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정파와 천주성은 다르니까
166화 정파와 천주성은 다르니까
“어쨌든, 예언은 틀린 셈이군.”
송천우가 말했다. 어떻게 보면 성주에 대한 모욕이 될 수도 있는 말이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예언자는 모든 부분에서 예언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한 번 예언을 하면 그것을 정확히 맞춰야 한다. 그게 덕목이었다. 천주성주는 원래 본인이 곧 죽을 것이라는 예언을 남겼었다.
“두 번째인가?”
송천우를 비롯한 당주들이 눈가를 좁혔다. 천주성주는 수많은 예견을 남겼지만 틀린 건 딱 두 가지. 나머지 하나는 이청명에 관한 것이었다. 이청명은 분명 천주성의 일원으로 황금세가에 계속 남아있으면서 영향력을 행사했어야 했다. 그런데 금목환이 이청명을 죽이면서 예언이 틀려버리게 된 거다.
모두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당연히 성주가 평안해진 것에 기쁨을 느껴야했지만, 지금 같은 상황은 당황스러웠다.
천주성주는 눈을 뜨자마자 아무 말도 안 하고 멍하니 반 시진 정도를 있더니, 손을 흔들어 십이당주 전체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그 이후 성주실에는 아무도 접근할 수 없게 됐다. 당연히 십이당주 사이에서는 많은 말들과 추측이 오갈 수밖에 없었다.
기억을 잃은 것이 아니냐, 예언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냐, 백치가 된 것이 아니냐, 우화등선을 하는 것이 아니냐 등. 그러나 그들끼리 머리를 싸매도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다만, 말없이 축객령을 내렸다는 점에서 불안함이 전염된 건 어쩔 수 없었다. 본인들이 아는 천주성주가 사라지지는 않았는지 말이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건 그것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잘 된 걸지도.”
송천우가 읊조렸다.
“오히려 우리가 원하던 바가 아닌가. 성주님은 언제나 예언을 하실 때면 괴로워했어. 우리가 그 괴로움을 보며 얼마나 괴로웠던가. 이미 성주님은 우리에게 모든 걸 줬다네. 이제 우리가 할 일만 남은 거지. 이제 성주님은 쉬시면서 당신께서 뿌리신 씨앗이 자라는 걸 보는 게야.”
그러나 남궁연화는 자못 비장하게 말하는 송천우를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송천우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럼, 우리가 할 일은 명확하군.”
“뭔가?”
“황금세가 가주에 대해 감사인사를 해야 하지 않겠나.”
송천우가 씩 웃었다.
“아주 성대하고, 격식 있고, 정파스럽게 말이야.”
보은(報恩)과 해원(解寃). 그들에게는 그것이 기본이었다. 본디 은원에 사사로운 감정 따위는 없었다.
*
갈유월은 멍하니 무릎을 끌어안고 있었다. 천주성에 와서 정말 방치당하는 느낌이었다. 실제로 소림사 사람들도, 하북팽가 사람들도 지겨워하고 있다.
사실상 초대를 받았는데 아무 것도 안 하고 돌아갈 수는 없다. 정파 사람들한테 천주성은 어떤 곳이다, 라고 정확히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알고, 실질적인 조약 같은 것을 남겨 와야 했다.
왜 천주성이 본인들을 놔두고 있는지는 알고 있다. 금목환이 천주성주를 고쳤다지. 정말 그 아이는 못하는 게 없었다.
천주성이 손님들에게 신경을 쓸 수 없다는 건 이해하지만, 연금당하는 답답한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갈유월이 할 수 있는 건 생각뿐이었다. 생각만큼은 묶인 몸에서도 훨훨 날 수 있으니까.
- 한 번만 더 내 사람한테 칼을 들이대면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괴로움이 뭔지 알려주마.
갈유월의 머릿속에서는 그 말이 계속 재생되고 있었다. 금목환이 자신 앞으로 나와 칼을 겨누며 한 말이었다. 이렇게 지켜지는 느낌. 정말 나쁘지 않았다.
몸상태도 좋지 않아 땀을 잔뜩 흘리면서, 눈을 반쯤 감은 상태로 보여 지던 옆모습. 그 상황이 얼마나 다급했나를 떠나서, 그 모습은 정말 판화로 남겨서 후대에 길이길이 보여줘야 했다. 물론 그 판화는 금목환의 외모를 다 담지 못하겠지만. 그런 생각을 할 만큼 갈유월의 눈에는 멋있게 보였다.
“···유월아, 유월아.”
갈유월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곳에는 스승님, 종리운이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예닐곱 번은 부른 것 같구나.”
“···아.”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느냐? 가자꾸나.”
종리운의 말에 갈유월은 얼굴이 붉어졌다. 아까부터 지금까지 금목환의 생각을 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지금 출발할 때였다. 오늘이 천주성에 도착하고 첫 일정이니까. 바로 축하 연회였다. 천주성주가 치료된 기념으로 연회를 연다고 했다.
갈유월은 그냥 으레 술이나 마시고 밥이나 먹는 연회인 줄 알았지만, 천주성은 연회에서 입을 의복과 차례를 먼저 보내오는 둥 엄청나게 성대하게 하는 것 같았다.
“조금 불편하네요.”
“나도 예복은 오랜만에 입는구나.”
원래 무인들은 연회 때도 대개 무복을 입는 법이다. 그러나 지금 종리운도 예복으로 차려입었고, 갈유월 역시 원삼(圓衫)에 봉대(鳳帶)에 등까지 내려오는 머리를 쪽 지어 머리 위에 틀어놓았다.
“꾸미니까 참 예쁘구나. 황금세가 가주가 좀 돌아볼만 하겠는걸.”
“걔, 걔 얘기가 왜 나와요?”
“농담인데 꽤 과민하구나.”
종리운은 껄껄, 웃었다. 갈유월은 부르르 떨었지만 여기서 더 말을 하면 휘말릴 것 같아 말을 하지 않았다.
하북팽가와 소림사의 다른 사람들도 속속들이 나왔다. 소림사 사람들은 여전히 법복이었다. 출가한 사람들에게까지는 강요하지 않은 것이었다.
팽의석과 함께 나온 팽상문의 눈은 바로 갈유월에게 꽂혔다. 팽상문의 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갈유월은 아름다운 자태를 피워내고 있었다.
빛나는 게 어디 옷뿐이랴. 시종들이 붙고 붙어 화장까지 다 해줬다. 원체 피부가 하얘 연지를 조금만 발라도 훨씬 생기가 돌았다.
“···갈 소저.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평소 갈유월과 데면데면하던 팽상문이었지만, 지금 갈유월의 자태를 보고 말을 안 꺼낼 수가 없었다.
“···고마워요.”
팽상문 이외에도 모두가 갈유월의 모습을 보고 한 마디씩 거들었다. 원래 아름다운 건 알고 있었지만 더 아름다워졌다. 이 정도면 호북제일미라고 칭할 만하다 등등.
낯부끄러운 칭찬들이었지만 갈유월은 내심 자신감이 생겼다. 정말 종리운의 말대로 금목환이 살짝, 아주 살짝 관심을 가질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던 생각을 하던 와중 마차를 타고 누군가가 그들이 모인 곳으로 다가왔다. 누가 봐도 금목환의 마차였다.
“금목환 가주는 어떻게 꾸몄을까. 천주성에 있는 화장 담당 시종들이 아주 진심이던데 말이야.”
종리운이 클클, 웃었다. 금목환이 꾸민 모습을 보지 못한 건 아니었다. 당장 가주 인계식 때 많이 꾸며 입었고, 기본적으로 가문의 복장이 예쁘지 않은가.
그러나 가주인계식 때 본 건 너무 어릴 때였고, 가문의 복장과 예복은 엄연히 달랐다.
마차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한 걸음씩 내려왔다. 붉은색 공단으로 되어있는 옷은 백택흉배(白澤胸背)를 부착한데다가, 머리를 뒤로 깔끔하게 넘긴 건 역시나 금목환이었다. 사람들은 이미 금목환이 나올 걸 알고 있으면서도 충격에 빠졌다.
금목환이 원한 건 아니지만, 이렇게 작정하고 꾸민 건 폐관 후에 또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화장으로 자칫 냉막해보일 수 있는 무표정한 인상을 화사하게 만들어, 금목환의 얼굴은 그야말로 완벽에 가까웠다.
‘···하아.’
갈유월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외모야 사람들 취향이고 보기 나름이라지만, 본인이 보기에는 본인보다 예뻐 보였다.
외모에 크게 관심은 없지만, 남들에게서 예쁘다는 말을 워낙 많이 들은 갈유월은 본인의 외모가 어떤 평가를 받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금목환 앞에서는 외모는 무용지물했다. 그보다 더 잘생기기는 불가능하니. 마찬가지의 의미로 능력도 그랬다. 현재 약관의 나이에 오대세가의 가주를 맡고 있는 금목환 앞에서 누가 능력을 과시할 수 있을까. 그야말로 완벽한 사람이었다.
금목환은 갈유월에게 그런 절망을 안겨준 것도 모른 채 사람들을 이끌고 천주성으로 향했다.
“유월아, 뭐 안 좋은 거라도 먹었느냐?”
“···아뇨.”
뭔가 넘을 수 없는 벽을 봤다면 웃기겠지. 솔직히 말해서, 본인이 객관적으로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룡삼봉의 수봉에 들 정도로 무공도 강하고, 외모 칭찬도 많이 들어봤고, 성격은··· 날이 갈수록 괜찮아지고 있는 것 같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금목환은 너무나 완벽해서 뭔가를 내세울 수 없다고 할까. 그냥 그런 게 답답했다.
정파 사람들은 금목환을 선두로 천주성으로 나아갔다. 천주성 사람들도 계속 힐끔거릴 정도로 정파 사람들은 화려하게도 꾸며져 있었다. 물론 그 시선 중 대부분은 금목환과 갈유월이 독차지하기는 했다.
곧 그들은 천주성에 도착했다. 천주성 사람들 역시 정파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화려한 예복을 입고 있었다. 십이당주는 마치 새가 날개를 펼치듯 남궁연화를 필두로 좌우로 젖혀져 있었다.
“어서오시게.”
“천주성에 올 때만 해도 이런 건 생각도 못했는데 말이죠.”
“우리 역시 그렇네.”
남궁연화가 미소를 지었다. 다른 당주들도 마찬가지였다.
“연회니까 검은 두고 가는 것이 어떤가?”
이 당주, 송천우가 말했다. 실제로 그들은 검을 차고 있지 않았지만, 정파 사람들은 당연히 무기를 전부 차고 있었다.
금목환은 그가 송천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명재희가 같이 온 이유가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그녀는 오자마자 귀신같은 경신법으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하고 다녔다. 당주들에 대한 정보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송천우를 본 금목환은 미소를 지으며 거절했다.
“죄송합니다.”
“이게 천주성의 예법이라고 해도?”
“정파와 천주성은 다르니까요.”
말을 꺼낸 송천우는 별로 아쉬운 기색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뭘, 성주님의 은인인 것을.”
“성주님은 어떤가요?”
금목환의 말에 송천우는 흠칫했다. 송천우뿐 아니라 다른 당주들도 흠칫했다. 정파 사람들은 금목환을 포함해 궁금한 표정이었다.
당장 금목환이 치료를 한 건 맞는데, 그 이후의 근황은 천주성에서 완전히 통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모른다네. 성주님이 문을 걸어잠그고 계셔서. 오랜 시간 아프셨으니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실 수도 있지.”
늘 듣던 대답 그대로였다. 천주성주가 폐관하고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는 것. 금목환은 그게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자신에게 우호적인 남궁연화도 그랬고, 명재희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으니.
“그럼, 이리로.”
남궁연화가 성 안으로 안내했다. 금목환의 느끼기에 천주성은 성주의 비명이 군데군데 묻어 있어 음울했다. 그런데 치료가 되고 나서는 공간의 느낌도 좀 바뀐 것 같았다.
성 안 응접실로 들어가니, 그야말로 거대한 식탁에 음식들이 빼곡하게 차려져 있었다.
“···오.”
명가인만큼 웬만큼 맛있다는 건 다 먹어보고 다닌 팽상문과 팽의석도 놀랄 정도로 음식은 훌륭했다. 그 음식은 중원의 것만이 아니라 극동의 것, 서역, 새외의 것도 함께 섞여있어 풍성하고 이국적이었다.
막 뒤에서는 음악을 연주하는 기녀들과 무희들의 그림자가 보였고, 연회 참가자보다 많은 시종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본격적인 연회였다.
그리고 다른 말로, 드디어 정파 사람들과 천주성의 사람들이 공식적으로 만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