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이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153화 이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중원이 흔들렸다. 당연했다. 구파일방, 오대세가에 마교의 간자들이 침투해있었다는 것이 사실로 밝혀진 것이다. 무림맹은 자비가 없이 조사했다. 마교의 간자들은 고구마 줄기처럼 끊임없이 캐져 나왔다.
그나마 세가는 혈족으로 이루어져 있어 중요한 위치에 있는 간자는 없었다. 남궁세가도 남궁선우를 제외하면 몇몇 시종들을 제외하고 간자는 없었으니까.
문제는 구파일방이었다. 문파 내 중요한 기밀도 알 수 있는 위치의 사람들이 간자인 게 밝혀진 것이다.
화산파의 내총관, 무당파의 해검지주(解劍地主), 아미파의 장로, 개방의 분타주들 등 마교의 간자가 없는 곳이 없었다.
그나마 깨끗했던 건 중원 대륙을 벗어나있던 해남파 정도.
그 중 화산파의 내총관은 십 년전 중원에 고독을 반입한 장본인이라는 게 밝혀지기도 했고, 문도 수가 많은 개방에는 수없이 많은 간자들이 침입해 있었다는 게 밝혀졌다.
거지면 모두 들어올 수 있는 개방의 특성상, 한 명의 분타주가 마교의 간자면 그 분타는 마교 천지가 되는 건 자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개방이 제일 더러웠다는 거군요.”
“맞아.”
화종도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가 헛웃음을 지을 정도로 개방은 부패해 있었다.
개방이 부패했다는 얘기는 이미 많이 들은 이야기였다. 정말 별의별 이야기가 다 있었다. 개방의 거지들이 북경에 가서 여자들을 끼고 술을 마신다는 이야기는 이미 유명했다.
당장 같은 구파일방, 해남파의 장문인인 적유엽도 믿을만한 사람이 아니면 개방에 일을 맡기지 말라고 했을 정도면 말을 다 한 수준이라고 봐야될 것이다.
“마교의 간자들이 순진한 거지들에게 정보를 파는 방법을 알려준 거지. 간악한 술책이야. 나태함을 알려줘서, 모두를 나태하게 만들어버렸으니까.”
“느리지만 확실한 방법이군요.”
“그래. 현 개방주, 아니, 이제 곧 전 개방주가 되겠지. 그 놈도 젊었을 때는 협의지사였는데, 언젠가부터 탐욕스럽게 바뀌었더라니. 사람은 참 약한 존재구나.”
화종도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마교의 간자들은 어딘가를 폭발시키거나, 누군가를 죽이지 않았다. 그들은 정파를 더럽히고,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들이 사용했던 방법은 문파의 자존심을 앞세워 타 문파와 이간질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게 언제부터 된 전략인지는 모르나, 몇몇 사람들을 떠올려보면 옛날부터 시행됐던 전략이 아닐까.
나태함과 타락은 퍼지기 마련이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정파를 약하게 만들고 있었던 거다. 물론 이제 무림맹의 조사 때문에 그 수작질도 제동이 걸리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네가 큰 역할을 했다. 이렇게까지 정파가 썩어있을 줄은 몰랐다. 더 늦었으면 어떻게 됐을지.”
“그것보다 진통을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가뜩이나 남궁세가 가주가 간자라는 충격이 다 가시지도 않았는데,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에 많은 간자들이 심어있다는 건 정파의 뿌리를 뒤흔드는 일이었으니.
“그것까지는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난 그걸 꽤 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화종도는 여유롭게 클클 웃었다. 그의 손바닥이 내 머리에 착 얹어졌다.
“앗.”
화종도는 내 머리를 완전히 헝클어뜨려놓았다.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 화종도를 바라봤지만, 그는 그냥 웃을 뿐이었다. 뭔가 애 취급을 받는 것 같아서 좀 그랬다. 하긴 화종도와 내 나이 차이는 백 년이 넘으니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냥 내가 참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이제 나는 가련다.”
“네. 나병촌으로 가신다고요.”
“그래.”
화종도는 약속대로 회전이 끝나자 봉공직을 내려놓았다. 그는 중원을 돌아다니면서 새로운 약을 개발하고, 환자들을 돌봐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봉공으로 계속 붙들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네. 그러시죠. 자금은 여유 있으신 걸로 압니다.”
“그래.”
화종도가 클클 웃었다. 그가 처음 말한 삼백만 냥까지는 아니지만, 꽤 많은 돈을 줬다.
나와 화종도는 정문이 아닌 쪽문에 있었다. 화종도가 괜히 대로로 나가면 번잡하게 될까 우려한 탓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인사를 안 해도 되겠냐니, 언젠가 만날 거라며 거절했다.
난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화종도를 언제 볼지 모르니, 지금 물어봐놓고 싶었다.
“뭐 하나만 여쭤봐도 됩니까?”
“뭐?”
“어째서 그렇게 돈에 쪼들리면서도 약을 만들고 남을 도우시는지요.”
화종도가 그런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안 뒤로, 그게 못내 궁금했다. 비도덕적인 질문으로 들릴 수 있는 걸 알았지만,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계속 궁금해했던 답이 화종도에게 있을 것 같았기에.
화종도는 날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이제 장난스럽지 않고 고요했다. 새삼스럽게 그에게서 나오는 기운이 압도적으로 느껴졌다. 패도적으로 압도하는 게 아닌, 은은하게 뿌려지는 분위기였다.
“혹시 숭산의 맹약을 아느냐?”
난 잠깐 생각했다.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숭산의 맹약. 아버지가 옛날에 말씀했던 단어다.
곽진도나 종리운이나 숭산의 맹약을 기억하고,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했지. 생각해보니 그걸 기억 속에 묻어뒀었다.
“이름만 들어봤네요.”
“네 나이 정도면 모를 게다. 고작해야 네 윗대까지 기억하겠지. 내가 어릴 때 있었던 일이거든.”
화종도가 어릴 때라. 내 생각보다 한참 옛날 얘기였다. 그걸 우리 아버지와 곽진도 선의 나이대까지 안다라. 화종도는 설명했다.
“내용은 간단해. 황금세가, 보타암, 소림사, 종남파, 남궁세가, 무당파, 개방이 모여 의협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지키자고 약속을 한 거지.”
“의협에 대한 정의요?”
“그래. 사람들은 의협, 의협 말로만 떠들어댔지 정확히는 몰랐으니까.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말이다.”
화종도는 잠깐 숨을 고르고 말했다.
“뭐일 것 같으냐?”
“글쎄요.”
의협의 정의라. 너무 내게는 어려운 말이었다. 종리운이 말한 정파의 할 일, 아버지가 내게 했던 질문, 이러한 것들에 대한 대답일 터였다.
“일단 의(義)는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을 뜻한다. 어떤 곳에서 녹림도가 선량한 사람들을 위협할 때, 무인이 나타나서 녹림도를 제거해주는 거지.”
“좀 뻔하군요.”
“협(俠)은 그 다음 이름을 밝히지 않고 떠나는 게야.”
나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이건 살짝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은 선의를 받으면 보답을 한다. 그걸 호혜(互惠)라고 하는 걸 너도 알 게다.”
“네.”
“협은 보답을 받지 않고 호혜의 고리를 억지로 끊어내는 거다. 협객은 자신의 선행을 자랑하지 않는다. 선한 일을 하면서도 답답하게 자랑하지 못하니, 남의 일을 도와주며 자신을 외롭게까지 만드는 거다.”
“굳이 밝히지 않아야 될 이유라도 있나요?”
“협은 불합리해야 한다. 남을 도와주면서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지. 희생에 보답이 따르면 진정 희생이 아니야.”
나는 잠깐 생각에 빠졌다. 원래 남을 희생하면서 돕는 건 불합리한 행동이기 때문에, 극기(克己)로서 그러한 불합리를 이기는 게 협이라는 것이겠다.
“그러면 협은 옳지 않은 겁니까?”
“인간의 관점으로 보면 옳지 않지. 인간은 결국 죽음을 회피하고자 하는 동물이야. 그러나 자연의 관점으로 보면 협은 옳지. 자연은 우리에게 마음껏 희생하고 있지 않느냐.”
알쏭달쏭한 문제다. 그러나 나는 더 캐고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이러한 말을 들으며, 내 마음 안에 어딘가 걸리고 정착되는 부분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게 내 생각인 거였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문제가 있었다.
“근데 왜 황금세가가 그 중요한 맹약에 끼어있을 수 있던 겁니까?”
당장 몇 개월전만 해도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황금세가를 대하는 걸 봤을 때, 이해할 수 없었다. 의와 협을 바로잡는 약속. 중원에서는 의미 있는 약속이다. 그곳에 황금세가가 들어간 게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건 나도 모르지. 뭐, 원래 황금세가와 무가들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 연장선상이 아닐까 하는데.”
“그런가요.”
“그럼 난 이만 가마.”
“나중에 보시죠.”
“오대세가, 될 거다. 넌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거든.”
화종도가 씩 웃었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라. 오대세가가 그런 걸로 되는 건가.
그러나 그걸 물어볼 새도 없이 화종도는 사라져버렸다.
*
진권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짚었다, 뗐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았다. 숭산 주변에서는 무인들의 아우성이 들린다.
“소림사는 정파 무림의 부패에 납득이 갈 수 있는 설명을 하라!”
“신단회는 해체하라!”
굳이 청력을 돋우지 않아도 소리들이 들린다. 정파 무림의 태두(泰斗). 소림사가 같은 정파 무인들에게 신뢰를 잃고 시끄러워지고 있었다.
“공휴.”
“부르셨습니까. 방장님.”
“그래. 내가 뭐를 잘못했는지 좀 말해주겠나.”
공휴는 진권의 그 물음에 입을 다물었다. 물론 진권이 완벽하다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나름 각자 특색이 강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조율하려고 노력했다.
“저희를 포함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 대해 너무 관용적이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지.”
“부조리한 일들을 관습이라는 이름 하에 덮어놓고 처리했던 것도 있죠.”
“허허. 그랬지.”
진권도 그 사실은 알고 있었다. 일처리가 깨끗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지금의 정파 체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최선이었다. 만약 깨끗하게 운영하려 했으면, 정말 뿌리부터 갈아엎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여기까지 올라온 것도 그러한 절차의 특혜를 받았기 때문이야. 근데 그런 내가 그것을 폐한다면, 누가 그 진정성을 알아주겠는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리하셨다면 방장님은 평생 고독해지셨겠죠. 없는 사람 취급을 받으면서 괴로워하셨을 겁니다.”
“그래도 그게 옳은 길이었던 게군. 그 가시밭길을 걸었어야 했어.”
“···옳다, 라고 하면 옳지만, 아무나 옳음을 실행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진권은 목을 뒤로 꺾었다. 사실,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는 모든 걸 바꿀 자신이 없었다. 밝히면 대중들에게, 동료들에게 앞뒤로 쏟아질 비난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후회해도 어쩔 수 없었다. 억울하다 생각해도 어쩔 수 없었다. 자책감이 들어도 어쩔 수 없었다. 여기서 자신의 변명을 하고 있을 시간도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들 말대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동시 봉문을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건 아니죠.”
공휴가 말했다. 지금 힘든 상황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이지만, 그렇다고 타개책이 안 보이지는 않았다.
“저들의 민심을 달랠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이 알 정도로 유명해야 하고, 구가(舊家)의 사람이 아닌 새로운 사람이어야 합니다. 또한 사람들에게 믿음을 받고 있는 인물이어야 합니다.”
“···그게 누구인가?”
“황금세가 가주입니다.”
공휴가 말했다. 진권은 눈을 감았다. 예상한 답변이었다. 그러나 가장 커다란 문제가 있었다.
“황금세가가 유린당할 때 우리는 방치했네. 그러면서도 그들이 구축한 상로, 상품들을 썼지. 부탁을 한다고 해도 될까?”
“이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공휴가 말했다. 이어지는 말에 진권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지금까지의 잘못을 빌고, 도와달라는 수밖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