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뒤에 서있지만은 않겠다
173화 뒤에 서있지만은 않겠다
집이 열 채도 있지 않은 작은 마을. 어떤 마당에는 쌀가마니가, 어떤 마당에는 닭장, 어떤 마당에는 돼지우리가 있었다. 담장은 어린 애도 뛰어넘을 수 있을 정도로 낮았다.
꼬꼬꼬꼬꼬···
마을 중앙에는 야트막한 언덕이 있었는데, 마치 마을에서 누군가 공개적인 발언을 할 때 올라가는 곳인 듯 곱게 다져져 있었다.
그곳에는 중키의 창백한 남자가 서있었다. 나이는 약관이나 좀 넘었을까, 할 정도로 앳된 얼굴이었다. 그 얼굴은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그 미소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편안함을 자아낼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다시 한 번 물을게. 네가 정녕 염수객(剡手客)이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창백한 남자의 좌우에는 검정 피풍의를 입은 작은 키의 남자 한 명과 거한이 있었다. 그들은 창백한 남자가 뭘 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군.”
창백한 남자 앞에는 누군가가 머리를 숙이고 분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이곳저곳이 심하게 부어있었고, 핏줄이 터진 눈동자가 붉었다. 그는 손목과 발목이 같이 묶여있었는데, 용케 엎어지지 않고 무릎으로 땅을 지탱하고 있었다.
언덕 앞에 묶여있는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끈으로 상반신이 묶여있고, 입에도 재갈이 물려있었다.
“얍.”
창백한 남자가 장난스러운 소리를 내며 비도를 날렸다. 그것은 앞에 무릎 꿇은 남자의 귓전을 스치며 뒤로 날아갔다.
푹.
“윽.”
칼이 박히는 소리와 단말마. 한 사람이 기댈 곳 없는 짚단처럼 쓰러졌다. 그것은 정확히 묶여있는 사람의 이마를 꿰뚫었다.
묶인 남자는 울부짖으며 소리를 질렀다.
“아니라고 해도 죽이고, 맞다고 해도 죽이고, 대답하지 않아도 죽이면 왜 물어보는 것이냐! 이 금수만도 못한 자식아!”
“얍.”
창백한 남자는 대답하지 않고 또 다시 비도를 던졌다. 또 다시 칼이 박히는 소리가 났지만, 이번엔 단말마도 나지 않았다. 소리가 나올 목을 꿰뚫었기 때문이다.
“맞다! 내가 염수객 곽철광이다! 그러니까 그만 좀 해라! 대체 나한테 무슨 원한이 있다고 이러는 게냐!”
창백한 남자는 묶인 남자의 울부짖음을 무시했다.
아마 정파 사람이라면 방금 남자의 말을 믿지 못했을 것이었다.
염수객 곽철광. 운남에서 유명한 협객인 그는, 십 년 전에 이미 많은 사람들 앞에서 금분세수(金盆洗手)식을 마치고 은거한 사람 중 하나였다.
금분세수는 모든 은원에서 해방됨을 의미하고, 그만큼 은원이 없는 자만 할 수 있는 은퇴식이었다. 그래서 금분세수를 마친 사람들은 정파의 불문율로 건드릴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불문율을 어기고 이렇게 잔악무도한 짓을 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염수객 자체가 만만치 않은 고수라는 점이었다. 그는 삼화취정에 이르렀던 고수로, 운남성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고수였다. 근데 저렇게나 무력하게 제압되어 있는 것이다.
비도가 하나 더 날아갔고, 또 한 사람이 죽었다. 이제 건장한 남자들은 다 죽었다. 옆에는 늙은이와 여자들, 아이들이 주르륵 묶여있었다.
“여기 중에 네 가족도 있지? 내가 한 번 맞춰볼게.”
남자는 비도를 손 위에서 돌렸다. 곽철광은 악다구니를 지르며 몸뚱이를 팔딱거렸지만, 돌아오는 건 거한의 발길질 밖에는 없었다.
가죽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곽철광이 땅바닥을 굴렀다. 그 와중 한 여자의 이마에 비도가 박혔다.
“으아악, 아악!”
이제 곽철광의 눈에 공포심이 가득 채워졌다. 비명은 말의 형태도 갖추지 못했다. 그저 소리에 불과했다.
“맞히다, 인가? 맞추다, 인가? 칼잡이. 뭐였지?”
“이런 경우에는 둘 다 옳은 것 같습니다. 소주(少主)님.”
피풍의를 입은 사내가 말했다. 곽철광은 몸을 꿈틀거리면서 소주라 불린 남자의 발치 앞으로 기어갔다.
“대체 원하는 게 무엇이십니까! 말만 하십시오! 제발, 뭐든지 다 하겠습니다···”
“아하. 드디어 경어를 쓰는구나. 진작 좀 그러지.”
곽철광은 그 묶인 몸으로도 소주의 발등을 핥았다. 소주는 그를 내려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살려주지.”
소주는 가지고 있는 비도들을 떨어뜨렸다. 곽철광은 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땅바닥에 찧었다. 어찌나 세게 찧었던지 이마가 바로 찢어지고 피가 흘렀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대협! 평생 심산유곡에 틀어박혀 칡뿌리만 먹고 살겠습니다!”
“하하. 각오가 굉장한걸.”
남자는 웃더니 사내 둘에게 눈짓을 했다. 피풍의를 입은 남자와 거한이 한 걸음 움직이는 듯했다. 그리고 곽철광의 눈이 크게 떠졌다.
촤아악!
곽철광의 눈에 들어온 건, 묶여있는 사람들 전부가 두 사람의 칼질에 몸이 베이는 장면이었다.
“아, 아···”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단말마 같은 신음소리를 냈다. 그 스러지는 사람들 중에는, 소주라 불린 남자가 말한대로 곽철광의 아내, 아이도 있었다.
“···으, 아···”
소주라 불린 남자는 언어능력을 상실한 것만 같은 곽철광을 보고 혀를 찼다.
“천추마령신공(天樞魔令神功)은 이래서 귀찮아. 꼭 이렇게 번거로운 짓을 해야 되니까 말이야.”
남자는 쭈그려 앉은 채 곽철광의 머리에 손을 대었다. 곽철광의 눈동자가 남자의 손이 있는 곳으로 빨려들어가듯 위로 뒤집혔다. 그리고 놀랍게도 곽철광의 정수리에서 회색 연기가 나왔다. 그건 남자의 장심(掌心)으로 고스란히 흡수됐다. 남자가 곽철광의 머리에서 손을 떼자 곽철광은 앞으로 푹 쓰러졌다. 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남의 절망을 먹고 자라는 무공이라. 이딴 무공은 왜 만들었는가 몰라.”
남자는 투덜거리면서 시체들 쪽으로 갔다. 그는 엎어진 시체들을 툭툭 차면서 뒤집었다. 검상은 마치 열꽃이 핀 것처럼 살이 뒤집어져 있었다. 이런 특이한 검흔을 내는 무공은 정파에 하나밖에 없었다.
“오, 이십사수매화검법. 오늘은 화산파야?”
“어제는 무당파의 양의검법(兩儀劍法)을 써서, 오늘은 화산파의 무공을 쓰려고 합니다.”
“그래, 그래. 많으면 많을수록 혼란스럽겠지.”
남자는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는 상처들이 잘 보이게끔 시체들을 전부 발로 차서 뒤집어놓았다.
“아, 나는 진짜 천재다. 천추마령신공도 수련하고, 아버지의 말씀도 이렇게 잘 수행하고. 난 어쩌면 마신님의 화신이 아닐까?”
“···소천마님, 마신님은 공식적으로 화신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건 교리상···”
“알아, 임마. 농담이야. 그리고 정파에서는 소주라고 부르라니까? 말이 말 같지가 않아?”
“죄송합니다.”
피풍의를 쓴 남자가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소천마, 천유현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마을 어귀로 향했다.
“다음은 영인(永仁)으로 가자. 거기 운진거사(雲盡居士)가 있다니까.”
“존명.”
천유현과 두 사람은 그렇게 작은 마을을 벗어났다. 이제 그곳은 마을이라 부를 수 없었다. 마을에 살아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
천주성주는 본인이 검후임을 숨기고자 했지만, 한유림이 본인의 딸인 건 숨기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게 부모의 자존심인지, 죄책감인지는 알 수 없었다.
사실 크게 상관은 없었다. 한유림이 보타암 출신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고작해야 금원대 사람들과 세가의 몇몇 인물들이 전부니까.
십이당주들은 천주성주에게 딸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놀랐지만, 한유림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하긴 성주 본인이 딸이라는데 누가 뭐라 하겠는가.
이제 한유림은 명실공히 천주성의 아가씨가 되었다.
“···실감이 안 나요. 어머니를 만났다는 게.”
“그렇겠지.”
오늘은 내가 천주성에서의 마지막 날이라고 공언했다. 이제 더 이상 중원으로 가는 걸 지체할 수 없기에 내일이라도 출발해야 했다. 난 한유림을 봤다. 달빛 아래 비친 한유림의 피부는 티 하나 없이 깨끗했다. 뭔가, 아름답다···라는 추상적인 단어를 정의하자면 지금 한유림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했다.
“정말 너무 감사드려요. 가주님께는 정말 제 모든 걸 드린다고 해도 이 은혜가 다 갚아지지 않을 것 같아요.”
“그래. 잘됐네.”
“혹시 가주님, 저희 금원대 무인들 휴가 규정이 어떻게 되어있는지 아세요?”
나는 갑작스런 말에 한유림을 빤히 바라봤다. 농담을 하려는 건 아닌 것 같았다. 하긴 한유림이 나한테 농담을 할 리가.
난 잠깐 생각을 해보고 말했다. 그런 규정들은 금화청이 만들었고, 나와 상의를 한 적도 없었다.
“아니.”
한유림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 년 기준으로 스무 날이에요.”
“그래? 많은 건가?”
“음, 다른 세가 무인들도 그 정도 할 거예요.”
하긴 금화청이 만든 규정 같은 것들은 평균에 입각해 있을 터다. 그렇다고 금원대 애들이 휴가를 더 바란다거나 그러진 않았으리라. 만약 그렇다면 내 귀에 들어왔겠지.
지금 한유림을 봐도 휴가일수를 늘려달라는 것 같지는 않았다. 보통 그런 얘기를 하려면 초조해야 하는데, 한유림은 도리어 비장했다.
“전 칠 년 동안 하루도 쉰 적이 없어요.”
“그래?”
“근처 산적들을 소탕하거나, 수련하거나, 금음검법을 해석해보거나, 딱히 할 일이 없으면 순찰을 돌았죠. 이런 말씀을 드리는 건 저를 칭찬해달라고 하는 건 아니예요.”
“음.”
생각해보면 한유림과 이렇게 둘이서 긴 얘기를 해본 적은 처음인 것 같았다. 한유림도 그걸 의식하고 있는 듯 얼굴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제가 가주님께 생명을 구원받고, 전 늘 가주님께 도움이 되기를 바라왔어요. 근데 가주님을 돕기에는 제 역량이 부족하더군요.”
“금원대주로서 할 일을 하는 게 날 도와주는 건데.”
“아니요. 전 가주님께, 직접, 도움이 되고 싶었어요. 가주님이 혼란스러워하실 때 옆에서 지탱해드리고 싶었고, 가주님의 검이 되기를 원했죠. 하지만 가주님은 혼란스러워하실 때가 없고, 제가 가주님의 검이 되기에는 가주님의 검이 훨씬 더 강했어요.”
한유림은 계속 말했다. 그 말에는 죄책감도 섞여있었지만, 묘한 박력도 있었다.
“저도 가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금원대주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하는 것밖에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가주님은 완벽하신 분이니까요.”
다른 사람들한테는 칭찬을 몇 번 들어봤지만 가까운 사람한테 듣는 건 또 신선한 기분이다. 좀 낯간지럽다고 해야 하나. 허나 한유림은 진지했다.
“그러나 그걸로는 부족하다 다시 한 번 깨달았어요. 가주님은 제 생명을 구하시고, 이번에는 삶까지 찾아주셨어요. 전 생존하는 것과 사는 건 다르다고 생각하거든요. 생존은 사는 것 자체가 목적이지만, 사는 건 생존하며 이뤄야 할 다른 목적이 있는 거죠. 저에겐 그게 어머니였고요.”
그랬던 걸까. 하긴 내가 한유림에게 줬던 것들은, 내 입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갚기 힘든 종류의 것임이 틀림 없었다.
“그래서, 지금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혹시 허락해주신다면, 칠 년 동안 모아놨던 휴가를 한 번에 쓰고 싶어요.”
“휴가?”
아까 그래서 휴가 얘기를 꺼낸 거구나. 난 계속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네. 그 기간을 합치면 아마 반년이 좀 안 되겠죠. 그동안 옥녀단마신공을 익혀보고자 해요.”
옥녀단마신공이라. 기억 난다. 장소열이 찾았던 것이기도 하고, 그녀가 내게 신옥주를 넘기고 가져간 것이기도 하다. 그녀는 아마 그걸 가지고는 있되 익히지는 않았을 거다. 가져간 것도 익힐 생각이 아닌 보존하려던 생각이었을 터다. 그런 절학은 혼자 독학하기도 힘들며, 그녀는 금원대주로서 황금공을 익히느라, 금음검법을 익히느라 바쁘게 살았으니까.
“옥녀단마신공은 이름대로 마교의 천적인 정종 무공이에요. 그러나 여자밖에 익힐 수 없죠. 분명 이걸 익히면 제가 가주님께 더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해요.”
“그래, 그렇겠네.”
난 고개를 끄덕였다. 부하의 각오가 있다면 그걸 지지해주는 게 장(長)의 일이었다. 한유림이 거짓말을 말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도, 게으르게 놀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난 잘 알고 있었다.
“그럼 그렇게 해.”
“가주님이시라면 허락해주실 줄 알았어요. 감사합니다.”
어차피 운남은 중원의 내로라하는 고수들의 각축전이 될 거다. 당장 한유림이 가서 도울 건 딱히 없었다.
나와 한유림의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그녀는 내게 마지막 인사를 한 다음, 예의를 갖춰 인사한 뒤 내 거처를 빠져나갔다. 마지막 말은 꽤 인상적이었다.
“흠.”
난 몸을 옆으로 꺾었다. 내가 본 곳에는 담장이 있었다. 저 뒤에, 누군가가 있었다. 허나 그 누군가는 내가 바라본다는 걸 직감적으로 눈치챈 듯 쏜살같이 도망가버렸다.
너무 쏜살같이 도망가서 담장 너머로 긴 머리카락이 펄럭이는 게 보였다. 요 근처는 중원에서 온 사람들이 묵는 곳이었다. 그리고 같이 온 무리 중에 저렇게 머리가 긴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그렇게 부드러운 향기를 가진 사람도 한 명밖에 없었고.
난 갈유월이 멀리 도망가는 방향을 담장 너머로 지켜보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더 이상 뒤에만 서있지는 않겠다라···”
난 마지막 한유림의 말을 곱씹었다. 내가 바뀌어가듯, 내 주변 사람들도 바뀌어 가고 있었다.
그렇게 천주성에서의 마지막 날이 지났다. 내일은 일어나자마자 운남으로 가야 했다. 중원의 동북쪽 끝에서, 서남쪽 끝으로 가는 것이었다. 꽤 긴 여행이 될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