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움직여야 할 때
152화 움직여야 할 때
당연하지만 남궁연화는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늘 침착했던 남궁연화도 이렇게 빨리 깨질 건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어떻게···”
“진법은 꽤 잘 알고 있어서요.”
남궁연화의 떨리는 목소리를 잘랐다. 무슨 진법인 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동안 내 상단전 역시 많은 성장을 했고, 원체 진법의 흐름을 잘 보던 내게는 이제 어떤 진법도 통하지 않았다.
방금 게 무슨 진법인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난 적어도 진법에 관해서는 무초(無招)의 경지에 오른 거다. 초식이 몸에 완전히 배어버린 경지.
“시험은 끝났나요.”
난 물었다. 흙 속에 파묻혀있던 나무 막대기들이 불쑥 튀어나와 엎어져 있었다. 진법을 구성할 때 썼던 것들 같다.
남궁연화는 내 시선을 따라 그것들을 같이 봤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역시 성주님이 관심을 가질만한 자로구나.”
“그 성주라는 사람은 누구죠?”
“당연히 알려줄 수 없지.”
남궁연화가 말했다.
“나도 모르거든.”
그럴까. 난 남궁연화가 거짓말 할 필요성은 없다 생각했다. 그러나 남궁세가의 원로원주 정도면 천주성에서도 나름 자리가 높을 터. 근데 천주성주가 누군지도 모른다라.
“따라오거라. 한 말은 지켜야지. 그게 정파의 사람이니 말이야.”
남궁연화는 산장 속으로 들어갔다. 진한 갉색의 목책은 그렇게 높지 않아서 아이들도 뛰넘을 수 있을 정도였다. 사실상 진법이 울타리의 역할을 하니, 이 목책은 아이들이 놀라고 만들어 놓은 것일 테다.
산장 안은 바깥과 마찬가지로 깔끔했다. 천장이 높고 방도 굉장히 넓었다. 눈에 띈 건 문을 열자마자 맞은편에 있는 선반들이었다. 가서 보니 각 선반마다 테두리에는 이름이 작게 음각되어 있었다.
“어차피 여기 오는 사람은 적어서, 선반을 나눠서 쓰고 있지. 낚시를 하는 사람들은 낚싯대를 가져다 놓고,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술을 가져다놓는 식이야.”
남궁연화의 선반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뿐이랴. 남궁선우, 남궁홍학, 남궁홍예의 선반에도 아무 것도 없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고, 유일하게 선반에 무언가가 있는 건 남궁진혁이라는 이름의 사람이었다.
그의 선반에는 어린 아이들이 놀법한 목마, 인형, 줄로 묶인 공들이 있었다. 유치한 취미를 가진 사람인 걸까.
“그건 선우와 선용이, 선혜가 어릴 때 가지고 놀았던 장난감들이지. 주책이지. 살아있었다면 치우라고 했을 텐데, 죽어버려서 그냥 놔두고 있지.”
난 고개를 돌렸다. 남궁연화가 어느새 차를 끓여서 내게 가져다줬다. 찻잔은 깔끔하고, 차의 향기는 훌륭했다.
“재미없는 구경이야.”
“그렇군요.”
남궁선우, 선용, 선혜라고 했다. 선용이라는 사람은 안다. 그때 무림맹으로 남궁 남매를 데려온 사람. 남궁선우에게 참형을 당한 사람. 그러나 선혜라는 사람은 몰랐다.
“선용이는 알 거고, 선혜는 어릴 적에 죽었지. 저기 앞 계곡에서 선우가 빠졌는데, 그걸 구하러 들어갔거든. 결국 선우는 구하고 자신은 죽었지.”
“그렇군요.”
“그 당시에는 나도 엄청 울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괜찮게 죽었어. 순수함을 가지고 죽을 수 있었으니.”
남궁연화는 내 궁금증을 꿰뚫어본 듯 말해줬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가족의 비극이다. 굳이 물을 필요도 없고, 묻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내가 반응이 없자 남궁연화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선우가 마교도인 걸 알아챈 건 그 아이가 가주가 된 이후야. 본 성의 정보로 역추적을 해서 나온 결과지. 뭐, 생각해보면 선우는 옛날부터 마교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어. 마교의 교리를 읽으면서 혐오스럽다기보다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거든. 내가 그 아이에게 마교의 무서운 점에 대해서 교육을 했으니. 난 그냥 어린 아이의 호기심이라고 봤는데, 잘못 본 게지.”
“그렇군요. 애초에 마교도의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었다는 건가요.”
“크게 놀랄 일은 아니야. 지금도 감숙과 신강 경계에는 목숨을 걸고 넘어가는 사람들이 있어. 마교의 교리가 그렇게 매력적이었나보지. 그러나 신강에서 감숙으로 넘어온 사람은 아무도 없지.”
신강에서 감숙으로 넘어온 자가 없다라. 그 말은 뻔했다. 들어가면 자의적으로 나올 수는 없다는 얘기였다.
남궁연화는 말을 이었다.
“왜 내가 그 녀석이 마교도인 걸 안 밝혔냐고 했지? 그 정답은 내가 이미 말했어.”
난 잠깐 생각했다. 곧 난 쉬운 결론에 깨달았다.
“남궁세가의 명예가 무너질까봐군요.”
“그래.”
쳐진 피부에 묻힌 그녀의 눈동자가 빛난다. 모르긴 몰라도, 옛날에는 꽤 이지적인 미녀였을 것만 같았다.
“근데 남궁세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천주성을 위해 그리했다 하시는 거겠죠.”
“눈치가 빠르네.”
“의미없는 말을 두 번 반복하실 분은 아니라고 생각해서요.”
남궁연화는 차를 호록 마셨다. 기분탓인가, 나를 보는 눈동자가 살짝 부드러워진 것 같다.
“정확히 말하면, 본 성을 위한 게 아니라 정파를 위한 거지.”
잠깐 잊고 있었다. 천주성이 어떤 집단인지 말이다. 지독히도 정의를 쫓는 집단. 정파다운 정파를 지향하는 곳. 남궁연화 역시 그런 천주성의 일원이었다.
어떤 뜻인지 난 정확히 이해했다. 천주성은 정파를 삼키고자 한다. 그러나 온전한 정파를 삼키고 싶지, 부서진 정파를 삼키고 싶지 않은 거다. 오대세가인 남궁세가가 무너진다면 정파에 심각한 혼란이 예상되지 않은가.
당장 지금 황산 봉우리에 있는 진권과 많은 사람들은 그걸 논의하고 있을 거다. 결국 천주성의 의도와 반대로 남궁세가는 나에 의해 무너지게 됐으니까 말이다.
“그러면 제가 정파에 반한 행동을 한 거군요?”
“아니. 그렇다고는 생각 안해. 그러니까 성주님이 네게 관심을 가지는 거지. 또 애초에 황금세가가 남궁세가가 마교라는 방을 붙일 때부터, 우리는 다른 계획을 생각해뒀어.”
“그러면 추후 남궁세가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래. 난 이제 세가의 사람이 아니니까.”
“아무튼 중요한 건, 그 계획에 제가 있다는 것이겠네요.”
“역시 눈치가 빠르구나.”
난 그때 차를 딱 다 마셨다. 남궁연화도 동시에 찻잔을 비웠다. 그녀가 빙그레 웃었다.
“그럼 저는 언제 가면 되나요?”
“너 편할 때. 성주님은 성 바깥으로 한 발자국도 안 나가시거든.”
“네. 그렇군요,”
“납득이 빠르구나.”
남궁연화가 웃었다. 어차피 말은 이렇게 해도 갈 때는 정해져 있다. 신단회가 끝나고 가면 되겠지. 그리고 그때즈음에 시기적절하게 천주성을 주축으로 커다란 폭풍이 한 번 불 거기도 했고.
이제 얘기할 건 전부 한 것만 같았다. 난 바로 그 자리를 일어나려 했다. 그때, 남궁연화가 입을 열었다.
“잠깐. 줄 게 있다.”
남궁연화는 품에서 작은 함 하나를 꺼냈다. 적색으로 되어 있는 함에서는 상서로운 향기가 퍼졌다. 함에는 어떠한 장식도 되어있지 않았지만, 도리어 그것이 더 고급스러워보였다.
남궁연화는 내게 그것을 건넸고, 난 받았다. 굳이 준다는 데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무슨 물건인지 여쭤봐도 되나요.”
“혈기린반지(血麒麟斑指).”
난 열어보려다가 손을 멈췄다. 남궁연화를 바라보니, 남궁연화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혈기린반지. 전설의 독공 고수, 혈기린이 남긴 유명한 반지다. 그 반지에서는 끊임없이 독이 뿜어져 나오는데, 그 독은 혈기린 무공의 정수가 담겨있다고 했다.
지금까지 혈기린반지를 가져온 사람들은 그 독을 분석하려다, 도리어 독에 중독되어 죽었다. 주인을 전부 죽이는 반지. 그야말로 귀물(鬼物)이었다.
이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던지.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혈기린의 독공을 전수받으려 했다. 물론 성공한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말이다.
“이게 천주성에 있었군요.”
“아니. 남궁세가에 있는 거였지. 성주님이 아닌 내가 주는 거다.”
“왜 주시는 거죠?”
“이제 남궁세가는 이걸 가질 자격이 없어졌거든.”
남궁연화가 조용히 말했다. 자격이라. 표정이 엄숙하니, 무슨 자격인지 물어봐도 안 말해줄 것 같았다.
그나저나 이걸 선물이라고 해야할까. 어떻게 보면 그냥 대놓고 하는 암살이 아닌지.
허나 그래도 선물이라고 납득하기로 했다. 독이 계속 뿜어져나오는 이 기묘한 반지는 당당히 중원칠종신기에 이름을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중원칠종신기 중 두 개를 가진 셈인가···’
신옥주하고 혈기린반지.
두 개다 얻을 생각도 없었는데 이렇게 굴러들어왔다. 물론 신옥주와 달리 해가 되는 신기지만 말이다. 그러나 해가 될지, 익이 될지는 두고 볼 일이었다.
난 함을 품에 챙기고, 남궁세가의 산장을 벗어나 황산의 봉우리로 다시 향했다.
*
당연히 남궁세가는 회전이 끝나자마자 세가의 모든 비처를 개방해야 했다. 진권의 지시 아래 급하게 조직된 조사반은 하나씩 간자 행위의 실질적 증거를 하나씩 찾아냈다.
그리고 그렇게 수면 위로 떠오른 남궁선우의 행위들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정파의 정보 조직들이 쓰는 안가들의 위치를 전송하기도 했고, 현재 삼선, 칠존, 십왕의 위치를 계속 추적하여 보내기도 했으며, 군소문파들끼리의 싸움을 부추겨 멸망시키도 했고, 멀쩡한 세가를 마교로 몰아 멸문을 시키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최근에 한 행동은, 정파상생기금이라는 공동의 기금을 횡령하여 신강으로 몰래 보냈다는 것이다.
그건 도저히 숨길 수도 없는 크기의 사건들이었고, 결국 남궁선우가 했던 행동들이 중원에 낱낱이 밝혀졌다.
- 남궁세가에게 무기한 봉문형에 처한다.
남궁세가에 대한 처우는 재빠르게 결정됐다. 지체할 사안도 아니었지만, 신단회를 소집할 시간도 없었다.
중원에 군림하던 남궁세가의 가주가 간자였다는 사실이 퍼지고, 그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알려지며 중원 전체가 분노했기 때문이었다.
“소림사 방장은 사과하시오!”
“모든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사람들은 책임을 져라!”
“당신들의 손에 정파는 못 맡기겠다!”
어디 중소문파 하나, 두 곳이 아니고 전 중원적으로 들고 일어났으니 묵살할 수도 없는 노릇.
사실 남궁선우의 간자 행위를 빌미로 지금까지 명문가들의 안하무인적 행동을 성토하는 것이기도 했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신뢰가 땅바닥까지 떨어졌다는 방증이었다.
이런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종횡무진을 지적하는 곳은 늘 있었지만, 이번에 다른 점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게 반박할 명분이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명가들을 대표해 소림사 방장, 진권이 모든 중원에 사과하는 방문을 붙이고 마교 간자 건에 대해서도 제삼자인 무림맹의 조사를 허락한다고 했다.
그 이후 다른 사항들에서는 최대한 빨리 신단회를 열어 후속 조치를 하겠다고 밝혔다.
“정말 바짝 엎드렸구나. 내가 살면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이렇게 엎드린 건 처음 본다.”
“안 그러면 큰일날 거니까요.”
“그렇긴 하지.”
곽진도가 허허, 웃었다. 오랜만에 스승님과 둘이 있는 것이었다.
바깥 장원은 조용했다. 우리는 승리를 거뒀지만 굳이 그걸 축하하지는 않았다. 당장 중원 무림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는데, 축배를 들기도 뭐하달까.
“무림맹이 어떤 성과를 내줄지 모르겠구나. 네가 이렇게까지 해줬는데, 아무 것도 못하면 그냥 무림맹은 해체해야지.”
“냉혹하시네요.”
그렇게 말해도 곽진도와 나는 제갈헌과 종리운을 믿고 있었다. 당장 그들은 진권에게 다음 달에 신단회를 열겠다는 약속을 받는 실적을 보여줬다.
“이렇게 신단회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는구나. 원래 신단회가 열리려면 서로 일정 조정하느라고 최소 반 년은 걸릴 텐데.”
“그러게 말입니다.”
“이제 그런 네게도 적응이 됐다. 놀랄 걸 미리 알고 있으니 놀라지 않게 되더구나.”
“그럼요.”
곽진도가 클클 웃었다. 금정원 옥상에서 부는 바람이 차가웠다. 그러고 보면 내가 폐관에서 나온 게 벌써 반 년이 더 됐다. 한창 여름때 나왔으니 지금은 겨울이었다.
“이제 약관이구나.”
“맞습니다.”
“누가 널 약관으로 생각하겠냐.”
“좀 늙어보이나요.”
“난 상관없는데, 다른 사람 앞에서 그런 농담은 하지 마라. 상처가 될 수 있다.”
그런가. 오랜만에 곽진도에게 조언을 듣는 것 같다. 내 나름의 농담이었는데 그리 재미있지는 않았나보다.
“큼. 신단회 준비는 어떻게 할 예정이냐? 그 꼬장꼬장한 뒷방 늙은이들은 논리가 별로 안 통해.”
논리라. 딱 봐도 그런 게 통할 것 같지는 않았다. 나도 이제 깨달은 건데, 중원에서 논리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논리보다 앞서는 건 무리(武理)니까.
“준비 안 할 예정입니다.”
“그래···, 음?”
곽진도는 반사적으로 대답하다가 날 바라봤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제 우리가 움직여야 할 때는 지났으니까요.”
내가 말했다.
“이제, 다른 사람들이 우리 때문에 움직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