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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세가 절대무신-191화 (192/225)

191화 의협지사(義俠志士) (9)

191화 의협지사(義俠志士) (9)

천유현은 주변을 둘러봤다. 이미 사문 근처에는 많은 살수들이 죽어있었다. 검격의 흔적만 봐도 어떤 저항도 없이 죽어갔다는 게 명확했다.

“그 녀석 나이가 몇이랬지?”

어떤 특정을 지을 수도 없는 지칭이었지만, 박용한은 누구를 말하는지 정확하게 알았다.

“올해 약관이라고 했습니다.”

“약관에 이 정도 검흔을 남길 수 있다라.”

천유현은 쭈그려서 시체를 들어 뒤집어봤다. 절단면이 전혀 뭉개져있지 않았다. 보통 내가기공의 고수가 검에 기를 담아 쓰면 뭉개져있기 마련이다. 피부의 면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힘을 뿜어내기 때문이다.

원래는 그게 보통이다. 보통 강호의 사람들은 무기는 기의 촉매제로 썼다. 사실상 검의 형태를 띤 내공으로 싸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근데 이 검격은 능숙한 도수부(屠獸夫)처럼 살을 완전히 발라냈다. 검에 기를 두르는 게 아닌, 검을 기에 담아서 쓴다는 증거였다.

“검에 대한 깨달음이 꽤 깊은 친구군요.”

박용한도 바로 인정했다. 천유현이나 박용한 정도 되면 검흔만 보고도 이 사람이 어떤 경지인지 능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게. 난 이 나이 때 어땠더라.”

“더 강하셨죠.”

“그랬나?”

박용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아부성 발언이 아니었다. 천마의 후계자에게 주어지는 천마신공(天魔神功)은 그만큼의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정종무공으로 절대 따라올 수 없는 속도와 힘을 사용자에게 쥐어줬다.

“강하기는 했지만 정교하지는 않았지. 강하면 꺾이고, 세차면 부서진다했으니. 경지로만 따지자면 이 친구가 위였겠군.”

천유현은 순순히 인정했다. 검의 흔적에서 깨달음을 추적했다. 이미 금목환은 검과 기를 동일시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허나 아직 신검합일(身劍合一)에는 이르지 못했겠어.”

“그렇습니까.”

“내가 보기엔 그래. 검이 너무 깔끔하잖아. 검에 자신(自身)이 배어있지 않아. 그저 검을 무기로서만 다루는 거지.”

“습관을 얘기하시는 겁니까?”

“습관하고는 비슷하면서 완전히 다르지. 습관은 비틀린 천성이지만, 자신은 순수한 천성이거든.”

박용한은 그 말을 보고 시체를 다시 봤다. 실제로 그런 것 같았다. 사람들이 소천마 천유현의 나이가 어려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이것에 있었다. 실제로 그는 본인의 강함과 깨달음으로 증명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물론 천하제일의 무공인 천마신공과 천추마령신공의 도움을 받은 거라고 해도, 그의 오성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검의 흔적을 보면 한 사람이 더 있는데. 상처 끝이 얕게 벌어져있어 여자일 확률이 크겠어.”

“아마 비봉일 겁니다. 무림맹주의 제자 말입니다.”

“아, 기억 난다. 그 성깔 있어 보이는 친구 말이지.”

여기 애뇌산에 모인 사람들 중 주요인물은 모두 용모파기를 파놨다. 그 중에 검존의 제자이자 오룡삼봉의 일원인 갈유월이 있는 건 당연했다.

천유현은 눈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간 고양이 같은 인상의 여자를 떠올려냈다. 허리까지 오는 새까만 머리카락과 비교되는 하얀 피부를 가진 여자아이였다.

“정파의 미래가 밝은데.”

천유현은 갈유월이 만든 시체를 보며 웃었다. 박용한 입장에서는 어이없는 농담이었지만, 실제로 갈유월의 성취도 보통 또래의 경지를 한참 넘어서있었다.

“어때, 이 둘이면 사문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사문 안은 기감을 쓸 수 없어 살수들을 이기기 쉽지 않을 겁니다. 어떻게 보면 살수들에게 가장 적합한 공간이죠.”

“그렇긴 하지.”

“그리고 설사 살수들을 해치운다고 해도, 사문을 벗어나 핵심으로 들어가는 건 또 다른 얘기입니다. 사문 안에서는 헤매다가 아사 상태로 발견되는 게 부지기수니까요.”

박용한의 말에 천유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합리적인 말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합리로만은 설명할 수 없었다.

“내가 물어본 건 둘이면 사문에서 빠져나올 수 있냐는 거였는데.”

“모르겠습니다.”

“진작 그렇게 말하지.”

천유현이 혀를 찼다. 언제나 전략은 최악을 상정하고 움직여야 한다.

“그럼 일단 터뜨려. 어차피 애뇌산에 대어는 많지 않으니까. 선택과 집중을 해야지.”

박용한은 미간을 조였다. 터뜨리라는 명령을 못 알아들은 건 아니었다. 심마환상공은 완벽히 장악한 사람에 한해서 선천지기를 터뜨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명령이 위험부담을 가지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억지로 터뜨리면 제 무공의 흔적이 남을 텐데요.”

“난 그것보다 이 금목환이라는 놈을 잡고 싶은데?”

박용한은 천유현을 바라봤다. 반박을 불허하는 눈빛. 저 눈빛을 띈 소천마에게는 어떤 간언도 통하지 않았다.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박용한은 소매에서 방울을 꺼냈다. 원래 있었던 녹슨 청동 방울이 아닌, 피칠갑이 되어있는 것만 같은 붉은 방울이었다.

ㅡ딸랑.

방울소리가 이름 없는 봉우리를 음산하게 채웠다.

“그리고 최대한 정파를 혼란스럽게 시켜놔. 그 방법은 우리가 전에 논의했으니 따로 안 말해도 되겠지.”

천유현이 말했다. 박용한은 그 말에 살짝 갸웃했다. 어째 어딘가로 떠나는 것만 같은 말투였기 때문이다. 그 궁금증은 바로 다음에 나오는 말에 풀렸다.

“나는 사문으로 들어가니까.”

박용한은 잠깐 자신이 잘못들은 줄 알았다. 사문은 천유현에게도 좋은 공간이 아니었다. 기감과 내공을 자유롭게 운용하지 못하는 곳이니까.

그렇게 생각할 때 천유현은 이미 사문 안으로 발을 옮기고 있었다. 박용한이 막을 새 없이, 천유현은 사문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박용한은 멍하니 언덕을 바라봤다. 순식간에 사선(死線)을 넘어버린 천유현의 모습은 온데간데 찾을 수 없었다.

*

갈유월은 최대한 몸에 힘을 빼고 있었다. 그게 금목환의 유일한 주문이었다.

“흐읍!”

갈유월의 머리카락과 발끝이 같은 방향으로 흩날려갔다. 지금 갈유월은 금목환에 의해 허리를 감긴 채 몸을 떠맡기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갈유월은 이 사문 안에서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녀가 배운 건 태원지기를 다루는 방법일 뿐이었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신체능력이나 기감이 갑자기 상승하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머리 숙여!”

금목환이 외쳤다. 갈유월은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머리를 숙였다. 위에서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흉흉했다.

사문 안에서는 내공을 쓰는 게 허락되지 않았다. 사문은 생기와 대비되는 사기(死氣)가 가득한 곳. 생기인 내공을 쓰면 똑같이 자연의 생기로 순환되어야 하는데, 사기가 들이차게 된다.

조금씩은 몰라도, 이렇게 사기가 가득 찬 곳에서 내공을 쓰면 순식간에 주화입마행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완전히 실제적인 감각의 싸움이었다. 눈은 얼마나 진실을 좇는지, 귀는 얼마나 작은 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지, 손은 얼마나 머리의 명령을 빨리 수행할 수 있는지를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싸움에서 고도로 훈련된 살수들은 그야말로 날아다녔다.

갈유월의 육안은 어둠을 꿰뚫어보지 못했고, 감각은 실 같은 얇은 비침이 밀어내는 대기를 느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지금 그녀는 금목환의 품에 있는 것이었다.

원래라면 부끄러워서 죽을 것만 같았지만 지금은 그럴 때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빛살 같은 공방이 오가서 정신이 없는 것이다.

금목환은 한 손으로 팔방으로 날아오는 단도들을 모두 쳐냈다. 갈유월은 지금 금목환의 시점으로 싸움을 구경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갈유월의 눈은 금목환의 검을 따라가지 못해 하늘이 여러갈래로 조각나 미끄러지는 것만 같았다.

대체 얼마만큼의 수련을 하고, 어느 정도의 재능을 가지고 있기에 또래의 나이에 이런 속도와 힘이 가능한 걸까. 사문 바깥에서도 봐왔지만 봐도봐도 납득이 안 되는 괴물같은 솜씨였다.

“뒤!”

금목환의 검이 채 닿지 않는 곳에서 철질려 같이 생긴 암기가 날아왔다. 금목환은 갈유월의 외침을 듣자마자 한쪽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돌린 다음, 검을 뒤로 강하게 쳐냈다.

탕!

뭔가 터지는 소리가 나며 철질려를 닮은 암기가 날아온 그대로, 아니, 더 빠르게 되돌아갔다.

푹!

곧 어둠 속에서 가죽에 쇠붙이가 박히는 소리가 들리고 사람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땅이 흔들리고 수풀이 떨리는 소리는 뒤늦게 따라왔다.

금목환은 갈유월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오른쪽의 나무를 두 발로 모아 밟았다. 얇지 않은 나무였는데도 금목환의 발에 밀려 나무가 살짝 기울었다.

우수수···

가을내 지지않았던 낙엽들이 뒤늦게 떨어진다. 금목환과 갈유월은 떨어지는 낙엽을 뚫으며 살수 한 명에게 쏘아져 나갔다.

유곡의 살수는 단검을 세워 막았지만, 무식하게 몸을 단련해온 금목환의 팔과 나무를 추진력으로 삼은 속도가 합쳐진 건 감히 단검으로 막을 수 없었다. 금목환은 검을 한 손으로 검을 후려치듯이 사선으로 베어갈랐고 중간 경로에 있던 단검은 뿌리부터 뒤집혀 손잡이에서 튕겼다. 왼쪽 목부터 오른쪽 허리까지 그대로 잘렸다.

금목환은 이 살수들의 지옥에서도 우월한 감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었다. 기감으로 잡히지 않은 암기들이 날아다니는 곳이었지만, 금목환은 피하고 쳐내며 살수들을 하나씩 정리해갔다. 어차피 살수는 암습에 특화된 사람들. 정면으로 승부하면 일 합도 못 버텼다.

다람쥐마냥 숲을 쏘다니며 금목환의 신형은 이리저리 번쩍거렸고 살수들의 발은 금목환보다 느렸다.

그렇게 우수수 쏟아지던 암기들도 잦아들던 때였다.

ㅡ딸랑.

이상한 방울 소리가 들린 건. 금목환은 잠시 멈추고 미간을 조였다. 방울 소리가 들리자마자 살수들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졌다.

“크···으···”

입에서 침까지 흘리는 살수들은 괴상한 소리를 냈다. 외형도 이상하게 변했다. 눈동자의 흰자는 붉게 변했고, 얼굴은 곧 터질 것처럼 빨갛게 부풀어올랐다.

“···이건 뭔.”

금목환은 살짝 당혹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처음 보는 현상인 것이다. 그러나 갈유월은 그 현상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선천지기 폭발이야!”

“선천지기 폭발?”

금목환은 되물었다. 곧바로 살수가 석궁처럼 쏘아져 들었다. 아까의 움직임보다는 훨씬 빨랐다.

“···음.”

갑자기 빨라진 속도에 적응하지 못한 금목환의 옷이 긁혔다. 피는 나오지 않았지만 옷이 벌어져 옷감의 단면이 보였다.

금목환은 모든 걸 다 아는 것 같으면서도 가끔 모두가 아는 걸 모를 때가 있었다. 갈유월은 선천지기 폭발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선천지기 폭발은 단전에 있는 생명력을 터뜨려 전신을 채우는 기술이었다. 선천지기를 터뜨리면 복구할 수 없어서 동귀어진의 수단이었다.

“그러니까 내공이 강해지는 게 아니라 신체 전체가 각성을 하는 거구나.”

“땡겨 쓰는 거지.”

“음. 그런 게 있었구나.”

금목환은 이해를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선천지기 폭발은 단순히 내공이 아닌 육체적 각성을 동반했다. 근육이 엄청난 긴장으로 조여지고, 평소에는 발휘할 수 없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게끔 해주는 것이다.

갈유월은 살짝 겁을 먹었다. 지금까지는 금목환이 압도해왔지만, 아까 같은 살수의 속도라면 금목환과 비슷하거나 살짝 상회하는 수준이었다.

살수가 많이 줄었다지만 최소 열은 넘게 남았다. 이런 상황에서 한쪽 팔을 자신에게 묶이고 있으니, 더욱 다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금목환.”

갈유월은 금목환의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금목환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말을 꺼냈지만, 금목환은 듣지도 않고 다른 말을 했다.

“좀 어지러울 수도 있어.”

“뭐?”

갈유월이 되물었지만, 그 짧은 음절은 미처 완성되지도 못하고 그들이 서있던 자리에 남겨졌다.

금목환은 아까보다 배의 속도로 질주했다. 갈유월은 순간 몸 전체가 붕 뜨는 것 같은 부유감에 휩싸였다. 그리고 깨달았다.

금목환은 자신 때문에 아직 전력을 쏟지 않았다는 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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