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그대는 누구신가
169화 그대는 누구신가
송천우는 금목환이 오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분명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중원에서는 지금 소제라는 별호로 불리고 있던가. 충분히 그럴 법했다.
정파의 사람이라면 응당 인정할 사람은 인정해야 하는 법. 송천우는 상대방을 인정하는 것에 그렇게 인색하지 않았다.
당장 저 뒤의 기라성 같은 명숙들을 두고 대표로 나왔다는 점에서 이미 말로 설명하기도 힘든 기재였다.
그래서 중원을 빨리 치고 싶었다. 저 금목환이라는 자는 그렇다 치더라도, 다른 사람들을 믿을 수 없었다. 이미 구태 정파의 기둥을 했던 사람들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법이었다.
“얕볼 상대는 아닐세.”
팔 당주 조현극이 붙었다. 중원에서 건너온 사람으로 별로 좋게 보지 않았지만, 그래도 천주성 사람은 천주성 사람이었다.
“이상한 기운을 쓰네. 태원지기와 본인의 내공을 합친 것 같더군.”
“나도 그건 봤네만. 그게 가능한가.”
“성주님이 흥미를 가질 사람이니 뭘 해도 놀랄 것도 없지. 아무튼 압도적인 양이었어. 한 번에 끌어올리니 반응할 재간이 없더군.”
조현극의 말에 송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현극의 패인은 결국 내공량의 절대적인 부족이었다. 금목환은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태원지기와 본인의 기를 합치는데 성공했고, 엄청난 내공을 가지고 있었다.
조현극은 진신 내공과 태원지기를 번갈아서 쓰는 입장이어서 그 파도에 대처할 수 없었던 거다.
“단순히 양만 많은 거라면 할만하지.”
송천우가 말했다. 조현극도 같은 생각인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내공은 다다익선이지만, 태원지기는 양이 중요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그리고 조현극의 태원지기와 송천우의 태원지기는 명백히 달랐다.
다른 내공을 이미 익히고 있던 사람과 처음부터 태원지기를 익힌 사람의 차이. 이게 중원에서 건너온 사람이냐, 처음부터 천주성의 사람이었냐의 차이였다.
금목환은 맞은편에서 이미 검을 뽑고 땅으로 늘어뜨리고 있었다. 송천우와 달리 다른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지도 않았다.
뒤에 있는 정파 사람들 표정 역시 초조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금목환에 대한 그만큼의 신뢰도 있는 듯했다. 만약 처음 봤으면 어처구니가 없었을 거다.
저 늙은이들이 백면서생처럼 보이는 꼬맹이를 앞에 세우고 뒤에 있는 꼴이라니. 하지만 이제 그런 뜻이 아님을 안다. 금목환은 명실상부 중원의 대표였고, 그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내고 있었다.
그리고 송천우 본인은, 지금은 천주성의 대표였다.
뒤를 돌아봤다. 다른 당주들과 가마에 탄 천주성주가 보였다. 천주성주는 여전히 면사를 쓰고 있었다.
“준비되면 말하지.”
금목환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손아귀에 힘을 쥐지는 않은 듯 칼날이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렸다.
지금 송천우는 지천명 가까이 됐고, 금목환은 갓 약관이었다. 나이가 반 갑자의 차이가 난다는 이야기였다. 근데 왠지 크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냥, 응당 그럴 사람이 그러는 느낌. 금목환이라는 사람이 주는 눈빛과 기세는 송천우에게 쓸데없는 자존심을 버리게 하기 충분했다.
이제는 성주님도 깨어났다. 천주성이 날개를 펼 때였다. 금목환이 천주성의 은인인 건 인정했다. 그래서 다른 정파 사람처럼 대하고 싶지 않았고, 당주라는 제안도 해본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인재가 정파에 있다면 결국 천주성에게는 손해였다. 지금 정파는 썩었다. 천주성이 가서 갱생을 시켜줘야 했다. 금목환은 그것의 걸림돌이었다.
송천우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천주성을 위해서, 금목환을 여기서 죽이자고 말이다.
“자네는 준비됐나?”
“아까부터.”
금목환이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팔 당주인 조현극을 이겼다고 자만하는 것일까. 그렇게나 쉽게 이겼으니 자만할만도 하다. 하지만 그게 금목환의 약점이 될 것이었다.
“그럼, 시작하지.”
송천우가 말했다. 중간에 심판은 없었다. 이건 비무가 아니였다.
송천우는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금목환의 칼끝은 여전히 바람에 실려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먼저 출수할 생각이 없는 것일까.
그렇게 잠깐 생각했었다.
자신의 시선 위에서, 사선으로 그어지는 금목환의 하얀 안광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까가각···
칼과 칼이 맞대어 비벼지는 소리가 처절했다. 금목환은 분명 위에서 떨어지며 검을 베어냈기 때문에, 도약하려면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그때까지는 몸을 못 쓴다는 이야기.
이것도, 그렇게 잠깐 생각했었다.
쿵!
금목환은 바로 천근추(千斤墜)의 수법으로 땅으로 빠르게 떨어지고 송천우의 허벅다리를 노렸다. 송천우는 대경하여 검을 일자로 세워 간신히 막았다.
“···큿!”
그야말로 변화무쌍한 검로였다. 혹시 그저 영약으로 내공만 키운 괴물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초식을 직접 맞상대해보니 내공보다는 오히려 초식이 괴물이었다.
허나 애초에 송천우는 검법으로 그와 겨룰 생각은 없었다.
그는 애초에 무인 출신이 아니었다. 검로의 형(形), 식(式)으로 치면 어디 명문 정파의 후기지수보다 못할 터였다. 그러나 송천우의 진력은 그게 아니었다.
쿠오오···
송천우의 몸에서 거대한 태원지기가 뿜어져나왔다. 태원지기는 자연의 힘이다. 사람은 그걸 빌려쓰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송천우와 조현극과의 차이는, 처음부터 태원지기를 받아들였느냐, 아니냐의 차이였다. 그것은 기운의 순수함을 결정짓는 요소였다.
태원지기는 절대적인 상성이 있었다. 보다 순수한 태원지기가 그것이었다. 그래서 송천우는 같은 태원지기를 쓰는 상대라면 질 자신이 없었다. 실제로 송천우는 모든 당주 중에 가장 강한 사람이었다.
금목환도 태원지기가 섞인 내공을 일으켰다. 조현극을 압살했던 그 기운이었다. 그러나 송천우의 태원지기는 금목환의 태원지기를 완전히 압도해나갔다.
순식간에 송천우의 태원지기가 금목환을 감쌌다. 내공 안에 쌓이면 당연히 압력을 받게 된다. 밖에서 볼 때는 금목환이 찌그러져 가는 것으로 보일 터였다.
송천우는 금목환의 심장 쪽으로 칼을 질러넣었다. 내공에 붙잡힌 그는 옴짝달싹 못할 것이었다.
“아앗!”
정파쪽 소녀가 소리를 질렀다. 갈유월이라고 했던가. 아까부터 금목환에게 눈을 못 떼고 불안해했다.
“당신이군.”
그때 송천우의 귀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을 그 나지막한 목소리는, 태원지기 안에 갇힌 금목환이 낸 목소리였다. 그는 칼이 가슴 바로 앞까지 왔는데도 침착했다.
“천주성 무공의 적자(嫡子)는 말이야.”
금목환이 말했다. 그리고 금목환의 신형이 어느새 흔들리고 사라져버렸다.
그의 말은 정답이었다. 천주성주에게서 태원지기를 받은 사람 중, 처음부터 무인이 아닌 자는 그밖에 없었다. 그래서 가장 강한 태원지기를 쓸 수 있는 거였다.
“당신은 나를 죽이려고 했지.”
금목환이 싸늘하게 말했다. 그 말에 송천우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왜냐하면 그 목소리는 바로 뒤에서 들렸기 때문이다.
“내게는 은원이야.”
분명 내공은 무림인들의 싸움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내공이 고강한 자가 미약한 자와 붙으면 부딪치는 것만으로 내상을 입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금목환은 송천우에 비해 내공이 밀리지도 않았다. 태원진기를 모두 뺀 그는 태을헌원신공만 운용하고 있었다. 바로 내공을 분리시키는 능력은 모두가 보고도 믿지 못할 지경이었다. 저렇게 다른 내공을 합치고 분리시키는 게 자유로우면 아무도 주화입마에 걸리지 않을 터이니까.
태을헌원신공의 순수한 하얀빛은 무형의 태원지기를 완전히 갈랐다. 그건 천주성 사람들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는 순간이었다. 자연의 흐름은 규칙적인 듯 보이지만 불규칙하다. 그래서 태원지기를 베어내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내공은 결대로 베어내지 않으면 오히려 반발력으로 튕겨내니까. 허나 송천우의 내공은 비단이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너무나 쉽게 갈라졌다.
촤아악!
“살의를 함부로 품지 마라.”
금목환의 그 말과 함께 팔이 툭 떨어졌다. 송천우의 팔이었다.
“···크···”
송천우는 어깻죽지에서 올라오는 작열감을 느끼며 생각했다. 이 금목환이라는 자는 어떻게 해도 이길 수 없었겠구나, 라는 생각이었다.
충격 때문에 희미해지는 시야 사이로 금목환이 보였다. 그는 내공을 거둬들이고 있었다. 하얗게 타올랐던 안광도 잦아들며 가라앉고 있었다.
*
천주성의 십이당주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먼저 살의를 드러낸 건 송천우이기 때문이다. 난 어떤 생각으로 살의를 드러냈는지는 충분히 알았다. 천주성에 대한 충심이 가득한 그는 내가 천주성의 걸림돌로 보였을 거다.
“그러지 않아도 됐거늘.”
천주성주가 송천우를 바라보며 씁쓸하게 말했다. 송천우가 쓰러지자 십일 당주인 당공현이 나가 바로 지혈을 시켰다.
천주성주는 송천우에게서 눈을 떼고 내쪽을 바라봤다.
“···손속에 자비를 둔 것을 감사드리네.”
“제 밑에 배속되어야 하기 때문에 살려뒀을 뿐입니다.”
내가 답했다. 난 납검을 하고 송천우를 바라봤다. 잘린 단면으로 내 내공이 침투했으니 엄청난 충격을 받아 쓰러질 수밖에 없었을 거다.
“굉장한 무위군. 그 나이에 오기조원에 들어선 건가.”
천주성주가 중얼거렸다. 당주들은 송천우의 잘린 팔을 보며 침통해하느라 바빴다. 자업자득이었다. 강호에서 상대방을 몰라보고 살의를 내뿜는 건 목숨을 내놓아야 할 중죄였다. 팔 하나로 대가를 지불한 건 값싼 대가라고 할 수 있었다.
“가주. 나와 둘이 얘기할 수 있겠나.”
“그러시죠.”
당주들은 천주성주의 말에 놀랐다. 조현극이 바로 입을 열었다.
“본 성 당주의 팔을 벤 것이 몇 년 전도 아니고 방금 전입니다. 지금 둘이서 보시면···”
“귀책은 당주에게 있지 않나.”
천주성주의 말에 조현극의 입이 닫혔다.
“나 역시 강호의 사람이네. 황금세가 가주는 송 당주의 목을 취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어. 그것만으로도 만나서 안전성은 확보된 셈이야.”
“···알겠습니다.”
“최대한 치료를 부탁하네.”
천주성주는 그렇게 말하고 등을 돌렸다. 내가 따라가려 하자, 누군가 내 등의 옷깃을 잡았다. 대충 누군지는 알았다. 뒤를 보니 갈유월과 같이 온 사람들이 있었다.
“가지마. 방금 천주성 사람이 널 죽이려고 했잖아. 성주가 당주의 은원을 갚으려 할 수도 있어.”
갈유월이 말했다. 천주성은 천주성 나름대로, 정파는 정파 나름대로 성주와 나의 독대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난 갈유월을 안심시켰다.
“괜찮아. 성주가 그럴 사람은 아니니까.”
“네가 어떻게 알아?”
“그냥 알아.”
그녀의 정체를 알았으니까. 하지만 아직 말하기는 시기상조였다. 나도 그녀의 정체를 알고 혼란스러웠으니까.
“그리고 내가 성주한테 일방적으로 죽을 정도도 아니야.”
“···그건 그렇지만.”
갈유월의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팽의석, 종리운, 진권도 내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지금 황금세가 가주는 십왕 그 이상의 무위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 회전 때도 힘을 다 쓰지 않았던 겐가.”
진권이 말했다. 굳이 말하자면 그들이 내 최고를 보기 전에 내가 계속 성장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무방했다.
“다녀오겠습니다.”
난 그렇게 말하고 천주성주의 뒤를 따라갔다. 공터에서 천주성은 그렇게 멀지 않았다. 천주성에 호위무사는 없었다. 성주가 깬 이후로 성에 있는 호위무사를 모두 바깥으로 두른 것 같았다. 하긴 천주성주는 연회에 나타나기 전까지 칩거를 하고 있었다고 하니.
다시, 난 천주성주의 문 앞에 섰다. 세 번째였다. 처음에는 비명을 들었을 때, 둘째는 치료를 할 때, 셋째는 지금이었다. 내가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원래 있어야 할 침상의 막은 완전히 걷어져 있었다. 그리고 천주성주의 면사 또한 걷어져 있었다.
피부가 말려있어 흉측했던 천주성주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우아한 중년의 미부가 앉아있었다.
“왔군.”
“다시 인사드립니다.”
나는 그녀에게 예의를 갖춰서 인사했다. 천주성주라면 그렇게 인사할 필요가 없었지만, 그녀는 강호의 까마득한 선배였으니까.
“그래. 내가 누군지 어떻게 알았지?”
성주는 꽤 급했다. 하긴 그게 궁금해서 버틸 도리가 없을 거다. 난 대답 대신 목에 걸쳐져 있는 줄을 바깥으로 꺼냈다. 신옥주가 매달려있는 목걸이였다. 그것을 보자마자 천주성주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그리고 곧 방 안에 엄청난 기운이 휘몰아쳤다.
“···그대는 누구신가.”
“황금세가 가주, 금목환입니다.”
나는 여전히 그것 이외에 날 더 적절히 표현할 말을 찾지 못했다.
“검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