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정반합(正反合) (1)
193화 정반합(正反合) (1)
난 눈치 챘다. 그건 정파 사람들의 비명소리였다. 정종무공의 기들이 하늘로 높이 올라왔다. 마기가 아닌 모두 정순한 기운들이었다. 기운들은 생각보다 도도하고 강맹했다. 하긴 여기까지 올 정도면 어느 정도 자신이 있다는 거다.
“시작됐군.”
“뭔가 또 수를 썼나보네.”
“수를 쓸 때마다 먹히니 안 쓸 수가 없지 않나?”
나는 긍정했다. 맞는 말이다. 뻔한 계략에도 정파 사람들은 매번 걸려들었다. 그게 참 신묘하다고는 생각한다. 그들은 덫을 안 보이게 설치하지 않았다. 보이게 설치하고 눈을 멀게 하는 것일 뿐. 그러니 밟을 수밖에 없는 거다.
나는 맞은편의 사내를 바라봤다. 자신을 천마신교의 부제라고 소개한 천유현. 이 판을 짠 사람은 생각보다 거물이었다.
“저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짐작은 하겠나?”
“싸우고 있지.”
“아니지. 많이 생략됐군. 평소에 체면을 챙기던 위선자들이 본성을 드러내며 싸우고 있다고 해야지.”
천유현의 말에서는 중원 정파에 대한 경멸이 가득했다.
난 경멸까지는 아니어도, 내용만큼은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실제로 내가 봐온 것들이 많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다투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내가 정파를 하나로 규합하려던 노력을 했어도 전부 통합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한 명이니까.
“사자신검의 위치라도 밝혔나?”
“오, 촉이 좋은 걸.”
천유현은 미소를 지었다. 촉이 좋은 게 아니라, 그들이 쓸 수 있는 패 중 그게 제일 강했으니 말한 거였다. 가장 혼란을 유발할 수 있는 방법이니까.
“정말 개판이겠는데.”
“그렇겠지? 아무래도 통제할 사람이 없으면 좀 사상자가 많이 나올 거야.”
천유현의 말이 맞았다. 지금 저기야말로 내가 필요한 곳이었다. 종리운이 혼자 통제하기에는 좀 힘들 거였다. 당장 초반에도 통제가 잘 안 돼서 십왕이 단독 행동을 한 것이 아니던가.
물론 내가 간다고 해도 상황이 깔끔하게 정리될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래도 가야만 했다. 그러나 천유현이 날 보내주지 않을 건 자명한 일이었다.
“상상해봐. 무가지보(無價之寶)가 눈앞에서 아른거리는데 옆의 자식을 죽이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천유현은 이렇게 시간을 끌고 싶은 건 줄도 몰랐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받아줄 생각이 없었다.
내가 할 건 명확하다. 진법을 깨고 혼란을 정리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 천유현이라는 사람을 잡아야 했다.
*
그나마 다행이었다. 금목환이 한 번 틀을 잡아준 덕분에 종리운이 있는 무리에서는 많은 이탈자가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또 다른 문제가 생길 줄은 몰랐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뭉칠 줄 알았는데 말이야.”
“사람들을 쉽게 본 거죠.”
제갈헌이 혀를 찼다. 두 개의 무리가 오목한 분지를 두고 맞보고 있었다. 하나의 무리는 금목환과 종리운이 합쳐갔던 무리고, 다른 무리는 그들을 본 사람들이 급하게 합친 무리였다.
“거, 왜 사람 말을 못 믿나! 우리는 싸울 마음이 없다니까!”
“그걸 어떻게 믿냐는 말이오!”
반대편서 돌아오는 말에 종리운은 답답해서 가슴을 쳤다.
“진짜 미친놈들인가?”
“감정적으로 행동하면 안됩니다.”
맞은편의 사람들은 종리운과 함께 몰려있는 사람들을 보고 지레겁을 먹은 것이다. 심지어 그들은 종리운이 도착하기 전 서로 싸우고 있던 무리들이었다.
종리운의 무리를 보니 위기감을 느끼고 바로 동맹을 체결한 것이다. 그야말로 이합집산이었다.
종리운은 그들을 보고 겁내지 말라며, 다가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목숨의 위협을 느낀 듯했다. 그런 위기감 앞에 칠존의 이름 따위 먹히지 않는 게 당연했다.
“일단 싸움을 멈춘 것만으로도 우리는 잘 유지하고 있는 겁니다.”
제갈헌이 말했다. 그건 종리운도 동의했다. 도착 전에 온 사람들은 늪을 한 가운데 두고 죽어라 싸우고 있었으니까. 다름 아니라 분지의 늪 중앙에 매달려있는 것이 바로 사자신검의 비급이었다.
“근데 뭐 저렇게 허접하게 걸어놨는지 모르겠네.”
“원래는 진법에 가려져 있었답니다. 근데 진법이 해제되면서 저렇게 보인 거죠.”
“어떻게 보면 절묘한 곳에 숨기기는 했네. 사자신검의 비급을 저렇게 늪 중앙에 매달아놨으리라 누가 생각했겠어.”
종리운은 어이가 없었다. 지금 저렇게 초라하게 있는 사자신검을 보고도 사람들은 아무 의심도 품지 않았다.
“아무튼 가주가 진짜 진법을 해제했군.”
“이제는 별로 놀랍지도 않습니다.”
“생각해보면 어릴 때 맨 처음 두각을 드러냈던 분야가 진법이었지.”
종리운도 일단 금목환이 올 때까지만 버티겠다는 생각이었다. 그가 오면 뭔가 해줄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했다. 지금 종리운이 할 수 있는 건 이 교착상태를 만드는 게 전부였다.
물론 이것마저도 그나마 칠존 중 일인이니까 가능했던 통제력이었다. 당장 지금 종리운의 무리들도 사자신검 비급을 보고 침을 흘리고 있는 게 뻔히 보인다.
적어도 금목환이 올 때까지만 버티자. 종리운의 전략은 그것뿐이었다. 다른 생각은 없었다.
*
나는 먼저 검을 내질렀다. 일직선으로 내지르는 태경용출의 수법이었다. 검이 지면으로부터 여섯 척은 떠있는데도 땅이 검이 나가는 방향으로 파였다.
쿵!
언제 꺼냈는지도 모를 천유현의 검과 내 검이 부딪쳤다. 난 살짝 눈을 찌푸렸다. 역시 여기 나타난 게 괜한 자신감은 아니었던지, 굉장한 힘이었다.
나는 질러가는 발검을 거두고 천근추로 바닥에 발을 박았다. 바로 반격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질퍽한 땅이라서 진흙이 발목까지 파묻혔다.
천유현의 검에 담긴 건 단순히 사이한 기운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마치 완성된 악이었다. 선명한 마기인만큼, 마기가 태원지기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난 바로 태을헌원신공을 몸 전체에 돌렸다. 사기와 상극인 태을헌원신공. 생각해보니 마기와 태원지기, 태을헌원신공은 서로 묘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태을헌원신공은 마기와 상극, 마기와 태원지기는 유사하다. 그렇다고 태원지기와 태을헌원신공은 상극이 아니었다. 내가 충분히 합친 바가 있었으니까. 꽤 복잡한 논리 구조였다.
내가 뒷걸음질을 치며 검을 막으니 천유현의 미소가 일순 짙어졌다. 그는 내가 싸움 이외에 다른 생각을 한다는 걸 눈치챈 것 같았다.
“생각을 깊게 하는군.”
그 미소는 짙어지다가 일시에 멈췄다.
“무시하는 것도 유분수지.”
천유현의 검이 사선으로 들어오는 듯했다. 종으로 들어오면 횡으로 막고, 횡으로 들어오면 종으로 막는다. 난 기본에 충실하여 검을 모로 들었지만, 그 검은 곧 공작새의 꼬리처럼 펼쳐졌다. 마치 검이 노을처럼 반원형으로 펴졌다.
난 잠깐 눈살을 찌푸렸다. 어느 게 실초고 어느 게 허초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실초와 허초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허초와 다르게 실초는 검로가 전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유현의 검은 모두 균질했다.
만약 천유현이 실초와 허초를 구분할 수 없게 섞어놓을 수 있는 경지까지 올랐다면. 난 잠깐 그런 생각을 했고 그 찰나의 순간은 이 싸움에서는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퍽!
가슴팍에서부터 쇠몽둥이로 친 것만 같은 충격이 퍼졌다. 내 발목은 땅에 흔적을 남겨대며 뒤로 쭉 밀렸다.
나는 밀리다가 날아갈 것 같아 검을 땅바닥에 박아 강제로 속도를 늦췄다.
“···퉤.”
간신히 멈춘 난 올라오는 피를 뱉었다. 분홍색 선혈이었다. 유효한 내상을 입었다는 뜻이었다. 내가 살면서 입은 첫 내상이었다. 원래라면 태을헌원신공이 이렇게 내상을 입을 리가 없는데, 사기에 절여져 있었기는 한 모양이었다. 내가 갈유월한테 내공을 쓰지 말라고 해놓고 썼으니. 물론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솨악!
뒤에서 익숙한 느낌의 강기가 날아왔다. 그건 날 노린 게 아니었다. 그건 내 어깨를 스쳐나가 천유현을 향해 빠르게 나아갔다.
“아, 맞다.”
천유현이 멍하니 읊조렸다. 천유현이 허리를 땅과 수평으로 눕혀 검기를 피했다.
쾅!
뒤에 있는 나무 몇 그루가 한꺼번에 쓰러졌다. 나도 그제야 깨달았다. 나나 천유현이나 서로에게 너무 집중하다보니까 여기 한 명이 더 있다는 걸 까먹고 있었던 거다.
“···후우.”
내가 뒤를 바라보자 갈유월이 긴장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꽤 강한데. 묘한 내공도 쓰고 말이야.”
천유현이 진짜 놀랐다는 듯 입술을 동그랗게 모았다.
“위험하겠어.”
그와 함께 천유현이 갈유월의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물론 그 사이에 내가 꼈다.
쿵!
순식간에 만천조종검의 일 초식부터 오 초식까지 관통해서 전개했다. 난 이번에는 태을헌원신공이 아닌 태원지기를 썼다. 당연하지만, 난 폭발할 줄 알았다. 분명 남궁선우와 같이 비무를 했을 때, 그의 마기와 부딪쳐본 적이 있고 그건 폭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태원지기와 마기는 계속 섞여서 부풀어갔다. 이건 중원에 있는 상식에 위배되는 상황이었다.
각자 몸에서 발출된 내공이 부딪치면 터지는 건 저잣거리의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싸움이 성립이 되겠는가. 설사 같은 내공을 쓴다고 해도 기의 운용법은 각자 고유하기에 폭발한다.
“···뭔?”
천유현도 처음 보는 상황인지 당황했다. 중앙으로 몰렸던 힘은 뭉쳐서 팽창했다. 내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마교의 간자들과 천유현은 뭐가 다른지. 물론 무공 실력 역시 천유현이 월등했지만, 그걸 떠나서 마기의 순도가 달랐다.
그건 완벽한 하위호환이었다. 화산파의 본산제자에게 알려주는 자하신공과 속가제자에게 알려주는 자하삼결 사이의 관계라고 정리할 수 있었다.
“이봐. 이런 현상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나?”
천유현은 그 힘을 억누르려고 노력했다. 그의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 이유를 난 알고 있었다. 저 팽창하는 두 개 기운의 합에는 보지 못한 엄청난 거력이 숨어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하늘까지 퍼져나갈 정도로 팽창을 반복했다. 그 힘 속에는 정말 엄청난 힘이 담겨있었다. 산에 계속 있던 안개마저 완전히 깨끗하게 씻겨져 올라갔다.
그리고 그것은 갑자기 쌀알만한 크기로 응축했다.
“···허.”
그 한숨은 내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빛이 터져 나오는 순간 난 힘의 정수를 봤다. 그 힘의 정수는 그야말로 완벽했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해질 정도로.
허나 그 힘은 아직 내 것이 아니었다. 난 갈유월의 손목을 낚아채 내 품 안에 둔 다음 호신강기를 부풀어 올렸다.
콰···앙!
그 거대한 힘 속에서 나무들은 뿌리 뽑히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서 원래 없었다는 듯이 태워졌다. 그 거력은 내가 본 힘 중에서 가장 완벽하고, 가장 강했다.
지금까지 얻은 깨달음을 전부 이끌어 호신강기를 몇 겹으로 펼쳐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폭발력에 나와 갈유월은 튕겨나갈 수밖에 없었다.
난 갈유월을 꼭 안았다. 우리는 지금 폭발력에 의해 튕겨져 하늘을 날고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날개 없는 자의 비행은 추락이 예정되어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곧장 곤두박질쳤고 최소 몇십 바퀴를 굴렀다.
호신강기가 벗겨진 상황에서 내 몸을 보호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돌부리들과 나무, 가시들이 내 몸을 들쑤셨다.
끝이 나지 않을 것만 같던 회전은 내가 나무둥치에 등을 박으면서 끝났다.
“···컥.”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귓전에 갈유월이 뭔가 외치는 것 같았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난 그저 고개를 치켜들어 폭발이 있었던 곳을 바라봤다.
그 컸던 봉우리가 완전히 사라져 움푹하게 변해버렸다. 산모퉁이 하나가 날아갈 정도의 충격이었던 거다.
이제 동서남북 시야가 탁 트이게 됐다. 시야를 가리던 언덕들이 모두 사라졌으니 말이다. 난 동쪽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두 무리의 사람들이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