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일등은 정해졌네
125화 일등은 정해졌네
확실히 초유열의 눈빛은 저번보다 많이 달라져 있었다. 땅에 기어다니는 먹잇감을 따라다니는 매와도 같다. 그러나 그렇게 보려면 그도 책임을 져야 했다. 나만 염탐을 당할 수는 없으니까.
난 초유열의 눈동자만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를 보면 내 어디를 공격할지 알 수 있었다.
초유열도 내 눈동자를 눈치 채고 나와 눈을 마주쳤다. 눈에서는 안광이 튀기고 몸에서는 날렵한 예기들이 뿜어져 나왔다.
“···그만. 시합 전에 기를 올리는 건 아니된다.”
심판의 말에 초유열은 흠칫 놀랐다. 본인이 기를 뿜어냈는지도 몰랐던 것 같다.
초유열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뒤를 돌아서 각자 자리로 걸어갔다. 저기 관객석에서 수많이 내리꽂히는 시선들이 보인다. 아마 초유열도 그것을 느끼고 있을 터다.
“열심히 해라! 나 너한테 인생 걸었다!”
걸쭉한 남자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 고성을 들은 연무장 사람들이 웃었다. 누가 보면 무슨 사랑 고백이라도 하는 줄 알 것이다. 실상은 내게 많은 돈을 걸었다는 것이다. 인생을 반골처럼 사는 걸 즐기는 모양이었다.
“성공할 사람이네.”
난 조용히 읊조린 다음 뒤를 돌아 다시 초유열을 바라봤다. 초유열도 나와 같았다.
아까같이 서로의 탐색을 하지는 않는다. 이제는 그저 자신을 관조하며 가라앉힐 뿐이다.
이제 내 마음 속 호수는 나뭇잎 하나가 퍼뜨리는 파문도 허락하지 못한다. 최대한 깨끗하게 비워놔야, 내가 배운 게 왜곡되지 않은 채 나올 테니 말이다. 그건 초유열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 고요한 분위기에 연무장에 있는 모든 사람이 동화된 듯 조용했다. 심판도 나지막하게 말했다.
“시작.”
그 말이 떨어짐과 함께 초유열의 검 주위에 회오리가 둘러졌다. 초유열은 술에 취한 듯 흐느적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물론 다가왔다는 표현을 하기엔 너무 빨랐다.
칼과 칼이 부딪쳤다. 실제로 회오리는 회전력을 지닌 듯 내 손목에 부하를 줬다. 나도 검에 내공을 넣었다. 송로의 검병에 있는 하얀 천이 뻣뻣하게 섰다. 송로에서 뻗쳐나오는 하얀 기가 회오리를 일순 걷어냈다.
난 회오리의 틈으로 검을 질렀다. 초유열은 아래에서 위로 발도하듯 올려벴다. 그 검로가 얼마나 우아하던지 하늘을 가르는 검 아래로 매화꽃이 휘날리는 듯했다.
나는 찌르고, 초유열은 올려쳤지만 내 칼은 조금 경로가 바뀌었을 뿐 앞으로 계속 나아갔다.
촤악!
그 소리가 날 때는 초유열이 멀찍이 뒤로 물러나있었다. 그의 어깻죽지의 옷이 잘려있어 맨살이 드러났다. 한 치만 깊었어도 어깨의 중심을 찔릴 뻔했는데 초유열이 몸을 뒤로 살짝 뒤집은 것이다. 칭찬할만한 움직임이었다.
“···넌 정말 강하구나.”
초유열이 말했다.
“넌 대체 어디 있었지?”
“황금세가.”
“난 장난이 아니다.”
초유열이 얼굴을 찌푸렸다. 난 합당한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육 년 정도 지났는데, 오 년 이상을 황금세가에 있지 않았는가. 물론 그걸 친절하게 설명해줄 필요성은 없었다.
나도 검에 기를 흘려보냈다. 무공은 신기하다. 내 내공은 초식을 펼치기 전에 미리 가서 움직이고 있으니까. 당장 나만 그런 건 아니었다.
나는 천천히 만천조종검을 그려본다. 전에 초유열과 싸울 때 살짝 꺼낸 거긴 하지만, 그때는 반 초식도 못 보여줬다. 그러니 제대로 펼치는 건 지금 처음이었다.
무언가 걸리는 깨달음이 오성을 나누는 경지라면 난 아직 이 성에 불과했다. 내가 만들었지만, 참 묘리가 애매한 부분이 많았다.
첫 초식, 대라회연(大羅回淵)이 그려졌다.
난 이게 어떻게 보일지 몰랐다. 어쩌면 내 모습은 다른 사람이 보는 게 더 정확할 수 있었다.
“···허어억.”
관객석에서 숨이 넘어가게 놀라는 소리가 들린다.
맞은편에 있는 초유열의 눈동자는 나를 바라보지 않고 내 머리 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
진권의 턱이 뻑, 소리가 날 때까지 아래로 떨어졌다. 그가 놀라하는 것도 당연했다.
모두가 금목환이 뿜어낸 거대한 내공의 형상을 봤다. 관객석에서 압도당해 숨이 넘어가는 것도 이해하는 바였다.
“···거대한 바다 같군요. 저놈은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놈···”
진권의 말에 화종도는 웃었다. 그의 말투에서 한껏 경계하는 모습이 노골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웃음소리를 들은 진권은 바로 애써 감추려 했지만, 화종도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이해해. 너희들은 파란을 싫어하니까.”
화종도가 말했다. 조롱이 아니라, 그는 정말 이해했다. 특히 소림사는 구파일방의 사실상 수장 역할을 맡고 있는만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을 극도로 싫어하는 경향이 있었다.
역대 모든 방장이 그랬으니, 진권도 예외는 아닐 터였다.
“근데 잘 봐라.”
화종도의 말과 함께 금목환이 거대한 기세를 이끌고 초유열 쪽으로 달려갔다.
“저 파란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난 저게 후배가 선배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예의라고 생각하는데.”
초유열은 전방위로 회전하며 금목환의 검을 쳐내고 있었다. 금목환은 초유열의 겉을 빠르게 회전하며 온갖 날카로운 검격을 날리고 있었다. 보법은 신출귀몰하고, 검로는 예리하고, 강기는 빛났다.
콰콰쾅!
강기들끼리 부딪쳐 폭발하는 소리가 연속해서 났다. 연무장 전체가 진동할 정도로 거대한 폭발이었다.
신기한 건 부딪칠 때와 부딪칠 때 나는 소리, 부딪칠 때 나는 섬광이 따로 노는 것같은 느낌이었다. 그만큼 빠른 속도로 검을 주고받는다는 얘기였다.
검끼리의 부딪침은 계속 됐지만 상처는 일방적으로 났다. 점점 속도를 못 따라가는 초유열의 몸에서 피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저 정도면 중지시켜야지. 사실상 깊게 벨 수 있는 걸 얕게 베주는 건데.”
화종도가 혀를 찼다. 진권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비무장에 있는 심판을 바라보니, 그도 넋이 나간 것 같았다. 금목환의 검술은 압도적이면서 우아하기까지 했다.
상처가 난 초유열은 계속 밀려나갔다. 금목환이 계속 초유열의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야금야금 갉아가며 압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곧 초유열의 발과 발 사이는 반치도 되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렇게 빨리 움직이던 금목환과 초유열이 동시에 멈췄다.
금목환의 검은 초유열의 목에 닿아있었고, 초유열의 검은 금목환의 목에 다섯 치 이상은 차이나게 떨어져 있었다.
“승자, 황금세가 금목환.”
그제야 심판이 정신을 차린 듯 선언했다. 그 얼빠진 목소리의 육합전성은 연무장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심정을 대변한 것이었다.
“···방금 뭔 일이 일어난 거냐?”
그런 공허한 소리만 연무장에 울려퍼졌다.
승자를 향한 거대한 환호가 연무장에 몰아쳤을 때는 이미 금목환은 대기실로 사라진 상태였다.
“일등은 정해졌네.”
화종도가 껄껄 웃었다. 진권은 아직 넋이 나가있었지만 어떻게든 입을 열었다.
“아직까진 섣부른 판단 아닐까요? 선우진도 얼마나 강한지 모르겠던데요.”
“금목환을 이길 정도는 아닐걸?”
진권은 바로 납득했다. 삼선 중 하나, 약선이 이렇게나 단정 지어서 얘기한다면 정말 금목환이 오룡의 수위를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화종도는 머리 뒤에 깍지를 끼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거의 볼 건 다 봤다는 태도였다.
“신물은 다 준비됐냐?”
“네, 북해 만년빙정(萬年氷晶)으로 만든 상무검(霜霧劍), 남만의 야광충으로 만든 박명주(薄明珠), 소림사의 현법단의(現法單衣), 극동에서 만든 천개궁(天開弓), 서역의 철로 만든 비위대도(丕衛大刀)입니다.”
“뭐, 괜찮네. 아닌가, 별로인가.”
시큰둥한 화종도의 반응에 진권의 얼굴이 붉어졌다. 괜히 신물이 아닌데, 뭘 저렇게 취급한다는 말인가.
당장 똑같은 대도라도 서역에서 넘어온 철은 질이 다르고, 중원에서 어중간하게 만들어진 빙정과 북해의 빙정은 급이 다르며, 남만의 야광충은 색깔이 화려하기 그지없다.
그런 훌륭한 재료에 장인의 손길을 입혔으니 신물이라고 하는 것 아니겠는가.
진권은 불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약선님은 준비되셨습니까?”
“뭘?”
“별호를 하사하셔야 되지 않습니까.”
진권이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 용봉지회의 심판장은 마지막 책무가 있다. 그건 바로 오룡의 별호를 정해주는 것이다.
각자 특성에 맞춰서 이름을 지어줘야 하는데, 심판장들이 제일 곤란해하는 문제기도 했다.
별호는 강호에서 두 번째 이름과도 같은데, 그것을 짓는다는 부담감이 있기 때문이었다.
저번 기수때는 검선 오유해가 화려한 검법을 보여준 후기지수에게 쾌변룡(快變龍)이라는 별호를 지어줬는데, 후에 다른 뜻으로 불리는 걸 듣고 굉장히 미안해 했다고 한다.
그만큼 부담이 가는 일일 텐데, 뜻밖에도 화종도는 유유자적했다.
“뭐, 대충 생각해놓은 건 있어. 적어도 황금세가 가주한테는.”
“뭡니까?”
“그거야 비밀이지.”
화종도가 껄껄 웃었다. 진권은 다시 표정이 일그러졌다. 정말 국물도 못 찾은 반발이었다.
*
대기실은 동서로 나뉜다. 내가 있는 곳은 동쪽이었고, 내가 있는 대기실에는 금월상, 나, 선우진, 남궁홍학이 있었다.
남궁홍학은 감히 날 쳐다보지도 못했고, 선우진은 날 흥미롭다는 듯이 봤다. 금월상은 긴장해서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고.
초유열과 대전 이후로 그 반응들은 정말 똑같은 방향으로 한 층씩 심화됐다. 남궁홍학은 내가 조금만 움직여도 움찔하고, 선우진의 눈은 내게 붙어있는 모양이며, 금월상의 목소리는 거의 포달랍궁의 주문을 외우는 것 같았다.
어쨌든 금월상의 주문만 빼면 조용한 곳이라. 난 그 이후 펼쳐지는 용봉지회를 흥미롭게 지켜봤다.
나와 초유열의 대진 이후에는 선우진과 팽차월이었다.
대기실이라 직접 본 건 아니지만, 그들이 뿜어내는 내공만 느껴도 그들이 어떤 투로(套路)를 거쳐왔는지, 어떤 무공을 펼치는지 훤했다.
아쉽지만, 선우진은 팽차월을 압도하는 무위를 지니고 있었다. 분명 더 깊이가 있어 보였는데, 팽차월은 거기까지 끌어내지 못했다.
금월상은 손을 깍지껴서 모으며 부르르 떨고 있었다.
“목환아. 형 이길 수 있겠냐?”
“네.”
“그렇게 영혼 없이 말하지 말고.”
금월상은 대체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걸까. 난 객관적으로 답한 것이었다. 금월상의 상대는 팽상문. 내가 생각할 때는 금월상과 팽상문은 무공의 묘리가 비슷하다. 중과 패.
그러면 힘이 더 강한 쪽이 유리한데, 금월상이 팽상문보다 힘이 강했다.
“질 것 같은데.”
“그렇게 마음 먹으면 질 수도 있고요.”
“에잇, 갔다오마.”
난 사실만 말했다. 금월상은 그렇게 나가서 팽상문을 이겼다.
용봉지회는 그렇게 빠르게 진행됐다.
승자는 나, 금월상, 양초원, 선우진.
패자는 초유열, 팽차월, 팽상문, 남궁홍학.
다음은 좀 복잡하다. 승자끼리 붙여서 순위를 나눈다. 승자 네 명에서 두 명은 비무를 하기는 하나, 둘 다 오룡으로 인정된다.
승자조 패자 두 명은 각자 대진을 해서 삼, 사위를 나누고, 패자도 자신들끼리 경기를 해서 순위를 나눈다.
대체 몇 개의 입김이 들어갔는지 모를 정도로 복잡한 규칙이었다. 이 정도면 사람들이 일부러 이해하지 못하게 꼬아놓은 것만 같았다.
“목환아. 네 상대가 양 소협이지?”
“네. 사질입니다.”
“큼.”
해남파의 양초원은 정말 소리 없는 강자라고 생각했다. 근데 알고 보니 나 빼고 다 아는 신진고수였다. 폐관수련의 여파가 아직 남아있기는 했다.
“목환아. 형 이길 수 있겠냐?”
나는 그 말에 멈칫했다. 내 상대가 양초원이면, 당연히 금월상의 상대는 선우진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선우진은 강했다. 금월상보다는 말이다. 난 잠깐 눈을 몇 번 깜빡거리고 말했다.
“이긴다는 마음을 가지면, 이길지도 모르죠.”
“···그건 또 뭔 대답이냐?”
사실이긴 하다. 이길지도 모른다는 건, 이기든 지든 성립되는 말이니까. 그래도 나 역시 처음 말하는 방식이라서 어색했다.
금월상은 찝찝해하면서도 나갔다. 사실 이제 용봉지회는 상관없었다. 난 오룡이 누가 될지 정확히 파악했다. 실력이 비슷한 것 같아도 각자 무공의 상성, 성격을 대보면 순위는 쉽게 나왔다.
이미 내 안에서 용봉지회는 끝났다.
본디 애초에 내게 중요했던 건 끝난 다음이었다.
난 오른쪽 허리에 메고 있는 철(凸)모양의 칼자루를 툭툭 건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