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안휘대회전(安徽大會戰) (4)
148화 안휘대회전(安徽大會戰) (4)
‘저 노인네. 드디어 기어나가는군.’
남궁선우는 속으로 생각했다. 남궁연화는 본인이 나가고 싶을 때 나간다고 했는데 그게 지금인 것이었다.
나름 괜찮았다. 반대에서 나온 사람은 황금세가의 직계. 물론 어린애 치곤 강하기는 하다만, 남궁연화에게 이기는 건 불가능했다.
당장 남궁연화는 지금 본인과 붙어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는 사람이니.
작고 왜소한 등과, 하나로 묶은 하얀 머리칼이 보인다.
남궁연화. 가문의 가장 큰 어른이라 제일 불편한 존재 중 하나였다. 다른 원로들과 달리 가문 운영에 간섭하지도 않으니 편해야 했지만, 왠지 그녀가 엮여있으면 불편했다.
공터는 긴장감으로 감돌았다. 참관인들도 자세가 바로 됐다. 남궁연화면 웬만한 사람들에게는 선배인 거다.
남궁선우는 방금까지만 해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금목환을 찾고 있었지만, 이제는 안 찾기로 했다. 여기서 이기면 승기는 남궁세가 쪽으로 기운다.
“시작.”
진권의 말과 함께 비무가 펼쳐졌다. 그러나 아무도 출수하지 않았다. 금월상은 당연히 자신보다 고수이니 수세를 취했지만, 남궁연화는 아무 행동도 없었다.
“아이야.”
남궁연화가 입을 열었다. 뜻밖이었다. 원체 과묵한 남궁연화였기 때문이다.
“네.”
“기권하거라.”
금월상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당연하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괜히 하는 말이 아니다. 지금 무르면 회전 자체를 끝내줄 터다.”
남궁연화의 말에 남궁선우가 퍼뜩 머리를 들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란 말인가. 금월상의 표정은 아리송해졌다.
이제 황금세가에게 남은 고수는 금월상보다 다 하수다. 구석까지 몰아넣은 상황에서 풀 필요가 없는 자비였다.
“무슨 꿍꿍이십니까?”
“꿍꿍이가 아닌 부탁이다. 너희들은 정파를 위해 아직 짓밟아서는 아니 되는 싹이다. 이대로 회전을 계속하면 너희 세가는 그간 힘들게 올려놨던 명예를 일거에 잃을 거라.”
남궁연화의 나지막한 말에 모두가 당황했다. 역시 제일 당황한 건 남궁선우였다. 갑자기 저 노인네가 남궁세가 대신 황금세가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고모할머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남궁 가주. 경고요. 비무에 끼어들지 마시오.”
진권이 말했다. 어쨌든 이들끼리 나누는 대화도 비무의 일종이다. 그러니 외부인이 간섭해서는 안 됐다.
“전 절대 기권하지 않습니다. 죽여 보려면 죽여보시지요.”
금월상은 강뢰도법을 운용했다. 도에 강기가 모이면서 강환(剛丸)이 부딪치면서 쿠릉거렸다. 남궁연화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너희들이 걱정하는 바도, 최대한 좋게 해결해볼 테니.”
“···그게 무엇이신지는 아십니까?”
“알고 있다.”
남궁연화의 말에 분위기가 싸해졌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는 것. 황금세가는 남궁세가 내에 간자가 있다고 말한 것이었다. 그리고 남궁연화는 그걸 긍정했다.
“저희가 그걸 어떻게 믿죠?”
“믿는 건 네 몫이지, 내 몫이 아니다.”
남궁연화가 차갑게 끊어냈다. 금월상은 입술을 비틀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헛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금월상 역시 남궁세가와 마교의 관계에 대해서 정확히 모르지만, 여기서 기권할 수는 없었다.
“거절하겠습니다.”
“권주 대신 벌주를 마시는구나. 굳이 말리지는 않으마.”
남궁연화가 그 말을 남기고, 신형을 흩뜨렸다. 곧 금월상 뒤에서 남궁연화가 나타났다.
쾅!
도와 검이 맞부딪치며 비무가 시작됐다. 모두의 눈이 번쩍 떠졌다. 아무도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비무가 흘러가는 것이었다.
*
늦었다. 내 머릿속에서는 그 생각밖에 없었다. 한 달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앉아서 운기조식만 했다. 그만큼 새로운 기의 출현은 내게도 위험했었다. 무작정 받아들이기에는 이게 어떤 기인지 몰랐으니, 결국 탐색을 하고 분석해봐야 했다.
결과는 마기와 비슷했지만, 마기는 아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마기와 똑같다고 생각할 터이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내 몸에서 휘돌고 있는 진기는 태을헌원신공. 마기와 만났으면 분명 역(逆)의 반응이 있었을 터다. 그럼 이 기의 정체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걸 모르니, 일단 하단전에 갈무리만 해놓았다. 그 시간이 한 달이 걸린 거다.
마기와 비슷한 그 기는 안에 깊숙하게 있어 진원지기와 똑같은 순수함을 지니고 있었다. 순수함으로 따지면 태을헌원신공보다 더 순수했다. 바깥에서 걸러서 들어온 것과, 안에서만 뭉쳐있던 것. 무엇이 더 깨끗할지는 뻔했다.
“···황산이라.”
내가 아는 이 기의 특징은 음유하다는 것이었다. 마기와 비슷하니 당연했다.
그것은 방축귀매신법과 극상의 궁합이라는 말이었다. 태을헌원신공은 모든 무공과 어울리고, 특히 도가무공과 어울린다. 하지만 방축귀매신법은 은밀하고 빠르다. 당연히 음유한 내공이 더 어울릴 수밖에.
그래서 팔 성에 머물러있던 방축귀매신법이 바로 극성으로 올라버렸다.
쉬익ㅡ!
팔 성과 십 성, 즉 극성의 차이는 명백했다. 일 성과 팔 성의 차이보다, 팔 성과 구 성의 차이가 더 크고, 구 성과 십 성의 차이가 더 큰 것 같았다.
웬만큼 단련된 나도 신법을 운용하다가 바닥에 고꾸라져 흙을 뒤집어쓰기도 했을 정도니까.
난 황산에 도착했다. 이미 회전은 시작됐을 터다. 그래도 끝나지는 않았을 시간이리라.
황산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지키고 있었다. 일반 사람들을 올려 보내지 않기 위해 둘러놓은 게 분명했다. 난 다가가면서 소리를 쳤다.
“황금세가 가주다. 황산으로 올라가겠다!”
“신원을 확인해야 하오!”
이제는 가까워진 목소리. 난 그 목소리를 듣고 대답하기를 포기했다. 신원을 확인 받고 있을 정도로 시간이 여유있지 않았다.
날 막으려 했던 사람들의 옷깃이 내 옷깃과 맞닿아 스쳤다. 그들은 어리벙벙한 눈으로 뒤를 봤다. 이렇게나 빠를 줄 몰랐다는 눈빛이다.
“잠깐! 거기···!”
난 그들의 말을 황산 안에서 들었다. 무인들은 바로 출수하고 내게로 달려들었지만, 그들보다 내가 느릴 리가 없었다.
펑!
누군가가 하늘에 불꽃을 쏘았다. 여기에 침략자가 있다는 뜻으로 썼겠지. 바로 주변에 무인들이 몰려들었다. 황산의 보위는 그야말로 철저했다.
“주살하라!”
이제 누구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들에게 나는 그저 불순한 의도를 가진 주살 대상이었다. 어차피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다 해결될 것이었다.
쉬쉬쉭!
철새들이 단체로 나는 소리가 들렸다. 난 하늘을 바라봤다. 하늘을 덮은 건 새들이 아니라 암기들이었다.
만천화우(滿天花雨). 여기에 당가의 고수도 있는 모양이었다. 암기 하나하나에 강기가 담겨 있었다. 벽력탄 정도로는 비교도 안 되는 파괴력일 터였다.
심지어 나를 그나마 쫓아오는 건 술에 취한 것 같은 신법이니, 개방의 사람들이었다. 회전의 보호는 생각보다 삼엄했다.
콰콰콰쾅!
이러면 결국 뚫고 나갈 수밖에. 나는 암기들을 쳐내며 길을 만들고, 그 길로 쏘아져나갔다. 내공을 함부로 써서 괜히 본 싸움에서 힘을 내지 못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난 그만큼 빨리 가야 했으니까.
촤촤촥!
내가 있었던 곳에 암기가 정렬되어 꽂혔다. 숲에서 검들이 불쑥 튀어나온다. 난 그것들을 모두 쳐내며 올라갔다. 그야말로 도산검림(刀山劍林). 그 와중에도 내 발걸음은 지체된 적이 없었다.
“위를 틀어막아라!”
누군가가 크게 명령했다. 확실히, 내 목적은 회전이 열리는 봉우리다. 넓은 산 아래보다 좁은 산 위를 막으면 막기 더 쉬우리라는 판단이었다. 좋은 판단이었다.
상대가 내가 아니라면 말이다.
좌우에서 경파들이 빠르게 날아왔다. 난 바로 근처에 있는 굵은 나뭇가지를 잡고 반 바퀴를 돌았다. 옷의 등 쪽이 찢어졌다.
내가 가지를 잡고 빙글 돌아, 마치 거꾸로 서있는 것 같은 형태가 될 때도 공격은 멈춰지지 않았다. 바로 사방에서 암기가 날아온 것이다. 난 잡은 나뭇가지에서 손을 떼고 송로를 휘둘렀다.
티티팅!
사방에서 날아오는 암기들이 내 휘두른 검에 내 주변에 꽂혔다. 내 주변은 이미 암기로 만든 돌부리 같은 것이 솟아올라와있었다.
귀에서는 한사코 떨어지지 않는 바람이 분다. 계속해서 움직이니 쉴 새가 없었다.
“뭐야, 저 새끼는···!”
“괴물이다!”
“위에다 알려!”
이쯤 되면 그들도 내가 심상치 않은 사람인 걸 안 것 같았다. 난 바로 포위진을 일점돌파했다. 겹겹이 있는 빗장처럼 사람들의 겹은 많았지만, 어차피 뚫고 나가는 건 한 부분이면 충분했다. 그리고 난 상단전의 기감으로 포위진의 어느 부분이 약한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포위진이 뚫린 사람들이 어수선거리며 나를 쫓아왔다. 내 뒤로 황산의 무인들이 계속 따라왔다. 조감해서 보면 마치 내 등이 무인들을 빨아 당기는 듯 보일 터다. 거의 모든 황산의 무인들이 나 하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내가 밟는 곳마다 땅이 파이고 나무가 부러진다. 그 정도로 난 힘을 마구 쓰면서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 하단전에 있는 정체모를 내공으로 보충이 됐다.
쿠구궁!
그렇게, 난 황산을 무너뜨릴 기세로 봉우리까지 올라왔다. 저 멀리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난 바로 위로 도약했다.
당연히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고수들이기에 나를 느낄 수 있었다. 저 멀리 금월상이 조그맣게 보였다.
금월상은 심상치 않은 사람과 비무를 하고 있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작은 할머니였다. 하지만 난 그녀에게서 엄청난 거력을 느꼈다. 금월상은 상대도 안 될, 거력이었다. 회전은 살상이 허용되는 곳. 난 생각할 것 없이 바로 검병을 어깨 뒤로 넘기고, 연무장으로 쏘아냈다.
쐐액!
검은 빛살 같은 속도로 날아갔다. 사람들은 갑자기 나타난 나 때문에 혼란스러웠는지 검을 막을 생각도 못했다.
쾅!
저 멀리 땅에 꽂힌 검신과 검병이 좌우로 부르르 떨렸다. 상대와 금월상이 나뉘어졌다.
“그만! 황금세가 가주 금목환이다!”
내 말이 황산 봉우리에 울렸다. 거리가 있어 내공을 담은 육합전성을 썼기 때문이다.
아마,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서 내가 가장 크게 내본 목소리일 것이었다.
“신원 불상의 사람입니다!”
내 뒤에 사람들이 우르르 따라왔지만, 난 이미 황금세가가 있는 쪽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그들은 내가 누군지 알았다.
“가주님!”
“오셨군요.”
나를 제일 먼저 반긴 건 금원대였다. 그렇게까지 반응이 극적이지는 않았다. 어차피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느낌이었다. 낭인들이야 날 잘 모르니 좀 놀랐을 거다.
뒤이어 따라온 사람들은 황금세가 사람들 앞에서 닭 쫓던 개가 돼버렸다. 정말 내가 황금세가의 가주인 줄은 꿈에도 몰랐을 터이니까.
“형님!”
난 바로 비무장으로 달려갔다. 남궁세가의 할머니와 금월상은 내 검을 중심으로 갈라져 있었다.
“어, 그래. 왔구나.”
그러나 금월상은 떨떠름하게 받았다. 나도 떨떠름했다. 왜냐하면 금월상이 아무 데도 다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형님, 괜찮으세요?”
“···어. 괜찮지.”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 저 앞에서 상황을 지켜보는 할머니는 초고수였다. 난 당황하면서 금월상의 내공을 살펴봤지만, 정말 별 문제가 없었다.
“이번 비무는 실격으로 황금세가의 패배요.”
난 중앙을 홱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소림사 방장 진권이 있었다. 실격으로 인한 패배라. 실격 이유는 확실했다. 내가 중간에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남궁세가의 할머니는 나를 살짝 훑어보더니 바로 등을 돌려 돌아갔다.
“목환아. 지금 우리가 회전에서 밀리고 있는데···”
금월상이 걱정스럽다는 듯 말을 흐렸다. 당연했다. 난 우리 세가가 남궁세가와 정면으로 붙어서 이길 건 아예 생각하지도 않았다.
“괜찮습니다.”
살짝 늦긴 했지만, 아주 늦은 건 아니었다. 황금세가가 있는 쪽을 쭉 둘러보니 사상자도 없는 듯했다.
난 바로 남궁세가 쪽을 바라봤다. 하단전이 있는 부분이 살짝 땡겼다. 이건 마기와 비슷한 성질을 가지고 있기에, 끌리는 느낌이 나는 것이었다.
그렇다는 건, 난 이제 마교의 간자를 탐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됐다는 의미였다.
난 남궁세가를 쭉 훑어봤다. 그리고 난 어느 한 지점에서 눈을 멈췄다.
남궁선우. 남궁세가의 가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