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운이 나빴을 뿐
175화 운이 나빴을 뿐
당연히 화산파는 극구 부정했다.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 운남에 가있는 제자조차 없다고 항변했다. 허나 분노의 물결에 그 항변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구파일방이라는 것들이 뒤로 몹쓸짓하는 건 알았지만, 아주 생각보다 더한 쓰레기들이었군!”
“염수객이 사자신검의 위치를 알고 있었고, 그래서 화산파가 죽였다는군.”
나온 건 염수객의 시체와 시체에 있는 이십사수매화검법의 흔적뿐이었다. 그 외에 어떤 것도 발견되지 않았지만, 이야기는 당위성만 충족되면 갈래갈래로 퍼져나갔다. 그야말로 대개 화산파가 악역으로 등장하는 ‘이야기’들이었다.
소림사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신단회는 사자신검 장보도 경쟁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밝혔지만, 이미 인식이 싸늘해진 후였다. 찰나의 싸움인데, 늦어버린 것이다.
“저렇게 말하고 뒤로 사람들을 굴리고 있겠지. 한 두 번인가.”
“모르는 게 아니라 눈을 감아준 것이거늘, 아주 선을 넘는군.”
이미 구파일방과 기존 오대세가들이 쌓아온 불신은 쉽사리 꺾이지 않는 것이었다. 냉정하게 말하면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들이 관례라는 이름으로 부정을 저지르고 있던 건 사실이니까.
“그 와중에 운남에는 소제만 혼자 보낸다며?”
“쯧쯧, 소제가 불쌍하군. 신입 오대세가라고 방패병으로 내세우는 꼴이 아닌가.”
“그렇지. 아무리 그래도 소제가 어찌 그들의 말을 거절할 수 있겠나.”
들어보니 그들은 무인들이었다. 이제 무인들 사이에서 내 별호는 소제로 정착된 모양이다. 상인들은 나를 황금세가 가주라고 부르고, 무인들은 나를 소제라 불렀다. 난 그래서 날 부르는 호칭으로 무인과 무인이 아닌 사람을 구별할 수 있었다.
아무튼 그나마 다행인 건, 막 오대세가에 들어온 황금세가는 그 비난에서 피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지금 다른 곳은 소란과 소요를 막느라 난리라고 하는데, 강서만큼은 평안하다고 하니까.
나는 돈을 지불하고 객잔을 나왔다. 맛없는 소면과 만두였다. 맛있는 집이라고 왔건만, 그렇게 맛있지도 않았다. 아니면 내 입이 너무 높아져 있는지도 모른다.
밖으로 나와도 사자신검에 관한 이야기와 화산파 이야기는 끊어질 줄 몰랐다. 무인이든, 무인이 아니든 그것들은 중원에서 가장 뜨거운 주제였다.
“근데 화산파가 진짜 그랬을까?”
“그러면 이십사수매화검법의 흔적이 왜 있겠는가?”
“그렇게 대놓고 흔적을 남겼다는 게 이상하다는 거야.”
“이 사람, 아주 구파일방에 단단히 홀렸군. 이제 옛날에 그 정의로운 집단이 아닐세.”
몇몇 사람들은 의심했지만 그들의 의견은 묵살됐다. 수심 밑에 박혀있는 조약돌이 강물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 뒤에서 누군가 조용히 물었다. 하얀 죽립을 쓴 송천우였다.
“진짜 화산파가 했다고 보나?”
“아뇨. 그럴 리가 없죠.”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지?”
“뒤로 구린 짓을 얼마나 많이 했는데 그렇게 초보적인 실수를 하겠어요.”
“···묘하게 설득되는 말이군.”
남궁연화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이 정답인 것이다.
생각해보면 간단한 논리지만, 분노한 대중들은 이성적일 여유가 없었다. 원래 분노는 시야를 좁히며, 일종의 고집까지 만든다. 납득되는 논리라도 그들이 받아들이기 싫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도 마교의 행동이겠죠.”
난 확신했다. 사자신검 장보도 건을 터뜨린 건 백 번 양보해서 마교가 한 게 아닐 수도 있다 쳐도, 이건 분명히 마교의 행동이었다.
마교는 여러 번 중원 무림을 침략하면서 무공서들을 약탈해갔었다. 화산파의 이십사수매화검법을 몰래 꿍쳐두고 있을 정신 나간 정파가 있을 리는 없을 테니, 무조건 마교의 짓이었다.
“그럼 최대한 빨리 운남으로 가야겠군.”
“네. 당주님들은 먼저 가시죠.”
내 말에 남궁연화가 멈칫했다. 다른 당주들도 의문스러운 눈빛을 했다.
“우리끼리만 운남으로 가라고?”
“네.”
“너무 당연한 질문이지만, 안 물어볼 수가 없군. 자네는 왜 안 가나?”
“기회가 생겼거든요.”
내가 말했다.
“정파의 또 다른 적을 삭초제근할 기회가.”
내 말에 남궁연화가 잠시 생각하다가 감탄했다. 그제야 생각이 거기까지 닿은 모양이었다. 그녀도 중원의 생리를 빠삭하게 아는 전문가다.
중원 정파가 혼란스러우면 사파가 득세하는 걸 모를 리가 없다.
이른바 산적들에게는 대목이었다. 문파들끼리 싸우든, 어디로 내뺐든 무슨 이유라도 전력이 빠져있으면 도적떼 처리는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당장 지금도 도적들이 통행세를 받으면 표물을 건드리지 않는 불문율을 어기고 있는데, 지금 같은 상황에서라면 더욱 더 날뛸 게 분명했다. 언제나 통용되는 말이지만, 위기는 기회였다.
“마교가 저희에게 기회를 준 셈입니다.”
이 계획을 실행한 마교놈들은 꿈도 못 꾸겠지만 말이다.
*
자금에 여유가 없는 대다수의 표국들은 표행을 멈출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물건을 늦게 갖다 주면 그만큼의 위약금이 물리고, 거기다가 어음을 못 갚는 게 겹치면 순식간에 파산이었다. 그러니 가만히 앉아서 파산을 기다리기보다는, 실낱같은 운에 걸고 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 대별산(大別山)을 통과하는 은상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당장 다음 달에 갚아야 할 어음과 빚, 위약금을 생각하면 표행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젠장, 결국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건 새우들이라니까.”
표국주 최은상이 분노를 속으로 삭였다. 당장 중원이 혼란스러우면 제일 먼저 피해를 입는 건 상계였다. 제일 약자니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것만 제대로 하자고, 이거 끝나고 당분간 표행 안 받을 테니까.”
최은상의 말이 신호라도 된 듯이 나무가 크게 흔들렸다. 바로 최은상과 표사들이 사색으로 변했다. 그들도 표행을 한두 번 다닌 게 아니다. 나무에 떨리는 숲과 사람 때문에 떨리는 숲은 직감적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안녕들하신가.”
껄껄 웃으면서 나오는 건 단 한 사람이었다. 그는 검버섯이 잔뜩 핀 노인으로 허리까지 굽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알고 있었다. 중원은 떼거지보다 단신으로 다니는 사람을 조심해야 하며, 젊은이보다는 노인과 아름다운 여인, 어린 아이를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누구십니까.”
“그건 알아서 무엇하려고?”
노인이 껄껄 웃었다. 최은상은 십몇 년의 표국주 경험으로 빠른 결단을 내렸다.
“표물을 드리겠습니다. 어르신. 목숨만 붙여서 보내주시지요.”
“허허. 눈치가 참 빠른 녀석이로다.”
노인은 손을 허리춤에 갖다 대려고 했다. 순간 낯선 기시감을 느낀 최은상은 고개를 숙였다.
촤악!
최은상의 머리 위로 무언가가 스쳤다. 뒤를 바라보니, 표사의 얼굴에 낫이 박혀있었다. 낫은 손잡이의 뚫린 구멍으로 쇠사슬이 길게 늘어뜨려져 있었는데, 그것은 노인이 들고 있는 다른 낫의 손잡이와 연결되어 있었다.
사파 고수는 정파 무인들보다 상계 사람들이 더 잘 안다. 당연하다. 더 마주칠 일이 많으니까. 그리고 최은상은 저런 독특한 무기를 쓰는 사파 고수를 알고 있었다.
“쌍겸노옹(雙鎌老翁)···”
쌍겸노옹 노두식. 별호대로 두 개의 낫을 번갈아 쓰는 무인이다. 사파 고수 중에 초절정, 그것도 삼화취정에 든 사람은 많지 않다. 그 많지 않은 삼화취정의 고수 중 한 명이 바로 노두식이었다.
“···삼 년 전에 자취를 감췄다고 들었는데.”
“어우, 그 강운이라는 놈한테 걸려서 쫓기느라고 말이야. 잠깐 숨어있었지.”
노두식이 큭큭 웃었다. 실제로 그의 얼굴에는 번개가 친 것 같은 검상이 깊게 남아있었다. 일명만뢰 강운에게 걸려서 죽을 뻔해서 은거를 하다가 막 나온 모양이었다. 운도 더럽게 없었다. 그 악독한 노마두의 초출이 본인들의 표행이라니 말이다.
최은상은 절망했다. 저 노인이 노두식이라면 타협 따위는 없었다. 저 자는 강도짓도 강도짓이지만, 사람을 죽이는 걸 즐기는 걸로 더 유명하기 때문이었다.
“자네는 모를 거야. 무기로 전해져오는 사람의 떨림이 어떤 대어를 낚는 것보다 손맛이 좋다는 걸 말이야.”
어차피 노두식의 말은 최은상에게 들리지 않았다. 그저 억울할 뿐이다.
“자네들은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야.”
노두식의 말마따나, 단순히 운 때문에 죽는다는 것이 그렇게나 억울할 수 없었다.
어느새 회수된 낫이 공중에서 빙빙 돌았다. 낫에 번쩍거리는 빛무리가 모여든다. 강기였다. 표사 다섯과 표국주 한 명을 썰기에는 과분한 크기였다.
낫이 큰 원을 그리며 날아오는 걸 본 최은상은 눈을 감았다. 살기가 가득한 바람이 뺨에 스쳤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그 살기는 뺨에서 스친 게 전부였다. 쩔그렁, 낫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난 다음에야 최은상은 눈을 떴다.
“···엇?”
그리고 최은상의 눈에 들어온 풍경은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앳된 얼굴의 청년 앞에 노두식이 어깨부터 허리까지 단면을 보이며 두 동강이 나있었기 때문이었다.
“괜찮습니까.”
청년은 굉장한 미형이었다. 반면 목소리는 고저가 없어서 뭔가 얼굴과 어울리지 않았다.
최은상은 청년을 계속 바라보다가, 문득 자신이 대답하지 않은 걸 알아챘다.
“아, 가,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저 노인이 운이 나빴을 뿐이죠.”
청년은 검을 납검했다. 딱 봐도 떠나려는 느낌이었다. 최은상은 급하게 물었다.
“대, 대협께서는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꼭 보답하고 싶습니다. 나름 오래된 표국이라 돈은 많습니다.”
사실 많이 없었지만, 최은상은 일단 그렇게라도 말해야 될 것 같았다. 청년은 멈칫하더니 미소를 지었다.
“황금세가의 가주, 금목환입니다. 보답은 괜찮습니다.”
“황, 황금세가 가주?”
최은상이 깜짝 놀랐다. 그러고 보면 못 알아본 게 이상했다. 현재 중원에서 이름을 날리는 젊은 고수, 한 상단의 가주기도 하며 소제라고도 불리는 사람.
특징으로는 여자라고 착각할 정도로 미소년이라고 했다. 한 번 보면 잊을 수가 없는 얼굴이라고. 실제로 본 사람은 얼굴에서 빛이 난다고 표현하기까지 했다. 최은상은 흔한 중원의 과장인 줄 알았지만, 그것은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그럼 이만.”
금목환은 그리고 사라졌다. 최은상은 멍하니 순식간에 작아지고, 사라진 금목환의 뒷모습을 봤다.
최은상은 다음 마을에 도착했을 때서야, 지금 중원을 강타하고 있는 금목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칠정살(七井殺), 사사혈인(死沙血人), 중경삼흉(重慶三凶), 암독비도(暗毒匪徒) 등 사파 고수라고 이름 난 흉수들을 모두 척살하고 다닌다는 소식이었다. 하나하나 이름이 가볍지 않고, 최소 초절정의 고수들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 명단에 쌍겸노옹도 추가되어야 할 터였다.
“···생각한 것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었군.”
그 소식은 바로 중원 전체로 퍼져나갔다. 어린 고수가 사파의 절정고수들을 때려잡는다는 이야기는 운남에서 누가 죽었다더라, 또 화산파의 검흔이 발견됐다더라, 십 년 동안 은거했던 사파 거두가 나타났다더라, 하는 암울한 소식들 중에서 더욱 희망차게 빛났다.
사람들은 금목환이 모든 사파놈들을 때려잡을 것이라며 칭송했고, 사파놈들은 절대 소제를 이길 수 없다고 소리를 뻥뻥 치고 다녔다.
그리고 그것들은 남아있는 사파 고수들에게 자극이 되기 충분했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퇴물들 잡으면서 값어치 올린다 이거지.”
녹림칠십이채 중 복건 무이산(武夷山)의 산왕채(山王寨).
의자에 거대한 사람이 앉아있었다. 의자 또한 거대했지만 워낙 몸이 커서 의자가 위태로워 보였다.
그가 바로 녹림칠십이채의 총 채주. 십왕 중 일인인 투왕(鬪王) 장덕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