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만날 사람
130화 만날 사람
진권은 당황한 듯했다. 여기서 약선이 나올 줄은 생각지도 못한 것 같았다. 진권은 화종도가 진심인지 아닌지, 눈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왜, 나로는 부족한가?”
화종도가 말했다. 진권은 고개를 저었다.
“삼선 중 한 분이신데, 부족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래, 그럼. 신원 보증은 됐으니 만년한철만 조사해보면 되겠군.”
화종도의 보증 때문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내 입장에서는 뜻밖의 행운이었다. 올해 용봉지회 심판장이 약선 화종도였고, 난 옛날에 화종도의 무공을 배웠기에 그의 관심을 받은 거다.
원래라면 내가 칼자루를 보여준 다음, 그들을 설득할 시간을 거칠 예정이었다. 그 시간이 완벽하게 사라진 거다.
“···그래, 그럼. 이번 건은 형산파부터 조사해봐야겠군. 과거 마교의 간자 명단 건도 다시 한 번 재검토해보고 말이야.”
결국 진권이 두 손을 들었다. 그 말로서 내가 여기 온 목적은 전부 달성한 셈이었다.
그렇게 긴 대화가 마무리 지어졌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말이다. 허나 그건 내 사정이고,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목적은 이 대화가 아니었다.
“···뭐, 그건 차차 얘기해보면서 진행하도록 하지. 오늘 이런 얘기를 하려고 모인 게 아니니까. 일단 신물부터 고르세.”
멍하니 우리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아이들의 눈빛이 바뀌었다. 진권은 일어나서 구석으로 향했다. 붉은 융단이 걷어졌다. 그곳에는 목함 여덟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자. 이게 용봉지회의 부상인 신물이라네.”
진권은 자랑하듯 말하며 목함이 하나씩 열었다. 한 눈에 봐도, 신물들은 괜히 신물들이 아니었다. 애초에 잘 만든 검이니 명예로운 역사를 담을 수 있게 된 거다.
우리는 목함을 열릴 때마다 소개를 신물에 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는데, 실질적인 성능이 아닌 역사 이야기라서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아무튼 여덟 개의 신물은 상무검(霜霧劍), 박명주(薄明珠), 현법단의(現法單衣), 천개궁(天開弓), 비위대도(丕衛大刀), 소하고검(素河古劍), 흑철상치(黑鐵象齒), 자하선광검(紫霞宣光劍)이었다.
들어본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다. 특이한 점으로는 자하선광검은 대놓고 화산파의 신물이었다. 진권도 이걸 소개하면서 민망해하는 걸 보니, 초유열이 당연히 일등을 할 줄 알고 준비해놓은 신물 같았다. 도리어 초유열의 표정에는 오히려 별 미동이 없었다. 사람들은 모르지만, 초유열은 문파에 대한 애정이 별로 없는 친구였다.
옆을 슬쩍 바라보니 다른 아이들의 눈도 초롱초롱했다. 허나 그에게는 일단 선택권이 없었다. 맨 처음 선택권은 내게 있기 때문이다.
“그래, 가주. 먼저 고르게나.”
진권이 말했다. 약선과 진권을 포함한 모든 사람의 시선이 몰리는 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한 얘기를 떠나서, 내가 뭘 선택할지는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전 선택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기대하고 있던 모든 사람들의 눈빛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하북팽가한테 제 선택권을 양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음.”
진권이 침음을 흘렸다. 그 말의 뜻은 명백했다. 낙양에 떠돌았던 질문. 하북팽가와 황금세가는 어째서 같이 다니는가. 그 질문이 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으니까.
진권은 딱히 뭘 묻지 않고 넘어갔다. 아까 약선의 보증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이리라.
난 그래도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아 물었다.
“신물의 권한을 넘기는 게 문제가 되는 건가요?”
“···흔히 있는 일이지. 팔아서 돈으로 달라고 하는 곳도 있어.”
“그럼 괜찮겠군요.”
팔아서 돈으로 달라는 건 뭘까. 재정이 부족한 문파였나보다. 난 바로 넘어가려고 했다. 허나 진권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어차피 남으니까 하나 더 선택하게.”
난 진권을 바라봤다. 다른 아이들이 놀라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한 사람이 신물을 두 개 받는 경우는 용봉지회 역사상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역대 용봉지회에서 한 명도 선우진 같은 사람도 없었다. 남은 하나는 소림사에서 회수할 줄 알았는데, 굳이 내게 주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냥 남아서 주는 건 아닐 터다. 진권의 눈빛은 침착했다. 이건 소림사가 건네는 손이었다. 또한 아직 불안한 진권의 믿음이었다. 난 그러니 겸양의 이유로 그것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러죠.”
난 앞으로 가서 물건들을 쭉 살펴봤다. 눈을 좁혀서 살펴보고 있자니, 화종도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딱 좋은 물건 고르려는 상인의 눈이군.”
맞다. 난 좋은 물건을 고르려 하고 있었다. 이왕이면 쓸모있는 물건을 가져가고 싶었다.
허나 내가 가져갈 건 애초에 그렇게 많지 않았다. 왜냐하면 난 이미 송로라는 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송로는 다른 검들을 보고 경계하고 있었다. 허리춤에서 타고 올라와 내 머리로 진동이 느껴진다. 태을헌원신공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반응을 보여주던 송로다. 팔 성인 이제는 대충 느낌만 봐도 알았다.
그럼 무기를 제외하고. 내게 남은 건 박명주, 현법단의였다. 박명주는 신수들이 잘 쫓아오는 빛을 뿜어댄다고 했고, 현법단의는 만독불침의 약이 안팎으로 도포된 옷이라고 했다.
난 별 고민 없이 현법단의를 집어들었다.
“이걸로 하죠.”
사실 박명주를 고를까도 했지만, 어떤 사람이 박명주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어서 그냥 놔뒀다.
“현법단의라. 좋지.”
진권이 말했다.
생각해보면 나와의 상성도 현법단의가 더 맞았다. 왜냐하면 나는 혼자 다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또한 얇은 홑옷이라 안에 덧대어 입을 수도 있어서 유용하기도 했다.
물론 독이 내 몸에 침투한다고 해도 내가 어느 정도는 정화할 수 있지만 아예 안 들어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강호에서는 눈 깜빡할 그 순간에 생사가 정해지니 말이다.
그 이후, 아이들은 신물을 선택했다. 내 다음 순서인 갈유월은 망설임 하나 없이 박명주를 택했다.
눈에 떠다니는 걸 보니 뭔가 신수라는 것에 굉장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당장 무림맹 비연각에 있는 철취신응도 신수인데, 그건 알고 있는지.
그 이후 한유림은 상무검을, 금월상은 비위대도를, 양초원은 소하고검을 가져갔다.
다른 이들도 각자 알아서 자기가 원하는 걸 가져갔다. 물론 원하는 걸 못 가진 사람도 있었다. 마지막 순서인 남궁홍예는 천개궁을 가지게 됐으니 말이다.
“자, 그럼 모두 축하하네. 그리고 황금세가 가주는 얘기 좀 더하다 가지.”
진권이 재빠르게 마무리를 지었다. 나도 그렇고, 그도 그렇고 아직 우리에게는 남은 이야기가 많았다.
*
황산모봉. 아마 세상에서 그들만큼 질 좋은 황산모봉을 마시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황산모봉은 안휘의 특산물이고, 남궁세가는 안휘의 주인이기 때문이었다.
“그래, 천개궁이라. 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홍예야.”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없지. 삼봉 안에 든 것이 얼마나 큰 자랑이냐.”
남궁선우가 말했다.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어차피 오대세가 정도 되는 명문은 가문의 창고에도 신물이 몇 개씩은 있다. 천개궁도 이백 년 전 궁신으로 불렸던 일발통관(一發通貫) 이세량의 유물이었지만, 남궁세가 입장에서는 창고 물품이 하나 늘어난 것에 불과했다.
그보다 중요한 건 어떤 말들이 오갔냐는 거였다. 금목환은 마지막에 마교 간자 조사에 협력을 하라고 했으며, 오대세가로 올라가겠다는 말까지 했다.
다른 세가들은 뒤의 말이 더 신경 쓰였겠지만, 남궁선우는 앞의 말이 더 신경 쓰였다.
이호는 금목환의 허리춤에서 붉은 칼자루를 확인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금목환은 어째서인지 몰라도, 붉은 칼자루가 마교의 것임을 예상하고 추적하는 게 분명했다.
만약 알았다면 폐회식에서 얘기를 했을 거고, 몰랐으면 버리거나 소림사에 떠넘겼을 거니까.
“그래, 그럼 거기서 들은 걸 얘기해보려무나.”
남궁선우가 말했다.
신물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금목환과 어떤 식으로든 얘기가 나눠졌을 게 분명했다. 진권은 소림사의 수장으로 그 발언을 안 짚고 넘어갈 수 없었을 터.
남궁홍예는 있었던 일을 토씨하나 빠뜨리지 않고 말했다. 금목환이 붉은 칼자루를 왜 마교의 것이라 의심하고 있는지, 어떻게 할 생각인지도, 약선이 그에게 신뢰를 보였다는 것도, 진권이 금목환에게 신물을 하나 더 선택하라고 했던 것도 말이다.
다 들은 남궁선우는 황산모봉을 한 모금 물었다. 예상보다 금목환은 본격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냥 혼자서 혈기에 불타서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참으로 신기한 아이다. 나이가 어린 걸 떠나서, 그런 성과가 가능할까. 남궁선우는 꽤 전부터 금목환이라는 사람에게 무수한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에서 제일 궁금한 게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약선을 어떻게 꼬셨을까.’
삼선 중에서도 제일 자유분방한 성격의 약선에게 신뢰를 받고 있다. 그건 대단한 일이었다.
“일단 알았다. 홍예야. 그만 가보거라.”
“네, 아버님.”
“조상신님께 기도 꼭 올리고.”
“네.”
남궁선우는 남궁홍예를 돌려보냈다. 남궁홍예는 이제 간이로 만들어진 제단에서 기도를 올릴 것이다.
물론 마신의 제단인 건 아직 모른다. 나중에 있을 기도에 익숙하게 해주기 위해 시키는 것이었다. 이렇게라도 마신에게 공덕을 돌려야 사후에 마신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으니.
남궁홍예가 나간 후, 누군가 천장에서 훅 떨어졌다. 온 몸을 검정으로 감싼 것이 딱 양상군자의 상이었지만, 남궁선우는 놀라지 않았다.
“이호.”
“네.”
“형산파를 버릴 준비를 하게.”
“준비해놓겠습니다.”
어차피 이런 상황이 올 수도 있기에 형산파를 대용으로 쓴 거다. 형산파가 마교에 관련되어 있다는 증거를 만드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작은 마신의 석상 몇 개 던져놓거나, 마신을 향한 찬양이 담긴 종이를 몇 개 던져놓으면 된다. 유치한 방법이지만 그것만큼 확실하고 잘 통하는 방법도 없었다.
형산파를 버리는 건 어차피 늘 있던 일이다. 여기서도 근본적인 문제는 금목환이었다. 남궁선우는 곰곰이 생각하다 말했다.
“더 힘들어지기 전에 죽여야 할까?”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럼 지금 하는 일 다 멈추고 금목환을 죽이는 데만 집중해. 기회가 있을 땐 즉시 사살하고, 기회가 없으면 기회를 만들어서라도 죽여.”
“네, 알겠습니다.”
“가봐.”
남궁선우의 말에 이호가 사라졌다. 남궁선우는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금목환은 뛰어난 녀석이었다. 그건 알 수 있다. 그러나 너무 많이 자신을 드러내는 건 실착이었다. 모난 돌이 정을 맞는 건 상식이었다.
*
우리는 그 이후로도 많은 얘기를 나눴다. 보통은 내 얘기였다. 내가 무림맹, 해남파, 하북세가와 엮인 이유를 차근차근 풀어갔다.
난 그냥 사실을 말할 뿐인데, 그들은 나를 새삼스럽게도 바라보았다.
“그걸 자네가 전부 했다고?”
“네.”
이젠 너무나 과거의 일. 내가 무림맹주와 담판을 짓고, 형산파를 수비하고, 해남파에서 검을 보여주는 것이 그들에게는 처음 듣는 얘기라 신선하게 다가가는 모양이었다.
“아주 재미있는 인생을 살고 있군.”
“그런가요.”
진권은 내 짧은 대답에 쓴웃음을 지었다. 나에게 익숙해지려면 좀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그럼 일단 칼자루 조사는 확실하게 해보겠네. 자네는 이제 집으로 돌아갈 거지?”
“그래야죠.”
“언제쯤 갈 예정인가?”
내 말에 진권 대신, 화종도의 물음이 이어졌다. 진권은 자신의 말을 가로채인 탓에 얼굴을 찌푸렸지만 뭐라하지는 못했다.
“글쎄요. 그래도 좀 쉬었다 가야죠. 만날 사람도 있고.”
“만날 사람?”
화종도가 되물었다. 적어도 이것 하나만큼은 지금 정리하고 가야 했다.
“누구?”
“형산파 장문인입니다.”
바로 형산파와 우리의 뿌리 깊은 은원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