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나갈 때가 됐어
93화 나갈 때가 됐어
“정말 남창은 엄청 번화한 곳이군요···”
푸른 두건과 푸른 무복을 입은 소년이 입을 떡 벌렸다. 그 소년의 허리에는 매듭이 딱 하나가 있었다.
번화한 교차로에 서있는 해남파의 무인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지나쳤다. 이제 남창에 해남파의 무인이 있는 건 신기한 일도 아니었다.
해남파의 지부가 황금세가에 있다는 건 이제는 다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지부에 있는 해남파의 무인들이 교대로 순환을 한다는 것도 말이다.
“입 좀 닫아라. 섬사람 냄새 난다.”
왕진현은 어린 사제의 턱을 툭 올려쳤다. 해남파 소년은 혀가 씹히기 전에 혀를 쑥 들이밀었다.
그렇게 왕진현이 닫아줘도, 해남파 소년의 입은 계속 벌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남창은 현재 중원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가 되었으니 말이다.
화려한 능라주단을 입고 창가에 앉아 손을 흔드는 미인들, 걸걸한 목소리를 내는 장사꾼들, 건물을 짓는 인부들의 고함, 서당에서는 천자문 외는 아이들의 목소리.
“사숙. 놀랍습니다. 제가 생각한 중원과는 너무나도 다릅니다.”
“넌 뭘 생각했는데?”
왕진현이 헛웃음을 지었다. 이제 고작해야 열 둘이 된 녀석이, 중원에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뭘 가지고 있겠는가.
허나 소년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대답했다.
“매일 객잔에서 싸우고, 모두가 긴장해 검병에 손을 떼지 않고 있으며, 뭘 마실 때면 언제나 은수저를 담가야 하는 곳이요.”
“맞아.”
“네?”
소년의 물음에 왕진현이 다시 한 번 대답해줬다.
“중원은 지금 네 생각이랑 비슷하다고. 너 되게 똑똑한 아이로구나.”
소년은 뭔 말인지 모르겠다는 둥 눈만 굴렸다. 왕진현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게 첫 중원 출도를 남창에서 하면서 생기는 문제점이었다. 오랜만에 왕진현의 순번이 되어 광주까지 가서 데리고 왔더니, 시종일관 안심하는 눈빛을 하고 있지 않은가.
중원은 원래 사질의 말처럼 거침없고,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몰라 조심해야 하는 곳이다. 그런데 남창 같은 곳을 너무 안전하게 방비하니 이런 역효과도 나는 것이다. 구파일방의 사람마저 중원은 안전한 곳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말이다.
“지금 네가 지나친 곳은 중원에서 제일 안전한 경로야.”
“네?”
“그러니까 최대한 경계 태세를 가질 것.”
왕진현의 서늘한 목소리에 소년은 허리를 꼿꼿이 폈다.
“넵!”
그렇게 경계 태세를 하기는 했어도 좌우로 돌아가는 눈은 어쩔 수 없었지만.
사실 왕진현이 소년에게 경계 태세를 하라고 한 건, 기합의 문제도 있지만 자신도 구경을 하기 위해서였다.
지금 오 년째 남창에 주재중이지만, 정말 보면 볼수록 매력적인 곳이었다.
가끔 해남에 정기적인 일정이 있어서 가면 동기, 사숙들도 같이 남창에 데려가달라고 얼마나 난리를 치던지.
해남파에서는 언제부턴가 황금세가로 발령받는 사람에게 ‘바다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고 불렀다.
“아. 사숙. 스승님이 전달해주셨는데, 외지에서 고생 그만하고 해남으로 돌아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제 본인이 그 고통을 받겠다면서요.”
“못 간다고 전해라.”
어째 사질이라고 오는 것들이 다 사주를 받아 오는 사람들뿐인지.
황금세가 내부에 차려진 해남파의 처소가 점점 커지고, 주재 인원도 늘고, 교대 인원도 늘게 된 건 사실이었다. 처음 왔을 때 세 명의 삼대제자들은 교대가 됐다.
그러나 권동운, 왕진현, 양초원 셋은 살아남았다. 왕진현은 아직도 첫 날밤, 같은 숙소에서 잘 때 권동운의 비장한 목소리가 잊혀지지 않았다.
- 얘들아. 설마 자냐?
- 안 자고 있습니다.
딱 그때 대답한 두 명. 양초원과 왕진현이었다.
- 정신머리 박힌 건 두 명이군. 삼경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은 너희들에게 조언을 하마.
- 조언이라 하심은?
- 무조건, 무조건 여기서 살아남아라. 최대한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라. 황금세가에 가서 일손을 돕든, 황금표국에 표사로 나서든 뭐든 중요한 사람이 되란 말이다.
-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저희는 이들을 지키러 온 건데 잡무까지···
정직한 양초원이 그렇게 말하자, 어둠 속에서부터 혀를 차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 그럼 넌 이 편안한 잠자리, 맛있는 식사, 아름다운 미인들이 있는 웅대한 대륙을 포기하고 다시 쥐 그곳만한 해남으로 가는 거야. 난 내일 바로 황금세가 직계를 만나서 제발 일을 달라고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을 테다. 와보니까 알겠어. 여기는 무조건 머리 박고 있어야 되는 자리야.
- 자, 장로님 체통을···
권동운은 그렇게까지 말하면서 황금세가에 붙으려고 했고, 양초원과 왕진현은 권동운을 따랐다.
행정을 맡고 있는 금화청이라는 사람은 흔쾌히 일을 줬다. 그때는 너무 많이 주는 줄 알았다. 남창 근처의 도적들을 잡아달라나, 위조 은자를 거두어 달라나, 가격 담합을 조사해달라나···
구파일방이라는 자존심 때문에 그 일을 맡지 않았으면, 지금 자신은 해남에 소환되어 있을 거다.
“와! 여기가 황금세가군요!”
옛 추억을 더듬어보자니 소년이 외쳤다. 이번 건 소리를 질러도 어쩔 수 없었다. 황금세가는 중원에서 제일 화려한 전장이니까.
마천루 같이 높이 솟아오른 전각. 옥이나 상아로 되어있는 장식들. 모두 사치스러워 보이는데 과해보이지는 않았다. 이게 중원제일부(富). 황금세가였다.
왕진현과 소년은 천천히 황금세가 안으로 들어갔다. 장창을 든 호위병들은 정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해남의 사람들은 무조건 통과였기 때문이다.
“그래, 그래. 한 계절만 보고 갈 거니까 잘 기억해둬.”
“그래도 상관없어요. 남창도 멋있지만, 전 해남도 해남 나름의 멋이 있다고 생각하는 걸요.”
소년은 순박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허나 그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소년의 눈에 굉장한 미인이 보였기 때문이다. 남자들 몇몇에 둘러싸여 있었는데, 그 남자들은 보이지도 않았다.
“···어, 어?”
오똑한 코, 호수를 담고 있는 것만 같은 눈, 맑은 이마, 앵두 색깔의 입술에 허리까지 늘어뜨린 머리까지. 금색 테두리를 두른 감색 옷을 입은 여인이었다. 왕진현은 소년이 보는 곳을 따라 보고 나서, 소년이 왜 고장났는지 납득했다.
묘령의 여인은 담장 벽을 올려다보면서 입술 한 쪽을 깨물고 있었는데, 찌푸린 모습 마저도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그녀는 놀랍게도 소년이 있는 쪽을 잠깐 바라보더니, 몸을 돌려 그가 있는 방향으로 다가왔다.
“사, 사숙. 여신님이 오세요.”
“조용히 해. 창피하니까.”
곧 왕진현은 목소리를 크게 두 번 가다듬었다. 그리고 앞으로 나가 소년에게 한 것과 아주 다른 말투를 보였다.
“금 소저. 웬일로 외원에 나오셨습니까?”
“아, 왕 대협. 진법이 좀 상한 데가 있어서 보려고 나왔어요.”
“제 나이가 몇인데 대협입니까. 다른 호칭을 강구해보시라니까요.”
“또 이름 불러달라는 얘기를 하시면 그만 가겠어요.”
금수린은 새침스럽게 얼굴을 휙 돌렸다. 왕진현은 허겁지겁 손사래를 치며 금수린의 앞길을 막았다. 아까 근엄하던 사숙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옆에는 새로 온 해남파의 소협이군요. 반가워요. 전 황금세가의 금수린이에요.”
“아, 네, 네. 저, 저는 해남파의 현진우입니다.”
“네. 편히 있다 가세요.”
왕진현은 헤롱헤롱하는 현진우의 꼴을 보며, 이번 기수의 아이도 황금세가를 빠져나갈 때 순탄치 않을 걸 짐작했다.
저 아이는 곧 알게 될 것이다. 지금 승냥이 떼들이 날뛰는 중원과 비교하면, 황금세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천국이라는 걸 말이다.
왕진현은 이럴 때마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기틀을 다져놓은 금목환 가주, 사숙은 어디 간 걸까?
*
나는 안에서 잠긴 빗장에 손을 댔다. 바로 열기 전에, 금목환은 뒤를 돌아봤다.
온갖 무기들과 망가진 만년한철 인형들. 어떤 인형에는 검흔이 나있고, 어떤 인형에는 붉은 혈도가 그려져 있었고, 어떤 인형은 움푹 뭉개져 있었다.
“···나갈 때가 됐어.”
혼잣말을 하고 빗장을 풀었다. 나오자마자 난 하늘을 바라봤다. 오랜만에 보는 달빛이었다. 그렇지만 서늘하지는 않았다.
오 년만의 달빛, 오 년만의 밤하늘, 오 년만의 풀 냄새, 오 년만의 올빼미 우는 소리, 오 년만의 세가.
난 연공부 주변을 슥 둘러봤다. 연공부 건물은 내가 있을 때와 비교해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오 년이 지나 칠이 좀 벗겨진 곳도 있었다.
내가 여기서 폐관을 하고 있는 걸 아니까, 최대한 건드리지 말라고 해놨을 거다. 안 그래도 된다고 했는데.
연공부 바깥으로 나왔다. 내가 나온 시간은 묘시 정도 되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어둠 속에 잠긴 시간이었다. 지금 연공부 문에 기대어 졸고 있는 두 사람도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난 그들을 바라보았다. 꽤 앳된 얼굴들이었다. 고작해야 지학 좀 아래. 푸른 무복과 푸른 두건을 하고 있어 해남파의 사람인 건 알 수 있었다.
“사람 배치할 필요가 뭐가 있다고.”
내 말에 호위병 두 명이 잠깐 움찔했다. 옛날에서도 나만 잠깐 썼지, 원래는 거의 폐건물이었다. 나 하나 나온다고 사람들을 배치할 필요가 없었다.
나가기 전, 연공부 문앞에 붙어있는 글씨들을 바라봤다.
- 장철부, 왕소견. 인시 – 묘시
- 송문홍, 황공의. 묘시 - 진시
- 양치범, 소문휘. 진시 – 사시
- 채진하, 유하린. 사시 - 오시
명백히 근무표였다. 그리고 이들은 송문홍과 황공의였다. 내가 오 년만에 나와서 굳이 그들을 흔들어 깨울 필요는 없었다. 졸린 새벽 시간이고, 어린 애들이고, 평소 사람 하나 안 다니는 한적한 곳이니 충분히 이해 됐다. 난 삼매진화로 주변을 살짝 데워주었다.
“···으음.”
벽에 기댄 송문홍과 황공의가 입맛을 다시면서 몸을 살짝 틀었다. 난 그들을 놔두고 연공부를 빠져나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길이 좀 헷갈렸기 때문이다. 너무 무공에 몰두했던 탓일까.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건물의 외양과 나있는 길이 완전히 바뀌어 있어서 그랬다.
당장 건물을 짓고, 철거도 많이 한 듯했다. 여기는 내가 아는 황금세가가 아니었다. 새벽의 시퍼런 숨이 막막하게 위로 떠올랐다.
“앗, 거기! 누구세요!”
내가 계속 서있자, 어떤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어둠을 뚫고 내게 왔다. 등롱을 들고 있던 그 아이는 내게 총총걸음으로 다가왔다.
“아저씨! 자시 이후부터는 등불을 가지고 다녀야죠!”
등롱을 흔들며 내게 주의를 주는 아이는 한 일곱, 여덟 정도로 되어보였다. 그러니까, 내가 모르는 아이인 게 당연했다.
“어머, 이 아저씨 나한테 들킬 줄 몰랐나보다. 내원 안에서 가법을 어기면 엄벌이라는 걸 아실 텐데.”
아이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쿡쿡 웃었다. 호두를 까먹는 다람쥐 같은 손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언제부터 밤에 다니면 등불을 무조건 지녀야 된다는 규칙이 생긴 걸까. 금화청의 생각이겠지. 여러모로 이득이 있는 좋은 규칙이었다.
“아저씨. 계속 말 안 할 거예요? 나 그러면 진짜 찔러! 푸슉, 피슉.”
“뭘로 찌른다는 얘기냐?”
“와, 말했다!”
아이는 내가 대답을 하자 좋아했다. 어디에서 시종 연습을 받고 있는 아이인 것 같았다. 시종 연습을 맡고 있는 건물이··· 어디더라. 애초에 관심을 둬본 적이 없어서 기억에 없었다.
“아저씨. 요즘 말 모르는구나. 이렇게 아저씨처럼 못된 일을 하는 사람을 상무당에 일러바치는 걸 찌른다고 해.”
“아. 그런 느낌이구나.”
나는 잠깐 머리를 갸웃하고 생각을 하다가 말을 이었다.
“그럼 조용히 지켜만보고 상무당에 가서 찌르면 되지, 굳이 나한테 온 이유는 무엇이냐?”
“아. 진짜, 아저씨. 말 안 통한다. 내당 무인인 것 같은데 온 지 얼마나 됐어? 칠주야도 안 된 것 같은데.”
아이는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난 그 아이와 얘기를 조금 더 해보기로 했다.
“네 이름이 무어냐?”
“나? 내 이름은 용소화.”
그런 이름이었구나. 가까이서 보니 동글동글한 게 귀여움을 많이 받고 자랄 것 같았다.
“그럼 소화야.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정말. 아저씨 아무 것도 모르는구나. 내가 좀 가르쳐줄게. 자.”
뭘 가르쳐 준다는 걸까. 확실히 오 년동안 가문이 바뀌면서 가규도, 사람들도 많이 바뀐 것 같기는 했다. 용소화는 작고 하얀 손바닥을 내밀었다.
“무슨 뜻이냐?”
“이럴 때에는 당과 하나만 주면 쉽게 넘어갈 수 있어. 난 당과를 얻고, 아저씨는 규칙을 어긴 걸 넘어갈 수 있지.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이런 거 아닐까?”
난 용소화를 내려다봤다. 말을 구사하는 것도 어린애답지 않고, 하는 행동도 어린애 같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 어린애 같았다. 이 정도의 암거래면 가규를 어겼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소화야. 네가 거처하는 곳이 어디냐?”
“숭화당(嵩華黨).”
“거기가 시종들이 있는 곳이구나.”
“그래.”
“거기로 좀 가자꾸나.”
내 말에 용소화는 갸웃했다. 생각해보니 한 시진만 기다리면 해가 뜨는데, 굳이 자는 사람들을 깨워서 소란을 부릴 필요는 없었다.
“왜?”
“해가 뜨면 가려고.”
“아. 구 당주님한테 걸리면 죽음이긴 하지. 나름 괜찮은 선택이야.”
용소화는 자기 멋대로 해석한 다음 내 손을 덥석 잡고 날 끌고갔다. 그러다 문득 멈칫했다.
“아니, 당과를 달라니까?”
“가서 주마.”
내 말에 용소화는 못 미덥다는 눈빛을 하면서도 계속 갔다.
“이건 당과 두 개짜리야. 아니, 세 개. 아니, 네 개···”
“네 개든, 다섯 개든 원하는 대로 줄 테니까.”
“그런 거짓말하는 아저씨들 많이 봤어.”
나는 용소화의 인도에 따라 숭화당에 도착했다. 시종들이 있고, 기르는 곳이다보니 꾸밈새는 소박했지만 건물 자체에 쓰인 재료들은 상등품이었다.
“자, 여기가 숭화당.”
“그렇구나.”
난 그냥 여기 건물에 앉아서 한 시진을 쉬다 가려고 했다. 연공부에서 그렇게 해도 됐지만, 오 년을 있었던 공간에서 그대로 쉬고 싶지는 않았다.
“용소화! 너 어디 갔다 왔어!”
“예, 예란 언니···”
그때 옆에서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소화는 목소리만 들었을 뿐인데 한쪽 눈을 찡그렸다.
옆을 보니 눈이 위쪽으로 치켜올라가 날카롭게 생긴 인상의 여자아이가 걸어오고 있었다. 딱 봐도 저 날카로워보이는 아이가 용소화보다는 너댓 살이 더 많은 것 같았다.
“어디 갔다 왔냐고. 이 새벽에 나가서 당과 걷는 거 말고 할게 어딨어? 다 내놔. 그리고 내 허락없이 나가지 말랬지?”
“···아니야. 나 측간 갔다왔어.”
그녀들 사이에서는 나름 진지한 이야기였다. 당과를 걷는다는 표현은 대충 짐작이 갔다.
예란이라는 여자아이는 용소화에게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소화의 팔과 소매, 허리, 다리 쪽을 손등으로 툭툭 건드렸다. 뭘 찾으려는 모양새였다. 원하는 게 안나온 듯, 예란은 얼굴을 확 찌푸렸다.
“뭐야? 하나도 없어?”
“측간 갔다왔다니까.”
“저 아저씨는 그럼 뭐야? 당과도 많이 주게 생겼는데.”
용소화는 예란의 말에 오물거리며 대답을 못했다. 예란은 용소화의 손목을 덥석 낚아채더니 내게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녀는 내 앞에서 용소화의 손목을 놨는데, 손목에 빨간 자국이 남아있었다.
“아저씨. 내원 사람은 맞아? 외원 사람이 지금 시간에 여기 들어온 거면 큰일 나는 거야.”
예란은 순진한 얼굴로 엄지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해보였다. 행동이나 말투의 억양과 강약조절이 한 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내원 사람이지.”
“그래?”
예란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 턱을 쓰다듬고는, 말을 이었다.
“아저씨. 신입인 것 같은데 잘 들어. 지금 아저씨는 등롱도 안 들고 다니고 다녔잖아. 딱 보면 알 수 있지. 그거 내당주님한테 말하면 바로 짤릴 수도 있어. 여기 들어오려고 엄청난 고생을 하지 않았어?”
고생이라. 들어오려고 고생한 것보다 나가려고 고생한 게 더 많았던 것 같다. 들어올 때는 무혈입성이었으니 말이다. 아이는 말을 이었다.
“난 지금 내당주님한테 바로 이르러 갈 거야. 그럼 아저씨는 짤리고, 지금까지 황금세가에 들어오려는 노력이 물거품이 되겠지? 근데, 돈을 좀 주면 눈 감아주겠다는 의미야. 아저씨는 우리한테 교육받고 가규를 더 성실히 지킬 거고, 난 맛있는 당과를 먹으니까 서로 이득이겠지?”
난 예란이라는 아이를 바라봤다. 뭐랄까. 황금세가가 이렇게 무인들에게 각광받는 줄은 몰랐다. 내가 조용히 물었다.
“얼마나 필요한데?”
예란은 사냥감을 낚아챈 여우의 눈빛을 해보였다. 그녀는 손바닥 두 개를 쫙 폈다.
“열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