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너무 시끄러운 고독
162화 너무 시끄러운 고독
난 내가 깬 걸 알리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고 갈유월을 내보냈다. 내가 깬 걸 알면 사람들이 우루루 와서 시간을 뺏길 터다.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혈기린반지의 함이 내 침상 옆 협탁에 놓여져있다.
“흐음.”
몸의 기를 돌려봤다. 몸상태는 좋았다. 나를 흔들어놓은건 상단전의 예민한 감응이었으니까. 만약 천주성주의 비명이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면 독에도 더 버텼으리라.
난 일단 상의를 벗었다. 그 다음 몸을 숙여 침상 밑 주머니에서 침을 꺼냈다.
현법단의는 이 독이 들어왔을 때 어떤 혈을 자극해야하는지 알려줬었다. 난 그것을 따라서 쭉 찌르기만 하면 됐다. 침이 하나씩 내 몸에 놓여졌다. 곧 내 상반신은 고슴도치처럼 변해버렸다.
“후우.”
그 다음 난 태을헌원신공을 극으로 운용했다. 몸에 찔려진 침들을 통해 독이 밀려나왔다. 뚝, 뚝. 보라색 진물들이 침의 끝에서 떨어졌다.
“혈기린반지라.”
남궁연화는 내게 이걸 넘겼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 혈기린반지의 독과 천주성주의 독이 같은지 알지 못했으리라.
왜냐하면 그녀는 천주성주의 몸에서 독이 뿜어져 나오는 걸 모르니까. 아마 함에 독이 묻어있다는 것도 모를 거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 독은 상단전이 열린 사람들만 감응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독의 작용은 엄청난 고통이었다.
이게 내 손에 들어온 건 우연일까, 필연일까.
난 그런 생각을 하며 혈기린반지의 함을 열었다. 독이 자욱하게 뻗어나왔다. 일반 사람한테는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지만, 상단전이 열린 사람은 엄청난 고통을 느낄 터다. 하지만 지금 나는 내공으로 보호하고 있어 아프지는 않았다.
붉은색 보석이 달린 반지가 보였다. 이게 주인들을 모두 죽였다는 그 혈기린반지인 것이다. 난 혈기린반지를 껴봤다. 조금 커보였던 반지는 내 검지에 딱 맞게 조여졌다.
“아.”
반지 안에는 바늘이 있었다. 끼게 되면 손가락에 맞게 조여지며 바늘이 들어가게 되는 식인 거다.
그 바늘에는 뿜어져 나오는 독의 연무를 응축시킨 것 같은 독액이 묻어있었다.
손가락에서 시작된 독액은 순식간에 머리로 치달았다.
난 통각을 차단시켜놨기에 고통스럽지는 않았지만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온 몸이 찢어발겨지는 육체적인 느낌만 났다.
“···으음.”
이 느낌. 익숙했다. 바로 고독이 발현될 때 나오는 작용이었다. 나도 전생에서 질리도록 경험한 것이니 모를 리가 없었다.
난 고통이 없으니 그 작용들을 관조할 수 있었다. 작용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신기했다.
고독의 종류들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고, 작용이 다 다르다. 그러나 이 혈기린반지에서 나오는 독액은 모든 고독에서 나오는 증상을 발현시키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반지군.’
내가 천주성주의 몸에서 나온 독과 혈기린반지의 독을 같다고 느낀 것도 당연했다. 혈기린반지에 있는 독은 모든 고독의 근원과도 같은 독이었다.
천주성주가 무슨 고독에 감염되어있는지는 직접 봐야 알겠으나, 고독에 감염된 건 틀림없는 사실로 보였다.
그렇다면 전생의 내 머릿속에도 이런 독기가 돌고 있었다는 거겠다. 하긴 고독의 독소가 바깥으로 나올 일은 거의 없었다. 보통 뇌에 기생하며 몸 안에만 퍼뜨리니까. 나도 고독의 독기는 처음 맛본 것이었다. 다신 맛보고 싶지 않은 성질의 것이었지만.
‘전설이 수정될 필요가 있겠어.’
혈기린반지는 전설보다 더 지독한 존재였다. 모든 고독의 아버지. 그야말로 원시(元始) 고독이었다. 모든 고독에 감염되었을 때 합치는 고통이 일거에 몰려드니 웬만한 사람들은 죽어버릴 수밖에.
물론 상단전에 태을헌원신공이 가득 감싸져있으니 상단전으로는 독이 침범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온 몸에 도는 독기는 현법단의가 알려준 혈맥을 통해 침으로 흘러나온다.
지독한 냄새가 방에 가득 찼다. 바늘에 독액이 맺히는 속도가 점차 잦아졌다. 처음에는 뚝, 뚝 떨어졌던 게 이제는 타고 흐를 지경이었다.
이제는 이 독을 어떻게 해결하는가의 문제였다. 고독을 해독하는 방법은 단 한 가지밖에 없다. 그건 모고(母蠱)를 통제하는 것이었다.
고독은 시전자의 의지를 따른다. 그리고 그 의지는 모고의 통제에서 나왔다. 난 혈기린반지에 있는 보석을 바라봤다. 붉은 호박(琥珀) 같은 것. 저건 뿜어낸 독이 굳어진 것이었다. 함에 독이 묻어있는 이유 역시 굳어진 독이 외부에 튀어나와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보석을 바라보자, 극성에 이른 태을헌원신공이 상단전에서 넘실거렸다. 이미 극성에 이른 태을헌원신공은 나와 같아, 내가 무엇을 할지 이미 알고 있다. 내공들은 완전한 전투태세로 돌입했다.
나는 손가락을 내 입에 댔다. 그리고 반지의 보석을 완전히 깨물어 뜯어버렸다. 내 입 속으로 혈기린반지의 보석이 쑥 들어갔다.
전신에 뜨거운 기운이 퍼졌다. 난 차단된 통각을 풀었다. 정확히 이 반지가 어디로 지나가는지 알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크···앗!”
입을 꽉 닫아도 이빨 사이로 신음이 흐른다.
혈기린반지가 오랫동안 사람을 죽일 수 있었던 이유. 이 반지의 결정에서 모고가 자고를 계속 생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반지 안쪽에 있는 면에 있는 바늘로 자고를 넣는다.
‘지독하군.’
이 혈기린이라는 사람은 미친 사람임에 분명했다. 자고를 넣는 건 일종의 시험이었다. 이것을 견딜 수 있냐, 의 시험. 그리고 열매는 보석 안에 있는 모고였다.
태을헌원신공과 독기가 충돌하기 시작했다. 외부에서 들어온 독기는 고강했다. 아무리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태을헌원신공이라고 해도 저 살의 가득한 독기마저 수용할 수는 없었다.
상단전 안에서 독기와 내공이 충돌하며 고통이 계속됐다. 태원의 기, 태원지기 역시 몸을 계속 파도처럼 휩쓸어 독을 바깥으로 빼내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나는 그 내공의 작용을 할 때 버티는 일을 맡았다. 다행히도 난 많은 종류의 고통을 알고 있었다.
고독이 내 뇌와 몸을 휘젓는 고통은 물론, 사지가 잘리는 고통, 철편에 피부가 찢기는 고통, 살에 불이 지져지는 고통 등. 정신이 아득해지는 고통 속에서, 저 멀리 내가 아는 사람들이 보였다.
내가 지금까지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 가족들, 스승님, 명재희, 금원대 아이들, 갈유월, 무림맹 사람들, 해남파 사람들···.
과거의 편린에 가까운 고통보다 현재에도 살아있는 이들과의 인연이 더 가까운 건 자명했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 부끄러운 말을 하자면, 이들에 대한 사랑이 고통보다 컸다.
솨아아악.
파도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난 눈을 떴다.
방 안은 난장판이었다. 독액으로 인해 지독한 냄새가 나는 건 물론, 내가 앉아있던 침상과 바닥과 벽은 부식되어 있었다.
난 상단전을 운용했다. 자욱한 태을헌원신공 안에 무언가가 걸리는 느낌이 났다. 진기에 갇혀있는 것 같은 곡옥 모양의 그것은 혈기린반지에 있는 모고였다.
내가 그 모고를 건드리자, 모고와 연결된 자고들을 느낄 수 있었다. 중원 전 대륙에 퍼져있는 고독들이 그의 자식들이었다. 자고들의 울음소리가 시끄러웠다.
*
나는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방축귀매신법을 극성으로 운용하면 같이 온 고수들도 못 알아차릴 것이었다. 이미 내 경공은 그 정도 경지까지 올라가 있었다.
우리가 있는 쪽은 심양에서도 외곽이었다. 심양 중앙에 있는 천주성과는 거리가 꽤 멀다는 것이었다.
갈유월이 천주성에서 날 여기까지 데려다준 것이다. 그녀에게 감사함은 나중에 표하기로 하고, 난 빠르게 달렸다.
옆으로 시야들이 휙휙 지나간다. 모든 사람들이 흰 복색을 하고 있었다. 천주성으로 가니 역시 호위무사들이 있었다. 팔뚝에 팔(八)이 있는 걸 보니 팔당이었다. 원래 그들이 정문의 호위를 맡는지, 순번이 돌아서인지는 몰랐으나 내게는 안 좋은 소식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성주실까지 몰래 침입할 수는 없는 노릇. 난 그들에게 다가가면서 신법을 풀었다. 그제야 흙 밟는 소리가 들리며 그들이 내가 있는 것을 눈치 챘다.
“···황금세가 가주님이시군.”
“들어갈 수 있겠나.”
내가 말했다. 그들은 당혹스럽다는 듯 서로가 서로를 바라봤다. 곧 그들의 입에서 거부가 나왔다.
“당주님의 특별 명령으로 불가하다.”
난 눈을 가늘게 떠서 그들을 보았다.
“그러면 일 당주를 보고 싶군.”
난 남궁연화를 생각했다. 그녀라면 내가 성주실로 들어갔을 때도 크게 적대적이지 않았다. 그녀라면 내 얘기를 들을 여유는 될 것이다. 허나 호위무사들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된다. 당주님의 특별 명령은 가주를 들여보내지 말라는 게 아니라, 가주의 말을 듣지 말라는 것에 있었다.”
내 입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노인네가 꽁해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부르는 수밖에 없었다.
난 내 기를 운용했다. 태원의 기와 태을헌원신공의 기는 합쳐질 수도 있고, 분리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들을 부르려면 태원의 기가 훨씬 나았다.
“···큿!”
천주성 사람들은 바로 검을 출수했다. 내가 기를 퍼뜨린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내가 태원의 기를 가지고 있다는 걸 몰랐기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태원의 기는 마르지 않는 샘물과도 같았다. 계속 기를 퍼뜨리면 퍼뜨릴수록 오히려 진진한 기운이 나오는 것 같았다.
난 머리를 위로 치켜들었다.
쾅!
내가 보고 있는 창문 안에서 누군가 유성우처럼 쏘아져나왔다. 그 사람은 나와 정문 호위무사 사이에 정확히 착지했다. 당연하지만, 그는 팔 당주인 조현극이었다.
“···네놈이 정녕 미쳤구나. 본성 앞에서 기를 내뿜다니.”
팔당의 무인들이 있으니 팔당주가 제일 가까운 건 당연한 것. 그 외에도 성에 있던 사람들이 내 주변에 속속들이 떨어졌다. 그곳에는 남궁연화와 목단화도 있었다.
“성주를 봐야겠어.”
“···가주. 급작스럽군.”
남궁연화가 말했다. 그나마 침착한 건 남궁연화와 목단화 정도. 팔 당주를 비롯한 사람들은 성난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성주님이 안정기에 접어드셔서 망정이지, 발작 도중에 내공을 퍼뜨렸다면 넌 즉참을 당했을 거다.”
“그 안정기는 내가 찾아준 것이 아닌가?”
내가 물었다. 조현극의 입이 순간 다물어졌지만, 곧 그의 입에서 변명 같은 목소리가 비져나왔다.
“···지금까지 성주님을 살린 건 우리다.”
“당신들은 그저 성주의 몸에서 약하게 흐르는 진기를 억지로 붙잡아 연명만 했을 뿐이야. 오히려 성주에게는 고통스러웠겠지. 지금도 성주는 고통스러워하고 있지.”
내가 진실을 알려줬다. 허나, 모든 사람이 그걸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그건 남궁연화와 목단화도 마찬가지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진짜야.”
그들에게 성주가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나, 존경과 숭배의 대상인 건 확실했다. 그런 대상을 고통주고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그들이 못 받아들이는 걸 넘어 분노하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아무튼 난 성주를 봐야겠다. 어떤 상태인지 정확히 봐야겠어. 고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하, 지금 고친다고 했나? 우리가 십 년 동안 못 했던 것을? 고작 하루 본 녀석이?”
모든 사람들의 눈이 불신으로 가득찼다. 하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갑자기 중원에서 넘어온 청년이 성주를 고친다니.
그 이유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어떻게 고친다는 건지도 모를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걸 납득시키는 건 너무 어려웠고,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강호에는 간단한 방법이 있으니까.
난 칼을 뽑아 조현극에게 겨눴다. 내 행동에 모두의 눈이 크게 떠졌다.
“천주성답게, 정정당당하게 하지.”
내가 말했다.
“이기면 들어가고, 지면 물러나겠다.”
천주성이 정파라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