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증명하기 위해서
163화 증명하기 위해서
그 말에 목단화를 비롯한 당주들은 어이없어했다. 암묵적으로 십왕은 초절정 중에서도 오기조원 이상에 이른 고수들이었다. 그 정도 경지에 이른 고수를 이기겠다고 지금 자부를 한 것이다.
이제 새해, 원단이 넘었으니 고작해야 금목환의 나이는 약관이었다. 약관에 오기조원의 고수에 도전한다니, 현명하지 않은 자살방법이라고들 생각했다.
가장 어이없는 건 당연히 지목된 조현극이었다. 조현극은 칼을 겨눈 금목환을 바라보며 물었다.
“···네놈이 지금 나를 우롱하는 거냐?”
“아니.”
금목환은 그냥 무덤덤해보였다. 원래 성격이 그렇다는 걸 목단화와 남궁연화는 알고 있었지만, 나머지는 몰랐다. 그렇기에 천주성 사람들의 화를 돋우기에는 충분했다.
이제 황금세가 가주가 중원에 명성을 떨치고 있었지만, 개인적인 성격과 풍모까지 알려진 건 아니었다.
“허허, 허허허···”
조현극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었다. 모두가 조현극을 바라봤다. 어쨌든 싸움의 대상으로 지목된 건 조현극이었다. 조현극이 결정할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사실 결정할 수 있는 선택지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새파랗게 어린놈의 도발이었다. 거기다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명분이 확실했다.
“기억하고 있나. 우리는 개인적인 은원을 무인의 생명을 걸고 푼다고 했지.”
“그래.”
“자신 있나?”
조현극이 물었다. 금목환은 잠깐 생각하는 듯 눈을 위쪽으로 굴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시종일관 침착했다.
“그렇군.”
서로의 의사를 확인했으면 더 볼 것도 없었다. 무인들은 결국 칼로 대화를 하는 족속들이었다.
조현극은 앞장서서 성에서 멀리 떨어진 연무장으로 금목환을 이끌었다. 모여든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일단 따라갔다.
당주들 입장에서는 골치 아픈 상황이었다. 금목환은 성주의 손님이다. 언어 기능이 극히 제한된 성주였지만, 황금세가 가주를 보고 싶다고 분명히 의사전달을 했다. 분명 그 이유가 있을 것. 그런 성주의 손님을 당주가 해하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그러나 이 싸움은 금목환이 먼저 건 것이었고, 이제는 무를 수 없었다. 천주성의 결투는 목숨을 빼앗지 않는다고 해도, 결투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당장 단전이 폐기되는 충격을 못 견뎌 죽는 사람도 부지기수였으니까.
그들이 도착한 곳은 북릉(北陵)이었다. 땅은 평탄하기 그지없고, 동쪽에는 유조호(柳條湖)가 있었다. 비옥하고 양지바른 땅이었지만, 농작물은 하나도 심어져있지 않았다. 그건 바로 천주성 사람들이 결투를 하는 공식적인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심양에서 가장 비옥한 토지를 결투라는 명예로운 행위를 위해 남긴 거다.
그리고 금목환과 조현극은 마주 섰다. 이제 성이 떨어져 있어 내공을 불러일으켜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이 없었다.
고오오-
대기가 진동하는 소리가 울렸다. 먼저 기를 발출한 건 조현극이었다. 흐물흐물하던 조현극의 소매가 뻣뻣하고 날카롭게 솟았다. 그는 팔을 한 번 굽혔다가 뻗는 식으로 손을 털었는데, 양손에는 비도(飛刀)가 세 자루씩 끼워져 있었다.
“아이야. 혹시 강호에서 십왕(十王)이라는 이름을 들은 적이 없느냐?”
조현극이 말했다. 그의 말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그의 목소리는 억울하기까지 했다.
일개 살수 출신에서 왕(王)이라는 별호를 받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여 왔던가. 그러한 노력들이 이 애송이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니 열이 뻗쳐왔다.
“있지.”
“그런데도 결투를 하겠다는 거냐? 나야 좋지만.”
“삼선, 칠존, 십왕이 무인들의 정확한 순위를 나누는 건 아닐 텐데.”
금목환의 말에 조현극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물론 그의 말은 맞았다. 삼선, 칠존, 십왕에 속해있지 않는 고수들도 많았다. 강호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붙여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
당장 남해삼객 중 일인인 곽진도도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십왕에게 밀리지 않는 명성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지만, 십왕이 너같이 젖비린내 나는 아이에게 무시 받을 정도의 별호는 아니지.”
“무시한 적은 없어.”
조현극은 기의 발출을 계속 불려나갔다. 대기는 진동하다 못해 일그러지고 있었다. 만약 모르는 사람이 보면 평원이 깨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원래 이게 너희들이 원하는 거였겠지.”
금목환의 말에 출수를 하려던 조현극의 손이 움찔했다.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말이었다.
“무슨 말이지?”
“애초에 너희들이 정파 사람들을 천주성에 부르려고 했던 이유가 따로 있잖아.”
금목환은 조현극에서 눈을 떼고 주변을 둘러봤다.
“모인 정파 사람들에게 천주성의 무공이 더 우위라는 걸 증명하는 것. 그게 태원의 기든, 뭐든 말이야.”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움찔했다. 확실히 금목환의 말이 맞았다.
금목환은 그것을 바로 눈치 채고, 정파 사람들에게 방을 붙여 오지 말라고 한 것이다. 그가 천주성의 계획을 방해한 건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래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그럼 너희는 왜 온 거지?”
지금 금목환은 성주실로 들어가기 위해 이 자리에 있지만, 처음부터 이러려고 온 건 아니었다. 성주의 발작주기는 불규칙적이라 금목환이 알 수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금목환이 온 원래 목적은 뭐였다는 것인가.
“증명하기 위해서.”
금목환이 말했다.
“내 무공이 천주성의 무공보다 낫다는 걸.”
그 말을 마친 다음에야 금목환이 내공을 뿜어냈다. 태을헌원신공의 진기. 흰색 빛의 내공이 물밀듯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와 함께 금목환이 위로 도약했다. 태양을 그의 몸이 절묘하게 가렸다. 몸테에 태양을 두른 금목환의 몸에서 섬광 하나가 조현극에게로 떨어졌다.
쾅!
조현극은 기함을 하면서 비도를 꽉 쥐고 팔을 엇갈아 그 발검을 막아냈다. 그러나 금목환은 그 도약에서 아직 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오히려 그 도약에서 더 하늘 위로 올라간 상태였다.
“···그새 더 늘었군.”
남궁연화가 읊조렸다. 모두가 무모하다고 생각했지만, 남궁연화만큼은 금목환의 실력을 알았다.
당장 자신의 조카, 창궁검제 남궁선우를 이겼던 자다. 중원에 널리 알려진 건 남궁선우가 마교의 간자였다는 사실. 그리고 황금세가 가주가 그걸 밝혀냈다는 사실이다.
그 밝혀내기까지의 과정. 금목환과 남궁선우가 비무를 벌였고 거기서 남궁선우를 압도했다는 사실은 중원에서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당연하지만, 쉽사리 믿기 힘든 풍문이라 잘 퍼지지 않은 것이다.
약관도 안 된 황금세가의 금목환이 창궁검제로 불렸던 남궁선우를 어떻게 이긴다는 말인가.
중원 사람들도 못 믿고 잘 모르는 마당에, 구석인 요녕에 있는 천주성 사람이 알리 만무했다.
모두가 멍하니 금목환이 있는 공중을 올려다봤다. 금목환의 검 주위에 하얀 구체들이 알알이 맺히더니 버섯 포자처럼 퍼졌다.
“···무슨!”
조현극이 여섯 개의 비도를 날렸다. 여섯 개의 비도는 폭포를 거스르는 물고기처럼 용솟음을 치며 위로 날아갔다.
그러자 떠있던 검환들이 움직이는 듯하더니, 일거에 땅에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굉음이 겹치다 못해 한 줄기 경적처럼 들렸다.
“갈!”
굉음과 함께 흙먼지가 바깥으로 비산한다. 주변을 두르고 있던 고수들에게로 흙이 퍼졌지만, 그들도 기막을 쳐서 흘려보냈다.
흙먼지가 걷힌 북릉은 그야말로 초토화였다. 조현극이 서있는 곳을 제외하고 땅이 깊게 파여서, 마치 조현극이 횃대 위에 서있는 것만 같았다.
금목환이 뒤를 돌아 조현극을 바라봤다. 도약을 하며 조현극의 머리를 넘어갔기 때문이다. 조현극의 눈빛은 반대로 침착해져 있었다.
“···빈 수레는 아니었구나.”
조현극이 말했다. 금목환은 뒤를 돌아 다시 조현극을 마주보았다.
조현극이 다시 손을 털었다. 그의 손에는 다시 비도 세 개씩 끼워졌다. 내공의 결투로 서로의 경지를 확인한 셈이었다. 그 한 수에, 모두가 느꼈다. 금목환은 절대 무시할만한 적수가 아니라고.
모두가 당황했다. 특히 목단화는 어이가 없었다. 이 천주성에서 금목환의 어린 시절 모습을 어렴풋이라도 기억하는 건 그밖에 없었다.
그 꼬맹이 시절에도 진법을 쓰고, 검을 쓰는 형이 정확하여 유별나다고는 생각했지만 당주와 맞설 정도의 무력을 지니고 있다니. 금목환의 나이를 생각하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진이가 과소평가를 했군.”
천주성에서 가장 촉망받는 후기지수. 선우진은 금목환에게 십 년만 지나면 정파를 대표하는 무인이 될 거라고 했다. 허나 그건 과소평가였다.
지금도 충분히 금목환은 일가를 이룬 무인이었고, 오대세가의 가주라고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조현극의 눈빛도 바뀌었다. 개인적인 은원도 은원이지만, 어떻게 보면 천주성을 대표해서 대결을 하는 것이었다. 그의 몸에서 거대한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태원의 기였다.
천주성의 당주들만 쓸 수 있는, 성주에게 선택받은 자만 쓸 수 있는 기운···인 줄 알았지만 금목환도 쓸 수 있는 기운이었다.
어떤 연유로 저 어린놈이 쓰게 되었는지는 모르나, 조현극은 자신의 기운이 더 고강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그마치 성주에게 직접 받은 기운이었다. 그 신성한 성주에게 받은 기운이 밀릴 리가 없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저건 뭐란 말인가. 금목환 역시 태원의 기와 비슷한 무언가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아까 금목환이 유성우처럼 쏟아냈던 내공과 닮기도 했고, 태원의 기와 닮기도 했다.
“말도 안 돼!”
누군가가 그렇게 외쳤다. 그렇게 하나둘씩 금목환이 뿜어대는 내공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믿을 수 없게도, 태원의 기와 자신의 기를 합친 내공이었다. 두 개의 거대한 기운을 합쳐서 쓴다는 건 중원의 상식으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네놈, 대체 뭐하는 놈이냐.”
조현극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이미 그의 내공은 방대한 금목환의 내공에 초라하게 가둬져 있었다.
조현극은 번갈아서 쓸 수밖에 없는 내공을 금목환은 한 번에 쏟아내고 있었다. 내공의 양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단순히 나이가 어려서 놀라는 게 아니었다. 만약 삼선이라도 저런 무리(武理)를 보여줬다면 놀랐을 터이니까.
금목환은 대답하지 않고 물끄러미 조현극을 바라봤다. 그리고 검을 느리게 내질렀다. 조현극은 내공을 모아 막으려고 했지만, 물살이 갈리듯 반으로 쪼개졌다.
천주성의 당주들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조현극이 질 것이 명약관화해도 끼어들 수는 없었다. 그건 도리어 조현극의 명예에 진흙을 뿌리는 셈이었다.
누가 중원의 십왕 중 일인, 천주성주의 당주를 저 아이가 압도할 줄 알았으랴. 누구도 경고할 수 없는 천재지변 같은 일이었다.
금목환의 검이 조현극의 단전을 쿡 찔렀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대기를 덮었던 모든 내공이 사라졌다. 또한 금목환의 검은 살결 깊숙하게 들어가지도 않았다. 그냥 그곳에서 멈췄다.
“동정하는 거냐?”
조현극이 말을 씹어뱉었다. 기해가 검에 닿아있는 서늘한 광경이었지만, 그럼에도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금목환은 고개를 저었다.
“이건 그저 성주실에 들어가냐, 안 들어가냐를 가르는 결투일 뿐이야.”
“나한테는 개인적인 은원도 겸해있는 싸움이었다.”
“당신이 은원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난 그게 은원이라고까지 생각하지 않아. 당신은 그저 천주성의 사람으로서 할 일을 한 거니까.”
금목환이 그렇게 말하며 검을 납검했다. 조현극을 포함해 모두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조현극을 바라보지도 않고 천주성 쪽으로 향했다.
“성주실에는 나 혼자 들어가겠어.”
강호의 사람치고는 작은 금목환의 등이 점점 멀어져갔다. 조현극은 그것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그의 마음속에 짙은 패배감이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