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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세가 절대무신-176화 (177/225)

176화 선 넘네

176화 선 넘네

투왕 장덕수는 뜻밖의 손님을 받았다. 바로 낭왕 염왕수였다. 서에 번쩍, 동에 번쩍하는 낭왕의 방랑벽 때문에 그와 약속하고 만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러니 이렇게 마주치는 것도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투왕이나 낭왕이나 같은 사파의 십왕이다. 사이가 절친하지는 않더라도, 서로 술잔을 몇 번 기울이기는 한 상대였다.

“그래, 어쩐 일인가.”

장덕수는 의뭉스럽다는 눈초리로 염왕수를 바라봤다. 낭왕은 그 눈초리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앞에 있는 자리에 앉았다. 옆에 멘 호리병이 출렁거렸다.

“아직도 술을 많이 마시나보군.”

“술 없으면 인생을 못 살지.”

염왕수는 정파 사람들에게도 소문난 애주가였다. 매일 호리병에 청주를 채워넣고 물 대신 마시는 사람이었다.

“그냥 근처 왔다가 얼굴이나 보려고 왔지.”

“신소리 하지 말게.”

장덕수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염왕수는 껄껄 웃었다. 그는 그렇게 웃다가 두 손을 턱에 받쳤다. 자세가 바뀌면서 눈빛도 많이 바뀌었다.

“요새 중원 정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고 왔지.”

“중원 정세?”

낭왕이 중원 정세라. 중원 정세 따위는 관심 없고 술만 마시며 돌아다니던 사람의 입에서 나오기는 낯선 단어였다.

“그래. 지금 자네는 정세를 어떻게 보고 있나?”

“사자신검 하나로 운남에 사람이 몰렸지.”

“반틈짜리 대답이군.”

염왕수의 말에 장덕수의 관자놀이에 근육이 솟았다. 같은 말을 듣더라도 그런 말을 하는 게 용납이 안 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장덕수도 살면서 책 한 권 안 읽은 처지지만, 그래도 방랑벽있는 술꾼보다는 교양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중원 정파에 구멍이 생기지 않았는가.”

“···음.”

“실제로 녹림채가 요즘 꽤 쏠쏠하게 활동한다던데. 아닌가?”

장덕수도 그걸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사파한테는 기회였다. 사파는 정파와 달리 실리를 따진다. 낮은 확률의 도박인 사자신검에 걸지 않고, 당장 눈앞에 있는 상단을 털어먹는게 그들의 삶이었다.

“뭐 대단한 비밀이라도 말해주는 줄 알았네. 그래. 맞아. 지금 우리한테는 대목이지. 수로채도 엄청 신났을걸.”

“그 정세를 주도하는 게 누구인지는 알고 있겠지.”

“소제라고 불리는 꼬맹이지. 아주 재수없는.”

사파들은 조직이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많은 사파고수들을 죽이고 다니는 것과 장덕수는 별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기분이 나쁘기는 했다. 장덕수는 금목환이 고작 공명심 하나 때문에 저런 지랄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황금세가 가주면서 창천검제를 이긴 무위, 어린 나이를 갖추고 있는 그는 지금 중원에서 가장 뜨거운 무인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당장 호사가들은 금목환을 칠존의 반열로 올려야 되는 건 아니냐고 호들갑들을 떨고 있다.

저런 꼬맹이 하나가 무슨 중원을 대표해 천주성을 다녀오고, 운남에 가고, 사파 사람들을 부수고. 낭왕의 말대로 금목환의 발걸음 하나하나에 중원이 주목하고 있었다.

그런데 낭왕이 그 소제 얘기를 꺼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문제는 그거지. 지금 소제라는 놈을 싫어하는 중원인은 없어. 그러니까 그놈이 만약 나이가 들면 정파가 통합적으로 움직일 수도 있겠지. 그건 사파에게는 거대한 문제 아닌가.”

염왕수가 말을 줄줄이 꺼냈다. 장덕수는 깜짝 놀랐다. 매일 술이나 마시고 다니는 저 머릿속에 식견이라는 것이 존재했던 거다. 심지어 꽤 깊은 통찰이었다.

당연하지만 사파의 전력은 정파에 비해 한없이 작다. 그리고 서로 분열되어 있다.

그러나 사파가 안 없어지는 이유는 정파들끼리 견제하기 때문에, 사파까지 신경 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통합이 된다면 쓸려나가는 건 불 보듯 뻔했다.

“그렇게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그 놈은 필사적으로 죽여야 될 놈이야. 그리고 또 그런 사람이 안 나오리라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그래서?”

“이제 우리 사파도 연대할 때가 되었다는 의미지.”

염왕수의 말에 장덕수가 깜짝 놀랐다. 사파가 연대한다는 제안. 당연히 사파끼리 뭉치면 강하겠지만, 그 모임을 정파가 허락해줄 리가 없었다.

“당장 중원은 사자신검 때문에 혼란스러워.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 대해 책임을 묻고, 그놈들은 수습을 하느라 바쁘지. 연대하려면 지금 해야 돼.”

염왕수가 말을 잇지 못하는 장덕수를 몰아붙였다.

“···그게 되나?”

장덕수가 난장판만 치면서 십왕까지 올라온 건 아니었다. 정파는 비무나 회전이라는 규정이라도 있지, 사파는 눈깔 한 번 잘못 마주치면 생사결이었다.

중요한 건 눈치였다. 어떤 수를 동원해서도 이길 수 없다면, 알아서 숙여야 하는 것이다. 당장 칠존 중 한 명이 무이산 근처를 돌아다니는 첩보라도 듣게 되면, 바로 그 날은 장사 접어야 하는 날인 거다.

눈치껏 될 일인지, 아닌지를 생각해봐야 했다. 사파 연맹이 생긴다면 정파는 사파를 더 쉽사리 건들지 못하게 될 거고, 또한 본인은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편안히 살 수 있다. 연맹이 생긴다면 당연히 직위가 생길 거고, 장덕수는 윗자리를 보장받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사파 연맹을 만들려다 걸리거나, 실패하면 어떤 후폭풍이 올지 몰랐다. 큰 보상에는 높은 위험이 따르는 거였다.

“흠.”

“지금이 적기야.”

염왕수가 말했다. 실제로 중원 정파가 이렇게 혼란스러워본 적이 없었다. 내홍을 겪으면서도 사자신검이라는 장보도 건도 잘 마무리 지어야 하니까.

눈치는 보되, 결정은 빠르게. 장덕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한 번 해보지.”

“그럼 여기 수결을 찍게.”

염왕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종이를 펼쳤다. 종이는 깜짝 놀랄 정도로 많은 사파 고수들과 그들의 지장이 찍혀져 있었다.

“수로채주도 여기 있다고?”

사파 무인들 중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수로채주. 그의 본 실력을 본 사람은 없다. 전부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설로는 칠존에 필적하는 내공을 지니고 있다는 얘기도 떠돌 정도였다. 실력은 충분하지만 칠존이니, 십왕이니 하는 것들이 정파의 분류방법이니 안 들어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정도 무인이라면 연대를 당연히 거절할 거라 생각했는데, 정말 그의 수결도 있었다. 낭왕이 중원을 빨빨 돌아다닌 것이 이런 이유였던가. 장덕수는 감탄했다.

“그래. 자네만 하면 되네.”

장덕수는 바로 엄지손가락을 이빨로 깨물어 손가락에 피를 묻힌 다음 찍었다. 인생 한 번 사는 거, 이런 모험도 해봐야 했다.

그렇게 아직 이름이 정해져있지 않은, 사파 연맹이 윤곽을 갖춰가려 하고 있었다.

*

언젠간 해야 할 일이었다. 내가 살면서 중원을 횡단할 날이 얼마나 있을까.

내가 의협에 대한 정의를 아직 정확하게 내리지 못했다고 해고, 사파 사람들에게 의협이 없다는 건 알 수 있다. 일관성도 없고, 아무 것도 없다.

그들은 그저 목숨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다. 마교가 침략하고 사람을 죽이면, 마교 편에 서서 사람들을 죽일 거다. 왜냐하면 그게 살 확률이 높으니까. 적어도 내가 만난 사파 사람들은 그랬다.

“제발, 제발 살려주게. 다시는 이런 강도짓 안 하고 손 씻고 살겠네.”

이것도 사파 사람들의 특징이었다. 본인이 죽이는 건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면서 본인이 죽을 위기에 처해있을 때는 살려달라는 말이 뻔뻔하다. 아무리 썩은 정파 사람이라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들은 중원에 있어봤자 정파를 좀먹는 쥐새끼들이었다.

“저 놈이 죽인 아이 수만 해도 열 명은 넘을 겁니다! 절대로 살려둬서는 안 됩니다!”

뒤에서 상단의 사람이 소리쳤다. 혹여나 내가 마음이 흔들려 살려줄까 두려워하는 목소리였다. 난 옆을 바라봤다. 나와 눈이 마주친 명재희는 바로 맑은 목소리로 읊어댔다.

“녹황채(綠荒寨) 채주 사무일. 소화산(小華山)의 백정이라고 불리는 놈. 말 그대로 쓰레기 같은 놈이야. 아이를 죽여 간을 먹는 습성이 있는 미친놈이라지.”

“그렇구나.”

난 사무일을 바라봤다. 사무일이라는 사람의 표정만 보면 세상 불쌍한 사람이었으며,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은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측은할 수도 있었다.

그러던 갑자기, 사무일의 허리춤에서 초승달 모양의 섬광이 번쩍였다. 아마 내가 봐주지 않음을 직감한 것 같았다. 그 섬광은 나를 향한 것도 아니고, 옆에 있는 명재희를 향했다.

“으악!”

칼은 명재희를 노리고 있는데, 비명은 도리어 뒤쪽 상인들에게서 났다. 그들이 보기에는 명재희가 칼에 찔리는 것처럼 보였을 거다.

그러니까 지금 보여지는 광경이 쉽사리 이해될 수 없을 터였다. 칼날에 올라탄 명재희의 모습이 말이다. 명재희는 발끝으로 검면을 눌러 서있었다. 여전히 경공 하나만큼은 천재적인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 경공을 가능케 하는 다리. 경공의 고수는 대개 각법의 고수이기도 했다. 명재희의 흰 다리가 채찍처럼 하늘을 갈랐다.

쐐액!

마치 매가 하강하는 것만 같은 소리가 나면서, 가죽 북을 두드리는 소리가 펑 났다. 명재희의 발이 사무일의 관자놀이를 차버린 것이다.

“으억!”

이빨이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사무일의 몸이 날아갔다.

“어딜.”

명재희는 허리를 숙여 손으로 발등을 털었다. 발등이 닿은 것도 싫은 모양이었다. 나는 사무일의 몸이 부딪친 바위쪽으로 걸어갔다. 송로를 꺼내 사무일의 몸에 찔러넣었다.

“커···억!”

바로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제법 훌륭한 귀식대법이었지만 내 기감을 속이기는 한참 어리숙했다.

난 상인들을 안전한 마을까지 전송했다. 명재희는 사람들이 떠나자 종이를 쫙 펼쳤다. 그리고 먹을 손가락에 묻혀 일자로 죽 그었다. 사무일의 이름에 실선이 쳐졌다.

“요즘 고수들을 만나는 빈도가 줄었네.”

“그러게.”

명재희의 말에 나도 긍정했다. 오히려 반대가 되어야 정상이다. 사파 고수들에게 나만큼 만만한 명성꾸러기가 어디 있으랴. 갓 중원에 이름을 올렸으니 나에 대해 모르고 덤벼들어야 했다.

“뭔가 이상해.”

난 명재희가 만든 종이를 바라봤다. 아직도 선이 안 그어진 이름들이 많았다. 소화산에서 잡아야 할 사파 사람이 세 명인데, 한 명밖에 잡지 못했다.

실제로 마을이나 산에서 만나는 산적이나 괴한 수도 눈에 띄게 줄었다. 특히 광서(廣西) 지방은 지역을 주름잡는 세력이랄게 딱히 없어서 더 많이 나와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그래서 신단회 무인들은 사파를 제대로 격퇴하는 걸 못 보여주기도 했다. 그나마 그거라도 했으면 인식이 반전됐을 터이다. 그 중 화산파는 아주 죽을 맛일 거다.

“재희.”

“응?”

“세가로 돌아가.”

“···왜? 내가 짐인가? 나도 꽤 빠른데.”

명재희는 달리는 시늉을 해보였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세가로 가서 할 일이 있어서 그래.”

“무슨 할 일?”

“방비. 어떻게 된지는 모르겠지만, 사파 사람들이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아.”

명재희는 내 말을 바로 알아차린 듯 눈살을 찌푸렸다.

“세가가 공격당할 수도 있다고?”

“유비무환이니까. 그게 사파의 방식이기도 하고.”

“선 넘네.”

그 말에는 나도 공감했다. 만약 세가를 공격한다면 그들은 정말 선을 넘는 것이리라.

난 명재희를 전송했다. 그녀에게 말하지 않은 이유도 있기는 했다. 조직적으로 움직였다면 누군가가 기획을 했다는 것인데, 그 기획을 한 사람은 분명 사파에서 인망이 높은 사람일 터였다.

궁금하면 찾아가는 거다. 난 명재희가 사라진 걸 확인하고 복건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무이산이 있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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