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죽을 정도는 아니니라
97화 죽을 정도는 아니니라
연무장이 긴장으로 감돌았다. 서로 느껴지는 기파를 뿜어낸 게 아니다. 눈빛의 기세였다. 금원대의 사람들이 불길을 뿜어내고 있다면, 금목환은 그 불길들을 모두 삼키는 고요한 호수 같았다.
“오, 비무? 볼 만하겠네.”
어느샌가 강운과 목현학이 황금세가의 직계들 뒤에 섰다. 가벼운 말투였지만 아주 약간의 긴장이 담겨있기는 했다.
진신절기를 전수하지는 않았지만, 넓게 보면 사제 관계다. 실제로 강운과 목현학은 직접 쓰지는 않지만, 필요해보이는 무공 몇 개는 전수하기도 했다.
“볼 만하기는.”
그때 괄괄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거한이 어둠을 뚫고 나왔다. 바로 곽진도였다. 황금세가의 남매들이 고개를 숙였다.
“아, 장로님. 늦게 오셨군요.”
“이때즈음 금원대 올 것 같더라.”
세가 전체를 돌아보는 건 곽진도는 참여하지 않았다. 곽진도는 세가 내부보다는 외부의 일을 맡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시간이 되면 참여를 하겠다고 했는데, 딱 때를 맞춰서 온 거다.
“그건 어떻게 아셨답니까.”
“내 제자니까 알지. 은근히 예측하기 쉬운 애다.”
“목환이가요?”
금월상이 되물었다. 곽진도가 흐흐, 웃었다.
“목환이가 대표적으로 긴장을 놓을 때가 밥 먹을 때 아니냐. 자기 생각에 최대한 맛있는 건 맨 마지막까지 남겨두더라고.”
“귀엽네요.”
그건 형제들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적용할 줄은 몰랐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동안 이미 연무장은 정리가 끝나가고 있었다. 비무를 하기 위한 준비. 병장기들을 최대한 밀고, 땅을 평탄하게 만드는 작업. 일흔 명이 넘는데도 동선 하나 겹치지 않고 깔끔하게 마무리 됐다.
“좋아.”
금목환은 흡족하다는 듯 말했다.
예전에도 일처리는 확실했지만, 너무 어린 티가 나서 어색했던 것도 사실이다. 허나 팔짱을 끼고 일흔 명을 물끄러미 보는 등이 이제는 익숙했다.
“가주님. 그럼 방식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한유림이 공손하게 물었다. 금목환은 잠깐 생각하는 듯 일흔 명을 둘러봤다.
“일단 너.”
먼저 손가락으로 한유림을 지목했다.
이해되는 결정이었다. 대주와 한 번 겨뤄보면 무리의 수준은 대개 확인되는 편이니 말이다.
하지만 금목환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 다음 너, 너, 너. 이렇게 합진으로 공격해봐.”
일대일 비무를 준비하고 있던 한유림은 살짝 당황한 것 같았다.
강운과 목현학, 곽진도도 그걸 유심히 바라봤다. 금목환은 말할 것도 없는 기재지만, 그렇다고 한유림을 비롯한 저 아이들도 엄청난 기재였다. 절맥을 극복한 사람들이 얼마나 빨리들 성장했던지.
당장 몇 명이 화지장개, 꽃봉우리를 만들어놓았던가. 한유림과 팽차월은 꽃까지 피워낸 기재 중 기재다.
세가에서 쓸 일이 없어서 드러나지 않을뿐. 이 정도면 이 나이대 부대 중에서는 이미 최강이었다.
근데 금목환은 그 중 네 명을 골라 싸우겠다고 하고 있다. 곽진도는 픽 웃었다.
“여전히 목환이는 목환이구먼.”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재주는 오 년 전과 전혀 다를 게 없었다. 심지어 고른 아이들은 한유림, 팽차월과 그 뒤를 바짝 따르는 삼, 사 위의 고수들이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한유림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금목환은 짧게 대답했다.
“응.”
“옛날에는 절맥을 고친지 얼마 되지 않았고, 무공의 기본조차 모르는 애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그래보여.”
금원대의 열기가 눈으로 보일 수도 있을것만치 일렁였다. 그들이 보일 수 있는 건 오로지 무공뿐이었다. 가주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지금까지 달려왔다. 은혜를 갚기 위해 이를 악물고 했다. 그리고 지금, 그걸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온 거다.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이 뒤로 쭉 물러나고, 금목환이 지목한 사람들과 금목환만이 연무장 중앙에 남았다.
그저 비무일 뿐이었지만 긴장감이 감돌았다. 금목환과 금원대 넷이 자세를 갖췄다.
당연히 지켜보는 사람들은 금원대보다는 금목환에게 시선이 쏠려 있었다. 어릴 때도 괴물 같았던 아이다. 그런데 오 년이라는 수련을 거쳤다. 어떻게 되어있을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시작할까.”
그와 동시에 네 명의 몸에 빛이 서리는 듯하더니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금목환을 기준으로 동서남북의 방위를 점한 것이다.
금원대 사람들은 유선형으로 움직이며 금목환에게 달려들었다. 마치 물이 한 구멍으로 빨려가는 듯한 흐름이었는데,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는 지독한 한기와 열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하압!”
팽차월의 기합소리와 함께 금목환에게 네 개의 검이 다가왔다. 진검이었지만 전혀 거리낌이 없는 검로였다. 금목환이라면 당연히 받을 줄 알고 있으니까.
푸푸푸푹!
모든 사람이 눈을 의심했다. 금목환의 신형에 네 명의 칼이 고스란히 박혀있으니까. 금원대의 모든 사람들이 심장이 덜컥했다. 금목환은 눈에 초점을 잃고 앞으로 스러지는 듯했다.
“···어?”
제일 먼저 한유림의 눈이 초조함으로 흔들렸다. 그때, 네 명이 동시에 검을 떨궜다. 몸의 경련으로 보건데 어딘가를 점혈당한 모양이었다.
“나를 너무 믿지 않고 있구나.”
어느덧 금목환은 자신이 검을 맞았던 자리에 서있었다. 네 명은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각자 팔뚝을 잡고 있었다. 팔이 저려지는 곳을 점혈한 것이다.
“본 가주. 아직 너희들에게 죽을 정도는 아니니라.”
금목환은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은 금목환을 보자마자 놀라기 보다,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금목환! 이상한 장난하지마!”
금수린이 약오른다는 듯 저 멀리서 외쳤다. 금목환은 금수린을 바라보며 살짝 목례를 했다.
이제 사람들은 안심했으니,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금목환은 어째서 쓰러진 듯 보였으며, 어떤 수법으로 네 명의 점혈을 했는가.
그걸 자세히 본 건 역시 곽진도, 강운, 목현학 초고수 삼인방이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쓰러질 때는 별 생각이 없었고, 네 명을 제압하는 단계에서 놀랐다.
“···기를 끌어와서 서있는 것만으로도 진법을 만들고, 특이한 점혈법을 썼군.”
“한 사람당 다섯 번씩 두드렸어. 총 이십번 두드린 셈이지.”
강운과 목현학이 말했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금목환은 스무 번의 손짓을 한 거다. 아마 상대하는 측에서는 몇 번 두드렸는지 감도 못 잡는데다가, 잔상만 보였을 터다.
“···난 저 나이에 저 정도 움직임을 보이는 아이를 본 적이 없어.”
“그건 오 년 전에도 그랬네.”
“그거랑은 좀 달라.”
문제는 그들의 눈에도 금목환의 손움직임이 느리게 안 보였다는 것이다. 분명히 빨랐다.
금목환은 완전한 무인이 됐다. 당연히 무인은 첫 번째 마주쳤을 때 얼마나 많은 패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승률이 갈린다. 경지는 단순히 경지일 뿐이었다. 그런데 당장 중원에서 누가 저런 싸움법을 택한다는 말인가.
“···진짜 궤도에 올랐군.”
자신만의 독특한 무공 세계가 생긴다는 것. 곽진도를 포함한 모두가 그걸 금목환에게서 봤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너희들의 검은 잘 봤어.”
금목환은 발로 검을 툭툭 차줬다. 똑같이 생긴 검들이엇지만 그 검들은 자연스럽게 주인을 찾아갔다. 넷은 어이가 없었다. 이렇게 제대로 보여주지도 못하고 끝나다니.
하지만 강호에서 그런 건 없다. 끝난 거면, 끝난 거다. 못 보여준 건 자신들의 잘못이었다. 그야말로 금목환은 최대의 효율로 자신들을 이긴 셈이었다.
“경계를 놓지마. 중원은 생각보다 신기한 사람이 많을 거니까.”
금목환이 말했다. 한유림을 포함한 넷, 금원대는 풀이 죽었다. 금원대 중 어떤 네 명이 나갔어도 똑같은 결말을 맞이했을 거다.
“물론 너희들이 내게 충성하기 때문에 더 당황했을 거야. 이제는 앞으로 더 당황할 일은 없겠지?”
금목환이 물었다. 금원대 사람들은 깨달았다는 듯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비무를 빙자한 가르침이었다. 금목환은 이 짧은 시간에도 자신들에게 가르침을 깊이 아로새긴 것이다.
“네!”
금원대가 동시에 외쳤다. 금목환은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오랜만에 돌아온 가주의 화려한 순회가 마침표를 찍었다.
*
가문은 전체적으로는 흡족하게 바뀌어 있었다. 이제는 어떤 기습에도 대응을 할 수 있는 체계가 잡힌 게 컸다.
물론 미흡한 점도 있었다. 더 발전해야 하지만, 갖춰놓은 틀은 내가 생각한 그 이상이었다. 형제들의 능력이 그만큼 되었다는 뜻이리라.
“근데 애들은 왜 이렇게 갈구고 다녔냐?”
“제가요?”
“마지막에 갈 때 표정 못봤어? 다들 죽어가던데.”
곽진도는 껄껄거렸다. 형제들을 보낼 때 딱히 얼굴은 보지 않았다. 난 그저 오래 걸어서 지친 줄 알았다.
“전 별 말 안 했는데요. 마음에도 들었고.”
“그래. 넌 그렇겠지.”
곽진도는 말했다.
“근데 시기 적절했다. 요즘 애들이 자기들이 너무 잘하는 줄 알고 있어가지고 잠깐 이마를 툭 쳐줄 필요는 있었어. 물론 네가 없는 동안 잘하기는 했지만 말이야.”
“결과적으로는 잘됐군요.”
“그렇지.”
나는 지금 금정원 꼭대기, 곽진도의 방에 있었다. 수석 장로의 방은 거의 가주실과 맞먹게 꾸며져 있었다. 응당 맞는 대우였다.
내가 곽진도와 지금 같이 있는 이유는 다름 아니다. 세가 내부를 전부 둘러봤으니, 이제 세가 바깥을 볼 차례인 거다. 형제들도 알고 있겠지만, 외부는 도리어 곽진도가 전문일 테니까.
난 지난 오 년동안 중원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들었다. 정파의 역학관계. 마교의 도발. 사파의 증식 등. 귀에 담을 만한 이야기들이 많았다. 그렇지만 제일 중요한 이야기는 따로 있었다.
“아무래도 천주성이 공식적으로 등장한 게 제일 크지.”
곽진도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얘기였다.
“그곳은 어떻게 행동하고 있습니까?”
“모르겠다. 정의(正義)만 부르짖으면서 요녕에 틀어박혀 있는데, 도통 뭔 생각인지.”
“요녕이라. 그럼 모용세가는 어떻게 됐습니까?”
“이틀 만에 박살나고 뿔뿔이 흩어졌지. 지금은 산동 황보세가에서 몸을 의탁하고 있을 게야.”
천주성은 내가 전생에서 아는 것과 똑같이 행동했다. 그저 정의를 천명하며 중원 북동쪽 구석, 요녕(遼寧)에 틀어박혀 있는 것. 대신 요녕은 확실히 점거하고, 들어오는 무인들에게는 바로 사파든, 정파든 철퇴를 가한다.
원래라면 구파일방이 철퇴를 가해야 했지만, 천주성은 개인들의 무력이 뛰어나고, 얼마만큼 큰 줄도 모르고, 또 구석에 있기에 잡지 못하는 형국이었다.
“그렇군요.”
나는 그 다음으로 무림맹에 관한 이야기들을 들었다. 얼마나 무림맹이 환골탈태했는지 듣는 건 꽤 재미있었다. 온갖 고수들을 불러모으고 건물을 증축해 무림맹이라는 이름의 위상에 좀 걸맞게 되었다고 한다.
“대신 부작용도 있었겠죠?”
“구파일방의 압박이 없어진 셈이니까. 다른 방향으로 압박을 하게 됐지. 요즘은 매달 사람들을 뽑아서 교대로 무림맹에 보낸다나.”
“뭔지 알겠네요.”
난 앞에 있는 차를 살짝 마셨다. 구파일방이 원하는 건 결국 감시다. 무림맹이 형산파 봉문 같은 일을 독단적으로 처리할 수 없도록 말이다.
“이번에는 무림맹에 남궁세가 사람들이 온다고 하더라고. 걔들이 돈 냄새를 잘 맡는 모양이야. 우리들한테 오고가는 걸 아주 경계하고 있던데.”
“아. 남궁세가요.”
갑작스레 나온 남궁세가의 이름이었지만 그리 낯설지는 않았다. 남궁세가는 사실 황금세가에 이은, 두 번째 부자 세가였기 때문이다. 살기 좋은 안휘를 통째로 먹어놓고 상권을 장악하니 당연한 결과였다. 물론 전 중원의 상로를 먹은 우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이등이었지만 말이다.
“무림맹은 그게 좀 겁나는지 우리한테 장부 한 번 맞춰보자고 사람을 보내달라고 했어. 상무당에서 아무나 보내면 되겠지.”
회계 장부 맞추기라. 정말 별 거 아닌 일이었다. 무인들과 아이들을 제외하고, 우리 세가 내원에 그걸 할 수 있는 능력자는 넘쳐났다.
“아뇨. 제가 갈게요.”
내 말에 곽진도의 눈빛이 멍해졌다.
“왜?”
“바깥을 좀 보고 싶어서요.”
언젠가 무림맹에 가기는 가야 했다. 황금세가에서 중원의 소식을 듣는 것보다, 무림맹에서 중원 소식을 듣는 게 더 정확할 터였으니까. 앞으로 방향도 좀 논의할 게 많고. 갈 명분도 생겼으니 좋은 때였다.
백문이불여일견. 어떻게 바뀌었는지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나았다.
내가 말했다.
“무한에 서한을 보내세요. 회계 장부 맞추러 황금세가의 가주, 금목환이 간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