐다. 회귀 이후에는 가장 오랫동안 붙잡고 있는 책이었다. 바로 이해가 되지 않아 몇 번이나 책의 처음으로 되돌아가고는 했으니.
그건 훌륭한 침법이자 무공이었다. 무공으로서의 특징은 많은 내공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단, 손속의 재빠름과 인체에 대한 깨달음을 요구했다. 물론 제일 중요한 건 인체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안일했구나!”
그걸 모르니 장소열이 저렇게 말할 수 있는 걸 테다. 장소열은 확실히 나보다 깨달음이 부족했다. 하긴 천혜침법을 견식해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을 거다.
비록 나도 전부 독파하지는 못했으나, 깨달음만을 요구하는 상승 무공이라는 점에서 내가 가진 무공 중 강한 수법은 천혜침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침법은 검법보다 권장각을 쓰는 게 훨씬 편했다.
또 내가 검법을 주로 배웠다고 권법과 장법, 각법을 안 배웠다는 건 아니었다. 한유림과 팽차월을 비롯한 칠십이 명의 아이들한테 줄 황금공을 만들었을 때, 수많은 수공과 각법의 조예를 빌렸으니.
나는 강기로 뛰어 들어갔다. 거대한 태풍 속으로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들어가자마자 전신의 기맥이 뒤틀리고 피가 울컥 올라왔다.
“커···흑!”
그러나 애초에 내상을 감수하고 간 거다. 대신 하완(下腕)의 상렴(上廉)과 편력(偏歷), 상완의 청령(靑靈)을 누르는 성과를 가져갔다.
“더 보여줄 건 없는 게냐?”
역시 장소열은 내가 뭘 하고 있는지 감도 못 잡고 있었다. 내가 점하는 혈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사람들에게 안 알려진 혈이기 때문이다.
내가 누르는 혈은 안마를 할 때 눌러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당장 장소열은 몸이 가벼워졌다는 기운을 받았을 거다.
“그나마 검법이었으면 좀 더 버텼겠구나.”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장소열의 방심이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보통 무인들도 모든 기맥을 다 알지 못한다. 아혈(啞穴), 훈혈(暈穴), 사혈(死穴), 마혈(痲穴), 수혈(睡穴)에 속하는 혈맥만 알뿐이다.
예를 들면 대표적인 마혈이라면 어깨뼈와 팔뼈가 만나는 점에 있는 거골혈(巨骨穴)이나, 목뒤 양쪽에 있는 천주혈(天柱穴)을 떠올린다.
그러나 약선은 혈맥을 그렇게 단순히 짚지 않았다. 인체는 모두 이어져 있고, 특정한 혈을 순서대로 누르면 예상하지 못한 점혈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점이 그의 이론 핵심이었다.
예를 들면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혈을 눌러도 마혈을 짚은 것과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거다.
그래, 지금 내가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사실을 알면 전 중원이 뒤집힐 것이다. 이걸 약선을 돈을 주고 팔았다는 거지. 아무리 기인이라지만 대단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재능이 있다고 해도 어리면 우물 안 개구리일진저. 넌 너를 지켜줄 천류유성검을 먼저 찾았어야 했다.”
그때 나는 뒤에서 조용히 몸을 일으키는 한유림을 봤다. 땅이 진동하니 잠깐 기절했던 그녀도 깬 거다.
난 그녀에게 신호를 주고, 양쪽으로 달려들었다. 장소열이 내게서 등을 돌렸을 때, 난 등 뒤에 있는 도도(陶道)를 눌렀다.
이제 마지막으로 한 혈자리만 남은 셈이었다.
이제 장소열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난 그저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다시 굴려볼 뿐이다. 머리에 가둬진 생각은 숨이 막혀도 선명해졌다.
“그만 가라. 이제 지치는구나.”
난 마지막으로 팔꿈치 바깥쪽 가로금 끝에 있는 곡지(曲池)의 밑, 수삼리(手三里)를 눌렀다.
상렴, 편력, 청령, 도도, 수삼리. 이 다섯 개의 혈은 대표적인 마혈인 거골혈을 누르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정확히 성공한 셈이었다. 장소열은 쓰러지면서도 자신이 지금 무슨 상태인지 모르는 눈빛이었다.
“···어?”
난 일어나서 지금까지 참고 있던 피를 뱉었다.
“퉤!”
마기를 모아놓은 검은 피였다. 내상이 있기는 했지만, 태을헌원신공이 정순해서 거동하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그 와중에 장소열은 자신의 몸이 왜 안 움직이는지 이해가 안 되는 듯 외쳤다.
“내 몸에 무슨 짓을 했냐고 물었다. 이 어린 불신자새끼야!”
방금 전만 해도 여유로웠던 장소열의 얼굴이 다급해졌다. 결국 사람은 마지막에 가서는 이렇게 추해지기 마련이었다.
“몸이 안 움직이는 걸 보면 모르나. 마혈이 짚인 거잖아.”
“뭔 개소리냐! 내가 너한테 마혈을 허락해 준 적이 어디 있다고!”
사실 무림인들의 검법 싸움 중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상대방의 핵심적인 혈을 점하는 데 있다. 칼로 베든, 찌르든, 손으로 짚든, 철퇴로 뭉개든.
그래서 고수들은 자신의 극혈들을 방어하고자 계산하고 움직이고, 공방을 나눠가는 거다.
장소열 입장에서는 억울할 만했다. 마혈이 안 짚였는데 짚였다고 하고 있으니까.
“···가주님.”
그때 내 옆에서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날아갔던 한유림이 다리를 끌면서 여기까지 도착한 거다.
“많이 다쳤어?”
“아뇨···, 웩!”
한유림은 바로 거짓말이 들통나고 말았다. 아무리 내가 기파로 흘려내 줬다고 해도 초절정 고수의 권격을 맞았다. 그래도 피의 색깔을 보면 치명적인 내상은 아니었다.
“이제, 이 간자는 어떻게 하죠?”
한유림이 물었다.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한유림에게 답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내 대답이 이렇게 나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한유림이 얼었다.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이 물끄러미 엎어진 장소열에게 내리꽂혔다.
사지가 묶인 무력한 상황. 그 앞에는 자신에게 천추의 한을 가지고 있을 복수자.
장소열은 그 상황이 너무 두려웠던 걸까. 그의 가랑이 사이에서 김이 나기 시작하더니, 땅바닥을 질척하게 만드는 얼룩이 퍼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