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오늘 여기서 끝납니다
123화 오늘 여기서 끝납니다
황보웅은 권법을 주로 하는 황보세가에서 나온 만큼, 어깨, 팔, 다리, 허벅지 모든 부분이 컸다. 마치 내가 두 명 나란히 붙어 서있는 정도의 크기였다.
난 연무장으로 올라가 심판과 눈인사를 했다. 바로 검을 손바닥에 잡아본다. 이제는 한 몸 같은 송로의 검병이 물샐틈없이 손바닥에 달라붙었다.
“너무 뻔하지 않느냐!”
갑자기 버럭 황보웅이 소리를 질렀다. 심판이 깜짝 놀라서 두 눈을 크게 한 건 물론이고, 객석에까지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웅성였다. 당연히 나도 놀랐다.
내가 뭔가 하고 황보웅을 바라봤다. 황보웅의 키가 나보다 커서 내가 올려다봐야 했는데, 그의 눈에는 내려다보는 걸 떠나서 경멸이 가득 담겨 있었다.
“뭐가?”
난 진심으로 몰라서 물었다. 황보웅은 다시 크게 소리를 쳤다.
“돈으로 무림맹을 매수해서 정파에 혼란을 불러일으키더니, 오대세가인 하북팽가와 구파일방인 해남파에까지 마수를 뻗쳤지 않느냐! 어찌 그렇게 뻔뻔하게 되묻는가!”
아. 황보웅은 나한테 말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을 하고 싶었던 거다. 사람들은 술렁였다.
“그런 건가?”
“하긴 하북팽가랑 해남파가 같이 다닐 이유가 없긴 한데···”
“그럼 저 황금세가 가주라는 사람은 하북팽가와 해남파에서 키우는 후기지수 아닐까? 신원을 속여서 나온 거지.”
“그렇지. 생각해보니까 옛날에 실종됐었잖아. 아직 안 돌아왔지?”
“그럴···걸?”
사람들은 황금세가 사람들이 있는 쪽을 돌아봤다. 곽진도와 팽차월의 표정은 황보웅을 잡아먹을 정도로 흉악해져 있었다. 그래도 난 재미있게 들었다. 사실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은 했었고, 음모론은 그냥 재미있었다. 그나저나 내가 황금세가 가주가 된 것도 모르는 사람이 아직 있기는 했다.
“우리 선대 고수들이 괜히 상계를 멀리한 게 아니다! 네놈들은 돈의 논리로 의협이라는 가치를 망가뜨리는 미꾸라지 녀석들이야!”
“옳소!”
“황금세가는 중원에서 나가라!”
몇몇 감화가 된 사람들은 갑자기 소리를 외쳤다.
의협이라. 난 사실 아직도 그 가치를 정확히는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황보웅이 생각하는 의협과 내가 생각하는 의협은 다를 것임을 확신했다.
대다수의 황금세가, 하북팽가, 해남파 쪽을 보며 수군대고 있었다. 누가 말했던가. 선동은 먼저 하는 쪽이 승리라고 말이다.
난 사실 그게 좀 이상했다. 황보웅은 의협이라는 가치를 말로만 했지, 직접 보여준 건 아무 것도 없다. 왜 사람들은 황보웅이 의협이라는 편에 서있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황보웅을 연호하는 걸 보면 사람들은 의협의 의미는 모른 채, 그저 그 단어에 들어가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황보웅.”
나지막이 말했지만, 많은 사람들의 귀에 들리기는 충분했다. 나지막이 말해도 내공을 충분히 싣는다면 육합전성이 가능했다.
내 목소리가 연무장에 울려지자 사람들이 고요해졌다. 몇몇 목소리는 내가 내상을 당한 게 아니었냐며 옆 사람에게 묻기도 했다. 하긴 이 정도 규모의 사람들에게 전부 들리게끔하려면 꽤 많은 내공이 필요했다.
허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난 황보웅을 바라봤다.
“난 네가 말한 대로 의협을 모른다.”
내가 말했다. 황보웅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더 기세등등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중원에 대해 아는 건 하나. 강자가 늘 옳다는 것이다.”
나는 황보웅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그런 말을 하려면 넌 나보다 강하다는 걸 증명해야 된다.”
황보웅이 이빨을 물었다. 내가 그렇게 말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은 듯했다. 얼마나 세상을 오만하게 사는지 알 수 있었다.
뒤이어 대기도 떨리기 시작한다. 내공을 발출하는 것이었다. 맹렬하고 사나운 내공이 연무장을 진동시켰다.
“···와, 황보웅이 이렇게 강했다고?”
“저 친구 어제 내상을 좀 입었을 텐데.”
“그러면 육합전성을 어떻게 쓴 거야?”
“모르지.”
황보웅이 사람들의 소란을 뚫고 내게 달려들었다. 마치 커다란 곰이 덮치는 것 같았다. 내 그림자가 황보웅의 그림자에 완전히 잡아먹혔다.
한껏 당긴 황보웅의 주먹 끝에는 푸른색 소용돌이가 맹렬하게 돌고 있었다. 그 회오리에는 하얀 결정마저 간간이 보였다.
“우와아아아!”
난 그걸 바라봤다. 확실히 사람들이 감탄할 정도로 멋있는 광경이었다. 주먹 끝에 맴도는 소용돌이라니.
나는 검을 꺼내지도 않았다. 화려하기는 했지만, 나를 상대하기에는 한참 부족했다.
난 바로 황보웅의 주먹과 허리 사이 빈 공간을 파고들었다. 내 왼쪽 어깨가 황보웅의 겨드랑이에 걸리는 느낌이 났다.
쾅!
“어어?”
사람들이 놀랐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아는 고수들은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어깨를 걸은 다음 오른손으로 황보웅의 얼굴을 잡고, 다리는 바깥으로 걸어 메쳐버린 거다.
난 그의 힘을 유능제강의 묘리로 돌려준 것도 아니고, 그의 힘을 흘려서 피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정면에서 맞서 싸웠고, 정면에서 부러뜨린 거다.
바닥에 대자로 누워버린 황보웅의 얼굴에서 손을 뗐다. 황보웅의 얼굴은 완전히 풀려있었다. 아까 의협을 울부짖던 목소리와는 다르게 꼴불견인 모습이었다.
“···승자. 황금세가 금목환.”
난 허리를 펴서 일어났다. 다시 주변을 둘러봤다. 주변은 조용할지언정 사람들의 반응은 다 달랐다.
고수들 중에도 나를 인정하는 사람들과 아닌 사람으로 갈렸고, 하수들 중에도 나를 인정하는 사람들과 아닌 사람으로 갈렸고, 일반 사람들도 나를 인정하는 사람들과 아닌 사람으로 갈렸다.
의협이라. 의협의 의미는 몰라도 활용도는 알게 된 것 같았다.
난 사람들을 대략적으로 훑어봤다. 나에게 우호적인 사람과 세력, 우호적이지 않은 사람과 세력들이 분간되는 순간이었다.
*
우리는 여전히 하북팽가와 해남파와 같이 입산을 했다.
확실히 많이 달라졌다. 우리를 보는 시선들이 말이다. 곽진도와 팽차월, 그리고 상처를 치료한 금월상과 금수린까지. 금수린이 주변을 흘깃거리며 바라봤다.
“···진짜 처음보다는 많이 달라졌구나.”
“그래야죠. 그러려고 온 거니까.”
금수린을 포함해 모든 사람들은 느끼고 있을 터였다. 사실 전부터 우리 세가를 보는 시선들은 달라지고 있었다. 어떤 이는 경계를 하고, 어떤 이는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런데 그 색깔들이 이제는 진해진 거다.
호기심은 호감으로 변화했고, 경계는 적대로 변하는 식.
그것도 큰 변화라고 말할 수 있지만, 아무래도 더 큰 변화는 하북팽가와 해남파보다 우리에게 더 시선이 많이 쏠린다는 것이었다.
“이제는 나보다 가주 얼굴에 더 많이들 시선이 가는구나.”
“잘생겼으니까요.”
“그런 말이 아닌 거 알지 않나.”
적유엽과 팽의석이 수군거렸다. 그들은 오히려 내가 시선을 분산시켜주는 걸 고마워했다. 물론 가끔은 너무 내가 시선을 받으니 낯설어하는 모습도 보였지만 말이다.
팽의석은 새삼스럽게 또 낯선 감정을 느낀 듯 내게 말했다.
“넌 정말 말하는 대로 사는구나.”
“보통 그러지 않나요.”
“아니지. 보통은 사는 대로 말하지. 어제 황보 아무개도 그랬지만, 사람들이 의협이라는 추상적인 말을 많이 쓰는 이유가 그거다. 본인의 행동을 의협이라고 주장하면 그만이니까. 안 그러느냐, 상문아?”
옆에서 조용히 걷던 팽상문이 흠칫 놀랐다. 그의 입에서는 바로 대답이 나왔다.
“그렇습니다. 할아버님.”
“너도 그렇게 살도록 노력해라. 금 가주를 따라하지는 말고. 그건 너무 힘드니까.”
팽의석은 껄껄 웃었다. 그는 이제 용봉지회가 마무리 지어져 가는데도 딱히 긴장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일흔 두명이 싸워 서른여섯명의 승자가 나오게 되고, 그 다음 열여덟 명의 승자가 나오고, 그 다음 아홉 명의 숫자가 나온다. 그 다음은 권위 있는 무인이 뽑은 패자 일곱 명을 추가해서 대진을 다시 짠다.
“근데 왜 이렇게 패자들을 중간에 끼워 넣는 거야? 그럼 굳이 이길 필요가 있어?”
금수린이 물었다. 그건 내가 처음 용봉지회 방식을 듣고 의문을 가졌던 것이기도 했다.
“오룡을 전부 대진으로 뽑으면 운으로 결정되는 사람도 있을 테니 안 되고, 그렇다고 패자 중에서 실력대로 뽑는다고 말해도 애매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냥 명성 높은 무인의 권위를 빌려 불만사항을 막아 놓는 거죠.”
금수린은 이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곽진도는 뭔가 불편한 기색으로 헛기침을 했다.
“···거 참, 너무 날카로운 분석 아니냐.”
내가 뭔가 안 좋은 얘기를 한 건지, 팽의석과 적유엽도 큼큼거리며 민망해 했다.
“뭐, 중원이 그렇게 주먹구구식인 게 생각보다 많으니까. 그건 우리 어른들의 잘못이지.”
“그런 말은 아니었는데요.”
“우리가 반성해야 할 일이지···”
적유엽과 팽의석은 한숨을 쉬었다. 난 정말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그렇게 들었다면 나야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금수린도 왠지 눈치가 보이는지 짐짓 밝게 물었다.
“그럼 아직 꽤 많이 남았네? 다섯 명을 추려내려면 최소 칠주야는 해야 될 것 같은데?”
“아뇨. 오늘 여기서 끝납니다.”
내가 말했다. 그때 곽진도가 내 말을 가로챘다.
“큼, 오룡이라면 하루에 여러 번 싸워도 무너지지 않는 체력을 보여줘야지.”
그런가. 난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는 만큼 대진에 인위적인 요소가 들어갈 거라고 생각했고, 그에 따른 불만을 최소한으로 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것까지 굳이 말하지는 않기로 했다.
“···에휴. 근데 대진운이 별로 안 좋구나.”
당장 여기 있는 금월상이 내가 그런 생각을 하게 해주는 증거였다.
초유열과 화려한 비무를 보여준 금월상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일곱 명의 패자 중에 꼽혔다.
근데 어떻게 된 게 금월상은 초유열하고 재대진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소림의 정화라는 사람은 초유열과 마지막에 만날 수 있도록 끝에 배치되어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말이다.
근데 금월상은 그저 운이 안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참 시종일관 순수한 사람이었다.
아무튼 용봉지회의 마지막 날이 이렇게 시작됐다.
*
남궁선우는 오늘 용봉지회에 가지 않았다. 아들인 남궁홍학이 열여섯 명 중에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가지 않았다. 지금은 용봉지회에 갈 때가 아니었다.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 있었다.
“왜 칼자루를 가져간 거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기와 정기가 만나서 폭발했으니, 마기의 흔적이 남아있을 수가 없었다. 그건 마기의 팽창이 아닌 충돌에 의한 폭발이었으니까. 어느 하찮은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고, 철마가 그런 기본적인 실수를 할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계속 생각이 들었다. 금목환은 왜 칼자루를 가져갔을까. 사실 그건 굉장히 부자연스러웠다. 만년한철이라서? 세상에 그것보다 모순되는 이유는 없다. 다른 누구도 아닌 황금세가의 가주인데 그만한 만년한철이 뭐가 중요하다고 달라고까지 하겠는가.
“왜 칼자루를 가져간 거냐고?”
남궁선우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부복을 한 하얀 복면의 남자가 움찔했다.
“···속하도 그건 모르겠습니다.”
합리적인 추론으로는 금목환은 뭔가 있어서 가져갔고, 진권도 당황했지만 뭔가 있을 것 같으니까 준 것일 테다. 아니면 그냥 바보거나.
허나 같은 신도를 채근해봤자 나오는 건 없다. 남궁선우는 다시 진정하고 고민했다. 그리고 문득, 생각이 미쳤다.
생각해보면 단순했다. 그 만년한철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단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그러나 사실상 알아보기가 불가능하고, 그런 생각을 떠올리기 쉽지 않았을 터다. 철광석 같은 것에 조예가 없는 사람이라면···
하지만 금목환은 모든 물건을 다루는 황금세가의 가주였다. 그렇게 따져보면 앞뒤가 맞았다.
“이호.”
“네.”
이호라고 불린 복면의 남자가 대답했다. 남궁선우가 말했다.
“지금 숭산 올라가봐.”
그 말을 듣자마자 이호는 사라졌다.
남궁선우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꼬았다. 만약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는 녀석이라면, 엄청난 위험 인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